망겜에 갇힌 고인물 201화
55단계 - Lv.2782 하이랭커 일그림(1)
일그림은 자신에 대한 주변의 시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이랭커였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행적이 많이 알려진 하이랭커다.
당연히 무수한 소문들이 따라다닌다.
거기에는 꽤나 근거 없는 비방도 섞여 있으며 있는 그대로의 진실도 있다.
제멋대로며 포악하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는 자신을 숨기려 한 적이 없으며 포장하려 한 적도 없다.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면 그대로 분쇄할 뿐이다.
실로 전사다운 삶이었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이젠 기억조차 희미해진 바깥의 삶은 이따금 케케묵은 지식이라는 면으로 고개를 들어 올릴 뿐이다.
일그림은 완전한 유배자요, 전사였다.
그에게 바깥에서의 삶은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도리어 이 미궁에서의 삶이 진실되다고 여겼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그 삶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에 관한 무수한 소문 중 와전된 것은 그런 부분이 있다.
그는 게이머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런 부류라는 점도 오히려 평생 숨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누군가에게 알려 도대체 무슨 좋은 말을 듣겠는가?
면전에다 대고 당신이 NPC라 욕이라도 하리?
오래 함께한 파티원 중 일부, 그리고 그가 모시는 결투의 신만이 그가 [게이머].
어쩌면 정말로 게임일 뿐인 미궁에 빠져든 현실의 인간.
또 다르게는 그런 설정을 지니고 생성된 NPC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그 사실에 덤덤했으며 오히려 즐기기까지 했다.
내가 NPC일 수도 있다고?
그럼 너무 좋지. 어차피 다 데이터 쪼가리면 좀 막 대해도 상관없는 거 아냐?
그 나름의 받아들임이요, 그 나름의 적응이었다.
그래서 [게이머]를 만나면 주시했다.
사실 원래는 그리 주시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 회차가 특별했다.
기이할 정도로 게이머가 많은 환경이다.
그간 30년에 한 번이나 볼까 말까 하던 게이머 태그의 유배자들이 잊을 만하면 나타난다.
무언가 임계점에 도달한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가 죽인 것은 대부분 그런 [게이머]들이었다.
어찌 된 것이 연차가 적당한 게이머들은 다들 자기만의 환상에 빠져 있었다.
대충 뭐 자기만 선택받았으니 이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둥.
좋아, 이해한다. 10년도 안 묵었거나 10년이나 겨우 묵은 때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생각은 일그림 역시 초기에는 했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조금 더 세월이 지나면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이머]는 큰 어드밴티지다.
그 정보가 어디 이상한 곳으로 흘러들어 그의 왕국이 망가지는 꼴은 볼 수 없다.
개심의 여지라도 보였으면 모를까 완전히 망상에 빠진 바보들이었기에 몇 놈 죽였다.
와전된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일그림은 미궁이 좋았다.
지금의 삶도 좋았다.
이제 마지막일 이번 회차는 정말 더없이 좋았다.
그러니 보통이 아닌 녀석은 중요하다.
이상하게 정보를 꽉 쥐고 있는 녀석은 더욱 중요하다.
웬 병신이 그의 삶을 망치게 둘 수는 없다.
"겉보기에 별일은 없는 것 같네."
운해를 가로지르며 에리나가 말한다.
마지막 하늘 유적이 조금 먼 곳에 보인다.
하이랭커의 초인적인 시력은 안개에 뒤덮인 작은 섬을 똑똑히 인지할 수 있다.
겉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가까이 가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겠지."
천사가 더욱 가속했다.
구름의 바다에 떨어져 나간 깃털이 흩날린다.
둘은 유적의 가장자리에서 골렘이 쓰러져 있음을 발견했다.
* * *
지하로 내려가자마자 색다른 감각이 몸을 엄습한다.
‘던전’을 구분하는 그 위화감과도 별도로 뭔가 공기가 달랐다.
바람의 원소가 가득 차 있다. 기이한 밀도로 꿈틀거리는 바람의 마력들이 촉감을 물리적으로 자극한다.
"이거 그건데. 14층에서 본 거 말이야."
"아, 그 느낌이군요. 정령계? 이번엔 육안으로도 많이 다르네요."
14층은 어차피 원소래 봐야 어둠뿐인 우주 공간이었다.
그곳에 현계한 유사 정령계는 육안으로 구별될 여지가 없었다.
이곳 지하는 다르다. 어딘가 희끗한 기운이 감돌면서도 끊임없이 강풍이 불어 닥치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니까.
"이거 중요해. 알아둬야 해. 우리가 지금까지 본 건 정령계뿐이지만 이런 식으로 현실을 침식하는 다른 차원은 꽤 흔해."
"대충 하이랭커쯤 되는 기준에서 말하시는 거죠?"
"그렇지. 우리는 그 이상이 목표니까."
그 와중 눈을 번쩍이는 꼬맹이가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의 차이점을 명료하게 짚어준다.
"정말 매지컬하고 엘레강스한 공간이에요. 바람 그 자체네요. 여기서 바람의 원소를 이용한 마법을 사용한다면 얼마나 위력이 증폭될까요?"
그건 또 술자의 능력 외에도 밀도와 친화성, 현실이 얼마나 잠식되었는가를 따질 필요가 있다.
대충 공식을 불러주자 꼬맹이가 암산을 한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
혼자 사색할 수 있게 안아 든다.
고양이 안듯이 어깨에 걸치게 한 손으로 안아 드니 딱이다.
반짝이는 은발이 코를 간지럽힌다. 요즘 들어 손질에 신경 쓴 모양인지 푸석푸석한 느낌이던 은발에 윤기가 돈다.
흠흠, 그리고 좋은 냄새. 내가 만든 샴푸로군.
"그런데 이러면 말이야. 여기의 보스가 특정되는데."
"정령왕인가요."
"그렇지."
블랑쉐와 제니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정령왕이 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쉽게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긴 하다.
정령왕 사용자를 만난다 한들 앗 하는 사이 다음 회차로 사출되지, 그 실체를 목도하는 일은 드무니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일단 빼는 게 좋겠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희우가 순순히 동의하자 다시 한번 제니와 블랑쉐가 의아해한다.
그렇지만 우리 실피드 같이 작고 가련한 아이가 아닐 확률이 높다.
늙을 대로 늙은 노회한 정령왕이 기다리고 있다면 건드리지 않는 편이 더 좋다.
유사 정령계를 만든 것도 뭔가 목적이 있어서일 것이다.
아마 바람의 결정이려나. 물질화된 원소는 이런 유사 정령계에서나 쉬이 구할 수 있으니까.
어쨌건 불필요한 위험을 굳이 감수하는 것은 하수다.
"바깥에 계단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찾아는 보고 다시 돌아오자. 이런 특수 던전은 계단이 잠겨 있진 않아."
"더 들어가면 정령들이 눈치채겠죠?"
희우의 말이 맞다. 그러니 더 발 들이면 안 된다.
"넌 여기서 좀 보고 있을래?"
"14층에서 제대로 봐두지 않은 제가 원망스러워요."
"좋아, 조금 있다가 돌아올게."
천천히 하면 된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다.
* * *
"솜씨가 아주 좋은데?"
"반면 스펙이 아주 높지는 않아. 최대로 잡아도 랭커 중하위 정도려나."
뜯겨진 골렘의 장갑을 보며 에리나가 말했다.
전투태세의 그녀라면 이 정도는 그냥 잡고 뜯을 수도 있다.
격투가는 힘에 광전사만큼이나 많은 투자를 한다.
너클이나 맨주먹으로는 잽싼 것만으로는 충분한 딜을 뽑아낼 수 없기에.
일그림도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근력이 강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스탯을 주력으로 삼는 직업인가 하기에는 흔적이 그렇지 않다.
총기는 격추된 드론에만 사용되었다.
골렘을 제압한 것은 온전히 어떤 전사계통 클래스다.
"마법사는 최소 하나가 있는 거 같네. 숲길의 발자국은 셋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교란이라고 봐야겠지?"
"제 발자국을 습관적으로 숨기는 녀석이 둘이지 않을까 싶군."
"그럼 총 다섯이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다지 위기감은 없다.
일그림의 랭킹은 42위, 에리나의 랭킹은 67위다.
이 둘이서 감당하기 힘들다면 또 다른 하이랭커뿐인데, 43서버에는 없다.
그리고 기반 서버를 두고 굳이 바지 리더까지 세워가며 여길 들어올 하이랭커도 없다.
"에리나, 도핑 할까?"
"아까우니까 아끼자."
랭커 중하위 수준이라면 초면에 큰일 날 일은 없다. 이 둘은 어찌 되었건 전사계통이고 그만큼 튼튼했다.
전사는 민첩직에게 강하다.
마인드 맵이 뻗어나가다 보면 저절로 기습대책이 생기기 때문이다.
"소모품을 너무 펑펑 써대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야. 일그림."
"하지만 윗동네 싸움은 소모품 싸움이기도 하잖아."
"나는 그렇게 표현할 정도로 대단한 적이라고는 생각 못 하겠는데."
일그림이 고개를 저었다.
"알고 온 거라면 나름대로 대단한 적일 거야. 온갖 꼼수로 무장한 변태일 수도 있지."
"[게이머]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입구를 턴 솜씨를 보아하니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고 온 거야. 안 그러면 이렇게 깔끔하게는 못하지."
에리나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추정되는 스펙과 인원, 조합으로 골렘들을 밀어버리며 전진한다면…….
전사된 입장에선 일단 마력 방벽이 성가시다.
마법사가 [디스펠]을 건다 치더라도 이 많은 수에 일일이 적용하는 건 스킬로는 안 된다.
그럼 아주 귀한 인원이다.
거기에 드론의 대가리를 정확하게 노리는 사격 솜씨, 흔적으로 보아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미래에서 가져온 장비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군."
"도핑 할까?"
"아냐, 그래도 그건 넣어둬."
주변을 둘러보는 일은 끝났다. 바깥에는 없다. 아직 유적 안에 있을 것이다.
별달리 계단이 발견된 것도 아니다. 그럼 안쪽에 계단이 있다는 건데 정령의 영지에 있을 게 틀림없다.
여긴 안 턴 게 아니라 못 턴 거다.
털어서 볼 이득보단 손해가 더 크다고 판단했으니까 내버려 둔 곳.
정령왕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존재니까.
안개가 흐르는 입구로 진입한다. 에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머랬지? 일단은 안 죽인다?"
"얘기해 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반만 죽여."
"후, 기껏 가꾸어둔 미래를 개박살 낸 놈들에게 손대중을 해야 하다니."
그래도 주먹질은 손대중이 쉬운 편이다.
하지만 마법사가 아닌 두 전사는 부주의한 실수를 저질렀다.
소리 없이 작동하는 작은 마법진을 둘 모두 감지하지 못했다.
* * *
"어. 누군가 들어왔다."
유적의 1층 벽을 뜯어내 미스릴 마법 회로를 채취하다가 깨달았다.
입구로 들어오는 인원이 있다.
둘이다. 하나는 천사, 그리고 인간.
당연히 우리 엔젤일 리는 없고.
우연히 들어왔을 리는 더더욱 없고.
"이거, 어째 좀 찝찝하긴 했어. 털려 있을 수도 있는 게 너무 멀끔하게 남아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함정인가요?"
"아까 들어올 때 본 둘이다."
희우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비상 탈출하나요?"
"아냐, 심연을 자꾸 썼다간 시간이 개판이 날 수 있어. 여신님에게 의존하는 건 슬슬 그만두는 편이 좋아."
심연의 저층까지는 시간의 뒤틀림을 막아줄 수도 있는 것이 혼돈의 신앙이다.
하지만 노코스트는 아니다.
신좌는 일개인을 편애하는 것에 제한을 두고 있다.
그간의 무리는 고블린들 덕에 꼬라박을 수 있었던 신앙이 넘쳤던 덕분이다.
그리고 이제는 대량으로 손에 넣었던 신앙도 아슬아슬하다.
이게 가까운 시일 내에 복구될 신앙도 아니다.
미래가 다시 바뀐다면 모를까, 고블레타리아 연방이 수백 년에 걸쳐 적립한 신앙들이었다.
거기에 신앙을 위해 그 미래를 리셋 하는 건 너무 아쉽다.
판단을 하자.
정면으로 당당하게 승리하는 건 힘들다.
아무리 그래도 당장 그럴 수단은 없다.
화신 정도 꺼내야 하는데 그건 악수다. 여신님이 어찌 될지도 내가 어찌 될지도 알 수 없다.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럼 퇴로 확보가 필요하다.
저들이 당당히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면 바깥에 계단이 있을 가능성은 배제해도 되겠지.
그렇다면 그곳을 지키고 있을 것이니.
굴착? 유적을 파고 다른 방향으로 탈출하는 건 좀 곤란하다.
던전에 해당하는 구조물들은 보기보다 많이 튼튼하다.
지금 걸어 들어오는 두 녀석이라면 할 수 있겠지만 말이지.
"계단은 유사 정령계에 있다. 퇴로 확보해 줘."
지목받은 제니와 블랑쉐가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린다.
"같이 뚫는 게 낫지 않나?"
"그 생각을 저기서 못할 리가 없지. 객기 부리는 것처럼 보여야 해."
어차피 제니와 블랑쉐는 당장 박힐 딜이 없다.
"시간 없어. 가능한 한 정령을 공격하지 말고 정령왕을 찾아. 협조를 구할 방법은 있어. 우린 바람의 결정을 대량으로 가지고 있으니까."
"알 것 같군."
"꼬맹이한텐 몸 숨기고 이쪽으로 오라고 전해줘. 정령왕 때문에 던전을 통째로 작살내지는 못할 거야."
불행 중 다행일까. 아예 생매장할 생각은 못 할 것이다.
꼬맹이도 마침 조금 멀리 있다. 마법사의 존재 정도는 깨달았겠으나, 내가 그 마법사인 척을 한다면 허를 찌를 수 있다.
"좋아, 시간만 끈다."
천사는 희우가 맡는다. 언데드인 내가 상대할 수는 없다.
걸어 들어오는 전사는 내가 상대한다.
물론 말이 좋아서 상대지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다.
"정말로 죽지 않기 위해서만 움직여. 까딱하면 즉사한다."
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골렘들이 걸어 다니던 복도는 공간이 아주 넓다.
어느 정도는 비행이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해. 그러면 상대가 고화력 스킬도 쓸 거야. 유적 안에서 싸워야 기본기 싸움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그래도 상대도 천사면 아저씨는 한 대 맞으면 가는 거 아니에요?"
"난 밖으로 빠질게."
"으……."
하고 싶은 말은 있어 보이지만 참는 듯한 모습.
어쨌든 이 모든 조건하에,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할 정도는 된다.
전사는 기본적으로 우직한 클래스고, 의외의 일격은 적은 편이다.
약자를 상대로 결코 지지 않는 클래스인 동시에 약자도 시간을 끌 수는 있는 클래스다.
희우가 속삭인다.
"전쟁의 화신만큼 강할까요?"
"아냐, 신에 비할 바는 아니지."
「필요하다면 한 번 더 화신해 주도록 하지.」
"부디 옥체 보존하시죠. 여신님은 중요한 몸이십니다."
「너보다 중요한가?」
"클리어 못 하면 어차피 저도 안 중요합니다."
「그건 좀 멍청한 소린데. 그보다 날 어디다 쓰려고…….」
그때 시야 끝에서 그 두 명이 나타났다.
여신님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나는 대놓고 마법을 캐스팅했다.
천사가 날아든다. 희우도 날아갔다.
두 천사가 부딪힌다.
그동안 인간 전사가 달려왔다.
하이랭커인데도 인간이라니 별나군.
마법을 캐스팅하는 걸 두고 볼 수 있는 전사는 미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달려드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캐스팅한 것은 공간이동이다.
당신은 나랑 밖에서 싸우자고.
공간의 균열이 열리고 바깥의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균열이 채 닫히기 전에, 상대의 창이 그 균열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다.
닫히려던 틈이 강제로 벌어지며 몸도 나타난다.
충분한 속도를 낼 수 있다면, 마법사의 공간이동 계통 마법을 따라갈 수 있다.
다음 동작은 모두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심장을 박쥐화 하여 뒤로 날리고, 몸 왼쪽을 그냥 대준다.
내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아직 모르는 지금만 이용할 수 있다.
심장이 햇빛에 불타며 날아간다.
한순간 의아함이 스치는 창잡이의 눈앞에 멀티 캐스팅된 디버프가 일제히 발사되었다.
"으라얍찻차!"
상대가 포효했다.
그러는 동시에 남은 오른팔로 마력의 1할을 소모하는 ‘평타’를 휘둘렀다.
공간이동을 추격하면 그 순간만큼은 위치가 고정되어 회피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마법사의 PVP 요령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상대가 있는 힘껏 몸을 비틀어 창대를 가져다 댄다.
통짜 금속인데 아주 시커멓다. 아다만타이드일까?
그러나 그 창대가 일격에 뚝 부러지고,
"어어?"
놀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팔로 관성을 제어하며 똑같은 일격을 한 번 더.
그리고 동시에 발동한다.
유니크 액티브 [종말의 붉은 짐승].
검붉은 박쥐가 허공에 피어난다.
"……!"
경악하는 상대의 얼굴.
그와 함께 세상의 색이 순간적으로 반전한다.
마인드맵에 단 하나만 구비할 수 있는 긴급탈출 스킬이다. 쿨다운은 아주 길다.
내가 쓴 게 아니다. 화들짝 놀란 상대가 사용했다.
계통은 거리를 벌리며 적에게 기절을 부여하는 것.
정신이 한순간 아득해졌다가 되돌아온다.
아직은 공중.
그 즉시 옆으로 창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무시무시한 속도의 투창. 보조 무기일까?
스친 것도 아닌데 여파만으로 재생한 몸이 다시 한번 작살났다.
심장만 간신히 마력으로 보호.
다시 재생한 끝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허공에, 창잡이는 지상에.
아주 먼 거리를 두고.
"좋군."
전사가 마법사를 상대로 거리를 벌렸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격을 보여주는 것에 성공했다.
심지어 왼팔이 붉은 짐승에게 침식당하는 중이다.
좋다. 정말로 좋다.
나를 완전히 미지의 무언가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시간을 끌기 위한 조건을 완성했다.
남은 마력 약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