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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04화 (20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04화

55단계 ? Lv.2782 하이랭커 일그림(4)

시간을 조금 되돌려, 제니는 후회하고 있었다.

"로건……. 네가 옳았을지도 몰라."

숨을 쉬기 힘들 만큼 공기의 밀도가 높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너무나도 농밀한 숨이 도리어 기도를 틀어막는다.

자연의 권화인 정령들이 물질계에 나타나 자리 잡은 공간은 정상적인 법칙대로 흘러가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끊임없이 살을 에는 바람이 날아든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칼바람이었다.

밴디지는 그때마다 제니를 방패로 내세웠다.

제니는 차마 불만을 말할 수 없었다.

하이랭커씩이나 나타난 지금은 분명 비상사태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공격을 둘 중 하나가 받아내야만 한다면 전사인 제니가 받는 편이 옳다.

민첩 전사라 한들 스탯 배분 비중의 차이일 뿐이다. 튼튼함으로는 타 클래스보다 우위다.

갑옷도 기동성을 생각하여 얇은 룬강철 사슬갑옷이지만,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무슨 쓸모가 있나 싶지만.

그래도 거의 가죽갑옷 수준인 밴디지보단 낫다.

짧은 시간동안 침입자를 공격하는 정령은 무수히도 많이 나타났다.

밴디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제니는 이미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갑옷도 성하지 않다.

마력을 씌운 검으로 최대한 공격을 받아내려 노력했으나 상급정령부터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돌진이었다.

그리고 마주한 정령왕은 난생 처음 보는 어떠한 것이었다.

[내가 침입자인 너희들에게 관대해야 할 이유를 대보아라.]

숨을 쉬기가 더욱 힘들다. 상처의 고통과 질식의 괴로움으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제니가 아직 ‘밴디지’라고만 알고 있는 블랑쉐 역시 충분히 지쳐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굳이 이렇게 물질계까지 내려와 유사 정령계를 만든 이유는 이건가?"

손가락으로 튕기듯이 날아간 바람의 원소 결정.

정령왕이 눈을 크게 떴다.

[순도 높은 결정이군. 내가 여기서 오랫동안 기다린 것보다 더욱 더 순도 높은 결정이야.]

"왜 이걸 모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우릴 죽이지 않을 이유는 되겠지. 이것만 있는 건 아니거든."

정령이 물질계에 존재하며 힘을 행사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마력을 소모한다.

하지만 동 속성의 결정이 있다면 계약자 없이도 단독 행동이 가능하다.

애초에 자의로 물질계에 이런 환경을 조성했다면 원하는 게 무엇이지는 너무나도 뻔한 것이다.

"통과하게 해줘. 우린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으니까."

[다른 세계에서 가져온 결정이군. 그곳의 바람은 이런 일을 개의치 않는가?]

"우리 리더가 계약자니까."

[그렇군.]

정령왕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통과는 시켜주도록 하지. 하지만 그 이상은 모른다.]

그뿐이면 부족하다. 땅이 흔들린다. 아니, 섬 전체가 진동하고 있다.

위층에서 어떤 거대한 파괴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령왕이 고개를 들었다.

[불청객들이 몹시도 시끄럽군. 두 녀석은 처음 오는 녀석들도 아니니 내가 있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닐 터.]

"이 섬이 파괴되면 다시 이런 환경을 구축하긴 힘들지 않나?"

[당돌한 유배자로다. 왕을 본 적이 많은가?]

그런 일 따위 있을 리 없다. 블랑쉐는 단지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그게 그거라는 사실을 알 뿐이었다.

그녀가 만약 정말로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다면, 연차와 무관하게 진정한 죽음이 된다.

다시 시작되는 삶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역설적으로 살기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블랑쉐는 황급히 주머니를 꺼냈다. 그 속에는 그의 리더가 일종의 예비 마력으로서 들고 다닌 원소 결정이 있다.

체내의 마력을 직접적으로 보충하는 수단은 미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런 식으로 외부 마력의 결정체를 가지고 다니는 일은 종종 있다.

구할 수가 있다면 말이겠지만.

[수량이 더 많은가?]

정령왕은 곧바로 관심을 보였다. 오랜 세월 이 섬에 죽치고 있었던 이유일터이니 당연히 동하리라.

블랑쉐는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의 역할은 첩보원은 아니었다. 그런 쪽으론 재능이 없다.

낯선 이와의 대화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일이다.

대신 그녀는 무언가를 죽이는 쪽으로는 아주 유능했고, 그런 방향에서 걸작이었다.

코드네임 오르골은 간혹 그녀에게 대본을 짜주곤 했다. 화술이 필요한 상황에서 문제가 생길 바에야 정해진 말이나 하는 편이 더 나으니까.

파티 리더 오르골 역시 마찬가지다.

준비된 대사를 읊는 것이라면 할 수 있다.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많은 결정을 준비할 수 있다. 우리에겐 대단한 가치가 있는 물건은 아니다. 다른 세상에서 바람과 계약한 리더와 다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령왕은 그리 말하는 무표정의 유배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표정만 없을 뿐 다급하다. 숨길 생각조차 없이 다급하다.

어쭙잖게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면 코웃음을 쳤으리라.

하지만 어설프다. 지금 나서서 말하고 있는 이도 그렇지만 그와 함께 온 요정 전사 또한 그렇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정말로, 좀 더 내버려 두면 질식하여 세상을 떠날 모양이다.

이들은 진실로 위급하다.

본디 정령은 필멸자와의 계약을 통해 세상을 접하는 존재다.

오래 묵은 정령이 필멸자를 하찮게 볼 수는 있되, 필멸자와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르르릉

쿠구구구

우드드드드드득

정령왕이 있는 섬의 심처까지도 위쪽에서 일어나는 전투의 파괴가 도달하고 있었다.

좀 더 위층은 이미 열려 바깥과 통하고 있다.

밀폐되지 않은 공간은 결정의 형성이 더욱 느려질 수도 있다.

정령왕은 불쾌하게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쯤 된다면 어차피 왕이 나서야 한다.

위쪽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지금 눈앞의 이 두 필멸자와 무슨 관계인지.

그런 것도 궁금하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안 되나?"

웃음이 나올 정도로 조바심을 내고 있다.

옛 계약자가 떠오른다. 그런 필멸자들의 모습이 좋아서 다시 세상에 내려가려고 했던 바이다.

편을 들어줄 수는 없으나. 벌어지는 싸움을 끝내기 정도야 해줄 수 있겠지.

[네 동료를 좀 더 신경 쓰도록 해라.]

블랑쉐는 당혹스럽게 고개를 돌린다. 제니가 쓰러져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곧바로 알았다. 포션은 진작에 다 떨어졌고, 출혈도 심했다.

하물며 부상자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공기의 밀도가 높았다.

급히 구급법을 실시한다.

정령왕은 그 촌극에 웃으며 사라졌다.

* * *

일그림은 그렇다 치더라도 에리나에게는 낭패인 일이었다.

정령왕은 제 영지 위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일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최대한 파괴를 자제하려고 했는데 상대가 그 정도로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결국 이 섬의 주인이 분노했다.

에리나는 일단 마법사를 제거해 보려고 시도했다.

수천의 마법 장벽이 겹겹이 그녀를 막아섰다.

일격에 뚫어내기는 어렵다. 연타를 준비하는 순간 위에서 내려다보던 정령왕이 말했다.

[분명, 일동 정지라 말했을 것인데.]

"제기랄."

에리나는 포기했다.

대신 비행하여 유적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낭패한 표정의 일그림과 함께 밖으로 나갔던 마법사가 보인다.

이쪽도 아티팩트까지 꺼내 들 싸움이었던 모양이다.

에리나는 상대 파티의 평가를 좀 더 상향조정했다.

일그림은 간혹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지만, 대부분 그것이 옳았다.

아직도 같은 파티인 에리나조차도 모르는 비밀을 얼마나 많이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게이머]로서 성공한 유배자란 보통 그런 존재니까.

그것을 상대로 격하의 스펙으로 이렇게 선전했다면, 틀림없이 이쪽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리나는 여기서 죽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령왕이 다시 한번 그녀를 노려보았다.

"왕이여, 우리는 당신의 영지를 파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미 저질러두고 할 소리는 아니군.]

"복구하겠습니다. 대신 저들은 우리에게 맡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저들? 내 손님이다.]

이런 제기랄.

뭔가 수작을 부렸군 이미.

[다른 세계의 계약자다. 어찌 내 문전박대하리.]

일그림과 에리나의 고개가 함께 돌아갔다.

태연스레 스트레칭을 하는 뱀파이어 마법사가 씨익 웃으며 이쪽을 본다.

그럼 왜 안 썼지? 아니지, 정령왕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서는 많은 품이 든다. 쉽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정령왕이 그걸 원할 리도 없고.

"그렇다면 저희는 그냥 물러가겠습니다. 그것까지 막으시지는 않겠지요?"

[그건 뜻대로 하라. 다만 다음에 또 찾아온다면 내가 좀 화를 낼 수는 있겠지.]

"우선 사죄드립니다."

[물질로 보상하지 그러나.]

"물론입니다."

일그림이 터덜터덜 걸어오며 말했다.

[롱기누스의 창]은 다시 길드 하우스로 돌려보낸 모양이었다.

"일단 가자고. 어차피 저 녀석들은 다시 왕국으로 돌아갈 거야."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모양이나 일그림도 그다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적은 없는 모양이다.

에리나도 그랬다.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일이 이어지다보니 유효타를 확실하게 꽂아 넣지 못한 상황에 더 가깝다.

하이랭커 둘이 받은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다.

고레벨 치천사의 날개가 부러질 정도의 공격력은 경이로우나, 유배자에게 이 정도는 제대로된 부상조차도 아니니까.

다시 싸운다면 훨씬 더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아니, 싸움이 성립하기도 전에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아티팩트의 내구도를 아낄 생각이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에리나는 찝찝한 표정이었다. 날개에 포션을 뿌리고 일그림을 집어 들었다.

날아서 섬을 벗어난다.

리프트의 제단에 [심연의 성물]을 바치고 들어온 시점에서 밖으로 나갈 계단은 없다.

시간제한이 다하여 절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래도 바깥의 동료에게 연락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일그림이 휴가 중인 둘에게 연락했다.

빨리, 지금 당장, 하드스록으로 튀어오라고.

각각 제 클래스에 맞는 마법사의 나라와 민첩직의 나라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하, 내 창. 두 개나 부숴먹었어."

"그게? 그렇게 치열했다고?"

"좀 다른 문제야. 아무래도 저놈 썩은 물이야."

"그거 게이머로서 말하는 건가?"

"이걸 봐."

일그림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침식중인 왼팔을 보여준다.

에리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피의 군주]……."

"역시 그건가? 긴가민가했는데 네가 본 적이 있으니 확실하군."

"전투용은 아닌데 그건."

"이건 확실히 아주 위험하지. 얻는 조건도 모르겠는 스킬인데."

인구 밀집 지역에서 증식이라도 시작한다면…….

"삼의회가 이걸 알고 있을까?"

"모르겠어."

에리나는 어쨌건 잔뜩 인상을 쓰고 계속 비행하였다.

* * *

정령왕은 그다지 우리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꼬맹이와 내가 가지고 있던 바람의 결정만으로도 이번 한 번 통과시켜줄 만한 값어치는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다시 찾아온다면 다른 세계의 바람을 보고 싶군.]

그다지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 모양이지만 어쨌건 좋았다.

정령왕이 원할 만한 순도의 바람 원소 결정이 14층의 배의 무덤에 존재해서 다행이다.

거기 찍혀 있었던 게 우리 46서버의 인간 왕국 왕가의 문장이었던 것 같은데.

나이트 크로우도 함께 있었고 말이지.

우리 서버의 중세로도 돌아가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정령왕의 호의에 충분히 감사를 표한 다음 왕국으로 돌아왔다.

일그림과 에리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없다. 하드스록에 더 머물기는 힘들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하고 희우는 아예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지만 블랑쉐가 업고 달렸다.

길드 하우스에는 영감님이 남아있었다.

"무슨 일인가? 그렇게 서두르고."

"얼굴을 맞댄 하이랭커가 생겨서요."

"그 꼴을 보니 한바탕하고 온 모양이군."

어차피 내가 없어도 돌아가도록 만들어둔 길드다.

나와의 접점을 찾으려고 한다면 찾기 힘들지는 않겠지만, 그때는 삼의회와 하드스록이 비호하리라.

46서버의 독점에 가까운 계약을 이미 체결한 후다.

[천사의 눈물] 길드는 일그림도 쉽게 못 건드린다.

하드스록에도 하이랭커 파티는 있고, 거대 길드의 꼭대기인 만큼 강력하다.

언제든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기에 짐은 이미 싸둔 후다.

삼의회가 우리의 위장신분만큼은 노출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거래 조건이었으니까.

"다음에 다시 볼 일이 있겠죠."

"어째 항상 짐을 싸두더라니."

"제가 없는 생활에도 익숙하시지 않습니까."

"그래, 자네는 약속을 참 잘 지켜 주었어. 언젠가 어디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제니에게 다그쳤다.

"짐 항상 싸두랬잖아."

"짐이라고 할 게 없어요……."

"그래? 더 좋네."

하우스를 나서기 전에 영감님이 행선지를 물었다.

"사수와 궁수와 암살자의 나라지요."

리프트는 각 나라마다 존재한다. 정확히는 리프트가 존재하니 그런 규모의 길드가 형성된 것이다.

일그림이 우리의 추적에 얼마나 열심일지는 모르겠으나. 쉽지는 않을 거다.

나는 돈이 많고, 돈이 많으면 대체로 무엇이건 가능하니까.

기차에 타고 출발한 후에야 희우가 눈을 떴다.

몸의 상처는 다 나았으나 피로는 어찌 되지 않는다.

"와? 잠깐 이거 다 뭐예요!"

"쉿. 기차 안이야."

"기차도 있었어요?"

"본 적 없어? 하긴 하드스록은 좀 낙후된 느낌이긴 하지."

일등석이기에 다른 시선은 없다.

"여행가는 것 같아서 좋네요."

"지금까지는 아니었고?"

"모험과 여행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그도 그렇군.

어쨌건 그쪽에서도 리프트부터 다녀야 할 것 같다.

비상시에 의지할 근거지는 확보되어 있으니까 레벨링과 파밍에 완전히 주력할 필요가 있다.

일부 파티원 후보로 삼을 만한 다른 고정 네임드 유배자 NPC들의 존재도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마력로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출발했다.

북부의 하드스록은 아직 좀 추웠고, 이제 이동할 나라는 좀 더 따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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