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05화
왕국 - Lv.152 민첩한 자들의 나라(1)
여신님이 하드스록에 남은 전 파티멤버들의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가 갑자기 사라진 것에 당황했지만 동시에 그럴 만도 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사실 하드스록에서 나는 거의 희우와 꼬맹이만 데리고 움직였다.
입지를 다지는 것을 돕고, 능력에 걸맞은 지위를 주고, 간섭조차 최소화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계속 함께할 희우와 꼬맹이의 강화에 쏟았으니 어찌 보면 방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걸 싫어했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리 멤버에서 모험을 정말로 좋아했던 이는 없다.
모두들 각자 바라는 삶이 있다.
평화의 가운데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있다.
레미에게는 그게 없었기에 비교적 바쁜 역할을 주었으나 곧잘 해내었고, 최근에는 뭔가 생각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로 두는 편이 옳다.
나는 내 인선을 의심하지 않는다. 모두 잘 지낼 것이다.
어차피 헤어져야 할 일이었다.
따라오지 못할 사람들을 억지로 함께 엮어간다면 기다리는 것은 어떤 의미로건 파멸일 뿐이니까.
희우는 크게 섭섭해 하지 않았다.
"어차피 뭐, 계속 못 만나는 것도 아니고요."
"의외네 막 눈물 흘리고 그럴 줄 알았는데."
"송별회 같은 거 하고 그랬으면 레미 언니 껴안고 울었을지도……?"
이제 그냥 언니 취급이군.
그 말에 옆에 있던 블랑쉐가 움찔했다. 여기도 언니지.
누구는 딸내미가 자꾸 늘고, 누구는 언니가 자꾸 늘고.
참 잘하는 짓이다.
제니는 여전히 혼란하지만 동시에 뭔가 들뜬 얼굴이었다.
일단 일등석의 시설을 여기저기 살피는 게 문명을 접한 야만인이 따로 없다.
"이거 얼마죠?"
"기차 타본 적 없어?"
"네……."
하드스록은 낙후된 게 맞으니 어쩔 수 없나.
근접 전사는 높은 단계에서는 귀중하지만 안전한 노동을 추구한다면 그다지 귀하지 않다.
그보다는 안정적으로 화력을 투사하는 마법사나 궁수, 사수 등이 더 각광받는다.
결국 전사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 클래스다.
하드스록도 상대적으로는 가난한 편이기도 하고.
"항상 전사였어?"
"민첩 전사도 사실 이번이 처음이에요. 자리 잡은 김에 요정 카드를 사서 한 거니까요."
"원래는 그럼?"
"검과 방패였죠."
이 왕국에 정착한 시점에서의 연차가 얼마 되지 않았던 게 분명하군.
검과 방패는 마스터리도 두 가지를 같이 확보해야 의미가 있다.
다 같이 저스펙인 튜토리얼 구간에서야 의미 있는 안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조합이다.
하지만 파티의 역할 분화가 되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왕국 이후에선 검과 방패를 들 메리트가 거의 소멸한다.
확실한 공격력, 혹은 확실한 방어력.
근접 전사는 보통 그 둘 중 하나를 골라 특화한다.
로건처럼 고만고만한 짐승을 잡는 수준에만 특화한 케이스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검방이면 뉴비인데."
"아니면 살인마거나."
잘 몰라서 마스터리를 두 개 찍거나, PVP를 위해 방패를 들거나지.
제니가 슬며시 웃는다.
"그런 말 많이 들어서 바꿔본 거죠. 저 뉴비 맞아요. 여기서만 오래 살았죠."
옆에서 희우가 끼어들었다.
"저는 초회차예요! 그럴 수 있어요! 저보다는 잘 아시니까 문제없죠!"
역효과가 났다.
제니는 잠깐 굳어졌다가 못들은 걸로 하기로 한 모양이다.
희우는 자신의 위로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더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블랑쉐는 뻣뻣하게 나를 보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블랑쉐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다른 이야기 좀 해볼까. 정보 수집은 했지만 지금 갈 곳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아는 건 아니라서."
"나도 하드스록의 슬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었다. 잘 아는 건 없다."
"그래도 암살자라서 생긴 정보는 있을 건데."
미궁에서 같은 클래스간의 유대감은 상상 이상으로 끈끈하다.
대다수의 능력은 고만고만하고, 그렇다면 상성을 극복할 수 없다.
개인으로서 상성에 대항할 수 없다면 집단이 되어야 한다.
동병상련을 공유하는 같은 클래스만큼 가까워지기 쉬운 존재도 없다.
애초에 클래스마다 역할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니 취급도 다르다.
상대의 역할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해 분쟁이 생기는 경우는 흔하다.
어차피 유배자 모험가는 프리랜서 개념이니까 별수 없다.
블랑쉐는 침묵했다.
나는 무언가 생각할 것이 있겠거니 하고 계속 주시했다.
끊임없이 침묵했다.
"뭐 문제라도 있어?"
"아니……."
"유배자와 접하긴 힘들어도 별 신경 안 쓰는 NPC들도 있었을 건데."
"오르골. 너는 알겠지만. 나는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하다."
"……그게 거기까지 갈 문제야?"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명령을 받으면 보통 필요한 정보는 모두 주어져 있지.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또 고개가 의심스레 기울어지는 발언.
"전 회차의 너는 제법 말이 많았는데. 대화 정도는 지장 없었다고 생각해."
블랑쉐는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 길드가 그만큼 좋았던 모양이지."
"그런가?"
"그래."
본인이 그렇다는데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가만 생각해 보면 전 회차에서 우연히 만난 것은 이미 삶을 포기하기 직전의 블랑쉐였다.
내가 통일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그 왕국에서 블랑쉐는 상당히 고생했다.
질서가 잡힐수록 온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이가 갈 곳은 없다.
그러니 그 왕국의 왕이었던 내가 나서서 받아들였다.
블랑쉐는 충분히 고스펙이고 잘 키운다면 훌륭한 전력이 될 수 있었으니까.
유일무이한 권력자 수준의 입장이었기에 가능했다.
보통은 블랑쉐를 받아들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유배자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는 수준의 존재도 드물다.
받아들인다고 융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블랑쉐는 내게 의존적이었다.
과거 이야기를 들은 희우가 경계할 정도로.
그러니 그 길드가 좋았다는 것은 결국 내가 좋았단 뜻인데.
그럴 수 있지.
다시 생각해 보면 백마 탄 왕자나 다름없는 꼴이긴 하구먼.
"뭐, 내가 너를 보았을 때, 이미 성격이 많이 변한 후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난 원래 누구와 대화하는 걸 잘하지 못한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 뭐, 첩보원 일이 그렇게 만만했어?"
"입만 다물고 있어도 되더군."
"하긴, 남자들이란."
그럼 지난 회차의 블랑쉐는 오로지 나와만 대화를 잘했던 모양이다.
대충 아싸 찐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보다 좀 더 심했던 모양인가 싶기도 하군.
"그래서 나는 아는 게 없다. 미안하군."
"친구가 없었군요! 언니! 괜찮아요! 이젠 제가 친구에요!"
"저도요!"
어느 새 다시 이쪽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희우가 끼어든다.
제니도 멋모르고 힘차게 맞장구 쳤다.
블랑쉐는 어딘가 한심한 눈으로 둘을 보고 대꾸했다.
"시끄럽다."
* * *
꼬맹이는 옆이 시끄럽거나 말거나 혼자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었다.
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적었기에, 전투 후에 계속해서 그 여운에 취해 있다.
마법은 연마하는 데 달리 자리가 필요한 분야가 아니다.
그 어느 곳에서 가만히 자신의 심상 속으로 침잠하여 되새길 수 있다.
결국은 마음의 기술이자 학문.
깨달음도 그런 곳에서 오는 법이다.
에리나라는 격투가의 포격을 받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두 공간을 이어 다른 곳으로 보낸다면 모를까, 원하는 곳에 원하는 순간 내보내기 위해서는 해야 할 작업이 훨씬 많아진다.
따로 아공간을 형성해야 했다. 그래야 잠깐이나마 공격을 담아둘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공간 내에서 계속하여 포격이 날아갈 공간을 확보한다.
둥글게 이어 붙여 순환하는 공간을 만든다면 좋겠으나 아직 거기에는 닿지 못했다.
그래서 포격의 속도만큼이나 사고의 속도를 유지해야 했다.
계속하여 마음속에서 포격이 질주해 나갈 만큼의 공간을 확보하고, 마력으로 구현한다.
신호를 보내는 것도 버거웠고 정확한 위치에 여는 것도 버거웠다.
그래도 해냈다.
할 수 있을 거라며 맡긴 것이지만 그걸 진짜로 해낸 것은 또 다른 일이다.
그 과정을 몇 번이고 다시 복기했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은 없다. 그 감각을 뇌리에, 손에, 몸에 새겨둬야 한다.
꼬맹이가 가야할 마법의 길은 아직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꼬맹이는 그 성공에 대하여 굉장한 흥분 상태에서 눈을 떴다.
"여긴 어디죠!"
"오, 일어났니?"
아빠가 머리를 빗어주고 있던 참이었다.
"열차 안이야."
"열차?"
"아, 뭔지 모르는구나."
모를 수밖에 없다. 꼬맹이가 살던 대륙의 이동 수단은 기껏해야 마차였다.
비교적 심드렁한 다른 사람에 비해 난생 처음 보는 무언가다.
꼬맹이는 다시 흥분했다.
일상적인 마력시를 통해 이 거대한 철 구조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렴풋이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저! 저! 구경할래요!"
"음, 그래."
"나랑 갈까?"
엄마가 나섰다. 저번에 선물한 장갑을 끼고 손을 잡는다. 객실은 아담하지만 고급스러웠다.
아빠는 말리지 않았다.
"얼굴이 특별히 알려져 있지는 않으니까 괜찮을 거야. 일그림은 기업형 하이랭커는 아니었거든. 기껏해야 수소문이나 하고 있겠지."
"금방 둘러만 보고 올게요."
"사고 치지 말고."
"어떻게 사고를 쳐요. 이동 중인 열차인데."
"불안해서 그래."
엄마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밖으로 나섰다.
날개와 링은 계속 숨기고 있다.
약간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아직은 걷는 게 어색하네."
"무리를 많이 하셨어요!"
"팔도 좀 아프고."
힐링 포션은 상처만큼은 말끔하게 처리해 주지만 뇌가 기억하는 고통은 남는다.
주로 신경계에 남는 종류의 불편함인데, 그게 해소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툭하면 여기저기가 으깨지는 뱀파이어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희우는 전투만 했다하면 몸이 부서지고 박살난 후 다시 재생하는 아저씨를 생각했다.
흠, 정말 힘들 것 같아. 이런 고통을 항상 느끼는 것 아니야.
하지만 뱀파이어는 무수한 단점을 대가로 그런 장점을 얻은 종족이다.
왜 인기가 없는지 알겠다.
꼬맹이는 일반석 차량까지 가고자 하지는 않았다.
도망치는 중이라는 사실은 인지했고,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도 인지했다.
다행히 일등석은 기관실과 가깝다.
희우는 거기서 꼬맹이를 앉혔다.
이미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마법, 또 마법, 잠꼬대도 무언가 주문을 중얼거리는 아이다.
들여다보려다 머리를 콩 하고 박기에 끌어당겨 자세를 바로 한다.
학구열이 지나쳐 걱정하는 부모의 심정이다.
"내가 이렇게 공부했으면 부모님이 좋아했을 텐데."
꼬맹이는 메모장을 꺼내 열심히 뭔가 그리기 시작한다. 벽 너머의 무언가가 보이는 모양이다.
* * *
전투 당일이라 많이들 피곤한 모양이었다.
제니는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나마 민첩직의 나라인 [더 시티즌]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제니였기에 계속 말을 시켰더니 말이지.
블랑쉐는 졸고 있는 제니를 흘깃 보고는 말했다.
"난 아직 잘 모르겠다."
"뭐가?"
"어째서 네가 나에게 이렇게 호의적인지."
"말했잖아. 이전 회차의 인연도 있고, 필요도 있고."
"알지, 머리로는 알아."
화상으로 망가진 얼굴은 가뜩이나 없는 표정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붕대로 감겨 있으니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나도 감정을 읽을 수 없다.
"그래도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이니까. 그리고 너무 낯설어진 일이니까."
"네가 몇 살이었지? 바깥에서 말이야."
"스물."
"사회 초년생은 원래 뭘 모르는 게 정상이다. 학교 다녀본 적도 없지?"
"없다."
"그 상태로 갑자기 온 세상이 너를 알고, 너를 싫어한다면 뭐가 뭔지 모르는 게 정상이지."
어째 내 파티에는 사회 부적응자들만 모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사실 정도 이상으로 뛰어난 인간을 모으면 어딘가 이상한 놈들만 모이는 게 평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편하게 지내. 부담 가지지 말고. 이 파티에는 너한테 원한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다 그냥 그런갑다 하고 대해줄 거야."
"그런가."
나는 문득 이전 회차의 생각이 났다.
"울고 싶을 때, 울어도 되고, 웃고 싶을 때, 웃어도 된다. 마음대로 해라. 이곳에 아버지는 없으니까."
블랑쉐는 눈을 크게 떴다.
말투로 흉내를 냈으니 눈치챘을 거다.
"그건 혹시……."
"지난 회차의 블랑쉐가 너에게 전해달라고 하더군. 다음 회차에도 자신을 찾아달라고 하면서."
"그런가."
"여긴 미궁이야. 어찌 보면 자유로워진 거지. 너는 소속도 없고 말이야."
"그런가."
블랑쉐도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전 회차의 블랑쉐는 자신의 신상을 아주 많이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르골과 동명이인인 나에게 말하기 껄끄러웠을지도 모르겠고,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후에, 블랑쉐가 웃었다.
"내가 모르는 내가 나에게 하는 조언이라. 재밌네."
웃는 모습을 보기 참 힘든 녀석이다.
적당한 종족 카드가 생기면 쥐여주자. 얼굴을 바꿀 방법은 화상 말고도 많으니까.
여신님이 슬쩍 속삭인다.
「난 아직도 블랑쉐가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게 신기하군. 그냥 피 대신 기름이 흐르는 살육 머신 아니었나?」
‘아니긴 하더라고요.’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하는군.」
‘왜 자꾸 프레임을 씌우십니까. 꼭 그 탓은 아닐 겁니다.’
「비겁한 녀석.」
아니, 정말 억울하군. 나 정도면 인격자거늘.
그렇게 생각할 때, 갑자기 폭음이 울렸다.
"음, 그럴 것 같았어. 우리 천사님이 함께하니 편히 갈 리가 없지."
제니가 놀란 고양이처럼 팔짝 뛰어올라 객석에 쪼그려 앉고, 열차가 거의 전복되듯이 정지했다.
"일그림이 달려온 건 아니겠지?"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