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08화
왕국 - Lv.152 민첩한 자들의 나라(4)
열차는 계속해서 나아간다.
뉘엿뉘엿한 노을 속에서 시커먼 터널이 불쑥 나타났다.
얼기설기 만들어진 터널은 내 생각보다 만듦새가 좋았다.
깜깜하게 둘 수도 있었을 것인데 안에 조명도 켜두었다.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구조다.
그래 마치 지구 같다.
보기 좋게 타일로 마감처리도 된 벽면이 창의 뒤로 흐른다.
어쩐지 좋은 예감에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희우가 슬쩍 나를 보더니 화음을 넣기 시작한다. 웃겨서 그만두었다.
희우가 샐쭉해진다.
[더 시티즌]은 그 이름처럼 도시라 불릴 만한 형태이며, [하드스록]보다도 훨씬 발전한 나라라고 알고 있다.
여러모로 하드스록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나라인 모양이다.
사실 모든 왕국이 이렇게까지 클래스로 나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는 서로를 구분하고 같은 클래스끼리 뭉치기겠지만 완전히 따로 사는 경우는 흔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러나 만약 그리 갈라섰다면, 그중 전사들의 땅이 유난히 투박한 경향은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클래스를 갈라서는 거예요?"
"튜토리얼부터 학습된 상성 때문이지."
"힘이 민첩에게 강하고, 민첩은 지능에게 강하며, 지능은 힘에 강한 상성이었죠?"
"그거 꽤 심각하거든. 동 레벨에 동 장비, 동 실력이면 거의 못 이긴다고 봐도 될 정도야."
희우는 순순히 납득했다.
우리 파티로서는 튜토리얼에서 오히려 느끼지 못한 상성이었다. 거기서는 스펙으로 찍어 누르고 다녔으니까.
희우가 요정 마법사를 상대했을 때는 마법을 너무 몰랐기에 그랬던 것이다.
기를 좀 꺾어야 하나 싶어서 그러기도 했던 거지 지금 같았다면 좀 다른 결과가 나왔으리라.
결국 유배자들끼리의 PVP 상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여기서부터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전사가 마법사에게 약한 이유는 낮의 전투로 똑똑히 보고 느꼈겠지.
일반적인 전사가 확보할 수 있는 마법저항력에도 한계가 있다.
천사 같은 고위 종족이 아닌 이상 각종 원소가 부여하는 상태 이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다.
거기에 마법사의 기본인 공간이동을 생각하면 동급이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실감할 수 있는 바이다.
"뭐, 그렇다곤 해도 처음부터 클래스별로 갈라서진 않아. 보통은 분쟁이 몇 번 난 후에 경계심이 생기고, 꼭 그걸 부추겨서 정치하는 놈이 있지."
"그게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별 이유도 없는 감정의 골이 되겠군요."
"회차를 거듭하면서 그게 점점 더 깊어지기도 하고 말이지."
지역감정이랑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지역과는 달리 클래스는 다음 회차로 넘어가기 전까진 바꿀 수도 없다.
바꾼다 치더라도 다양한 클래스에 숙련도가 있을 정도면 이미 훌륭한 고참이다.
사실 고참급이어도 유배자들은 대개 한 우물만 판다.
그 하나도 버거우니까 말이다.
그래도 다른 클래스들끼리 무작정 배척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극도로 경계하는 느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제니가 고개를 갸웃한다.
"저는 딱히 마법사에 악감정은 없어요."
나는 피식 웃었다. 나름대로 고참인 것 치고는 순수한 면이 있다.
"그건 너무 건실하게 살아서 그래. 그럼 PVP 할 일이 없잖아."
"……그런가요."
"칭찬이야 칭찬."
대화하는 새 터널이 끝났다.
식생이 풍부한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교적 척박한 분위기의 북부지역과는 다르게 공기부터 촉촉한 느낌이다.
열대우림은 아니지만 울창하게 뻗어 있다.
그리고 저 멀리 하늘 위로 오로라처럼 번지는 빛무리가 보인다.
별빛을 가릴 만큼 밝다.
실로 도시적인 무언가이다.
"야경이라고 부를 만한 게 있는 도시인 모양인데."
"미궁에서 말이죠? 잘 상상이 안 되는데요?"
"제국 수도 생각해 봐. 우리 서버의 그거."
"아……. 그런 느낌인가."
날카로운 기적 소리가 울린다.
열차가 제동하기 시작했다.
언제 이번처럼 습격당하여 파손 당할지 모르는 기차다. 그러니 그다지 섬세한 기술로 만들지 않는다.
이건 결국 증기 기관차이되 물을 끓이는 주체가 마력일 뿐이다.
그래서 실로 영화에서나 볼법한 그 기적 소리가 울린다.
잠에서 깨, 얌전히 앉아있던 꼬맹이가 낯선 소리에 신난 얼굴이 되었다.
가끔 나이를 들먹이며 어른스러운 척을 하지만, 결국 어린애다.
정신이 외견을 따라간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는 빗나간 적이 없는 사실이다.
희우도 외견이 성장한 후에 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졌다.
기나긴 선로의 마지막에 도달했다.
너덜너덜해진 기차를 보고 역무원이 달려온다.
우리는 VIP 대접을 받으며 내릴 수 있었다.
역장이 찾아와 고개를 숙인다.
이 기차도 어차피 유배자들이 이용하는 시설이다.
그러다 보니 전투에 참가한 승객을 어찌 대하는지 매뉴얼이 잘 되어 있었다.
합당한 보상이 준비될 동안 최고급 호텔의 객실을 제공한다는 모양이다.
안내를 받아 이동하는 와중 감탄이 계속되었다.
"우와!"
"와아……."
희우와 제니가 감탄하고 꼬맹이는 눈이 핑핑 돌았다.
역을 지나 들어선 도시는 나도 상당히 의외인 광경이었다.
하드스록은 아무래도 덩치 큰 트롤, 오우거, 오크 등의 종족이 많다.
그러다 보니 건물들도 큼직큼직하기 마련이며 크게 짓다 보면 투박해진다.
반면 작고 민첩한 종족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시티즌은 도시가 훨씬 오밀조밀했다.
애초에 인구수가 가장 많은 것이 민첩직이다.
전사는 죽어서 적고, 마법사는 어려워서 적다.
민첩직이라고 뭉뚱그릴 뿐이지 사수, 암살자, 궁수 세 갈래의 클래스가 공존하니 가장 인구도 많을 수밖에.
"내가 왕국에서 야경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낭만적이네요. 네온사인도 있고."
"아마 네온이 아니라 마법이겠지만."
"라스베이거스? 뭐 그런 느낌이에요."
제니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디테일은 좀 아쉽지만 라스베이거스 느낌이네요."
"바깥에서 거길 가 봤어?"
"일자리가 거기였어요. 딜러였거든요."
"세상에."
제니가 그리운 듯이 웃었다.
"이 왕국에 삼십 년을 살면서 한 번도 다른 곳으로 가볼 생각을 못 했다니. 생각해 보니 놀랍네요."
"어어? 삼십 년? 제니, 그렇게 늙었어요?"
"네에? 그렇게 말하니까 슬픈데요. 유배자에게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게다가 전 요정이라구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잎사귀 요정 카드 사느라 돈을 다 썼구먼.
그러니 궁핍해서 어디 다니지도 못하지.
놀랍게도 관광이란 것이 의미를 가질 만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는 나라였다.
* * *
다음날 낮에도 봄의 촉촉한 안개는 물러가지 않았다.
햇살을 산란하며 얇은 이불처럼 도시를 덮고 있다.
썩 나쁜 느낌은 아니다.
우주도 그렇고 심연도 그렇고, 상당히 건조한 환경이다 보니 이런 촉촉한 느낌이 오랜만이다.
[더 시티즌]은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그래. 정말로 도시였다.
하드스록이 횃불과 가스등이 공존할 것 같은 혼란스러운 양식의 시가지였다면, 이곳은 안개 속에 간판의 불빛이 번쩍이는 현대다.
다양한 형태의 차량들이 포장된 도로를 달리고, 약소하게나마 고가도로도 보인다.
기술 전문직들이 유배된 후, 민첩직을 택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왕국에선 유난했던 모양이다.
심지어는 자판기도 있다. 하드스록의 시가지에서는 기껏 해봐야 노점상이었다.
거기선 도로도 여기처럼 아스팔트는 아니었다.
"탄산! 탄산! 탄산이다!"
희우가 팔짝팔짝 뛴다. 제니도 약간 감격한 얼굴이었다.
꼬맹이는 새로운 세계를 본 것 같은 표정이다.
「빨리 내게도 바쳐라!」
여신님이 닦달한다. 콜라 비스무리한 음료는 빠르게 공물이 되었다.
굳이 신언으로 들려주는 감탄사가 신도들의 뇌리에 울린다.
「아니, 왜 고블린들은 탄산 만들 생각을 못 한 거지?」
‘연방에 이런 게 없습니까?’
「충직하긴 해도 좀 재미없는 녀석들이긴 하지.」
약간 일개미 같은 게 떠오르려고 한다.
"뭔가 진짜 돌아온 것 같기도 하네요."
"걸어 다니는 사람들 복장이 희한하고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거만 빼면요."
"향수에 잠길 만한 풍경이야."
블랑쉐와 꼬맹이만 이해하지 못했다. 둘은 현대 지구와 관련 없는 곳에서 왔으니까.
막내가 보았다면 어떻게 말할까?
"일단 시설들 크기가 균일해서 좋네요."
"덩치 큰 종족이 없으니 말이지."
호텔 로비에서 아이스크림 따위도 팔고 있었다.
지배인으로 보이는 정장의 남자는 아주 정중하게 우리를 대했다.
그 정장 가만 보면 미스릴 실로 엮어 만든 거다.
국영 호텔 같은 거라고 했던가?
여기 투숙하는 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이랭커가 본격적으로 우리를 노리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위험은 정면에서 이겨낼 수 있다.
그 정도 전력이 확보되어 있는 상태다.
그리고 듣기로는 이곳은 통일되어있는 환경이 아니다.
괜히 민첩직의 나라일까.
상성으로는 한데 묶이니 공존할 뿐, 엄연히 다른 계통 클래스들이 산발적으로 모여 있다.
좀 쉬었으니 움직인다. 꼬맹이의 마력은 전혀 만전은 아니었으나 30% 정도까지는 회복되었다.
[초마도사]의 영향으로 마력 회복 속도도 몹시 빠른 편이다.
마력의 회복 속도는 바닥에 가까울수록 느려진다. 마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결국 이미 체내에 존재하는 마력이기 때문이다.
아케인의 고위 마법사라도 있다면 눈독 들일 만한 재능이다.
오래된 유배자 마법사들 중에서는 정말로 ‘마법사’가 되어버린 이도 많으니 말이다.
대표적으로 마법의 신이 있겠지.
"일단 일하러 가자."
"밤인데요?"
"몇 가지 실험과 사소한 레벨링이야."
리프트는 센터라고 부를 만한 형태의 건물 속에 있다.
야외에 노출되어 있는 하드스록과는 다르게 입장 시스템도 철저하다.
하드스록에서 등록한 신분이기에 약간의 검문이 있었다.
위장 신분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검문 게이트를 통과하고 구획 별로 나눠진 제단이 보인다.
키 아이템을 판매하는 상점이 이리저리 있다. 하드스록에서도 물물교환 같은 식으로 자주 보이는 광경이지만 체계화가 된 점이 다르다.
접수표를 뽑아두고 대기하는 동안 상점을 살폈다.
블랑쉐가 약간 의아하게 묻는다.
"굳이?"
"그게 말이야. 일그림 파티가 습격해온 일에 묻힌 것 같은데. 보스가 정령왕이려면 몇 단계여야 할까?"
"표기는 55였는데……."
"좀 많이 이상하긴 하단 말이지."
그냥 그 조건으로 나올 수 있는 가장 곤란한 곳에 꽂아주는 것 아닐까? 처음은 제니와 로건이 있어 비교적 온건했을 뿐이고.
숫자가 박혀있는 키 아이템들은 미궁이 시스템적으로 부여한 것들이다.
인카운터 없는 일반적인 단계에 쉬이 입장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다.
미궁인 시점에서 그게 꼭 배려인가 하면 의문스럽긴 하지만.
숫자 30이 적혀 있는 구슬을 몇 개 샀다. 바람의 원소를 머금고 있다.
통상적이라면 그냥 그런 속성을 지닌 몬스터가 보스로 나오는 정도다. 폭풍 그리폰이라거나 많지 않은가.
"이걸로 들어가 보자고."
자연스럽게 제니가 손을 내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보지."
46 서버로 다시 돌아갈 필요도 있다.
남의 서버를 들쑤시는 건 좀 조심해야 하니 우리 본진으로 가는 편이 좋겠지.
부유감이 몸을 감싼다. 팁 메시지가 당혹스럽다.
"설마, 이거."
"여기는 그 하늘 유적이랑 몹시 비슷하네요."
"비슷한 게 아니라 거기보다 더한 곳인데."
그야 거긴 유사 정령계고, 여기는 진짜 정령계니까.
어느 시점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자연의 권화가 온 사방에 맴돈다.
도사리고 있는 존재감은 충분한 대정령의 영역에 도달한 것들이 보인다.
저것들이 적이라면 죽도록 싸워야 했을 것이다.
잽싸게 무기를 들었던 다른 파티원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무기를 내려놓는다.
정령은 많았으나 적대적인 분위기는 또 아니었다.
곧 멀리서 작은 은빛의 드래곤이 날아든다. 몇몇이 움찔했으나 드래곤은 내 어깨에 앉아 머리를 비빈다.
희우가 알아보았다.
"어라? 실피드 아니에요?"
"그러게 대체 왜 그 구슬로 여기에 들어오는 거지?"
제니가 경련하며 숨을 헐떡인다.
"저저저저정령계? 정령왕? 또?"
파밍이고 나발이고 좀 실험을 더 해봐야겠다.
필요하다면 희우를 빼고 입장하는 수도 있지.
난이도가 변하는 규칙을 파악해 보자.
* * *
무서워졌기에 한 자릿수 키 아이템으로 실험했다.
대충 예상대로 희우가 원인은 맞다.
심지오 희우를 빼고 입장하면 정상적인 난이도의 층이 나왔다.
함께한다면 얄짤이 없다.
이마를 싸매고 축 처진 모습이 된 천사를 내버려 두고 고민한다.
희우가 없다면 내가 알던 법칙대로 굴러가고 있다.
그리고 희우가 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규칙성은 보였다.
"이거 무조건 보스층이구만."
"다 저 때문이었다니. 진짜로 그랬다니. 충격이에요. 전 대체 뭘까요?"
"음……. 그러게?"
"흐윽! 제가 나쁜 아이였어요!"
콰광 하고 충격받은 듯한 모습이 된 희우는 블랑쉐에게 가서 매달린다. 블랑쉐는 아주 귀찮아하면서도 받아준다.
요즘 바빠서 말이 잘 없으신 여신님도 이 실험은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메인 던전 입장하는데 특별히 대단한 키 아이템도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좋은 일이긴 한데. 그게 문제는 아니죠. 행운의 신이랑 친한 신 없습니까?’
「그런 유배자가 있겠느냐. 행운의 신전 같은 건 듣도 보도 못했단 말이다.」
‘풀어야 할 숙제군요. 아마 답은 리프트에 있겠죠.’
「미궁은 언제나 그랬지.」
골치 아프다. 이미 이러고 있는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갔다.
한눈에도 수상쩍은 사수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충분히 강해 보이는 사수가 대뜸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고명한 마법사가 계신다고요?"
"어쩐 일이신지?"
"맡기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아케인의 소속이 아닌 강력한 마법사. 당연히 소문은 퍼진다. 미끼를 물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