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09화
왕국 - Lv.152 민첩한 자들의 나라(5)
고레벨 사수는 다른 클래스에 비해 유난히 강함 티가 나지 않는다.
결국 내재된 마력도 중요해지는 전사와 애초부터 마력이 존재 이유인 마법사나, 신성함이 철철 넘쳐흐르는 성직자와는 다르다.
맨몸의 사수는 그냥 기동성만 초인적인 일반인이다. 그들의 마력활용은 총기를 잘 다루는 수준에서 끝난다.
물론 레벨업하며 스탯이 오르는 만큼 근력이라거나 정밀한 움직이라거나 그러한 부분에서는 분명히 보정을 받긴 한다.
문제는 사수를 위한 스킬이 없다는 점이다.
사수는 정말로 자신의 사격 능력과 운, 그리고 지식만을 가지고 플레이하는 클래스다.
지금 눈앞의 남자가 사수라고 한눈에 알아본 것도 그 탓이다.
고레벨 전사 특유의 단단한 체격과 병적인 갑옷 사랑이 없다.
강렬한 마력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다.
허리춤의 권총 두 자루를 뺀다면 정말로 그냥 평범한 NPC라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마력은 도리어 저 권총에서 느껴진다.
꼬맹이가 그걸 보더니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앤티크한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사냥꾼이 남기고 간 물건이지만 호신용으로 꼬맹이가 가지고 다닌다.
"저는 에르메스라고 합니다."
가명 참 고급스럽네.
"하드스록에 적을 두고 있는 마법사는 귀하죠. 그 정도로 강한 분이라면 더욱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대화를 좀 할 수 있겠습니까?"
한눈에 보아도 리더는 나다.
그러니 악수도 내게 청한다.
나는 그 손을 잡고 흔들었다.
종족은 언뜻 인간 같아보였으나 그러며 슬쩍 찔러본 마력으로 눈치 챌 수 있다. 늑대인간이다.
흔히 뱀파이어의 숙적으로 일컬어지며 실제로도 그렇긴 하지만, 유배자에게는 큰 의미 없는 일이다.
발이 빠른 늑대인간은 어차피 장비빨인 사수에게는 고려할 만한 선택지다.
뱀파이어와는 나이트 크로우의 사냥감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우리 딸내미한테 관심이 있다고 하시니 기꺼이 들어보도록 하죠."
"딸……. 아니, 따님 말씀이십니까?"
꼬맹이가 저요? 하듯이 나를 본다.
일단 우리 파티의 마법사는 꼬맹이 하나인 걸로 해둘 것이다.
애초부터 호텔이 사수 계열 길드가 운영하는 것이었다.
곧바로 라운지로 이동한다. 에르메스는 그래 보여도 800위대에 걸쳐있는 랭커였다.
"예전에는 600위까지 가 본 적도 있었죠. 은퇴한 지 몇 년이 지나니 점점 내려만 가는군요."
은근한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발언. 우리가 랭커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니 순순히 말을 들어라는 뜻이라 생각한다.
용건 자체는 마법사에게 있으니 마주앉은 것도 우리 흡혈귀 마법사다.
에르메스는 랭커답게 외견으로 상대를 판단하지는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우리 꼬맹이는 알맹이도 애다.
길게 설명했음에도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꼬맹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결국 에르메스가 포기했다.
"아무래도 리더님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약간 화난 티를 내며 에르메스가 나를 본다. 나는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은 구미가 당기지만 후려치는 느낌이 강하다. 이 정도면 넘어오겠거니 하는 금액이다.
"그 제안, 받아들이죠."
"네?"
"대신 지금 제시한 보수는 필요 없습니다. 그냥 우리 편의나 좀 봐주시죠."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 말입니까?"
말투가 더 험악해진다.
명확하게 금전을 제안한 입장에서 두루뭉술한 요구는 불쾌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의 제안부터가 우리 입장에서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인 발언이었다.
"일을 맡기겠다면서 구체적이지 않은 조건, 거기에 보상은 묘하게 후하고. 당신은 랭커 나으리고. 이거 엄청 위험한 일이지? 바보가 아니면 그냥은 안 하지."
사수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이제는 확연하게 다른 어투다.
"이런, 당신이 그걸 알면 차라리 더 쉬울지도 모르겠네."
에르메스의 태도가 변한다.
무기를 뽑는다. 한 호흡으로 리볼버가 그의 손에 쥐어지고 조준까지 끝난다. 나와 꼬맹이를 겨누고 있다.
정확히 심장을 노리고서.
"그래서 안 할 건가?"
수틀리면 겁박. 힘이 있다면 가능한 선택지다. 그냥 구슬리는 게 더 편하니 정중했을 뿐.
"자기 목이나 살피고 말하시지."
총을 뽑는 것과 동시에 블랑쉐의 날이 에르메스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처음부터 은신하고 대기한 참이다.
검은 연기가 흩어지며 모습이 드러난다.
스킬에 의한 보정 외에도 블랑쉐는 원래 몸을 숨기는 데 능하다.
"흠. 이건 생각 못 해봤는데. 어째 들은 것보다 한 명 적더라니. 하지만 이런다고 이길 것 같나?"
나는 웃었다.
"그건 되었고, 당신이 맡기는 일은 해준다니까."
"뭐?"
"대신 겨우 돈 몇 푼에 입 싹 닫으면 안 되는 거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내가 꼬맹이를 보았다.
꼬맹이는 자신의 마법 능력을 증명하라는 눈치를 곧장 알아듣는다.
고사리같이 작은 손가락이 딱 소리를 내며 튄다.
최근에 가르친 소매틱이다. 술자인 꼬맹이 본인이 요즘들어 저걸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다. 마법은 정신적인 것이니까.
따로 메모라이즈 해둔 것도 아닌 마법이 떠오른다.
사수인 이상 메모라이즈의 기척은 느낄테니까 그 사실은 알 것이다.
무수한, 정말로 무수한 [매직 미사일]이 떠오른다.
그다지 강한 마법은 아니다. 멀티캐스팅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퍼포먼스일 뿐.
에르메스가 입 다물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전부 하얀 빛의 미사일들이 떠있다.
"이 정도면 만족하지?"
"왜 이런 마법사가 아케인 소속이 아닌 거냐?"
"사정이 있지."
"좋아, 랭커급 파티인 모양이군. 내가 크게 실례했어."
랭커급은 보통 그냥 띄워줄 때 으레적으로 쓰는 관용어구 같은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제대로 악수할 수 있었다.
* * *
실력 있는 유배자임에도 마법사를 급하게 구할 일이 있다면 그건 대부분 아케인의 횡포 때문이다.
마법사는 유용하고도 강력한 존재다. 원한이 있지도 않은 바, 사수들 가능하면 마법사들과 함께하길 원한다.
오히려 그것을 원치 않는 것은 마법사들이다.
그들은 전투를 하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당장 이 도시를 이루는 근간 역시 마법이니만큼, 원천 기술을 독점하다시피 한 마법사들이 저자세로 나갈 이유가 없다.
그 와중 하드스록은 마도공학에 필요한 재료를 공급함으로서 아케인과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그건 국가단위의 이야기고 일개인으로서 가장 구하기 힘든 인력은 분명히 마법사다.
중립을 표방하는 시티즌에도 마법사들은 피곤하고 귀찮은 족속들로 인식되고 있다.
마법사들은 어떻게 해야 자기들 몸값이 올라가는지를 너무나도 잘 안다.
애초에 똑똑한 놈들이나 하는 클래스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를 써야할 일이 있고, 그 일이 위험해서 마법사를 구할 수 없었단 거군요."
"거기에 저 양반도 의뢰주한테 예산 받아서 진행하는 거라 남기면 다 자기 거였던 모양이야."
에르메스가 맡은 일은 구출대였다.
전사나 다른 멤버는 갖춰졌으나 선뜻 나서는 마법사가 없었던 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구출대상은 실종된 랭커다.
"거절할 만하네요. 랭커가 돌아오지 못할 정도면 억만금을 줘도 자기 목숨이 먼저일 수밖에요."
"구출대가 뭔지는 알지? 우리가 구출대라고 생각했었잖아. 12층에서 샤크마에게 잡혀 있던 인물들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도 이 왕국 사람들이죠?"
"그럴 수밖에 없지. 정확히 어느 시기의 사람들인진 모르겠지만 왕국 기준으론 미래에서 온 사람들일걸."
아직까진 46서버는 열쇠를 쥔 인물들이 서로 눈치만 보는 단계다.
이후 47서버가 열릴 때쯤에나 슬슬 풀기 시작하겠지.
그때 12층에 억류되어 있던 유배자들은 대부분 지금 이곳의 왕국보다 미래에서 온 유배자들일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바뀌지 않도록 공고하게 다져둔 모양이라고 바로 그때 확신했지."
"그럼 그들에게 뭘 물어보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아니, 아마 그들은 내 얼굴을 알 거야.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가 유명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까? 잘 알지 못하며 미래에 영향을 줄 필요는 없지."
"어……. 그럼 잘 숨긴 것 같네요. 정보 우위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죠?"
"우리는 상대를 알되 상대는 우리를 모르게 해야지."
다음 날, 에르메스가 다시 찾아왔다.
의뢰주와 협상을 하고 왔다는 모양인데 원하는 조건을 듣고도 우리 파티 전부를 두말없이 고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어차피 내가 힘쓸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 돈도 필요 없다니 남는 장사고 말이야. 나로선 더할 나위 없어."
에르메스는 한때 도전자로서 랭킹에 머물고 있다가 은퇴한 인물이었다.
간곡한 부탁을 받아 이렇게 나서게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의뢰주는 이 호텔의 주인이야. [무기고] 길드 마스터지."
"전투보다는 총기 제작의 장인인 모양이군."
다른 인물들도 소개받았다. 에르메스와 마찬가지로 은퇴한 랭커 궁수도 하나 있었다.
그 외에도 다섯이 더 있었는데 전부 1000레벨은 넘는 고참급들이다.
나는 우리 파티의 레벨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그 정도야 뭐. 의뢰주 얼굴을 못 보는 건 이해해 줘. 내가 대리로 하는 거니까."
"시티즌의 모든 검문을 프리패스 해주는데 이해할 수 있고말고."
"그렇다니 다행이군."
구해야 할 인물은 의뢰주의 옛 파티원인 모양이었다.
희우가 속삭였다.
"그런데 우리 굳이 이거 끼어들어야 해요?"
"건스미스래. 사수들의 왕이지. 에르메스 양반을 통해 필요하다면 추후에도 뭔가 협상할 수 있겠지."
"우리 돈 많잖아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돈보다도 과거에 베푼 은혜가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법이다.
거점은 하드스록에 있되 어딜 가도 좋은 관계를 맺어둘 필요는 있다.
마법사는 항상 귀하니 누군가는 접촉해올 거라 생각했으나 상상보다 더 거물이다.
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용하는 화기 그 자체이며, 건 스미스들은 사수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런 길드 중에서도 가장 큰 [무기고]의 길드마스터에게 은혜를 베풀어두면 편하다.
아는 사이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쉬우니까.
하지만 그 이유는 덤이다.
"제일 중요한 건 네 상태 확인이지. 완전 남의 일에 남이 파티 리더인 상태에서도 이상한 곳으로 튈까?"
로건의 경우에는 넘버링 된 키 아이템을 사용했다.
이번에 사용할 키 아이템은 실종된 랭커의 유품…… 은 아니고 오래 썼던 애병이다.
이렇게까지 핀 포인트로 꽂히는데도 괴이한 난이도 보정이 출현한지에 대한 실험이다.
과연 어떨까?
"만약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약간 애석한 일이지. 리프트 난이도를 필요에 따라 조정할 수 없다는 거니까."
블랑쉐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이런 고레벨 멤버가 가도 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오겠군. 그럴 경우의 대책은 있나?"
"전쟁의 화신과 우주전도 했었는데 그쯤이야."
어차피 랭커가 돌아오지 못한 시점에서 멀쩡한 곳은 아니다.
그리고 정 안 되면 쓸 비장의 수도 준비했다.
주머니에서 작은 은빛의 드래곤이 날아올라 어깨에 안착한다.
어딜 보아도 정령왕 같지는 않은 비주얼이라 대놓고 다녀도 오해조차 받지 않는다.
43서버의 정령왕이 바람의 결정을 탐냈던 이유는 이런 게 가능해서다.
"약소한대로 우리 파티는 건사할 수 있겠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처음 계약할 때처럼 다시 난리를 피우며 실피드를 보러 가야하는 문제였는데, 그냥 리프트를 통해 덜렁 마주쳐버렸다.
그대로 가지고 있던 바람 결정을 모아 육신을 형성해 데려온 참이다.
한번 정도는 왕의 위엄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그래도 아마 실피드를 동원할 일은 없을걸?"
랭커가 조난을 당하는 경우는 적이 강해서라기보다는 이상한 기믹이 있기 때문이지.
단순히 적이 강해 돌아오지 못했다면 이미 죽었다.
구출 대상은 [길드석]의 랭킹에서 1년간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서든 데스가 없는 어느 곳에 갇혀있다고 보는 게 옳다.
에르메스는 그런 기믹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처음 찾아왔을 때는 쏙 빼놓았던 부분이다.
마법사가 필요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단한 기대를 하지는 않았고 기본적 유틸리티만 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그래도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좋다. 전투 이전의 문제다.
에르메스로서도 형편 좋게 풀린 경우이리라.
"그래서 추정되는 곳은 어디요?"
에르메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홀수층, 몽환의 숲. 아주 위험하지."
"아, 거기."
"경험이 있나?"
"칭호 달아본 적도 있지."
"든든하군."
에르메스는 믿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탈출이라면 모를까, 정복자 칭호라면 하드스록의 친애하는 마이어씨가 달고 다닐 정도로 대단한 위업이다.
허세로 받아들이는 편이 정상이다.
나는 그냥 웃었다.
몽환의 숲이 어려운 이유는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몰라서일 뿐인데.
그래도 이번 회차에서 정복자 칭호를 챙기는 건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