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16화
????단계 - Lv.1023 불의 마탑(1)
마법사의 나라이자 최대 길드인 [아케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이야기보다는 흉흉한 소문이 더 많았다.
마법사들은 어느 회차의 왕국에서나 지식인들이며, 그것은 바깥에서도 그렇다.
대학교수, 연구원, 예술가 등, 가방끈이 길거나 먹물에 푹 담겨져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법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애초에 적성에 맞기도 힘드니까 말이다.
"구출대라니, 좋은 일들 하시는군."
"아닙니다. 협회에서 일을 받아 하는 일인걸요."
"의뢰를 냈다고 이런 오지까지 오는 용병들도 드물지. 자랑스러워해도 좋다고 생각하네."
에르메스가 상대 중인 학회장이라는 양반은 장발에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종족은 물론 마법에 최적화된 종족인 그루터기 요정이다.
거기에 구김살 없는 얼굴도 그렇고 묘하게 고아한 말투하며, 몸짓 하나하나가 쓸데없이 귀족적이다.
유배자 2세대인가?
아무래도 왕국 마법사의 전형이라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워 메이지는 아닐 것이며, 순수한 연구자에 더 가까운 마법사.
개인적으로는 엮여서 썩 좋은 경험이 없는 종류다.
희우는 이미 날개를 숨기고는 그냥 전사인 척을 하고 있다.
그 마법을 건 꼬맹이 역시 내재된 마력의 양만으로는 유망한 수준에 불과하기에 시선을 끌지 않는다.
여기선 시치미를 뚝 떼야 한다.
연구자들은 정말로 피곤한 족속이다.
단체로 돌아버리기라도 했는지 미궁의 신비를 파헤치겠다며 달려드는 탓이다.
그게 꼭 뭐……. 나쁘다곤 못하겠고, 오히려 슬럼의 길드 마스터 같은 이들에 비하면 긍정적이긴 하다만.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떤가? 우리가 수색을 좀 돕도록 하지."
"네? 그……. 그게……."
이렇게 선량해서 귀찮아질 수가 있다.
에르메스가 티 안 나게 내 눈치를 본다. 곤란하긴 하겠지.
나도 곤란하다. 학자라는 양반들은 왜 이렇게 선의를 베풀고 싶어 하는지.
딱 관상부터 그렇게 생겨 먹어서 일이 이렇게 될 것 같더라.
거절하기에는 명분이 애매하다.
[불의 마탑]이라면 불의 원소를 다룰 것이고, 꽤나 메이저한 마탑일 것이며, 그곳의 학회에서 학장을 맡을 정도라면 영향력도 클 것이다.
그냥 가능한 이상한 낌새 없이 넘기는 게 좋겠다.
아케인에 벌써부터 무슨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니, 그보다 그냥 없어도 된다.
약삭빠르게 구는 것은 유배자 1세대이며 워 메이지 같은 전투 마법사들이나 그렇다.
저런 연구자들은 미궁의 끝을 본다고 하면 크게 저항하지 않는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상관없는 이들이다.
나와 엮이지 않으면 무해하단 말이지.
그렇게 가만히 눈을 감고 잠깐만 어울리기로 했다.
* * *
"좋은 사람들인데 어째 불편하네요."
"오, 너도 정말 훌륭한 유배자가 되었구나. 이유 없이 선량한 사람을 보면 속이 쓰려지고 어딘가 찝찝하고 그렇지?"
블랑쉐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가시를 삼킨 기분이군."
제니조차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하드스록과 아케인이 전쟁을 벌일 때, 저는 참전하지 않았지만 불편하긴 하네요."
뭐 그 전쟁은 철저하게 주도권을 쥐기 위한 길드전의 양상이었기에 소시민인 제니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학회씩이나 벌이고 있는 이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대부분이 그루터기 요정이니 요정들이라고 해야 하나?
두 대척점에 소속된 마법사와 전사로서는 온건한 상황이라 하겠다.
학회의 사람들은 기꺼이 휴식을 베풀고자 했다.
아케인은 인구가 적지만 마도공학의 핵심 기술을 틀어쥐고 있는 국가다.
당연히 부유하며 질적으로도 지구가 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한다.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있었으나 나는 가능하면 빨리 이들과 헤어지고 싶었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 숲의 위험성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또 내가 간과한 부분이군. 좋네. 우선 움직이도록 하지."
학장의 지시에 따라 마법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전부 밝은 표정인 것이 그다지 전투에 위험을 느끼는 바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표정이 썩어가는 것은 마법사들의 호위다.
"제기랄, 에르메스! 대체 왜 여기 나타난 거야?"
"내가 고른 길은 아니지."
같은 용병인 모양이다.
구면에 서로 친한 것 보니 저쪽도 비슷한 급이겠군.
"후, 보수만 아니었어도 안 받아들이는 건데."
"뭘 받기에 그러나?"
"대량의 오리하르콘 주괴. 학장의 개인 재산이라더군. 꼭 몽환의 숲에서 학술대회를 열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야."
에르메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뭔가 웃고 싶지만 웃을 수 없는, 티내고 싶지만 티낼 수 없는 그런 표정이다.
그야 뭐 당장 제 주머니에 산더미처럼 들어 있을테니.
에르메스가 그 웃음을 최대한 참아내고 대답한다.
"대체 왜 이딴 곳에서?"
"주제가 그거라더군. 미궁에서 존재란 무엇인가, 마법적으로 풀이하고자 하는 뭐 그런 거라던데."
"개똥같은 소리로군."
"마법사들이 그렇지. 유배자 1세대가 아니면 더더욱 그렇고."
"날 때부터 그루터기 요정이면 머릿속이 꽃밭이 되는 건지. 쯧."
희우가 묻는다.
"저게 무슨 소리에요?"
"저기 마법사들 대부분은 1세대 유배자가 아니야. 그 자손이지."
"아……. 그럼 그냥 그루터기 요정이 맞는 것 아닐까요? 부모가 종족을 바꾸고 혼인한 그런 케이스죠?"
"카드가 영혼의 종족마저 바꾸는지, 유전자와 영혼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그거에 대해 연구하는 건 자주 본거 같네. 결론은 나도 몰라."
"아저씨도 모르는 게 있군요."
"그걸 안다고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나도 연구해 봤겠지."
정말 순수학문이다. 의미가 없다곤 못하겠지만, 대다수의 유배자들에게는 아주 사치스러운 무언가로 보일 행위.
하지만 그 덕분에 많은 발견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접목이 가능해지기도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것.
하지만 미궁에서는 마냥 존경받기는 힘든 태도기도 하다.
특히 저쪽의 호위들은 죽을 맛인 게 눈에 띈다.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법사님들이 전력적으로는 어떻습니까?"
"거, 아케인의 마법사들답게 다들 한가락 하시죠. 그런데……."
"쓸모는 없겠네요."
"어쩔 수 없죠. 마법만 잘 쓴다고 워 메이지가 되는 건 아니니."
총을 쏠 줄 안다고 군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럼 저건 몇십 명의 짐덩이다.
이건 슬슬 암담해지는데. 희우를 슬쩍 보았다.
눈치가 빠른 우리 천사는 잽싸게 내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저는 여기 남을게요."
"그게 맞겠다. 다 죽을 일 있겠어."
"평범한 숲을 즐기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미안해."
"아니에요!"
제니도 눈치를 슥 보더니 남겠다고 했다. 이쪽은 정말로 피로로 지쳐 보였기에 그러자고 했다.
희우가 제니의 손을 잡고 팔짝팔짝 뛰며 마법사들이 제공한 천막으로 향한다.
내부와 외부의 크기가 다르며 내부에 욕실도 있는 사치품이다.
이번 왕국의 마법사들은 어디까지 발전했는가.
"전투는 오랜만이로군."
"마법으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해야지. 가끔은 이런 일도 좋지 않나."
마실나온 것 같은 요정들과 그 호위들 사이에 우리도 대열을 맞춘다.
에르메스와 로잘린은 지휘부라고 불러야 할 쪽에 합류했다. 늑대인간 전사가 껄껄대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좀 편하겠습니다."
"저 마법사들을 보고도?"
"그래도 이젠 갑자기 악마 같은 게 튀어나오진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좋겠는데."
희우도 두고 가는 마당에 별일이야 있겠나 싶긴 하지만 여긴 미궁이다.
찝찝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선택지로 열려 있는 길은 여러 곳이 있었다.
인원이 많은 만큼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호위들이 분배된다.
수색을 하는데 이 많은 인원들이 함께 움직일 필요는 없다.
아직 숲의 중심부는 한참 멀다.
본격적으로 악몽같은 경험이 나오기 시작할 단계는 아니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
그러나 그 실종된 랭커가 과연 이런 얕은 곳에서 발이 묶였을까?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 수색이 시작되었다.
* * *
로잘린과 우리 파티는 학장이 있는 쪽으로 배치되었다.
아무래도 골칫거리를 가져온 입장에서 학장의 쪽으로는 강한 전력을 두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있기로 했다.
로잘린은 이 상황을 간단히 평했다.
"그림은 좋네요. 어쨌든 의뢰주가 시티즌과 아케인 양측의 거물이 된 셈이니. 이렇게 협력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나쁠 건 없겠습니다."
"좀 큰 건인가 봐?"
"그렇죠. 전 랭커들이 이렇게 잔뜩 나서는데 어떻게 안 그렇겠습니까."
희우가 빠지고 나니 잔챙이들만 나와 김이 샐 지경이었다.
방법을 알면 숲 외곽에서는 난이도가 충분히 낮아질 수 있다.
하물며 왕국에서 나고자란 마법사들은 대단한 역경을 지나오지도 않았다.
최대한 그들의 경험이 나오도록 배치를 조절하고 선택지를 고르자 위험하다고 해보아야 야생 와이번 떼라거나, 드레이크 정도에 불과하다.
뭐, 이런 식이라면 몽환의 숲에서 학술대회를 여는 것도 이상할 건 없군.
호위들은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지만 마법사들이 긴장이 없는 점은 이해할 만해졌다.
위험한 경험을 한 적이 없으니 자연히 변수도 없으리라 여기는 것이다.
놀라우리만치 전투가 쉬웠기에 주변을 순회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몇 번인가 새로운 야영지를 발견하기도 했고 그곳에서 다른 팀과 마주치기도 했다.
"별일 없네."
"그동안 겪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정도군요. 몽환의 숲이 산책이 되어버리다니."
나 역시 마음을 어느 정도 놓은 순간.
조금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이번 지표는……."
"거대한 구조물……."
구조물은 전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저렇게 거대하다면 그만큼 강력한 전사를 뜻할 뿐만 아니라 상대의 체격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
거의 성채만큼이나 거대한 이것은.
"거인이군요."
로잘린이 인상을 찡그리며 주변을 살핀다.
그런다고 희우가 보이진 않는다. 제니랑 같이 목욕이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거인이라는 말에 마법사들의 표정도 조금 신중해졌다.
학장이 말한다.
"조심하시게. 야만한 거대 인간이겠군. 이건 우리의 힘을 보여줄 때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인은 전사로서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지닐 수 있는 종족인 동시에 방어적으로는 한없이 취약하다.
몸에 맞는 갑옷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보통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출현한 거대 거인 셋은 그리 야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갑옷을 걸친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나자 모두 침을 삼켰다.
"대열 위치로! 사격 개시!"
"마법사님들은 대마법을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인은 고위종족이다. 장단점이 너무 극명하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뿐, 그 공격력만큼은 비할 바 없이 명확한 존재.
망치질 단 한 방에 운석을 가볍게 상회하는 파괴가 자행된다.
불의 마탑에서 온 마법사들은 도움이 되었다.
공기를 태워 버리고 갑옷을 녹여버리는 열기가 다수의 마법사들에게서 구현되었다.
전력을 숨기고 자시고할 상황이 아니었다.
블랑쉐의 레일건까지 꺼내고서야 겨우 상황이 정리된다.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이건 희우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건데.
"저건 누구 경험인가?"
호위 중 몇 명의 사상자까지 나온 전투 끝에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 파티는 거인을 만난 적이 없다.
"위치상으로는 분명히 마법사들 중 누군가의 경험이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로잘린이 나서서 반박한다. 사실이다. 그녀는 우리와 함께 온갖 보스급의 적들을 마주하면서도 거인을 본 적이 없다.
"규칙이 틀렸나? 그럴 리가 없는데. 지난 몇 년간 그대로였어."
"애초에 다른 회차에서도 항상 규칙만은 동일하지 않습니까."
아니지, 멍청이들아. 이건 그거다.
"마법사님들 중에 이상한 놈이 좀 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무슨 소리인가?"
학장이 바로 반발했다.
"혹시 뭐 최근 마탑에 알력이라거나 없습니까? 구체적으로는 당신이 사라지면 확실한 이득이 생기는 누군가가 있다거나."
학장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그루터기 요정으로 태어난 뇌는 남의 악의를 쉽게 시뮬레이션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마법사는 로잘린이 말했듯이 거물이다. 노려질 개연성은 충분하다.
심지어 이 학회에 출석할 정도면 측근이겠지. 모두 일망타진한다?
차도살인마저 쉬운 몽환의 숲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나.
그래도 순수 100% 내츄럴 본 그루터기 요정이 아닌 학장은 사태를 곧바로 파악했다.
"있네. 있어. 누군가가 그러면 고의적으로 위기를 만들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호위를 포함해 아직 의심의 눈초리가 남아 있다.
내 신용이 거기까지인 거지.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네. 모두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데."
"로잘린, 그 사람들은 누군가? 그쪽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나?"
물론 로잘린은 장담할 수 있다.
내가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걸 알 테니.
"일단, 다음 길, 다음 갈림길을 보죠."
선택지 셋이 모두 끔찍한 것이었다.
그래, 뭐. 늘 휘말리게만 했으니 가끔 나도 남의 사정에 휘말릴 수도 있는 거지.
화가 나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