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17화
????단계 - Lv.???? 거신(1)
사실 대부분의 왕국 이후 홀수 층은 다른 로그라이트 게임.
그러니까 로그라이‘크’ 말고 로그라이‘트’ 게임을 미니게임마냥 집어넣어놓은 것과 비슷하다.
개발자 놈들이 베를린 해석을 철저하게 따랐다간 안 팔린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 아닐까. 내부 던전에 장난질을 많이 친 기분이다.
몽환의 숲도 결국 그 일환으로서 지극히 제한된 미니게임과도 같은 식의 폐쇄적인 룰을 가지고 있다.
오픈 필드라 할 수 있는 짝수 층, 그러니까 서버의 내부처럼 다양한 임기응변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곳의 규칙은 조금 변할 수는 있더라도 추가적으로 더 변경시킬 수는 없다.
그 사이를 파고드는 창발적 플레이 정도가 전부겠지.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제아무리 마법의 달인이거나, 강력한 전사일지라도 그 룰 자체를 폐기처분 해버릴 수는 없다.
그랬기에 선택지를 앞에 두고 마법사와 호위들은 많은 고심을 해야 했다.
도리어 우리 파티와 로잘린은 심드렁하다.
‘끔찍한 선택지’라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다.
조금 전의 거인들은 충분히 강력했으나 천사 다섯에 비할 바는 아니다.
같은 고위 종족이하면 셋 보다는 다섯이 더 강하다.
당연한 이치다.
지난 며칠간 훨씬 더 끔찍한 선택지를 겪은 입장에서는 두 군데는 그저 무난해 보일 정도다.
다만 다른 한쪽의 갈림길은 약간 걸리는 점이 있다.
주사위.
잊을 만하면 미궁에 나타나는 악의 그 자체인 랜덤 요소다.
물론 정말로 아무 제한 없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확률이기에 심각한 것이 나오긴 힘들다.
물론 선택권을 가진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이미 사상자도 나온 마당이니까.
머릿속이 꽃밭인 그루터기 요정들도 이 시점에서만큼은 굳어진다.
호위대를 이끄는 남자가 말한다.
"이대로 전진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군요. 이겨낼 수 있는지를 떠나 그다음이 어떠할지는 모르니까 말입니다."
"수상쩍은 자가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겠군. 거기 당신들도 벗어날 수는 없네."
뭐, 그거까지는 어쩔 수 없나. 로잘린이라면 나름대로 유명인인 모양이나 우리 파티는 순순히 신원보증까지 받을 입장은 아니다.
일단 블랑쉐는 붕대가 좀 깨끗해졌을 뿐, 여전히 모습을 가리고 다닌다.
암살자에 가장 걸맞은 모습이라면 이쪽이지.
"그럼 저희는 저기 구석에 얌전히 짜져 있을테니 알아서들 하십…… 꾸엑!"
"어딜 도망가려고 해요! 이것도 해결해줘야죠."
"아니, 하지만 우리는 호위하라고 돈 받은 것도 아닌데."
로잘린이 애매하게 쳐다본다.
"그럼 아까 끼어들지도 마셨어야죠."
"아니, 그건 순간 답답해서."
"그냥 해결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더 편리하고."
뭐, 그거야 그렇긴 하겠지만.
휘말린 이상 그냥 말끔하게 처리하는 편이 더 효율이 좋다.
하지만 저런 연구형 마법사들과는 영 엮이고 싶지가 않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로잘린에게 잡혀 의논에 참석했다.
* * *
학회에 스며든 암살자는 한참 당황하는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다른 일행과 조우한 것도 처음에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잘게 인원이 쪼개진다는 것 자체는 좋았다.
처리 대상은 전원이 아니다. 그저 학장과 몇몇 측근들뿐.
나머지는 어찌 되어도 좋다.
생각보단 쉬운 건이었다.
위장하고 슬쩍 끼어드는 것 자체는 쉽지 않았으나, 일단 성공하고 나면 편했다.
날 때부터 그루터기 요정이었던 마법사들은 의심이란 것을 거의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호위 플랜 자체가 마법사들의 위치를 조정하여 그들의 경험만을 끄집어내 버티는 식이었다.
여러모로 산전수전을 겪은 그가 그 사이에 섞여들어 있기만 해도 강한 것이 튀어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적절한 시기에 제대로 방해만 할 수 있으면 된다.
몽환의 숲은 그에게 아주 유리한 전장이었다.
과거 왕국에 대한 [침공]을 겪고도 살아남아 먹고 살기 위해 구르고 있는 입장에서 퍼낼 경험은 엄청나게 많다.
암살자인만큼 전투적으로 크게 강하지는 않으나 경험은 많다.
혼란을 가중시키고 서로를 의심시키며 다들 피폐해져 갈 때쯤에 적당히 하나둘씩 없애면 된다.
어차피 호위로 고용된 용병들이 아니라면 마법사들을 처리하는 일은 쉽다.
원래부터 암살자와는 극상성인 게 마법사니까.
거기서 조금 문제가 생긴 것은 생각보다 더 강한 게 튀어나와서였다.
"왜? 무장 거인들이? 저 정도 무장이면 [요툰헤임]의 습격 때인데."
400여 년 전의 악몽이다.
그때 왕국은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한차례 리셋 되었다.
대부분의 유배자가 죽고 살아남은 이들과 새로 유입된 이들이 다시 재건해야하는 아포칼립스였다.
서버의 번호가 다시 1로 돌아간 것도 그때다. 이제 곧 47서버가 열릴 차례던가.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운이 좋아 요정 카드 한 장을 얻었다. 그 덕에 오래 사는 것은 좋다.
그럼에도 재능 없고 능력 없는 유배자는 세월만 보낸다고 강해지지 않는다.
지금 호위 중인 전 랭커들도 그보다 나이가 많은 이는 드물리라.
보고 열등감을 느끼는 시기는 지났지만 기분 좋은 모습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는 그가 살아남는 것이 문제인 상황이 왔다.
거인들을 어찌 물리치긴 했지만 애초에 그는 마법사가 아니다.
이제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다.
"재수가 없으려니."
그 불운은 그래도 이번에는 행운이 되었다.
다음 선택지도 아주 지옥 같은 길이다.
충분한 혼란이 야기될 것이며 틈은 있으리라.
그렇다면 누가 진짜 마법사였는지 검증하기도 힘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애초에 그는 지금 스킬이나 마법으로 위장하고 있지도 않다.
어차피 그도 그루터기 요정이니까. 로브를 두르고 마법사인 체하며 섞여들어 있을 뿐이다.
그때, 중간에 조우한 웬 이상한 놈 하나가 나섰다.
학장과 호위들이 상상도 못한 암살자의 존재를 대뜸 짚어버린다.
한순간에 막다른 곳에 몰린 암살자는 생각했다.
판단만큼은 빠르다.
그렇기에 비교적 별 볼일 없는 능력으로도 무수한 지옥을 헤치고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
이젠 죽어도 다음도 없으며 튜토리얼을 제대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지금.
바로 지금 도박을 걸어야 한다.
지표를 읽는 법에 통달했다고는 할 수 없다.
주사위가 무엇인지 정도는 안다.
그의 의뢰주는 마법사다. 마법사는 부와 권력을 거머쥔 존재며 미궁을 가장 깊이 이해한 존재다.
[요툰헤임]을 겪었던 이 암살자는 몽환의 숲에서 불러낼 수 있는 경험만큼은 누구보다도 흉악하다.
그렇기에 의뢰주가 쥐어준 것이, 행운의 성물.
대신격과 관련되었기에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소모품이지만.
검게 물든 채 불길한 어둠을 내뱉는 이 성물의 용도는 행운이 아니다.
확률을 관장하는 대신격 행운이 할 수 있는 한 최악의 상황을 불러오도록 하는 것이 이 성물의 역할이다.
연구용도 이상으로는 가치가 없기에 그에게 주어졌다.
이걸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써야 한다.
품속에서 봉인을 잡아 뜯었다.
차단되어 있던 성물의 기운이 어둠을 물씬 피워 올린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를 보았다.
위기 감지에 관련된 몇 가지 스킬이 촉을 바짝 곤두세운다.
살기 위해 달아나는 뒤편으로 살의가 꽂힌다.
어떻게 이걸 바로 눈치챈 거지?
하지만 아직 한 명.
굳이 [은신]의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모든 스킬을 총동원하여 질주한다.
주사위가 있는 갈림길로 달린다.
누군가가 쫓아온다.
그보다 빠르다. 하지만 암살자는 포기할 수 없었다.
총탄이 날아든다. 몇 가지 방어에 관련된 스킬이 간신히 그것을 막아낸다.
마법은 달려들지 않았다.
그루터기 요정들은 일단은 동족인 자신에게 무턱대고 마법을 날려댈 만큼 냉혹하지 못하다.
"야! 이 자식아! 너 그거 뭐야!"
거의 다 왔으나.
따라잡힌다.
마지막으로 성물을 집어던졌다.
검은 보따리에 싸인 수정이 날아간다.
"쏴!"
마력이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날아가는 성물을 붙들기 위해서.
하지만 간발의 차이였다.
안개와 접촉한 수정이 진동하며 날아드는 공격을 튕겨낸다.
우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숲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길이 선택된다.
선택받지 못한 길을 안개가 감싸 막아서 버렸다.
땅에 엎어진 채 앞을 본다.
갈림길의 저 너머에 불길이 치솟았다.
지독한 유황 냄새와 함께 문을 지키고 있던 거대한 형상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거대한 거인, 조금 전의 무장 거인과 비교해도 훨씬 더 거대하며 전신이 불타고 있는 신화적 거인.
그는 기억하고 있다. [침공]의 첨병이 되어 온 왕국을 불태우던 거대한 거인의 존재를.
그리고 저 불길에 쓰러지던 랭커들과 하이랭커들의 존재를.
그가 살면서 본 가장 강력한 존재였다.
"성물? 행운의 성물?"
의아해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암살자는 의식을 잃었다.
숲이 만들어낸 화염 거인이 적을 찾아 불길을 내뿜기 시작했다.
* * *
"이야, 수르트네."
"온도가 변했다. 저건 강한가?"
블랑쉐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실제로 기온이 한순간에 5도 정도는 상승했다. 그 후로도 점점 오르고 있다.
꼬맹이는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한 수르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마력을 보는 눈에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괴물로 보일 것이다.
저것은 걸어 움직이는 항성과도 흡사한 열량을 가진 존재다.
케찰코아틀은 홀수 층을 위해 준비된 보스 중에서는 가장 저급하기에 떼를 지어서도 등장한다.
수르트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저건 언제나 단 한 개체만이 존재한다.
애초에 왕국을 리셋하기 위한 [침공] 이벤트 때나 등장하는 최강의 보스들 중 하나다.
어떻게 저게 나왔는지가 중요한건 아니다. 나왔다면 그 다음 해결책을 생각해야지.
제길 좀 안이했나? 아니 근데 이게 말이 되냐. 희우도 없는데.
오랜만에 정상적인 미궁의 확률에 너무 해이해졌을지도.
일단 성물을 가지고 있던 암살자 요정을 억류한다. 뭘 좀 물어봐야겠다. 행운의 실마리는 중요하지.
내 디스펠 없이는 다시 의식을 되찾지 못하게 조치한 후에 고개를 들었다.
거인의 움직임이 느려서 다행이다.
도전하라고 만들어둔 보스가 아니다.
왕국을 돌아다니며 무로 되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보스지.
성향은 적극적이지 않다.
다만 숲에서 출현한지라 도망칠 곳이 한정적인 것이 문제다.
일단 클리어한 길을 되짚어 야영지로 되돌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소환된 적을 처리하지 않으면 숲의 탈출구를 찾아도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로라는 전 랭커들도 모두 패닉에 빠졌다.
신언이 난무하고 있다.
신들이 이 숲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약식으로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여신님께 질문했다.
「뭐라고?」
‘전쟁의 신한테 수르트 이길 수 있냐고 좀 물어봐 주십쇼.’
「이기긴 하겠지, 아니, 잠깐만, 전쟁의 화신이 이길 수 있냐고? 그건 못 이기지.」
‘그래도 비빌 정도는 되지 않습니까?’
「내 메시지를 볼지 모르겠군, 일단 보내보마.」
놀랍게도 여신님은 즉시 대답을 가지고 오셨다. 전쟁의 신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을 보내온 모양이다.
「당연히 이긴다며 노발대발하는군. 미친놈인줄 알았다.」
‘허세 부릴만큼은 여유가 있단 거군요. 그럼 되었습니다.’
일단 모두 야영지를 향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기온이 점점 상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