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23화
왕국 - Lv.2660 하이랭커 맥(1)
[무기고]의 마스터, 베티는 까탈스러워 보이는 인상의 바위 난쟁이였다.
들어 올린 용접면과 오른손의 망치가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얼룩덜룩한 작업복과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공방에서 작업 중이었다고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베티가 구출당한 나이트 크로우 중독자를 보았다.
"러셀, 살아 돌아왔군. 내가 보낸 구출대가 돈값은 한 모양이야?"
"제기랄, 1년이 지나면 구하러 오라고 하긴 했는데. 내 생각보다 1년이 너무 짧았어."
"난 솔직히 1년 채우기 전에 뒈질 줄 알았다. 아직 랭킹에 남아있으니 살아있긴 할 텐데 하면서 보낸 건데 정말로 찾아올 줄이야."
그러며 고개를 돌린 난쟁이는 입맛을 다시며 내게 다가온다.
옆의 에르메스와 로잘린보다도 내가 더 중요한 인물이라는 걸 아는 눈치다.
의뢰주에게까지 상황을 숨길 수는 없지.
본래는 전권 대리인인 에르메스 선에서 끌날 일이지만 사태가 사태였던 만큼 나도 불려와 있다.
"고생 많았어요. 이 멍청이가 칼을 들었다면서요?"
"인류의 적 취급을 받지 뭡디까."
"하하, 미안합니다. 그 숲에 갇힌 채로도 컨셉에 충실할 줄은 몰랐죠."
"컨셉이라고 하지 마라. 나는 진심이다."
베티가 눈을 흘기며 다시 속삭인다.
"미안하니까 보수는 더 넉넉하게 넣어드리죠. 원래도 편의를 봐주길 원했다면서요? 뭐든지 말만 해요. 시티즌에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그럼, 입단속 좀 시켜주시죠."
"흠, 몽환의 숲이 다시 한번 클리어되었단 건 못 숨기는데."
"그건 알려져도 됩니다. 우리에 대한 정보만 어디에 알려지지 않게 해주시면 됩니다."
"어느 정도로?"
"가능한 최대로."
베티가 턱을 쓰다듬는다. 여성 드워프도 수염이 난다거나 그런 세계는 아니지만 참으로 잘 어울리는 동작이다.
"좋아, 그럼 먼저 탈출한 녀석들은 처리해야겠군요."
"겁에 질려 도주한 녀석들 말입니까? 협회가 가만히 있나요."
"내 의뢰에서 중도 이탈한 녀석들을 좀 처리한다고 그 치들이 무슨 소리를 할 수 있겠어요."
"그럼 잘 좀 부탁합니다."
"특별히 나한테 캥키는 일만 안 만든다면 앞으로도 잘해드리죠. 그리고 고마워요. 이젠 친구라고 부를 만한 놈도 저 녀석밖에 안 남았거든."
"고생하시네요."
"나이트 크로우의 표식이 없었으면 그쪽이 훨씬 고생했겠죠. 구출대를 보낼 때도 늑대인간이랑 뱀파이어는 배제해야 했는데."
에르메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아무도 생각을 못 했던 모양이다. 솔로 플레이어다 보니 괴짜의 컨셉질 정도로 여겨졌던 모양이고.
아니, 애초에 컨셉을 잡아도 자기를 구하러 온 사람들에게 칼을 겨누나?
어쨌든 이야기는 좋게 끝났다.
제법 유쾌하던 늑대인간 전사는 이미 보수를 챙기고 휘파람을 불며 떠난 후다.
나에게 정말로 감사하다며 인사하더니 사라졌다.
베티가 묻는다.
"밥 먹었어요?"
"아직 입니다."
"호텔에 준비시킬 테니 돈 걱정하지 말고 즐기다 가요. 성공했으면 회포는 풀어야지."
좋고 말고. 느긋하게 에르메스나 로잘린과 이야기도 좀 해보자.
* * *
시티즌은 비교적 살아가는 것에 바쁜 하드스록과는 다르게 사치재라는 것이 존재한다.
뱀파이어에게는 결국 모든 것이 피일뿐이지만 그럼에도 사치스러운 피라는 건 존재한다.
무슨 와인처럼 혈액을 블렌딩하고 숙성시킨다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뱀파이어인 내 입맛에는 그 차이가 느껴진다는 게 더 우습다.
미궁은 정말로 이상한 곳이다.
"순결한 인간 처녀의 피를 베이스로 이건 잎사귀 요정의 피인가? 그리고 한 방울 정도는……. 모르겠군."
"꽃잎 요정의 피입니다."
"이야, 그걸 어디서 구한 거래. 얘야, 마셔보렴."
꼬맹이가 홀짝홀짝 피를 마신다.
"달아요!"
"그래? 그게 달게 느껴지면 안 되는데."
톡 쏘는 맛이 나야 하는데 이상하다?
그러며 나도 홀짝이는데 확실히 달다. 뭔가 더 가공된 모양이군.
바텐더가 멀리서 의미심장한 윙크를 날린다. 거참 뭔가 비법이 있나 보군.
현실이 된 미궁에 존재하는 컨텐츠는 그 수를 셀 수가 없는 영역에 이르렀다.
게이머고 나발이고 나라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특히 전투가 아닌 부분은 말이다.
잠시 후에 꼬맹이가 얼굴이 발그레 해져서 잠든 것을 보면 요정의 피가 맞긴 한 모양이다.
"애한테 몸에 나쁜 걸 먹여도 되는 걸까요?"
"뭐 술처럼 성장을 저해하는 것도 아니니까."
"으으음. 평생 어린 모습이어야 하다니."
"얘도 다른 종족이 될 날이 오겠지."
그럼 평범하게 다시 성장이 시작된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 말이다.
결정 직전의 빛을 젤라틴처럼 만들어 둔 푸딩을 썰며 희우도 식사를 즐기고 있다.
식문화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만큼 발달하게 되어 있다.
아주 다양한 종족을 위해서 말이다.
천사에 대한 대비는 아니고 페어리 계열의 몇몇 종족들을 위한 것인 모양이지만 빛 속성이란 점은 같다.
천사가 즐기는 데도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야?"
"함구해야죠."
"내 말귀를 지나치게 잘 알아듣는 건 좋은데, 그거 말고."
"뭐 은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르메스가 기쁜 듯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한다.
베티를 통해서 조금씩 현금화할 모양이다.
애초부터 베티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니까 이런 일을 맡은 모양이다.
로잘린은 약간 다른 표정으로 웃었다.
"이제 빚은 다 갚았군요."
"빚? 그런 실력으로 빚을 질 정도라니 무슨 일을 한 거야?"
"어딘가에 도전하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하고 그 준비도 결국 돈이죠."
아, 몽환의 숲.
"이런 식으로 저도 정복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이어도 기뻐하겠네요."
도전자를 그만두는 사유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법이다.
기본적으로는 지쳐서겠지만 지치는 이유가 단지 힘들어서만은 아닌 경우도 많다.
금전적인 압박도 그렇다. 특별히 스폰이 붙은 것도 아니라면 파티는 자력으로 무언가를 조달해야 한다.
거기에 마법은 돈이 많이 든다.
아케인 아처 같은 직업도 마법사의 일종이다.
강력한 마법을 지닌 활이 필요하고, 마법을 새긴 화살이 필요하다.
그런 소모적인 물품 없이 낼 수 있는 힘도 충분히 강력하겠으나, 그 이상의 적에게 도전하는 것이라면 결국 답은 없다.
수십 수백 번 실패하고 목숨만 어떻게 건사해 돌아오고 하다 보면 파산할 수도 있다.
도전자가 적은 이유다.
"마이어가 최초로 정복자를 달기 전까지는 아무도 여길 제대로 공략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 않았어요."
"입장을 위한 키 아이템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숲의 난이도는 충분히 높아졌을테니……."
몽환의 숲은 사람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지는 홀수 층이긴 하지만, 원래 이런 홀수 층 자체가 입장 조건이 까다롭다.
정해진 특수한 키 아이템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 키 아이템들은 서버의 아주 외진 곳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아티팩트거나, 아티팩트에 가까운 무언가를 집어넣어야 할 때도 있다.
짝수 층과는 입장 난이도부터가 차별화된다.
그나마 아티팩트의 경우에는 제단에 바치더라도 소모되지는 않으니 다행이지.
몽환의 숲은 그래도 접근성은 높은 축이다.
키 아이템인 [몽환의 거울]이 꽤나 다양한 곳에서 입수할 수 있는 편이기에.
그런만큼 어려워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곳에 입장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대적할 수 없어 도망쳐야했던 보스를 마주한 경험도 넘치도록 있으리라.
로잘린은 후련하다는 듯, 그리고 섭섭하다는 듯 제 머리 위를 만지작거렸다.
칭호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실체는 없다.
"이렇게 제 모험도 끝이 나는군요."
"거기가 끝이었어?"
"이젠 죽으면 끝이기도 하고……."
비교적 최근에 100년이 다한 모양이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죠. 바깥에서 살았던 것처럼 살아보려고 해요. 미궁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제대로 된 은퇴라는 게 저런 걸지도 모르지.
우리 엔젤은 그걸 좀 더 빨리 이룬 것이고.
에르메스가 머리를 긁적인다.
"난 지금도 아무 생각이 없는데."
* * *
블랑쉐는 카드를 받아들었다.
"이것 때문에 내가 마법을 배워야하는 셈이군."
"뭔가 배우는 건 싫어해?"
"교육에 좋은 추억이 있을 리가 있나."
"하기야."
카드를 만지는 모양새가 어딘가 어색하다. 마치 처음 보는 듯 했으니까.
"종족을 바꿔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래. 여동생들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기분이 드니까 그러지 않았지. 난 언제가 돌아갈 생각이었고."
블랑쉐는 그리 말하며 카드를 찢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약간 레벨이 다운되고, 마인드맵의 초기화도 일어난다.
그렇지만 외형의 변화가 가장 크다.
이블은 붉은 피부와 뿔을 가진 악마다.
하지만 짙은 붉은 색이 되는 경우는 남성의 이야기고 여성은 그보다는 조금 옅은, 분홍빛에 가까운 느낌이 된다.
사람으로 치면 언제나 약간 홍조가 올라있는 정도일까.
뿔의 크기도 개인차가 있으나 블랑쉐의 경우에는 그리 크지는 않았다. 모자로 숨길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좌우에 양처럼 휘어 있다.
"어색하군."
희우가 슝하고 날아가 안겼다.
"언니 너무 예뻐요!"
"그래?"
천사와 악마는 공격을 한다면 서로 상극이나 동시에 동급이기에 특별히 만지지 못할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저급한 언데드인 뱀파이어만 슬퍼진다.
몸을 가리기 위해 두르던 망토와 얼굴을 가리던 붕대를 풀어내고 제대로 복장을 갖춘다.
흠, 이건 확실히 지옥에서 올라온 서큐버스? 까불면 죽을 것 같은 여왕님 같은 비주얼이군.
"마력의 흐름이 달라졌지?"
"확실히 충만해졌고,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는 느낌이야."
"드래곤이나 꽃잎 요정과 함께 마법의 정점에 선 종족이니까 당연하지. 스킬셋에 대해 이야기 좀 해보자고. 사수 겸 암살자 포지션으로 일해줘야겠어."
"여기까지 온 이상 해야겠지."
레일건도 다시 수리를 좀 해야 한다. 베티의 공방을 좀 쓸 수 있으려나?
그녀라면 틀림없이 호기심을 보일만한 총기인데. 제조법을 알고 싶어 할게 분명하다. 그 정도면 공방을 쓸 대가로는 충분하겠지.
* * *
베티는 공방에서 하던 작업을 마쳤다.
[무기고]의 마스터 씩이나 되는 이에게 직접적인 제조를 의뢰할 수 있는 자는 적다.
완성을 기다리며 몇날 며칠을 공방에 딸린 휴게실에서 노닥거리고 있다면 더 피곤해지긴 한다.
지금도 술에 취해 늘어져 있다.
"하, 이건 또 언제 다 치워. 야! 일어나 맥!"
"으음? 다했나?"
"진짜 일그림만 아니었으면 짬처리 때리는 건데. 그쪽 부탁이니 매번 이 꼴이지."
"하하, 뭐 어때. 물건은 괜찮게 만들어졌어?"
"원하는 대로 리볼버다. 난 이게 맞나 싶은데, 네가 좋다면 된 거겠지."
"의외로 근접전에선 쓸 만해."
"사수가 근접전을 하는게 이미 글러먹은 상황 아니야?"
"그럴 수도 있긴 하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맥은 새로 제작된 총기를 받아 들었다.
범용탄이 아닌 전용탄을 사용하기에 베티가 만든 것을 넘긴다.
장전은 거의 박자가 없는 동작으로 이루어졌다. 달칵하는 소리만 나자 이미 표적을 겨누고 있다.
베티가 신음했다.
"남의 휴게실에 표적 설치하지 마!"
"뭐 어때."
탕! 탕!
표적에 깔끔한 구멍이 났다. 일그러지지도 찌그러지지도 않고 정말로 예쁜 원.
지나간 탄두는 그 뒤의 벽마저 꿰뚫는다. 바람구멍이 난다.
따로 원소 폭발 같은 마법적 효과는 없었다. 대신 순수한 물리적 충격만큼은 뛰어나다. 개중에서도 관통력이 말이다.
"딱딱한 거 쏠 때 손맛이 좋겠군."
시가를 뽑아 물고 그 끝에 총을 갈겼다. 베티가 비명을 질렀다.
"천장에 구멍 나잖아!"
"이런 관통력이 너무 좋아서 불이 안붙는데."
"제발 나가서 사격해!"
맥은 무시하고 라이터로 불을 당겼다. 베티가 한숨을 푹푹 쉰다.
한 모금 깊이 빨자 잠이 달아난다. 그리고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혹시 발견되었나?"
"뭐가?"
"여기 처음 왔을 때 파티 하나 찾아달라고 했잖나."
기천사 하나와 뱀파이어 소드 마스터 하나.
그리고 마찬가지로 뱀파이어인 은발 적안의 어린 소녀 모습의 마법사 하나.
"얼마 전에 아케인으로 들어가는 물자를 수송하던 열차가 습격 받았잖나. 그걸 방어한 마법사가 있다던데. 어리고, 은발에 뭐 그런 증언이 있더라고."
베티는 잠깐 생각했다.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 일그림의 파티와 무슨 악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그렇게 해주자.
일단 자기 휴게실에 구멍이 난걸 참을 수가 없다.
"글쎄? 그 마법사는 아케인 소속이었다고 알고 있어."
"그런가? 뭐 네 화물이었으니까 잘 알고 있겠지."
맥은 귀찮아서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게이머에 부정적인 것은 일그림이나 그렇다.
동족을 용납할 수 없다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위협이라고 보는 것인지.
솔직히 말해서 맥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파티 리더가 부탁하니 예의상 확인이나 해본 것뿐이다.
지금은 아케인에 쉬고 있을 파티의 마법사나 보러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들었다면 실행해야 한다.
언제나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인다. 그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기차 예매나 해야겠군."
"제발 좀 꺼져."
맥은 베티의 공방에서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