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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24화 (22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24화

왕국 - 남는 시간의 일부

베티의 공방은 길드마스터답게 아주 안전하고도 철옹성 같은 길드 하우스에 있다.

천사의 눈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인 게 수십 층의 마천루다.

그 아래에는 경호원들이 배치되어있으며 무수한 장인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수많은 제작의 현장이 나타나기에 공사판이나 다름이 없지만, 1층 로비만큼은 깔끔하고 그럴싸하다.

원래 따로 마법을 깃들일 필요가 없는 장비를 만드는 것은 민첩직을 따라갈 수 없다.

대장장이들이 왜 민첩하냐고 묻는다면 힘은 기계가 메꿀 수 있으나 정밀함은 기계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의외로 왕국의 기술은 기계적 정밀함은 부족한 면이 있다.

애초에 기계보다 강한 인간도 존재하는 세상이니 별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지.

당연히 베티는 내게 길드하우스의 출입 허가를 내주었다.

모종의 이유로 랭킹을 뚫지 않는 하이랭커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장사꾼이니 아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기도 할 것이고.

하드스록에선 보기 힘든 그럴듯한 승강기도 마련되어 있다.

최상층으로 직행하는 전용 승강기다.

꼭대기에서 내리는데 어떤 남자와 마주쳤다.

실내에서 시가라니 악취미군.

그보다 여긴 저런 것도 만드나? 대륙에서 공수해 온 물건일까?

거칠게 산발된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지저분하다면 지저분하지만 그 나름의 야성미라고 할 만한 게 있었다.

관상학적으로 지 맘대로 사는 놈이다.

사실 랭커라는 놈들은 그런 놈들이 많다.

제 잘난 맛에 사니까 랭킹 유지하려고 발악이지 않겠나. 로잘린의 공방에서 나오는 거니 보나마나 상위 랭커쯤은 되겠지.

저어기 하드스록에서 삼의회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친애하는 마이어씨나, 얌전하고 착해 보이는 로잘린도 이 미궁에 가슴이 불탔던 적이 있으리라.

단지 가슴 속 야망을 얼마나 표출 하냐의 차이에 불과하다.

북부의 왕이나 이 남자는 그걸 참지 않을 뿐인 것이다.

내가 길을 먼저 비켜주었다.

어쩐지 아니꼽게 날 꼬나보던 남자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들어갔다.

실루엣이 잘 드러나지 않는 가죽 코트에, 허벅지와 허리를 가리지 않고 빼곡한 주머니들.

사수인 모양이다.

승강기의 문이 닫히는데 ‘요정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하는 말이 들린다.

"예전엔 이 얼굴 일부러 망가뜨린 적도 있었는데."

"그거 범 미궁적 손실이군. 그래 넌 또 왜 왔나? 잘생긴 거 자랑하러?"

베티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방금의 손님이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뭐, 상관없지.

"이것 좀 수리하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베티는 내가 가져온 블랑쉐의 레일건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한눈에 보아도 그 범상치 않음은 깨달을 수 있으리라.

아니면 길드 마스터 자리 반납해야지.

"미친, 이게 뭐야? 혹시 아티팩트? 이렇게 생긴 건 처음 보는데."

레일건이나 빔 캐논 따위의 소화기 수준을 벗어난 SF적 병기들은 레시피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무기가 아니라 병기에 더 가깝기에 그렇다.

서버의 미래는 얌전히 보존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작살내 버린 43서버의 드워프 왕국 같은 걸 생각하면 말이지.

그게 아니더라도 유배자에게 기술을 공유해 줄 이유도 특별히 없으니 일부 우호도 작업을 잘한 이들을 통해 공유된다.

다른 회차에서 알아오는 경우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풀리는 정보는 한계가 있다.

이런 장비 제작 레시피도 내게나 별 것 아니지 귀중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이다.

"너 게이머냐?"

"대뜸 그걸 묻는 건 실례 아닙니까. 저도 그러면 좋겠네요."

"그래? 그럼 말고."

에르메스도 목숨이 아까울 테니 내가 보여준 것을 표현하되 구체적이진 않게 말했을 것이다.

의뢰주인 베티는 단지 우리 파티가 하이랭커급 역량을 가졌다고만 알고 있을테고.

거기에 거래를 텄으니 그 이상으론 관심을 안 가질 생각 아니었을까?

실제로 그 이상의 인연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이 닿는다면 이런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강한 인연으로 만들 수 있다.

"너희 사수 거야? 이거 내가 정말 수리해도 되는 거야?"

"아 물론이죠. 레시피 분석도 하셔도 됩니다. 주운 거라서 저도 알고 싶네요."

"분석 결과를 듣고 싶다면 따로 결제를 해야 하는데."

"그럼 그건 그만두죠. 모쪼록 수리만 해주시죠."

"흠, 뭔지 모를 불의 거인이 등장했고 그걸 또 전쟁의 화신이 나타나 잡았다더니……."

그렇게만 알려진 모양이군. 우리 이야기는 참으로 축소되어 전달된 모양이다.

"이 정도 물건은 있어야 그게 되지. 그래서 말인데 신이랑은 어떻게 그렇게 친해진 거야?"

"네? 무슨 말이죠?"

"전쟁의 신의 총애를 받는 것 같다고 들었는데. 그 양반 엄청 센 신이잖아. 엄청 오래되고."

"뭐, 튜토리얼에서 조금."

"흠, 뭐 비밀이 많은 건 정상이지. 내일 다시 오도록 해. 이건 하루 종일 뜯어 볼 테니까."

처음부터 만드는 것이라면 모를까 단지 수리라면 혼자서도 잘 해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길드의 장인들이 전부 소집되겠지.

그 과정에서 알아낸 재료와 가공 방식은 추출한 레시피가 되어 [무기고]의 귀중한 지적 자산이 될 테고.

비밀스럽게 소량 생산되어 만들어질 레일건들은 사수들이 선망하는 명품이 될 것이다.

생산 길드는 대체로 그렇게 돌아가는 곳이다.

* * *

결국 떠나게 되었지만 관광 같은 느낌으로 보낼 수 있는 하루의 유예가 주어졌다.

총기 수리부터해서 여러 가지로 준비할 점이 많다는 모양이다.

애초에 갑작스럽게 결정된 아케인 행이었다.

희우는 이 기회에 데이트를 즐기고 싶었다.

미궁의 삶은 팍팍하다. 하루 종일 전투 혹은 부상 등등의 문제로 가득하다.

심지어 이번에 희우는 제 한 몸 불살라 인간, 아니, 천사 포탄이 되어 불의 거신을 향해 돌격했다.

그 와중에 정말로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서 며칠간 운신도 쉽지 않았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게 나았음에도 팔다리가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꽤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재활훈련하자."

"그거까지 해야 해요?"

"힐링 포션을 통한 재생이 지나치게 반복되면 아주 좋지 않아. 몸과 영혼이 점점 괴리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 영혼이란 거 신경계 같은 거라고 받아들이면 될까요?"

"아니, 이 경우에는 진짜로 영혼이다. 너 퇴마사라며. 유령 같은 거 안 때려잡았니?"

"옛날에 말한 거 같은데 우리 동네 유령은 때리면 때려지는 애들이었어요."

"그러냐……."

대충 저런 대화가 오가며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재활 타임이 이어졌다.

신성이 통하지 않게 하는 장갑을 끼고 여기저기 마사지를 받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최근엔 스킨십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일단 종족이 가장 큰 장벽이니.

"너 다리 정말 길어졌구나. 짜리몽땅했는데."

"핫하! 빨리 제 성장을 더 찬양해보세요!"

"허리도 가늘고, 흠. 아닌가 아주 가늘진 않은가?"

"그건 무슨 나쁜 말이죠?"

"등이랑 배에도 근육이 예쁘게 잘 붙어 있네 싶어서. 이러면 비행 중에도 타격에 힘을 넣기 쉽지."

"으아아! 변태! 변태예요! 변태가 여기 있다!"

"실실 쪼개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어쨌건 재활을 위한 노력까지 포함하여 아저씨에게 보상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어졌다.

주변을 살펴보니 블랑쉐뿐이다.

제니는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모양인지 창문 밖을 보며 별의 개수를 세고 있다.

그럴 수 있지. 나도 처음엔 조금 그랬던 거 같아. 미궁은 이상한 곳이니까!

블랑쉐는 미지근한 눈빛으로 대답한다.

"말은 거창하지만 노력했으니까 예뻐해 달라는 뜻 아닌가."

"아니, 언니! 낭만 없게 말을 뭐 그렇게 해요! 데이트!"

블랑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르골은 바빠 보이는데."

"그래도 저를 위해 시간 정도는 낼 수 있지 않을까요?"

"흠."

"그렇다고 해요! 그냥!"

희우는 그리 말하면서 몽환의 숲에서 로잘린이 말했던 이야기도 다시 떠올렸다.

처음에 부부입니다. 엣헴. 같은 식으로 이야기했더니 픽 웃으며 좋겠네 같은 말을 하더라.

그리고는 좀 더 친해지고 나서 이런저런 조언을 하기도 했다.

"사랑을 확인 받고 싶은 것은 모든 여자의 소망이에요. 옆에서 봐도 틀림없이 아끼고 있는 건 알겠는데."

"그걸론 부족한가요? 저도 요즘 조금 부족하지 않나 느끼고 있던 참이었어요!"

"그렇다니까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어필을 해봐요. 더 부부다운? 아니지 아직은 커플이죠? 그런 일을 하는 건 중요해요. 요식행위는 결국 마음으로도 이어지는 법이니까."

"음, 헤헤. 사실 부부다운 일은 뭔지 모르겠어요."

"저 마법사도 진짜 딸은 아니죠? 뭐 거기까지는 알아서 하시고……."

막상 그 아저씨가 들으면 기가 차하며 오러 블레이드 딱밤을 때릴 일일 것이다.

‘부부? 프러포즈는 했니?’ 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아직 호칭도 아저씨에서 바꾸지 못하고 있다. 좀 더 당도 높은 게 많은데도.

어쨌건 당시 희우는 로잘린에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자녀 계획은 생각해 본 바 없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꼬맹이가 섭섭할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제 딸이에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가끔은 느긋하게 함께 지내는 것 이상도 필요하죠."

"격렬하기는 지금도 아주 격렬한데요?"

"그거 말고요. 알콩달콩하고 꽁냥꽁냥한 그런 거 있잖아요. 이런…… 안개 낀 칙칙한 숲에서 하는 거 말고요."

"과연!"

"시티즌은 좋은 도시랍니다. 어느 회차에도 이런 곳은 잘 없을 거예요."

치안이 막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이었다.

왕국에 치안이 좋은 곳은 아케인 외에는 없다고 들었다.

어쨌건 이곳은 쾌락과 향락의 도시.

하드스록은 비교적 여유가 적은 곳이었으나 시티즌은 규모도 크고 여러모로 발전한 부분도 많다.

백화점이 버젓이 영업을 할 정도니까.

물론 뭘 파는지를 따져보면 결국 지극히 미궁스러운 결말을 맞이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건 시티즌이 하드스록보다는 고급스럽다.

그리고 듣기로는 아케인은 상당히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의 나라인 모양이다. 거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로잘린은 베티의 호텔에서 식사한 후,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하루 정도는 럭셔리하게 즐겨도 좋지 않아요?"

"럭셔리!"

"후후후. 재밌게 놀다가요."

럭셔리.

어쩐지 가슴 깊이 울리는 단어다.

그래서 희우는 검을 들고 나섰다.

때맞춰 아저씨가 호텔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가장 등급이 높은 스위트룸인지라 거실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달려들었다.

목옆에 단검이 팍 하고 꽂힌다.

"뭐야?"

이제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반문하는 모습을 본다.

너무 좋다. 새삼 다시 볼 때 마다도 설렌다. 가끔은 꿈같다.

그 몽실몽실한 꿈을 담아 말했다.

"데이트 신청이요!"

"아……. 그래……."

* * *

꼬맹이가 밝아진 건 좋지만 가끔 보면 누구를 닮아 가는지 보인다.

활기차고 저돌적이다. 그러면서 묘하게 순수해서 가끔 대하기가 난해하다.

희우를 쏙 빼닮아가고 있다.

텅 빈 아이였으니 제일 가까운 사람을 보고 배우는 것이다.

정신 연령은 비슷한 수준인 것 같지만 어쨌건 그런 의미에서는 엄마 역할을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희우는 여전히 어딘가 나사 빠진 구석이 있는 동시에 순수하다.

매사를 대체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아주 바보는 아니다. 가끔은 묘하게 통찰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생각은 많지만 그게 겉으로는 어지간히도 티가 안 나는 타입인가 싶다.

그런데 그래서 가끔 나도 읽기가 힘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게 또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대충 표정과 몸짓, 태도, 그리고 얽힌 이해관계만으로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마음이 읽히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희우는 그 자체로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다.

"그래. 뭘 하고 싶으니?"

"그러게요!"

"쇼핑이라도 할까?"

"그건 아주 좋은 생각 같아요!"

그렇다면 거의 약속된 루트를 이행한다.

미궁스러운 물건만 가득한 이 동네 백화점에도 백화점다운 잡화는 존재한다.

의외로 유배자들의 패션에 대한 수요도 적지는 않다.

그 수요가 예쁜 원피스라거나, 멋들어진 정장이라거나 그런게 아니라서 그렇지.

"숲의 요정 컨셉이네요."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라. 그루터기 요정 스타일인걸?"

"앗, 그러고 보면 그때 그 옷 아직 가지고 있어요."

나도 안다. 몰래 혼자 입어본 모습을 본 적이 있었지. 그때 들키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저건 마법사 같은데요? 꼬맹이가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걔 슬슬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네요. 학교에서도 꼬맹이라고 불리면 이상하잖아요."

척 봐도 가명 그 자체였기에 그대로 쓰고 있었다.

본인도 솔직히 이름에 큰 관심은 없어 보였고.

고깔모자에 로브를 구입하며 궁리해본다. 희우가 본인과 함께 생각하는게 맞지 않냐고 하여 그만두었다.

"옷을 많이 사두고 싶어요!"

"여기 아니면 달리 이렇게 의류 매장이라고 할 만한 곳은 없긴 하지."

대다수의 유배자들은 그런 사치를 부리기 힘들다.

이렇게 제대로 디자인 되고 마감한 옷은 사치재니까.

그보다는 누더기 같아 보이더라도 트롤 가죽을 기워 만든 옷이나 마법 걸린 거적떼기를 선호하겠지.

"잎사귀 요정의 사제복도 나름대로 예뻤는데."

"음, 그거 좋았지. 그런 디자인으로 한 벌 만들어 줘?"

"그것도 가능해요?"

"지금까지는 기능위주로 대충대충 튼튼하게만 만들었지만 예쁘게 못 만드는 건 아니지."

"우후후후."

그 외에도 내의 같은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기에 구입해 두었다.

유배자들은 대충 천으로 감아두는 식으로 많이 하고 다니지만 아무래도 몸에 꼭 맞는 편이 더 좋지.

"자꾸 체형이 변해서 불편했는데 이제 더 안 커지나 봐요."

"더 자라면 전투가 많이 불편해질걸?"

희우가 제 가슴을 꾹꾹 눌러보더니 나를 본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한다.

뭐 딴에는 유혹인가. 가소롭군 애송이.

이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아가씨 주제에 말이지.

그리고는 또 식사. 단걸 굳이 싫어하는 여자는 잘 본적이 없다.

희우도 그렇다.

셋을 시켜 하나는 여신님께 공물로 올리고.

"이렇게만 보니 품목이 좀 이상한 거 빼고는 정말 지구나 다름없어 보여요."

"특히나 이 도시는 그렇지. 민첩직들이 유난히 바깥의 향수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그걸 구현할 기술이 있어서인가요?"

"그렇다기 보단 그런 쪽 종사자였던 사람들이 사수나 궁수를 하는 경우가 많거든."

유배자로서의 전투 클래스 적성과 지구에서 가졌던 직업 생각보다 밀접하다.

"아저씨는 뭐 했어요?"

"나는, 뭐 그냥 회사 다녔지."

"사무직?"

"그래. 부업으론 유튜브 했는데 쏠쏠했어."

희우가 후후하고 웃었다.

"저희 집은 엄청 부자에요."

"아니, 뭐, 그렇겠지."

"데릴사위 어때요?"

"받아준다면야 기꺼이."

정씨 가문이 어마어마한 부자가 아니었던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나쁠 거 하나도 없다. 미궁을 클리어한 후에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걸리는 점은 많지만 그냥 그렇게, 미래 이야기나 희망찬 이야기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급기야 희우의 요망으로 도시락을 사서 피크닉도 나가기로 했다.

어쨌든 시티즌은 숲 사이에 불쑥 솟아나 있는 도시다.

근교로 나가자면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다.

굳이 비행하며 적당한 언덕으로 올라간다.

도시도, 자연도, 적당히 보이는 언덕이다.

"무릎 베게!"

"마력으로 버티면 가능하긴 하지."

"오래 안 할게요!"

희우가 털썩 드러눕는다. 거 참 호쾌한 것 봐라.

아무래도 얘가 천사로서의 신성력을 억제하는 것보다는 내가 마력을 조금 소비하는 편이 낫다.

내 무릎에 드러누운 천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입가에는 늘 그렇듯 생기발랄한 미소.

"아직도 안 돼요?"

"뭐가?"

"오빠라고 부르는 거요."

"음, 마음의 장벽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그런 게 있어."

"피이."

아저씨는 너무 거리감이 있긴 한가.

순순히 포기하는 모습이 도리어 애처롭다.

다시 생각해 보면 아저씨라는 호칭이 더 위험한 거 같기도 하고.

"그래 불러라."

"오빠!"

"좋네."

"시우 오빠."

"그래. 희우야."

두 번째는 되뇌듯 조용하게 중얼거리듯 발음한다.

낯간지럽군.

"좋아요. 좋아해요. 정말로."

진짜 낯간지럽군.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발그레해진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부끄러움도 많이 타는 바보였지.

그렇게 제 얼굴은 숨겨두고 내 허벅지를 꼬집는다.

대답을 바라는구나.

"그래. 나도 좋아해."

"누구를요?"

"너를."

"이름으로!"

"희우를 좋아해."

"꺄아아아!"

새빨게진 천사는 그대로 발사되었다.

핀 형태의 날개가 사정없이 진동하더니 저 멀리 날아갔다가 돌아온다.

"뻔뻔하게 이런 말을 못하다니 아직 멀었군."

"할 수 있는 아저, 아니, 오빠가 대단한 건데."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림자의 위치가 바뀌고 있다.

"햇빛 들어온다. 피하자."

"[데이워커] 안 따요?"

"버틸 만은 하니까 포인트 낭비야."

고위 뱀파이어는 햇빛에 피해는 입지만 그게 또 아주 치명적이진 않다.

희생이 너무 크다. 평생 뱀파이어로 지낼 것이라면 또 모르지만.

"이제 들어갈까?"

"만족스러워요."

"그렇다니 다행이다."

"오빠는? 오빠는?"

"나도 좋아."

"좋아요. 지금은 그걸로 되었어요."

천사가 배시시 웃는다.

* * *

희우는 블랑쉐에게 말했다.

"그 음. 좀 그런 거 있지 않아요?"

오랜만에 되돌아온 자신의 본모습에 적응 훈련 중이던 악마가 아주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천사를 돌아본다.

"뭐?"

"제가 어필을 엄청나게 많이 해봤는데. 스킨십도 되는 김에 굉장히 노력해 봤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원래 그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구체적인 설명을 다 들은 후에 블랑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르골을 무슨 발정 난 짐승으로 생각하는 거냐. 그게 정상적인 태도다."

"그치만."

"그치만이 아니다. 가서 할 일이나 해라."

희우는 속으로만 혹시 아저, 아니, 오빠는 고자인가? 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섹시한 애인이 있는데 어떻게 한 번도 조짐을 안 보이는 거지?

고자가 맞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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