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28화
왕국 - Lv.98 영재 진학반(2)
아케인의 워 메이지 양성 기관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었다.
기초를 다지기 위한 프로그램도 존재했다.
"이거부터 하자고."
"으음."
미아의 두 번째 등교와 같은 날에 입소하는 기수가 있다. 블랑쉐는 그 과정을 등록했다.
물론 가명에다 외모도 다르다. 악마인 것을 티낼 수도 없다.
밴디지라는 가명만은 그대로였지만.
미아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 교장에 도착한 블랑쉐는 분위기를 확인하고 안심했다.
어딘가 낯익은 느낌.
낯선 사람들이 잔뜩 있다는 점에서는 굉장히 마음이 불편해진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았다.
아케인은 연구자와 탐구자들의 나라지만 모든 기관이 학술기관인 것은 아니다.
워 메이지는 그런 것과의 거리가 멀다.
그들은 마법을 위해 마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써먹기 위해 마법을 익힌다.
진정한 의미의 마법사라기보다는 마법 사용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법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 다룰 뿐인 자들.
그게 바로 워 메이지의 정의다.
아무래도 옆 동네 시티즌에 적을 둔 자들이 많았다.
당연하게도 아케인 아처들은 대부분 워 메이지다. 그들로서는 화살의 화력을 끌어올릴 수단으로서 마법을 다룰 뿐이니까.
비슷한 이유로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찾아온 사수들도 곧잘 보인다.
대개 늑대인간처럼 피지컬적으로 잽싼 종족이 아니라 마법에 강점을 가진 종족들이다.
결국 대부분이 요정이다.
블랑쉐 역시 이블의 종족 특성을 연습하는 중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요정이었다.
아케인에 요정이 있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제일 대중적인 마법 특화 종족이니만큼 인구의 절대다수가 요정이다.
"지금부터 본 교관이 여러분을 지도하겠다. 제 약력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100단계 클리어를 성공한 랭커 출신으로서……."
그리고 당연하게도 순수한 마법사가 아닌 이들은 이론에 빠삭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까지 파고들 재능이 있었다면 이미 마법사의 길을 걷고 있었으리라.
단지 종족 보정에 의해 마법을 구사하는 요령만을 익히려고 온 자들이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몰라도 구사만 가능하면 그만인 법.
"그런 연유로 지금부터 혹독한 훈련이 시작될 예정이다. 어려울 것 같다면 당장 퇴소할 수도 있다. 교육비는 전액 환불된다."
당연히 벌써부터 주눅 드는 이는 없었다. 분위기가 조금 살벌한 정도로 떠날 것 같았으면 여기 입소할 비용도 내지 못했으리라.
블랑쉐는 이 익숙함에 감사했다.
‘오르골’이 언제나 그녀의 교육을 전담했던 것은 아니다.
특수부대 훈련에 위탁교육을 간 적도 많았다.
그래 이건 정말로 반가운 그 냄새.
군대의 향기였다.
"퇴소할 인원이 없다고 판단하고 교육을 시작하겠다!"
대열을 갖춰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고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비싼 돈을 내고 들어온 교육장이며, 랭커였다는 교관의 압박이 대단한 모양인지 다들 순순하게 따른다.
블랑쉐는 이게 뭔지 알고 있다. 군중심리라는 것이다.
옷을 깔 맞춤으로 빼입은 빨간 모자의 조교들이 주변에 붙어 따라오고 있으니 절로 위압될 수밖에.
군 경험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덩치 큰 근육질의 남자 하나였다.
마법을 익힌다기에는 드물게도 전사 같아 보이는 모습이다.
"마력을 제대로 느끼고 통제하기 위한 커리큘럼은 다양하다. 고상한 연구 마법사들은 명상 따위를 한다고 하는데 우린 그럴 시간이 없다!"
척 봐도 몹시 위험해 보이는 구덩이가 있다.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불은 가장 강렬한 원소 중 하나며, 속성으로 마력을 통제하기 위한 최적의 선택이다!"
그렇기는 하겠지.
"단순한 마력방벽을 일으키는 것은 술식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동시에 그 정도 마력을 움직일 수는 있어야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 술식은 그 다음이다!"
마력 감응과 통제, 그리고 장악에 대한 훈련이었다.
마력 방벽은 단순히 몸을 강화하거나 무기에 마력을 살짝 덧씌우는 것과는 또 다르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보다 한 차원 더 나아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블랑쉐는 냉병기에 마력을 입히는 것까지는 숙달된 상태였다.
애초에 대부분의 유배자는 싫어도 그걸 익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니까.
그러나 몸에서 벗어난 곳에 유형의 물리적 힘을 마력으로 행사하는 것은 할 줄 모른다.
"위험은 없다! 최고의 성직자들이 대기 중이다. 훈련생들이 위험에 처한다면 즉시 구조한다. 사망률 0%를 자랑하는 본 프로그램은 결코 훈련생을 위기로 몰아넣지 않는다!"
삼십 여명의 입소자들이 한숨을 내쉰다. 다들 익숙하지만 원하는 종류의 고통은 아닐 것이다.
"숙달된 조교의 시범이 있겠다! 그리고 개인별로 조교가 붙어 요령에 대해 끊임없이 알려줄 것이다! 훈련생들이 늘 하고 있는 무기에 마력을 입히는 행위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해낼 수 있다!"
고통에 대한 훈련이라면 신물 나도록 해보았다. 고통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다.
"전원! 입화!"
불길 속으로 뛰어드니 입화인가? 우습군.
약 십 분의 고통 끝에 블랑쉐는 기초적인 마력장벽의 형성에 성공했다.
본인 스스로도 얼떨떨했다.
"아주 우수하군. 휴식을 허가한다."
정말로 그녀가 겪었던 군대 같지는 않았다. 사고 방지를 위한 군기일까?
특별히 구호를 통일하거나 복명복창은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교관 역시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으나 그뿐이다.
불합리함으로 점철된 실제 군대의 훈련과 다르게 아주 합리적인 진행이다.
몸을 식히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대기하던 마법사와 성직자가 당황한다.
블랑쉐의 몸에 눈에 띄는 화상이 없었다.
"내화 스킬 보유자신가 보군요. 그렇다면 더 편해지죠."
악마라는 고위종족이 단순한 불길에 큰 상처를 입을 리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자자, 감각을 잃지 않도록 되새기며 반복훈련을 하도록. 한번 해보았으면 그 다음은 쉽다."
성공한 인원에게는 한껏 누그러진 태도로 교관이 말한다.
블랑쉐는 몇 번 더 방벽을 만드는 것을 시도했다.
놀라울 정도로 쉽게 방벽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반복할수록 점점 더 익숙해져 간다.
마치 원래부터 마법사였던 것마냥.
옆의 마법사가 조금 이상한 것을 보는 눈이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방벽의 형태나 속성을 조정해 보기 시작했다.
체내의 마력은 아주 많다.
악마는 마법의 종족이기에 태생적으로 높은 마력 수치를 가진다.
* * *
미아도 두 번째 날에는 슬슬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다.
아직 마법사로서 첫걸음도 내딛지 못한, 혹은 처음 걸음을 내딛고 있는 와중인 학생들은 미아의 기대치를 충족할 수 없다.
동시에 인식의 수정이 있었다.
"그 기초가 이 기초와 다른 거구나!"
또다른 깨달음도 있었다.
"나…… 사실 굉장한 건가?"
교사가 그 깨달음을 부추겼다.
칭찬을 아끼지 않다 못해 가끔은 당혹스러워하는 그 모습에 미아는 점점 더 현실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아예 따로 과외를 하는 느낌이 되었으나 이미 더 가르칠 게 없어졌다.
"어, 음. 그래요. 리틀 양은 이제 충분히……. 음. 연구 과제를 골라볼까요?"
입시에 중요한 부분이다. 아케인에는 여러 마탑이 있고, 그 마탑에도 수많은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들이 있다.
교수직을 하려면 적어도 마스터.
그런 마스터들의 눈에 들 만한 연구과제를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탑의 대학생이 될 수 없었다.
물론 학생 수준에서 정말로 마탑의 마스터가 반할 만한 연구를 할 수는 없다.
보통은 마스터들이 거느린 수많은 대학원생들의 눈에 드는 것이 먼저였다.
적어도 교사의 인식은 그랬다.
그 역시 이 자리에 오기 전에는 공간과 차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논문을 수편 짜낸 끝에 학위를 취득하고 미래의 후배들을 가르치러 영재 진학반의 교사로 영전했다.
"어……. 그럼 전에 하던 걸로 해볼게요."
미아의 그 발언에 교사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뭐 하던 게 있었다고? 스승의 연구를 이어받았나?
아니지 그런 경우라면 이미 학회에서 스카우트해 갔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 확실히 이 아이는 어딘가 연결고리가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는가 하면 자신도 잘 모르겠는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너무 제멋대로였다.
또 이상한 게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며 연구과제 작성을 지켜보았다.
제일 먼저 나온 주제는 환상.
환영마법 계열인가? 실존하는 것을 시뮬레이션해야 하는 아주 귀찮고 어려운 계열이다. 그러면서 묘하게 실용성은 없다.
이 아이를 꽂아 넣은 불의 마탑 그랜드 마스터가 아마 관련된 학회의 장을 맡고 있었지.
생각해 보면 많은 화제가 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몽환의 숲의 클리어.
학장 역시 그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양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쥐고 있던 펜은 멈추었다.
미아가 고개를 든다.
"저기, 이거 어떻게 써야할까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그럼 저와 먼저 이야기를 해보지요. 대화하며 정리하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이 연구 과제 보고서는 마탑 입학을 위해 심사를 받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부분이니까요."
이미 몇 년은 이 자리에 있었다.
천재라고 불릴 만한 학생도, 그 끝에 지금 마탑에서 대단한 성과를 내고 있는 학생도 몇 명은 그의 손을 거쳤다.
마법만 잘하지 다른 부분은 영 뒤떨어진 경우도 종종 보아왔다.
가끔은 유치원 교사인가 하는 착각이 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미숙한 아이들도 마법에 대한 재능만은 진짜다.
그것을 가꾸는 일에 어찌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까.
그리고 이 아이는, 그의 걸작이 될지도 모른다.
"어, 그 부분은 이렇게 쓰면 될 것 같군요. 아니, 하지만 개요만을 작성하는 것이니까……."
"그건 이렇게 하려고 했어요. 적어도 될까요?"
"네. 그건 뭐……."
하지만 대화가 지속될수록 이상해졌다.
이건 연구 과제를 고르는게 아니라 정말로 연구 그 자체인데?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자신만이 이해하고 있는 말을 줄줄 늘어놓는다.
따라가는 것조차 벅차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일단 책을 펴들었다.
교실에 학술서와 논문의 사본은 많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언제나 참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그렇게 되나요? 최신 논문에 따르면……."
"잠깐만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마법진을 좀 그려도 될까요?"
"아, 네 그러기 위한 공간이 있으니 이동을 하도록 하죠."
다른 학생들이 슬그머니 일어섰다.
이동하는 뒤편을 졸졸 따라오기 시작한다.
교사는 말리지 않았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자신도 잘 모르겠으니까.
비어 있는 소형 실습실로 들어갔다.
미아는 슥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무 작아요. 여기서는 다 구현할 수 없어요."
"그런가요? 어느 정도가 필요하죠?"
"계산을 조금 해볼게요."
펜과 종이를 내주었으나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지금 암산하고 있나?
"제일 큰 실습실이 어느 정도 크기죠?"
"실습실은 아니지만 그렇게 쓰이기도 하는 광장들이 4만 평방미터쯤 될 겁니다."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무엇을 하려는 거지? 교사는 이제 너무 큰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대로라면 환상의 구현에 관한 것일 뿐이었다.
디테일과 물리적 실체마저 구현하는 이상적인 환상 마법.
하지만 이렇게 규모가 커질 이유가 있나?
"일단…… 사용 허가를 내고 오지요."
"선생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 그래요. 좀 해주겠어요? 저기 리틀양? 혹시 필요한 게 더 있나요?"
"이런 매질이 좀 더 있으면 좋겠는데요."
"그거 제가 허가 받아서 창고에 넣어둔 게 있어요! 가져올게요!"
다른 학생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비참하게 짓밟힌 어제의 일은 모두 잊은 듯 했다.
그렇다 이게 마법사다. 이것이 마법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들이고.
다들 이겨내었구나. 연구자는 결국 언제고 벽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자신보다 더 큰 재능을 가진 마법사는 항상 존재한다.
거기서 꺾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마법사의 소양이다.
교사는 절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록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 * *
마법 방벽을 가장 늦게 형성한 것은 블랑쉐가 눈여겨보았던 근육질의 남성이었다.
가장 늦으니 안 그래도 눈에 띄던 외모가 더욱 더 눈에 띈다.
블랑쉐는 무의식적으로 전력을 측정하려고 했다.
걸음걸이는 완벽하게 균형 잡혀있다. 손동작이나 근육이 움직이는 방법만 보아도 강건한 전사임이 느껴진다.
체격도 아주 크다.
미궁에서의 싸움도 기본 체급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아무리 스킬을 떡칠하더라도 육신의 질량은 어쩔 도리가 없는 부분이니까.
2미터를 가볍게 넘는 체고와 그 신체에 빈틈없이 들어찬 근육은 요새를 방불케 했다.
블랑쉐가 보아온 그 어떤 전사보다도 피지컬적으로는 우위에 있지 않을까?
자연스레 파티의 천사가 떠오른다.
그 아이가 무시무시한 기초 스탯을 가졌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과연 저 전사를 근력으로 이길 수 있을까?
이번만큼은 좀 무리가 아닐까.
수염이 잔뜩 그슬린 채로 돌아온 전사가 주변을 살피더니 블랑쉐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보고 있던 블랑쉐가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선다.
전사는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블랑쉐는 문득 떠올렸다. 자칭 프로 학생인 여동생이 속성으로 주입해준 사교성.
그러니까.
통성명부터 시작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음, 그. 그러니까. 나는 밴디지라고 하는데."
그리고 칭찬을 하라고 했지.
"대단한 피지컬이군. 부러워."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벼락치기는 역시 좋지 않다.
블랑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전사는 한참이나 더 침묵하더니 짧게 입을 열었다.
"에길."
"음?"
"대머리 그림의 아들 에길이다."
때마침 교관이 훈련생들을 불러 모았다.
블랑쉐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상대가 통성명에 응했던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