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232화 (23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32화

왕국 - Lv.981 바이킹 전사 에길(1)

왕국에 찾아오는 이들의 출신 성분은 몹시도 다양하다.

랜덤 NPC인, 혹은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믿고 있는 유배자들은 온갖 템플릿과 태그의 랜덤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대부분은 현대 지구와 비슷한 지구계열의 NPC지만 블랑쉐나 막내처럼 연대가 좀 다른 경우도 많다.

그 연대는 미래일 수도 있으나 과거일 수도 있다.

에길 스칼라그림손.

이 사람은 내 지구에서도 실존 인물이었다.

에길의 사가라고 불리는 유명한 서사시의 주인공이며, 전사이자 시인인 바이킹이다.

여러모로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바이킹은 게임 기획자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그래도 재해석의 결과로 사실은 여자였다 같은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그저 시인으로서의 면모보다는 전사로의 면모를 훨씬 강조했다.

그 덕에 에길은 1층부터도 아주 끔찍하게 강력한 전사다.

그 시점의 블랑쉐와도 좋은 승부를 벌일 수 있을 정도라고 하면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게다가 사수이자 암살자인 듀얼 클래스로서 장비발을 잔뜩 받는 우리 블복치와는 다르게 가진 건 한 손 도끼 두 자루가 전부인 상태다.

그 상태로 블랑쉐와 맞설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겠는가.

스텟 괴물 중에서도 상괴물이라는 뜻.

많은 유배자들은 미궁에 와서 적응하는 기간을 가진다.

그러나 에길에게는 그것이 일상이다.

어차피 그가 살아왔던 시대는 이미 야만과 약탈의 시대였다.

거기에 내 지구와는 조금 다르게 정말로 신화적인 괴물들이 실존하던 지구 5쯤 되는 곳이다.

이보다 준비된 유배자도 드물다.

그렇기에 에길은 별문제 없이 튜토리얼을 갈아버리고 왕국에 도달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시인으로서의 면모는 현명함으로 발휘된다.

모나지 않게 적당히 굽히고, 필요에 따라서는 기꺼이 살인이나 전투를 불사하며.

그렇게 완전한 유배자로서 왕국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 지구에서는 아주 포악한 인물이었다는 모양이지만 어쨌건 미궁에서의 에길은 그랬다.

"그의 목표가 발할라라고?"

"잘 모르나?"

"다연장 추진 로켓선의 이름이군."

"신화라는 건 몰라?"

"배우지 않았다."

"그런 시대인가……."

현대 지구 계열 유배자가 가장 흔한 것은 미궁이 아우르는 세계의 중간 지점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전사가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후 도달하는 낙원, 발할라.

전장에서 죽지 않는다면 발할라가 아닌 헬로 가게 된다. 그곳은 지옥에 대응한다.

그 누구보다도 충실한 바이킹인 에길 역시 전장에서 죽어 발할라로 떠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미궁을 헬이라고 여기고 있겠지."

"사후세계…… 이긴 하군. 나도 죽은 후에 눈을 떠보았더니 1층이었다."

"에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용의 목을 베고 최후를 맞이했어. 하지만 눈을 떠보니 전혀 발할라 같지는 않은 곳이었던 거지."

대체로 고정 네임드 NPC들의 최후는 로딩창의 메시지로 묘사된다.

에길은 언제나 용의 목을 베고 쓰러진다.

"그러고 보면 너는 로딩 메시지가 보이지 않나?"

"맵을 넘어갈 때라면 보이는데."

"그거 말고 새로운 회차가 시작될 때 말이야."

"세계가 다시 만들어지는 그 메시지들 말인가? 꽤 이런저런 층에 대한 힌트가 있긴 하던데."

지나고 나면 힌트였구나 싶은 그런 얄팍한 정보긴 하지만 미궁에서는 그것조차 소중한 법이지.

"누군가의 최후에 대해서는 본 적 없어?"

"모르겠다."

"그런가."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

어쨌건 나는 남들과는 다르다는 증거.

가끔 이런 곳에서 찾는 위안이다.

NPC들의 최후가 세계 생성 시의 로딩 메시지에서 보이는 것은 나뿐이었다.

그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언제나 그랬다.

그래봐야 미약한 자기합리화에 불과하지만, 그런 부분만큼은 게임과 그대로니까. 내가 게임으로 접하던 미궁과 똑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어쨌건 에길은 지금도 발할라를 찾아 헤매고 있을 거야. 미궁은 신화가 살아서 날뛰는 곳이니까."

"우리에게 그의 시선을 끌 만한 도구가 있나?"

"있지."

그러며 레바테인을 뽑아 보여준다.

발할라는 북유럽 신화의 신들이 훌륭한 전사들을 데려와 하루 종일 싸우게 하는 공간이다.

전투 끝에 죽어도 날이 밝으면 되살아난다.

그렇게 신들의 황혼, 라그나로크가 찾아올 때까지 더 훌륭한 전사로 거듭나 신들을 위한 군대가 되는 것이다.

그 라그나로크에서 신들을 죽이고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 수르트, 펜리르 따위의 신화적인 존재다.

"이 검이 바로 그 수르트의 검이다."

"신화……. 미신이라곤 하지만 그 시대의 사람에게는 잘 먹히겠군. 레바테인은 내 세계에서는 대함 요격 미사일이었는데."

"그리고 사실 어느 게 진짜인지도 모르는 미궁 같은 세상에서 오히려 그런 신앙은 더욱더 공고해지는 법이지."

각자 자신의 잣대로 미궁을 평가하겠지만, 에길의 잣대에서는 이 미궁에 발할라는 틀림없이 실존하는 것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입장하기 아주 힘든 홀수 층이라서 그렇지.

"물론 제단에 레바테인을 넣어서 발할라로 갈 수는 없어. 그 대신 다른 게 있지."

"묠니르!"

"그건…… 요인 암살용 개인화기 벙커버스터의 이름인데."

회의 중이니만큼 서브 리더로서 같이 듣고 있던 희우가 소리쳤다.

"토르는 아스가르드에 있겠지. 발할라도 아스가르드에 있고."

"이해했다. 미신을 이용해 꼬드기라는 말이군."

"꼭 꼬드긴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어쨌든 에길은 발할라로 가지 못해 헤매고 있는 길 잃은 바이킹이고, 더 큰 위업을 남긴 후에 발할라로 간다면 그에게는 훨씬 영광스러운 일이니까."

"우리 파티의 행보는 틀림없이 위업이 되는 거고요!"

"맞아, 그러니 발할라의 열쇠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야 해. 자연스럽게 말이지."

그래서 블랑쉐는 신화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에길과 대화가 되려면 알고 있어야 할 테니까.

우선은 친분이다.

"대본 써줄까?"

"혼자…… 해보겠다."

결론을 들은 전 SF 첩보원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표정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희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다가 블랑쉐에게 밟혔다.

* * *

레베카는 맥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 든 정이라곤 미운 정뿐이다.

아주 피곤하고 귀찮아서 노골적으로 밀어내더라도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에리나처럼 건드리지도 못할 정도의 위엄을 가져보려고 애썼으나 쉽지 않다.

뭘 해도 무슨 딸이나 여동생을 보듯 흐뭇한 얼굴로 그래그래 오구오구 하는 듯한 그 얼굴에 파이어볼을 냅다 던진 적도 있다.

하지만 아마 그래서 맥이 더욱더 레베카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리라.

리더인 것치고는 비교적 만만한 일그림도 그렇고 레베카도 그렇고 맥의 얼굴만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사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맥의 얼굴을 보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부터 푹 내쉬었지만 뻔뻔한 총잡이는 개의치 않고 자기 할 말만 해대었다.

"그래서 말이야. 세상이 얼굴이 전부가 아니더라도. 난 그렇게 잘생긴 뱀파이어는 처음 봤는데……."

"지금 그 이야기 하려고 날 만나러 온 거야?"

"물론이지. 레베카와 이야기하는 건 항상 즐거워."

"내 얼굴에 따분하다고 적어둔 것 같은데도 그래?"

"후후후. 그러면서도 부르면 꼬박꼬박 나오고 이야기도 다 들어주잖아."

"하아, 난 연구가 있다고. 가뜩이나 상층 공략하는 사이 짬짬이 와서 손대는 건데."

맥이 푸근한 아빠 미소를 지었다.

"정말 열심히 사는걸? 나는 그렇겐 못 살겠어. 술이 내 벗이지."

"그럼 그 벗이랑 놀지 그래."

"하하, 괜찮아. 우리 레베카가 훨씬 소중한걸."

"말이나 못하면."

말은 저렇게 하지만 결국 레베카도 들어준다.

많은 마법사가 그렇듯이 탐구심은 강하되, 사교성은 좋지 못한 레베카에게 맥은 아주 신기한 존재였다.

나쁘게 말하면 대체 왜 저렇게 살지?

좋게 말하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지?

스스로 합리화하자면 다양한 인간군상을 경험하는 것 또한 마법사에게는 중요한 자극이라 여기기에 어울리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했다.

하지만 그렇게 귀중한 시간을 쪼개어 파티 동료의 잡담에 어울려 주던 레베카도 자신을 찾아온 조교수의 반응에는 벌떡 일어섰다.

"몽환의 숲 구현?"

"지금은 이미 끝났습니다만 아케인 전체가 그 화제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그걸 해냈다고? 어떻게?"

몽환의 숲은 레베카의 주요한 연구대상 중 하나였다.

그녀가 마법사로서 아케인에서 진행하고 있는 연구는 유배자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허상인가 실체인가.

죽으면 사라지는 유배자의 영혼은 과연 다음 회차로 가는 것인가, 아니라면 허상이라는 증거인가.

몽환의 숲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그렇다.

유배자의 가짜는 영혼을 가지지 않고 있다.

반면 NPC임이 확실한 존재들은 영혼을 가진 채 나타난다.

마법적으로 아주 의미심장한 암시였다.

그 가짜를 구성하는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구현할 수 있다면…….

많은 유배자들의 오랜 고민이 해소될지도 모르니까.

"빨리, 빨리! 그 학생과 만날 자리를 좀 마련해 줘!"

"알겠습니다!"

"음? 레베카 바빠졌나?"

영문을 모르는 맥이 싱글싱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레베카는 갑자기 영문 모를 분노가 치솟았다.

그리고 그 분노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너 때문에! 엄청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옆에 못 있었잖아!"

마법사의 주먹질이 강할 리는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배자 기준에서나 그렇다.

수천 레벨에 달하는 워 메이지의 앙증맞은 주먹질은 어설픔과는 반대로 일반인 프로 복서에 준하는 속도와 위력을 가지고 있다.

맥은 굳이 피하지 않았고 레베카의 어퍼컷에 잠시 다운되었다.

곧 카페 종업원이 걱정스럽게 맥을 깨웠다. 아르바이트 중인 학생 같아 보이는 요정은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이 날아간 시간은 몇 초 되지 않는 모양이다.

"거참, 손이 매운 아가씨야. 바람맞아 버렸으니 이제 그 친구를 찾아가 볼까?"

열차에서 사귄 새 친구에 대한 흥미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맥은 얼얼한 턱을 쓰다듬으며 카페를 나섰다.

카운터로 갔으나 레베카는 그 와중에도 계산은 하고 갔다.

"꼼꼼하기는."

* * *

"군사 캠프에 더 가깝군요?"

"그렇다."

블랑쉐는 대본 없이 친구 만들기에 도전하기로 했으나 도움마저 거절할 생각은 아니었다.

당연히 제일 먼저 끼어든 것은 희우다.

"마침 저는 경험이 있어요!"

"경험? 왜 있어? 군대 갔어?"

"갈 나이도 아니었거든요! 원래 퇴마사들은 합동훈련에 참가하곤 해요. 큰 규모의 재해면 아무래도 군대의 도움도 필요해지니까요."

그래 뭐, 생각해 보면 저쪽 정씨 가문은 일종의 초인 PMC 같은 거였지.

"그것보단 히어로라고 불러주시죠!"

"뭐 비슷한 거 아냐?"

"어감이 너무 다르잖아요!"

어쨌든 희우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보자.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편 희우가 블랑쉐에게 말했다.

"서로 통성명도 했으면 이제 친해지기 1단계는 끝난 거예요. 게다가 에길 아저씨는 마법에 별로 재능이 없어 보인다고 했잖아요. 어려워 보일 때 가서 도와줘야 해요!"

음, 뭔가 정확히 맞는 말이고 정론이긴 하다.

그런데 희우가 말하니까 어째 러브코미디 같아진다.

러브도 코미디도 없는데 말이지.

블랑쉐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희우의 강의를 메모하고 있다.

나는 어딘가 끼어들 곳을 찾으려 했으나 일단 논리 자체는 완벽해서 도무지 뭐라 할 말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 자연스럽게 다가가서 도움이 되어준 후에 같은 화제의 공유.

비록 전사와 사수지만 어쨌건 블랑쉐는 신화에 정통한 척을 할 필요가 있으며 전사로서의 조예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암살자는 클래스 보정을 떼고 본다면 결국 전사나 다를 게 없으니 기술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도 좋은 대화가 될 것이다.

어쨌든 유배자가 된 그 순간부터 전투의 프로인 두 사람이나 생각 외로 잘 어울리지도 모르겠다.

"계기가 있다면 대련 같은 걸 해보는 것도 좋아요! 전투에서도 서로가 가진 노하우가 다르니까 그런 교류가 또 감정의 교류로 이어지거든요!"

말투는 저런데 왜 이렇게 내용은 또 전문적이야?

정말 위화감이 넘친다.

열변을 토하는 선생님 곁으로 어느 샌가 미아도 다가와서 듣고 있다.

마찬가지로 필기도 하는 중이다.

미아 역시 첫 등교에서 깨달은 바가 많은 모양이다.

구석에 앉아 있던 제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 곁으로 가서 앉았다.

제니가 말했다.

"어렵네요."

"맞아, 참 어렵군."

"저쪽에서 제 검술 좀 봐주시겠어요?"

"그러도록 하자고."

제니도 최근에는 열심인 만큼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다. 언젠가 로건이 본다면 깜짝 놀랄 만큼 말이다.

여러 가지 일로 시간이 흐르고, 저녁이 되었을 때였다.

올빼미가 편지를 다리에 묶고 날아왔다. 아케인 특유의 집배원이다. 패밀리어라고 하는 생물들.

발신자는 불명이었으나 여러 과정을 거치며 그렇게 된 것일 뿐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는 뻔했다.

하드스록의 레미와 약속해 두었던 암호로 적혀 있다.

대강 지금까지 진행된 일의 보고였다.

개중에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약탈당할 뻔한 열차를 지켜줘서 감사하다는 내용.

……아?

그게 우리 46 서버에서 끌어온 자원들을 하드스록이 수출하는 열차였나?

확실히 화물칸이 좀 많았던 것 같긴 한데.

삼의회의 용인과 상부상조하는 협약을 맺은 것은 나였지만 이후는 레미에게 일임했었다.

둘 다 일 처리가 엄청나게 발 빨랐었군.

편지는 아무래도 자원의 출처에 대해서 꼬리가 잡힌 것 같다는 말로 끝맺고 있었다.

슬슬 일그림이 문제도 아니겠군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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