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33화
왕국 - Lv.981 바이킹 전사 에길(2)
가짜 몽환의 숲에서 만났던 과거의 나와는 길게 대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되새길 계기이기도 했다.
원래 내 표면상의 성격은 어느 정도 의도된 유쾌함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딘가 다른 안 좋은 생각에 정신이 팔릴지도 모르니까.
희우를 만나고, 미아를 신경 쓰고, 먼저 행복을 찾아 떠나간 사냥꾼을 보고, 지난 8년간 이미 자신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은 엔젤을 보고.
꽤나 말랑말랑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사는 것도,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 도 좋지 않은가?
좋다.
실제로 좋았다. 여신님도 그리 말했고 아주 좋았다.
그 시점에서 과거의 내가 나에게 제기한 의문은 좋은 충격이 되었다.
실제로 나도 모르는 새 꽤나 느슨해져 있었다.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도, 과거의 내가 나의 달라짐을 느끼고 경고할 정도로 말이다.
의도된 유쾌함을 가장하다가 정말로 유쾌해졌던 모양이다.
이렇게 그냥 하이랭커 파티 하나 정도 꾸려서 그대로 미궁에 눌러앉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실제로 그렇다.
하지만 난 그러려고 이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다.
일할 시간이다.
정말로.
이제 가족 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가장은 일을 해야 하는 법이다.
* * *
일단 맥이 찾아왔다.
그리고 레베카도 찾아왔다. 레베카는 어떻게 수소문하여 미아의 행방을 좇은 모양이었다.
레베카의 연구는 특별히 비밀이 아니었기에, 몽환의 숲을 구현한 미아에게 관심을 크게 가질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랬기에 문전박대했다.
사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로 그리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근신을 핑계로 가정사로 만들어버리니 레베카도 할 말은 없다.
한술 더 떠서 미아가 존경하는 교수와 만나게 된다면 그건 벌이 아니게 된다는 말까지 나오자 레베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저를요?"
"아유, 그럼요.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정말 기쁜 일이군요."
여기까지 했으면 자연히 조금 있다가 만나게 되리라고 여길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레베카는 절실했다.
결과적으로 문전박대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그대로 그 이야기를 맥에게 했다.
숨기는 것도 이상하니까.
"곤란하구만그래."
"레베카는 좀 마이페이스 기질이 있지. 저래도 계속 달려들걸? 아, 그래. 강의 전후에 갑자기 난입할 수도 있어. 조심해. 행동력과 결단력이 아주 넘치는 여성이거든."
"그래? 참고하지."
그리고 맥의 발언을 통해 한 가지 더 알 수 있었다.
"딸이라고 했나? 대단한데? 레베카가 저렇게 필사적이 되는 건 처음 봤어. 아케인 소속이라고 하더니."
한 가지 찰칵 맞춰지는 사고의 퍼즐.
아케인 소속이라고? 학생이면 학생이라고 말하지 저렇게 말하진 않는다.
"우리 딸이 아케인 학생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음? 그랬나. 하하. 뭐 어때."
누군가 둘러댄 것 같은데.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실 하나.
베티에게 물어봤을 가능성.
콕 집어서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으니 그 정도 비밀 유지는 해주었을 것 같다.
그럼 맥이 베티에게 물어본 것일까?
베티 외에는 달리 정보를 가진 사람 자체가 없다. 학장이 그리 말했을 리도 없고.
단어의 뉘앙스는 중요하다. 베티인 모양이다.
맥은 적당히 둘러대고 다른 화제로 넘겼다. 약간 부자연스러울 정도다.
일그림이 뭐라 말은 한 모양이군. 그래도 본인은 그다지 열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고, 그냥 열차 강도 때 활약한 마법사 정도는 수상하다고 여긴 거겠지.
딱, 그렇게 된 거겠군.
이렇게 맥과 대화할 때는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종의 정보원으로서 느슨한 하이랭커만큼 좋은 존재도 없다.
"레베카를 좀 놀려줘야겠어. 그 학생 가족이랑 아는 사이라고 말이야."
"적당히 하지그래."
"마법사들은 너무 어디 콕 처박혀 있단 말이지. 모처럼 휴일에도 일만 하고."
본인이 들으면 민폐라고 생각할 발언이다.
하지만 그게 이 남자의 성격이겠지.
강연 준비를 한다고 하자 맥은 선선히 떠나주었다.
마법의 신이 나타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그 딸이라는 아이가 사고를 쳤다.
아케인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모여들고 있음이 느껴진다.
학장도 행운의 성물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고 연락해 왔다.
그 태평한 요정은 정말로 내 강연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별도로 첨언하고 있었다.
[내 정말 아쉽지만 원한다면 강연을 취소해도 좋네. 그야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지. 만약 그러겠다면 내 책임지겠네.]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꼬리가 잡혔다면 조만간 여기까지 타고 오는 랭커들이 있을 것이다.
개중에서도 기업형으로 굴러가고 있는 랭커 파티들은 철저하게 이득을 추구한다.
하드스록에 남기고 온 전 파티원들마저 위험할 수도 있다.
시선을 이쪽에 모으는 편이 훨씬 낫다.
차라리 거하게 눈에 띄는 것이 옳다.
내 강의는 급하게 잡혔다. 그다지 유명한 경우도 아니고 학장의 억지에 가까운 초청이었기에 중히 여겨지지 않은 덕분이다.
원래는 미아를 위해 아케인에서 한 달 정도는 머물 생각이었다.
강연이 기점이라고 생각하면 시간은 충분하다.
그보다 더 빨리 문제가 생기더라도 전 파티원들에 대한 문제지 현 파티의 문제는 아니다.
좋아, 상황은 여전히 좋다.
과연 내가 안이해질 만큼 편안한 흐름이다.
게다가 그동안 조금 느슨하게 지냈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랭커 무리나 하이랭커가 등장하더라도 대응할 스펙은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애초부터 나는 속성으로 가능한 레벨링보다는 그것을 활용할 기술을 단련시키는데 시간을 많이 써왔다.
그건 결코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날고 기는 유배자들 사이에서도 더 잘 싸울 줄 아는 녀석이 결국은 이긴다.
이제 희우도 미아도 그런 부분에서는 충분하다. 블랑쉐는 원래부터도 전문가다.
단지 아직까지는 스펙이 좀 낮을 뿐이지.
부족한 것은 그저 레벨과 일부 유니크 스킬뿐.
특히나 블랑쉐는 사수기에 총빨이 거의 다다. 종족빨도 잘 받을 테니 공간이동 단 하나만 탑재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
잘하고 있겠지? 누군가가 제대로 습득하고 있나 만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 * *
마법이 이렇게 쉬운 것이던가.
블랑쉐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에길을 보았다.
과연 악마는 마법을 위한 종족이다.
마력을 다루는 것이라면 자신 있다. 그건 전투의 기본이니까. 블랑쉐도 17년 차의 경험을 가진 유배자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그렇다. 술식을 이해하고 구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종족적 보정으로 들어오는 충만한 마법의 재능이 술식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대충…… 이렇게인가."
머리로는 모르겠지만 술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블랑쉐의 손끝에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공간의 균열을 만들기 위한 술식의 가장 앞부분 약간이다.
이것만으로는 마법도 무엇도 아니지만, 제대로 수행되고 있으니 스파크가 튄다.
조교가 훌륭하다며 박수를 쳤다. 다른 훈련생들이 부럽게 블랑쉐를 본다.
이런 곳에서 속성으로 교육하는 공간이동 마법은 좀 더 [스킬]에 가까운 것이다.
응용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단지 정해진 공식을 외우고 그대로 실현하는 것에 가깝다.
공부라기보다는 훈련이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렇게 캠프 같은 것인가. 블랑쉐는 그렇게 납득했다.
"재능이 있군! 휴식을 취해도 좋다!"
반면 고전하는 자들도 많다. 어쩌다보니 요정이 되었고, 단지 그 종족적 특성을 활용하고자 배워보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개중에서도 종족 보정조차 없는 순수한 인간 전사 에길은 특히나 고전하고 있었다.
조교들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다.
거대한 근육질의 바이킹은 이제 겨우 마력 장벽을 형성하는 법을 깨달을락 말락하고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의 문제라면 우리 아케인은 환불을 지원하고 있다. 그편을 더욱 추천한다. 재능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교관의 그 말에도 에길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왜 공간이동 같은 어려운 마법을 익히려고 드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뒤로한 채 블랑쉐가 접근했다.
"그게 아니다. 좀 더 위로."
에길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표정이 없다. 블랑쉐 역시 그렇다. 표정 근육을 제대로 움직이는 것은 자신 없는 일이다.
그러니 무표정한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 그것보단 위로 조금 더 위로 올리는 게 좋다."
에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했다.
블랑쉐가 보기에 이 전사 역시 마력을 다루는 것은 쉬이 해내고 있다.
고정 NPC라고 했던가? 그게 진짜일지 가짜일지는 몰라도 무수한 회차를 사선을 넘나들며 보내왔을 것이다.
마인드맵의 은총은 마력에 대한 이해를 일깨우고 결국 그 사용법에 도달케 한다.
여기까지는 모든 유배자들이 거치는 과정이다.
이제 마력을 단순한 힘이 아닌 가공된 무언가로 처리하는 것이 마법이다.
거기까지 스스로 닿는 유배자는 극히 드물다.
에길은 조금 더 노력했다. 교관이 한숨을 내쉬며 전담했다.
미궁 치고는 놀랍도록 공평하게 돌아간다. 돈을 냈으니 그런 거지만, 그럼에도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과연. 알겠다."
마침내 마력 장벽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마력을 유형화하는 첫걸음이다.
동시에 가장 원시적인 술식이기도 하다.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부분은 본 교관이 생각해 본 바 없었다. 둘 모두 전사로서 조예가 깊은 모양이라 통하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군."
교관은 에길이 구사한 마력 장벽을 보며 오우거가 구사하는 마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본능으로 행해진다. 이해를 동반하지 않으며 술식조차도 아니기에 더 나아가기는 힘들다.
하지만 저 과묵한 전사가 혹여 분노라도 하면 피곤해지니 그냥 떠넘기자.
그렇게 블랑쉐는 남는 시간마다 에길을 봐주게 되었다.
교관의 생각대로 큰 의미는 없었다.
능숙하다 못해 커리큘럼을 앞서나가고 있는 블랑쉐에 비해 에길은 여전히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하는 중이다.
과묵한 전사는 드디어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군."
블랑쉐는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암살자가 회심의 기회를 노리고 날을 꽂아 넣는 것처럼.
바짝 긴장하면서도 부드럽게, 힘을 풀고 말을 건넨다.
블랑쉐에게 낯선 이와의 대화는 살인과도 같다.
그녀가 타인과 해온 교류란 대체로 이런 것이기에.
"어째서 마법을 배우려고 하는 거지?"
"……."
"너는 훌륭한 전사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칭찬을 했다. 좋은 접근이라고 자평한다.
에길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블랑쉐는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실수인가? 정확하게 찌르지 못했는가?
다행스럽게도 에길이 입을 열었다.
"공간인가 뭔가 하는 요술을 알면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게 무엇인지를 바로 묻는 것은 멋없는 화법이다.
블랑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라. 지금 상황에서 알맞은 대꾸를.
칭찬, 그래 칭찬을 곁들여 에둘러 말하자.
"그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게 있다고? 미궁은 힘이 곧 정의인 땅. 어렵지 않을 터인데."
에길의 표정이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그걸로 안 되니까. 이러고 있지 않겠나?"
통한. 실수였던 모양이다.
낭패감에 블랑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표정은 달리 에길에게 블랑쉐가 불쾌해한다고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바이킹 전사는 비교적 신사적이었다.
"궁금하다면 알려주지. 나는 발할라를 찾고 있다. 이 미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아스가르드의 발할라를."
블랑쉐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오르골의 예측이 정확했다. 그딴 이유로 공간 마법을 배우러 오려고 했을 줄은 몰랐지만, 미신이란 그런 거니까 하고 납득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대뜸 내게 방법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민하는 블랑쉐를 빤히 바라보던 에길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웃지 않는군. 보통은 이런 말을 하면 비웃던데. 너는 좋은 녀석이다."
블랑쉐는 어찌 되었건 호감을 샀음에 만족하기로 했다.
복귀한 후에 오르골에게 보고했다.
오르골이 아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 그래……. 잘했어."
그러거나 말거나 블랑쉐는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