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35화
왕국 - Lv.981 바이킹 전사 에길(4)
일을 미뤄두면 대가가 돌아온다.
물론 지금의 경우에는 그리 큰 대가는 아니었다.
단지, 튜토리얼 구간 초기의 그 빡빡함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일주일간 쉬지 않고 리프트를 드나들었다.
뱀파이어도 천사도 지구력의 한계로부터는 상당히 자유롭다.
중요한 것은 레벨링, 대량의 레벨링을 할 수 있는 기반이다.
보스전은 광역기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레벨링은 광역기로 하는 법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영역으로 간다면 무엇이건 결국 광역기가 된다.
희우는 그 격렬하고도 쉴틈 없는 사냥의 나날을 단 한 줄로 자평했다.
"재밌었어요!"
참으로 감상이 특이한 아이다.
"그게 아니라! 단 둘이라서 좋았다고요!"
그래. 정말로 특이한 아이다.
"아이 참!"
"저는 이제 인원으로 카운트도 안 해주나요."
"앗! 제니를 무시한 건 아니에요!"
근신 중인 미아는 데려가지 않았다. 블랑쉐는 임무가 있었다. 그러니 제니와 희우만 데리고 피로 피를 뒤집어쓰는 생활이었다.
희우가 있으니 난이도는 저절로 올라간다. 충분한 수준의 사냥터를 잡기 위해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어느 정도 이상의 고단계 키 아이템을 갑자기 많이 사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주목을 받기 쉬우니까 좋은 현상이다.
그 와중 나는 블랑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명색이 첩보원이고, 단독 임무를 수없이 수행하던 베테랑이었는데.
대충 알아서 하겠거니 했더니 보여주는 모습은 실로 파멸적이다.
그래서 내 기억을 꼼꼼하게 되짚어 보았다.
그래. 사실이었다.
이전 회차의 블랑쉐는 나 이외의 누군가와 교류한 적이 없었다.
정말로 없었다.
길드 마스터인 내게만 명령을 받았고 그것을 수행했다.
아마 과거의 블랑쉐도 나를 ‘오르골’과 동일시했던 모양이다.
3일 차까지는 보고를 받으며 이거 맞나 하는 의심을 했다.
4일 차에는 그래도 뭔가 좀 방향을 찾아가나 싶어서 일단 두고 보았다.
6일 차부터는 도대체 왜인지는 몰라도 블랑쉐가 정말로 에길의 마음에 든 것 같아서 안심하기는 했다.
정말로 왜인지는 모르겠다.
대체 왜?
에길이 현대인이 아닌 먼 옛날의 사람이어서 그럴까?
어쨌건 블랑쉐는 정말로 에길을 꼬셔서 내 앞으로 데려왔고 그는 레바테인을 보며 경악하고 있다.
"이건……. 진품인가?"
에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일견 어리숙해 보이는 전사의 눈빛에 깃든 지성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에길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그저 조금 옛날 사람일 뿐이지.
트동트 영감님이 그랬듯 총과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모를 뿐이다.
현대인에게는 신화나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그 시대가 그들의 삶이었으니까.
지식과 지혜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에길의 눈이 블랑쉐를 향했다.
놀랍게도 그 눈빛과 동작에는 신뢰가 담겨 있었다.
아니, 정말로 어떻게 한 거지?
그걸 알기엔 내가 일주일간 너무 바빴다. 새로운 전사를 영입하는 것보다는 있는 것을 완성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잘못되면 잘못되는 대로 이후 에길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에길의 시선을 쫓아가니 자연스레 블랑쉐와 시선이 마주친다.
평소처럼 냉랭하게 굳어 있던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서늘한 표정에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 슬쩍 내비쳐진다.
좋아. 인정할 수밖에 없군.
너는 잘했다. 블랑쉐. 정말로 잘 해주었어.
나는 에길에게 말했다.
"진품이다. 위대한 전사 에길이여. 너는 몇 년 차지?"
그럼에도 바이킹은 단순하다. 자신을 칭송하는 말에 약간 굳은 표정이 풀린다.
에길은 신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33년이다."
연차의 노출은 상대에게 정보를 주는 행위이다.
블랑쉐에 대한 신뢰 덕에 여기까지 와보았을 뿐, 마법에 미련을 버리고 아케인을 떠나려던 참이었다고 생각한다.
장비 상태를 살펴본다. 전력을 가늠해 본다. 지금 에길은 충분히 강하다. 본래부터가 타고난 전사.
미궁에서도 왕국에서도 전투를 쉬지 않았겠지.
발할라로 가는 길은 더 험난한 전투에 존재한다고 믿을 테니까.
33년이 진실이라면 왕국에 머문 지 11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거짓말이라고 판단했다.
그랬다면 저 전투광 바이킹이 명성을 떨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미 랭킹에 이름을 올렸겠지.
"뭐, 믿건 말건 그게 중요한건 아니야. 이게 아티팩트라는 건 알겠지?"
"그렇다."
"어떻게 하면 믿어주겠나?"
"……."
에길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다시 블랑쉐를 보았다.
블랑쉐는 여전히 그루터기 요정의 모습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뭘 물어 본거고 뭘 대답한 거지? 왜 눈빛으로 통하고 있냐 너네.
에길이 말했다.
"나는 네가 아주 강력한 전사라고 들었다. 그 사실을 증명해라."
뭐, 역시 이렇게 되는군. 에길은 이럴 경우 강함으로 증명을 요구하는 인물이다.
강한 자는 옳고, 옳은 자는 강하다.
만약 강한 자가 옳지 않았더라도 그보다 약했던 자신의 잘못이다.
그것이 전사다.
* * *
대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살벌한 분위기였다. 블랑쉐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잘 몰랐다. 에길이 자신을 이용하려고 드는 유배자들을 수없이 겪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에길은 블랑쉐에 대한 신뢰를 대가로 단 한 번 이 초대에 응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거대하고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진 바이킹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살기를 뿜어내었다.
실로 광전사라는 단어의 유래가 된 그 모습 그대로다.
블랑쉐는 자신과의 대련이 정말로 기량을 알고자 하는 친선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에길은 짐승이다. 그 무엇보다도 포악하고 강력한 괴물이다.
지금의 저 모습을 보고 누가 그 사람 좋고 과묵한 전사를 떠올릴 텐가.
외모 그대로의 파괴적인 존재가 이곳에 있다.
에길은 다시 한번 블랑쉐를 보았다. 무언가 말하듯이.
블랑쉐는 그것이 오르골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전하는 것임을 몰랐다.
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의 임무는 끝났다.
그 오르골의 앞에 선 이상 저 바이킹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바이킹이 한 손 도끼 두 자루를 들어 올린다.
[광화]가 발동했다.
에길은 광전사였다.
* * *
전사는 증명을 요함에 손대중을 하는 법이 없다. 에길은 정말로 날 죽이려고 드는 중이다.
그의 인생의 목표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자신보다는 강해야 한다는 의미다.
신념이라고 하면 신념이며 긍지라고 하면 긍지다.
에길은 저런 사고방식 때문에 대부분의 유배자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
낡은 사고방식이긴 하다. 대부분이 현대인인 유배자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식이기도 하고.
그리고 많은 게임들이 그렇듯이, 더 동료로 삼기 어려운 상대일수록 더 유능하다.
힘은 곧 속력이다. 땅을 박차자 땅이 터져 나왔다.
그 반작용이 에길의 거구를 앞으로 튕겨낸다.
나는 순간적으로 상대의 레벨을 추정한다.
1000에 근접했다. 어쩌면 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11년은 확실히 뻥이다. 5년 정도겠지.
내 전사로서의 마스터리는 어디까지나 한 손 검.
소드 마스터의 증표 오러 블레이드가 피어오른다.
고레벨 광전사인 에길은 광화를 유지하면서도 이성을 온전히 가질 수 있다.
그의 눈빛이 오러 블레이드를 본다.
날에 닿는다면 반드시 무기가 상할 것 역시 안다.
그가 택한 방법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효과적이었고, 나에게는 그리운 것이었다.
이전에 아주 지겹도록 보았던 전술이다.
거구를 밀어붙인다. 오른손의 도끼로 내 검의 경로를 제한한다. 무기를 벨 것인가 몸을 벨 것인가.
여기서 몸을 베면 죽는다.
막내보다도 더 거대한 체격은 경로가 제한된 한 손 무기로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
시작하자마자 뼈를 주고 목숨을 취하려고 든다.
피지컬로 찍어 누르기. 희우에게 간혹 요구하던 것과 동일한 전법이다.
광전사와, 에길이라는 인물에게 그 무엇보다도 잘 어울리는 전법이기도 하다.
나는 그대로 검을 베어 올렸다. 단분자 커터인 오러 블레이드의 절삭력에 마주친 에길의 도끼가 고스란히 베인다.
그것을 무시하고 광전사는 그대로 내 몸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쾅 하고 밀려난다. 왼손의 도끼가 날아갔다.
던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광폭하다. 미사일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길의 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일그림의 투창만큼 강력하지도 않다.
검을 왼손으로 바꿔 든다.
회전하는 날의 옆면에 손을 대고 마력을 흘리며 힘의 방향을 통제한다.
그대로 한 바퀴 돌며 에길에게 돌려주었다.
광전사는 가슴팍을 움켜쥐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마투사로서의 마력폭발이 그의 가슴팍에 적중한 탓이다. 치명상은 택도 없으나 비틀거리게 만들 정도는 된다.
에길은 그로 인해 생긴 틈 때문에 도끼를 피하지 못했다.
자신이 투척한 힘 그대로 돌려받은 도끼가 가슴에 꽂힌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몸을 틀어 급소를 피했으나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다.
"이제 대답이 되었나?"
솔직히 말하면 못 움직이는 거다.
순간적으로 재생했지만 그럼에도 팔이 엄청 저리구만.
저렇게 투척 무기를 돌려주는 건 심리전 기술이지 실전 기술이 아니다.
너무 집중해야 하고, 마력 가성비도 끔찍하게 나쁘다.
차라리 내가 내걸 투척하는 편이 더 좋다.
그러나 이런 기술을 익혀두는 이유는 보기에 너무 굉장해 보이기 때문이다.
에길은 가슴에 도끼가 박힌 채 눈을 크게 떴다.
"과연……."
그리고 쓰러졌다.
블랑쉐가 깜짝 놀라 달려간다. 그리고 에길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포션을 뿌린다.
무기를 잃어 마스터리 보정이 빠져나가지 않았다면 계속 싸울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역시 내가 알던 에길이군.
* * *
"의심해서 미안하군."
"괜찮다."
에길은 블랑쉐에게 먼저 사과했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멸망의 거신 수르트를 쓰러뜨릴 만한 실력이었다. 난 다시 네게 이길 수 있는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그러시겠지. 안 그래주면 곤란해. 사실 좀 아슬아슬했거든.
아직도 팔이 저리네.
일주일간의 레벨링이 없었다면 더 아슬아슬할 뻔했다.
원래 내 전문은 기만이다. 다양한 클래스 경험으로 쌓은 기술과 알아보기 힘든 잡다한 퍼포먼스는 상대를 쉽게 교란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실제보다 내 전력을 과장하며 미궁에서 살아왔다.
그편이 가장 효율이 좋을 뿐만 아니라, 속이면 잘 속아 넘어가는 이들도 너무나도 많다.
타고난 강자들은 대부분 미궁의 시스템과는 별개로 강자니까 시스템을 잘 이용해 먹는 내가 유리할 수밖에.
"그렇다면 위대한 전사여. 내 감히 묻건대 발할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는가?"
몽환의 숲에서 레바테인을 얻은 이야기 같은건 멋이 없고.
"토르신의 망치를 내 동료가 가지고 있지. 리프트의 작동 방식은 알고 있겠지?"
"……신을 뵐 수 있는가……!"
2미터 40센티는 될 듯한 거한이 벌떡 일어나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은 참으로 장관이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신께 망치를 돌려주러 갈 생각이었다."
"맙소사!"
"하지만, 그전에 그에 걸맞은 명예를 쌓아야하지 않겠나. 전사여."
"과, 과연. 그대는 수르트를 벤 검사다. 나는 아직 그에 미치지는 못한다."
"이 미궁에는 많은 사악한 거인들과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대가 쌓은 위업은 오딘의 궁전에서 노래되리라!"
"오오!"
사실 에길 자체는 내게 구면이다. 나는 이 남자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블랑쉐 이상으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이 남자는 자신이 발할라에 들지 못했음을 자신의 탓으로 여긴다.
더 많은 명예를 쌓지 못했고 더 전사답지 못했다고 여긴다.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다. 그래서 언제나 그는 싸움을 찾아다니고 전사다운 강함에 집착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깨닫는다. 그가 바라던 발할라는 미궁의 발할라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 후의 에길은 미궁에서 해방되기를 소망한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발할라다.
그렇다면 에길은 믿을 수 있다.
돌아갈 이유가 있는 NPC들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내 목표 또한 미궁의 클리어니까.
이 모든 이야기는 이전의 어느 회차에서 내가 섬기던 전쟁의 신이었던 에길이 내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아주 먼 옛날, 내가 아직 1년 차에 불과하던 시절의 이야기.
"나는 그대를 따르겠다."
에길이 다시 자세를 낮춘다.
한때는 신언으로 듣던 그 목소리를 다시 들으며 내가 보내온 세월을 실감한다.
그리고 NPC라는 존재들이 묶여 있는 굴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