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37화
95단계 - Lv.635 B-561 개척 항성계(2)
46서버에서 레벨링을 위한 대량 학살을 벌일 수는 없다.
미래는 가변적인 것이며 기껏 내게 유리하게 고정시켜 둔 역사를 다시 개변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정도 이상의 파괴나 학살 행위는 우리 서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바르바로이는 내게 그런 파괴 행위를 보고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니를 앞세워 통행하는 43서버가 그런 역할로 낙점되어 있다.
이 타이밍에 미래로 진입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허를 찌르는 의미가 가장 크다.
일그림은 우리의 행적을 쫓는 한편 엉망이 되어버린 43서버의 미래에서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것이다.
맥이 털어댄 정보와 직접 만나본 레베카라는 마법사를 보았을 때, 애초부터 이런 외교에 가까운 일은 일그림과 에리나가 전담하리라.
혹은 파티에서 이탈했다는 어느 전사가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전쟁의 신좌에 도전하러 갔다고 하던가.
보기 드문 용맹무쌍한 자로다.
어쨌건 일그림과 에리나는 반드시 지금 이 우주에 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다시 여기 나타나 태연자약하게 경험치를 쓸어 담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게 평범한 하이랭커의 사고다.
* * *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성계야. 인구는 다 합쳐도 30억이 안 되는 곳이지. 적당한 곳 물색하느라 시간은 좀 걸렸지만 나쁘지 않아."
"저한테 맡겨두고 혼자 자꾸 리프트 들락거리더니 이런 이유였군요!"
"그야 뭐, 네 서브 리더로서의 능력을 함양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희우는 내 성분이 부족하니 같은 소리를 하며 김을 푹푹 뿜어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파티는 아직까지 꽤나 빠듯하게 굴러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팀 합은 최소한으로는 맞춰졌다고는 하나 개개인의 피지컬에 의존한 부분이 크다.
수십 년간 함께한 그런 파티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
뭐, 내가 고른 파티원들이니 개인 능력만큼은 잠재력까지 쳐서 최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전부여서는 안 된다.
메인 던전이 스펙만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가능한 곳이었다면 무수히 많은 미궁의 어딘가에서는 클리어하지 않았겠는가.
혹은 어쩌면 누군가 클리어했을지도 모르긴 한다.
클리어가 단지 그 회차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
어쨌든 결국 나는 내 손으로 클리어해야 한다.
"또 그런 방식의 레벨링인가요……."
제니가 흐물흐물한 모습으로 말한다.
반쯤 녹아 있는 요정 같다.
"이제 와서 뭐 부담이라도 되는 건 아닐 거고. 힘드냐?"
"제가 죽으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세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테라포밍이 끝나고 이제 막 개척 초기에 접어든 작은 성계다.
국가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이곳에 제대로 된 군대는 주둔하고 있지 않다.
파티가 아직 맨몸으로 우주전을 벌일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니 고른 곳이다.
찾기는 힘들지 않았다.
조금 미래로 가서 의문의 재해가 일어나 성계 단위로 전멸한 개척성계를 찾으면 된다.
재해의 종류로는 인위적으로 일으키기 쉬운 슈퍼 플레어 정도면 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미래의 나는 충분한 스탯이 확보된다면 바로 그런 식으로 이곳에 자행된 레벨링을 감출 것이다.
우연하고도 불행한 사고였다는 듯이 말이다.
아마도 메인 던전 공략에 나서기 전에 한 번 더 이곳에 들르겠지.
다시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말이다.
미래와 과거의 자신들과 협업하는 것은 중요하다. 시간의 신이 그래서 대신격이니까.
"어, 그러면 미래의 강력한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시간을 잘 이어붙인다면……."
"리프트 속의 짝수 층에서 파티원이 아닌 유배자들을 만나려면 많은 예외상황이 필요해. 우선 서든데스가 없어야 하고, 한 달쯤 머물러야 하지."
게임처럼 생각해 보자.
짝수 층에 들어선 유배자 파티에게는 맵이 주어진다.
그 맵은 한정된 공간이며 그들은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짝수 층에서 다른 파티를 만나려면 맵의 일부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
주어진 맵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는 것은 유배자니까 별수 없다.
하지만 미궁은 그것을 허가하지 않는다. 짝수 층은 온전히 싱글 플레이의 영역이다.
다른 유배자와 만나 멀티플레이를 하는 곳은 홀수 층이다.
짝수 층의 맵은 결코 서로 다른 파티끼리 겹치지 않는다.
함께 입장한 것이 아니라면 짝수 층에서 다른 유배자의 난입을 겪을 일은 없다.
이것은 일종의 보호 시스템이다.
짝수 층을 드나드는 것은 상대적으로 뉴비일 테니까.
"하지만 몇 가지 예외가 있는 것 같은데요."
"작정하고 특정 파티가 서든데스가 없을 때까지 반복 입장한 후 한 지역을 점거하고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봐. 그럼 그 지역은 그 파티가 전멸할 때까지 봉인되잖아?"
"그렇겠네요."
"그래서 한 달쯤 지나면 그 보호가 해제되어서 난입이 가능해지지."
제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상식과도 같은 것이니까 오래 지낸 제니는 당연하게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블랑쉐와 에길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희우가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나만 몰랐어?"
"우리 서브 리더는 정말 초회차가 맞나 보군."
에길이 머리를 긁적인다. 이 바이킹에게도 희우는 의문스러운 존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럼 그때 그 하이랭커들은 어떻게 난입한 거죠? 일그림인가 뭐시긴가."
"심연의 성물이지. 그런 미궁의 기본적인 법칙을 관장하는 것이 대신격들이니까."
그들은 미궁이라는 게임의 룰이다.
그러니 그들의 힘을 빌리면 그 법칙 자체를 어그러뜨릴 수 있다.
"어라? 그거 좀 익숙한 이야기인데."
"너한테 왠지 따라붙은 기능이 행운의 성물과 같은 거야. 원래 소모품인데 넌 소모가 안 되는 모양이고."
"좋은 거죠?"
"엄청 좋은 거지?"
"왜 의문형인가요!? 제가 의문스럽나요?!"
의문스럽긴 하지. 그러니 행운의 신전을 한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거고.
행운의 신은 무언가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대답을 하지 않겠다면 하게 만들어봐야지.
처음에는 희우의 기능이 중요했다.
지금은 기능보다 희우가 더 중요하다.
확실히 해야 하는 부분이다.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건 우리 천사는 또다시 스팀을 뿜고 있다.
장난기 어린 행동에 지금부터 시작될 일에 굳어진 파티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진다.
제니는 여전히 눈이 죽어 있지만 형식상으로나마 미소를 짓는다.
분위기 메이커는 중요하다. 과거에는 내가 저 역할을 자처해 봤는데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 거다.
저런 건 타고나야 한다.
밉상일 수도 있는 짓을 해도 밉상이 아닌, 그런 분위기. 그저 자연스럽게 웃음 짓게 만들 수 있는 행동.
얕보일 만도 한데 그것과는 다르게 신뢰를 얻어내는 태도.
이런 것은 결코 후천적으로 습득할 수 없는 종류의 재주지.
나는 심리상담사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스코트가 될 수는 없다.
가장 체격이 큰 에길이 차원 수납 주머니들이 들어 있는 배낭을 쏟아낸다.
쇠붙이들이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자 빨리 조립해!"
각자 잡다한 물자는 전부 왕국에 두고 왔다. 상당히 중요한 물건들도 있었지만 일단은 별수 없다.
아케인의 그랜드 마스터인 학장이 마련해 준 숙소인데 도둑이 들 리도 없고 뭐 어때.
그렇게 만든 차원 수납 주머니들의 빈 공간에 무엇이 들어갔냐 하면.
"이거 이렇게 끼워 맞추는 게 맞나요?"
"그거 맞아. 아 거기는 좀 아래로 붙여야 해. 얘야 이리 와서 용접하렴."
고블레타리아 연방산 우주선 부품이다.
크기가 크지는 않아도 거기에 들어간 기술은 고블린들의 정수!
바다를 항해하는 배로 따진다면 소형 고속정에 해당하는 사이즈와 성능이다.
미아가 마법적인 불꽃을 손가락 끝에 일으켜 용접을 시작한다.
비드가 훌륭하군. 용비늘 같잖아. 우리 딸내미는 뭐든지 잘하네. 하하.
현 위치는 일단 이 성계의 행성 중 하나다.
현지에서 우주선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직접 공수하는 수밖에 없다.
약 두 시간 만에 완성되었다. 연방 최고의 석학들이 잠도 아껴가며 설계한 휴대형 우주선이다 이 말이야.
새는 곳이 없는지 점검도 끝나고 출발하기 전에.
[종말의 붉은 짐승]
유니크 스킬에 탑재된 유니크 액티브가 발동한다.
오랜만에 풀어내는 검붉은 늑대들이 나타난다. 그것들은 어디론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행성들의 주민들을 향해서겠지.
나는 굳이 그것을 통제하지 않았다.
테라포밍된 지 얼마 안 된 이 행성은 이제 겨우 생태계가 자리 잡아가고 있을 뿐이다.
저 늑대들이 그것을 철저하게 파괴하리라. 다시는 못 쓸 행성이 될 정도로 말이다.
뭐, 그럼에도 마도공학의 은총은 결국 다시 이 행성에 생명을 꽃피울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개개인의 목숨이라는 건 참으로 하잘 것 없다.
우주에서도, 미궁에서도.
* * *
같은 와이드 맵이어도 중세 판타지 월드였던 8층과 우주시대인 이곳의 와이드맵은 그 크기에서 차원이 다르다.
우주 시대에서 와이드 맵 뜬다면 적어도 성계단위다.
"경험치가 들어오기 시작하는군."
희우가 흠칫하더니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태도다. 약간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직접 대면하는 일은 최대한 없도록 설계를 했으니까 뭐.
"거기 인구가 몇이랬죠? 몇 레벨까지 갈까요?"
"한 7억 정도 될 거야. 이 성계의 수도성이니까. 소환수는 경험치 손실이 발생하니까 아마 이번에 1,000 정도는 땡겨지겠지."
"미궁은 경험치가 엄청 짠 거 같아요."
"안 그러면 개나 소나 3천렙 찍고 하이랭커 하고 있을 거잖아."
"그건 좀 많이 끔찍하아아……."
공간이 일그러졌다.
"……아아아네요."
저 이상하게 들리는 발음은 말하는 도중 함선이 워프해서다.
순간적으로 심연에 들어갔다가 다시 짝수 층으로 돌아가는 기술.
얕은 곳은 그리 고레벨 존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어쨌건 메인 던전을 통로로 이용하는 기술이라니 오싹하기 짝이 없다.
워프해 온 곳은 이 성계의 거주 가능 행성 중 가장 작은 곳이다.
"아빠! 준비 다 끝났어요!"
보따리를 잔뜩 챙긴 우리 미아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다.
사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은 참혹한 학살의 현장인데 이 아이는 아무 생각도 없는 마법바보다.
거기다가 어쩐지 스케일이 큰 걸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마법에 반한 순간이 그때 그거여서 그런 모양이다.
미궁의 경험치 시스템은 상당히 합리적으로, 어디까지나 개인화기 수준의 장비여야만 경험치로 산정된다.
플래닛 킬러의 함장이 발사 버튼을 눌러 행성을 쪼개 버렸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한 개인의 힘으로 판정되어 경험치를 들이부어 주지는 않는다.
그게 된다면 군대의 수장이 되는 편이 가장 폭렙이 가능하겠지.
레벨링을 위해서는 그 판정 안쪽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따라서 미아가 준비한 것은 또 다른 대마법이다.
그 에너지원은 고블린들이 잔뜩 준비해 줬다.
바리바리 싸들고 가는 핵융합 마력로는 미아의 외장노심처럼 기능할 것이다.
"조심하고. 실수 하지 말고. 가서 잘하고. 항성풍에 정면으로 노출 안 되게 잘 피해야 해. 그 술식이 제일 중요해. 알겠지?"
"네에!"
미아를 투하한다.
체구가 작아 고블린용 강하 캡슐이 딱 맞았다.
이제 나도 희우에게 이런저런 강화 마법을 걸기 시작한다.
가장 중요한건 불속성 저항이다. 마찰열이 엄청나게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고블린들이 단지 이번 일에만 사용하고 버릴 일회용 장비도 많이 준비해 줬다.
다른 쪽에서는 에길과 제니도 준비하고 있다. 블랑쉐와 함께 갈 것이다.
전사들이 레벨링할 때 좀 어려움이 있긴 하다.
대체로 광역기라고 부를 만한 것은 마법사에게 많기 때문이다.
레벨링이란 건 결국 뭔가를 죽이는 짓이다. 그걸 한 땀 한 땀 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일단 정신이 못 버틴다.
그래서 이들은 테라포밍이 끝난 행성이 아니라 진행 중인 곳으로 보낸다.
그런 곳의 인구는 훨씬 더 밀집되어 있고, 직접 어떻게 하지 않더라도 쉽게 위기에 처할 만큼 취약하다.
"항상 하는 짓이지만, 그래도 기쁘다고는 도저히 못 하겠어."
레벨링의 쾌감은 지금도 전달되고 있다. 붉은 짐승이 엄청나게 날뛰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것을 보면 미궁은 유배자가 타락하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경험치에 굳이 쾌감을 동반시킬 이유가 뭐냐고.
마치 생물이 번식 행위에 쾌감이라는 보상을 줘서 유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워프가 일어나고, 희우도 출발했다. 강하 캡슐은 필요 없다.
기천사는 우주에서 자유비행이 가능하다.
"다음으로 간다."
"전 틀림없이 죽으면 지옥으로 갈 거예요."
제니의 말이었다.
에길과 블랑쉐는 도리어 그 발언을 약간 의아해하는 듯하다.
"전사는 죽으면 발할라로 간다."
"그놈의 발할라."
"제니, 발할라는 실존한다."
"어휴."
제니를 빼고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아서 좋군.
그래도 조금 생각은 해보는 편이 어떤가 싶긴 한데.
이 성계에 유의미한 인구가 존재하는 행성은 넷이다.
모두 다 합치면 약 25억 정도가 된다.
이제 며칠 안에 이 성계 내의 인구는 거의 사라질 것이다.
생명으로 경험치를 짜내는 연금술이다.
합장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위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