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40화
왕국 - Lv.545 강연(1)
일그림과 에리나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그걸 격무라고 부르기는 좀 뭣할지도 모른다. 결국 기반 다지기에다가 좀 더 온건한 형태의 약탈이니까.
근미래 구간의 난쟁이 왕국 수도가 통째로 날아가면서 급격하게 미래가 변했다.
그런다고 기존의 중세부터 이어져온 인연의 끈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중요한 자원 수급구간인 미래의 끈은 모두 사라진다.
근미래가 변함으로써 이어진 미래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었기에 그렇다.
이 일을 저지른 녀석들은 심지어 근미래의 끝자락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
안 그랬다간 시간을 넘어 일그림의 파티가 막아내었을 테니까.
취약구간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방어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대놓고 그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 생각 자체를 못했다.
하이랭커가 소속되었으면 다른 랭커들도 다수 활동하고 있는 43서버의 미래를 그렇게 깽판 친다?
죽겠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놓쳤지."
"그래서 이 고생 중이잖아. 으아아. 죽겠네 정말."
힘을 보여주고, 협정을 맺고, 단순한 상부상조 이상의 신뢰를 만들고 제아무리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곤 해도 이건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B-561 개척 성계는 또 무슨 일이야? 거긴 왜 절단 난 거래?"
에리나가 수집한 자료에 따라 대꾸한다.
"요즘 적극적으로 확장하던 난쟁이 왕국의 영역인데, 항성이 슈퍼 코로나를 터뜨린 모양이야. 갑작스런 통신 두절에 후에 조사하러 갔더니 그런 흔적이 있었다는군."
"난쟁이들은 되는 일이 없군. 애도를 표해야겠어."
"혹시 이것도 그 파티의 짓일까?"
에리나의 의견에 일그림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래,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
하지만 그런 우주적 스케일의 재앙을?
"그런게 가능하다면 마법의 신이겠지. 혹은 [아케인] 파티거나."
"그렇긴 해."
"이 시간선의 난쟁이들이 아주 운이 나쁜 거라고 해두자고."
그보다는 일이다. 결국 그때 그 하늘 유적의 게이머 파티는 놓쳤다. 찝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조용할 모양이었다.
감쪽같이 잠적했으니까.
서버 내에서 추적하는 것보다는 왕국에서 추적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그편도 하드스록이 협조적이지 않단 말이지."
"삼의회가 뭔가 숨기고 있어."
"하지만 그 자식들 뒤에는 [하드스록]이 있잖아."
일그림 파티 역시 하이랭커지만, 그 위가 없진 않은 법.
이 왕국의 패권을 쥐고 있는 네 파티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래, 아직은.
"후우, 용사를 다시 찾아야 하는데."
"그 [용사]라는 유니크 스킬 조건이 뭐였지?"
"제일 중요한 건 NPC 용사와의 깊은 신뢰관계와 인정."
"완전히 무로 돌아갔군."
공들인 탑이었다.
용사가 될 가능성이 있는 무수한 어린아이들을 전란의 시대에서 찾아내고, 어떤 놈이 용사가 될지 모르니까 주의 깊게 추적해야 한다.
하지만 용사가 발생할 만한 전쟁의 시기가 바뀌어 버렸고, 일그림이 공들여 둔 인과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냥 종족 변환하는 게 어때? 남는 카드는 많은데. 그린스킨도 좋고, 그게 아니라면 웨어비스트 계통도 있잖아."
"그렇게 해야 하나. 한다면 웨어베어 정도가 좋겠지만. 천사 한 장 더 못 구하려나."
"나도 운이 좋았던 거니 기약 없이 천사를 기다릴 수는 없지."
제기랄.
일그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간의 종족 유니크 스킬인 [용사].
그가 아는 스킬들 중에선 최고의 전사 계열 유니크 스킬이다.
그걸 위해 꽤 오랜 기간 빌드업 해왔다.
말이 좋아 용사와의 신뢰 어쩌고지, 사실상 스스로를 히어로 유닛으로 역사에 새겨 넣어야 하는 거니까.
꼼수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일그림은 그리 고인물 게이머는 아니었다.
취미로 가끔 하던 게임 속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지.
이제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타임어택 랭킹 1위의 방송을 더 열심히 봐야 했다.
그 인간 정말 꼼수로만 게임을 하는 정신병자였는데. 현실이 된 미궁에서도 아주 쏠쏠하지 않았을까?
구독만 해두고 가끔 궁금한 것만 찾아보는 정도였는데도 그 편린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다.
더 열심히 보았다면. 혹은 그 본인이라면 어땠을까?
"일단 랭킹 관리나 좀 하러 가자고. 휴가를 너무 오래 준 것 같아. 뚫다보면 뭐 혹시 아나. 천사 카드라도 덜렁 나올지."
"그럼 맥과 레베카에게 연락하도록 하지."
"성직자의 나라에서 보자고 해."
에리나는 옅게 웃으며 돌아섰다.
맥과 레베카는 이쪽의 둘이 바쁜 동안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맥은 재미있는 친구를 사귀었다며 헛소리를 보내왔고, 레베카는 새로 생긴 제자를 편지가 마르고 닳도록 칭찬한다.
자신이 차기 마법의 신을 길러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나.
맥은 몰라도 레베카는 잘하고 있다. 왕국에 대한 파티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좋다.
이미 ‘경영’당하고 있는 이 왕국을 뒤엎으려면 뭐든지 해야지.
"수명 걱정도 해야겠는데."
인간으로 계속 지내온 일그림은 이미 꽤 늙었다. 용사가 되지 못한다면 빨리 수명이 긴 종족이 되는 편이 더 낫다.
뭐, 정 안 된다면 신이라도 되어버려야지.
신이 되겠다며 파티를 떠나간 전사는 전쟁의 신좌를 찾았을까?
아직 랭킹에서 이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라도 전쟁의 신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기를.
* * *
제니는 악몽을 꾸었다.
피로 가득 찬 웅덩이에서 헤엄치는 끔찍한 꿈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몸이 잘 말을 듣지 않았으며 아주 배가 고팠다.
근육통과는 달랐다.
제니는 그것이 반복된 부상으로부터의 회복 때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반쯤 기다시피 침대의 난간을 짚고 일어선다.
이 숙소는 충분히 넓다. 손님으로서 지내는 곳이니 흠잡을 곳 없이 훌륭하다.
제니의 개인 방은 조용했고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기억은 살아남았음에 환희하며,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긴장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점심이었다. 아케인에선 시계도 흔하다. 하드스록에서는 나름대로 귀한 물건이었다.
문밖으로 나가려다 거울을 지나쳤다.
굉장한 꼴일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멀끔했다. 도리어 건강해 보인다.
그 놀람에 반응해 고양이 귀가 쫑긋 움직인다.
귀나 꼬리의 털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다.
어라……. 내가 씻은 기억은 없는데. 그럼 누가?
의식이 없는 채로 빨래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어쩐지 오싹해진다.
제니는 고개를 힘껏 흔들고는 비틀비틀 나섰다.
문을 열자 바깥에도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잘 보이는 곳에 쪽지가 붙어있다.
[지금 일어났으면 3일이 지났으니 식사부터 하도록 해.]
미궁의 보정으로 언어는 통하되 문자는 통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바벨탑이란 게 있어서 모든 언어의 통역을 담당한다던가, 실로 신화적인 소문이었다.
어쨌든 영어를 문자로 쓸 수 있는 건 리더뿐이다.
제니는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 주방 겸 거실로 갔다.
숙소 내에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제니 밥 여기 있음]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완전히 읽히고 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쪽지가 붙어 있다.
시키는 대로 냉장고를 열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신선한 야채들을 보았다.
[반드시 다 먹도록.]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하지만 막상 먹다보니 맛있다. 자꾸 들어간다. 뱃속 어디에 공간이 있어 이게 다 들어가나 의문스러울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육식을 하는 그루터기 요정과 달리 잎사귀 요정은 구조적으로 채식이다.
식물과 친구인 그루터기 요정은 친구인 식물을 못 먹고, 잎사귀 요정은 그 반대다.
신체구조의 문제였기에 잎사귀만 뜯었음에도 제니는 충분한 포만감을 느꼈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늘어진다.
그야 말로 나른한 오후의 고양이처럼.
잎사귀 요정이 된 후로는 잠이 많아지고 햇빛을 좋아하게 되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닿는 쪽으로 꿈틀꿈틀 기어가서 몸을 둥글게 만다.
다시 잠이 쏟아진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마인드맵을 불러왔다.
가운데 박혀 있는 제니의 얼굴.
고양이 귀가 달려 있는 자신의 모습에 익숙해진지는 너무 오래되었다.
그 아래의 숫자 셋은 단순 스탯이다.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남은 포인트는…….
[1106]
일단 오싹했다. 꼬리가 바짝 섰다. 꼬리의 털도 바짝 섰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숫자.
기존의 스탯과 더한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잠에 취해서일까 멍해서일까.
셀 수도 없이 많이 죽으며 1층으로 돌아갈 때마다 봤던 자신의 기본 스탯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런 잡담을 할 때 리더가 ‘아, 그거 한국 남자의 군번 같은 거지.’하면서 껄껄대던 게 생각난다.
계산, 계산을 해야…….
역산이 끝났다.
제니의 레벨은 1644다.
펄쩍하고 소파에서 네 발로 뛰어올랐다.
꼬리의 털이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다.
동공도 한계까지 확장되었다.
침을 삼키지도 못해서 벌어진 입으로 주르륵 흐른다.
약 10초간의 경직 끝에 제니는 정신을 차렸고, 일단 마인드맵을 껐다.
다시 몸을 둥글게 만다. 다리 사이로 제 꼬리를 가져와서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아본다.
좋은 냄새.
무의식적으로 꼬리를 핥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멍했다.
다시 한번 마인드맵을 열어본다. 숫자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마인드맵을 끈다.
다시 연다.
다시 끈다.
다시…….
"아바바……."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
뒤늦게 아드레날린이 확하고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환희라고 표현하기도 부족할 만한 무언가.
정신에 내려치는 번갯불.
형용하기조차 힘든 어떤 전류.
제니는 이것에 감전사하기 전에 어떻게든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잠깐 숙소에 들를 일이 있어 대학에서 돌아온 미아가 문을 열었다.
네 발로 마구 달리고 있는 제니가 보였다.
미아는 일단 문을 닫았다.
그리고 눈을 열심히 비볐다.
다시 문을 열고 숙소 안쪽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네발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제니가 보인다.
눈을 가늘게 뜬 미아는 고양이가 기쁠 때는 꼬리가 빳빳하게 서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육안으로 쫓기가 힘들 정도로 빠른 사족보행 우다다를 보여주고 있지만 꼬리가 꼿꼿하게 서 있다는 것은 알겠다.
기쁜 것 같으니 문제는 없는 듯 하다.
"어제 잎사귀 요정의 잠재된 야성 발현이란 논문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흥미가 생겼으면 해결해야 한다. 미아는 문을 닫고 레베카 교수님의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 * *
3일 만에 깨어난 제니가 거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다.
전사의 신체능력으로 우다다를 했다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우린 그랜드 마스터의 손님이기에 파손된 가구는 곧 교체되었다.
제니는 토마토와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푹 떨구고 있다.
왜 그랬는지는 묻지 말도록 하자. 보나마나 마인드맵 열어보고 잠깐 영혼이 외출했겠지.
"이따가 저녁에 마인드맵 방향성 좀 보자고. 어떤 방향의 유니크 스킬이 마음에 드는지 알려주면 설계해 주지."
"유?! 니크?!"
그 말에 축 늘어져 있던 꼬리와 귀가 팟 하고 일어섰다.
보통 잎사귀 요정들은 저런 반응을 잘 제어하고, 제니도 잘해왔다.
하지만 당분간은 감정 제어가 전혀 안 될 모양이다.
블랑쉐가 에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저 둘은 이상하게 죽이 잘 맞는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에길이 대뜸 제니에게 다가가서 덥석 안아 들었다.
제니가 몸부림친다.
그리고 블랑쉐를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뭘 하나 했더니 그대로 헹가래를 친다.
"으와아악! 뭐예요냥?! 어라?! 냥?"
야성이 줄줄 새는군. 고장 났다. 고장 났어.
무사히 의식을 되찾은 걸 축하하는 의미인가? 블랑쉐의 감성은 따라가질 못하겠다.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에길도 말이지.
"좋아, 좋아. 서브 리더 이리 와봐."
"네엡!"
빨리 스킬 조건을 만족하고 본격적인 전투를 대비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벌인 일은 그냥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케인에서는 이미 얼굴을 너무 많이 팔았다.
당장 파티 [아케인]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을 것이며, 내 강연 후에는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이거 따지고 보면, 마법의 신이 잘못한 거 아냐?
그 양반 때문에 예정보다 빨라진 것 같은데?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용서는 하겠다.
좀 물렁해져 있던 내 정신이 번쩍 살아났고, 충분히 제때에 레벨링을 끝냈다.
스킬 확보도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 같다.
당장 [아케인]을 상대하는 건 다시 생각해 볼 문제지만, 일그림 정도는 문제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들을 불러올 준비도 슬슬 해야겠다.
완성이 다가오고 있으니만큼 메인 던전이 어떤 것이 열려 있는지도 다 확인을 해야 하고 말이지.
메인 던전의 종류는 모두 36가지.
그중 랜덤한 4개의 테마가 매 왕국 리셋마다 출현한다.
침공으로 리셋되면 전혀 다른 네 개의 메인 던전을 처음부터 다시 클리어해야 한다.
그거 정말 화난다. 겪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