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45화
왕국 - Lv.2701 일그림 파티(4)
에길에게 미궁은 그가 바라던 발할라는 아니었으나, 그에 못지않은 곳이기는 했다.
삶의 목표로서 삼기는 곤란하지만 당면한 환경은 좋다.
강자들이 많으며 도전할 곳이 많다.
더 큰 위업, 더 큰 힘.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종족이 바뀌는 것.
인간으로서 인간의 적을 상대해 왔던 에길은 그래서 인간을 버리기를 거부했다.
그는 아직도 인간 전사다.
그리고 전투를 사랑하며 싸움을 즐기는 전사다.
파티 리더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잘 알고 있다.
어떤 고민이, 어떤 고뇌가 있는지.
현대인이라는 고리로 엮여 있는 대부분의 유배자들과 달리, 그 어떤 흡사한 곳에서 온 유배자도 발견하지 못했던 에길이었다.
블랑쉐 외에도 이 강력한 전사이자 마법사인 리더에게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파티는 강한 자도 있고, 마음이 맞는 자도 있으며, 조금 미덥지 못하지만 전사로서 성장해 나가는 자도 있다.
욤스비킹 시절이 생각난다. 이런 떠들썩함은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미궁에서 배운 점도 있다.
그야말로 진정한 전사들인 그린스킨들이 곧잘 입에 올리는 말.
전사는 무기로 대화한다.
그러니 지금 상대하고 있는 창잡이와 그는 분명 대화 중이었다.
훌륭한 전사답게 에길은 창과 도끼의 교환에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아주 정직하고 기본적인 창 놀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틈은 없다.
놀랍도록 예리하며 재기발랄한 무기술은 언뜻 굉장해 보이지만 생존율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생각보다 나쁘다.
전장, 그리고 전투는 변수로 가득하며 그 변수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은 정직함이다.
기교가 아닌 힘.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이상으로 욕심내지 않는 절제.
자신의 요령 좋음 따위에 취하지 않은 보기 좋은 무기술이다.
다만, 그 사이사이에 바깥과는 다른 형태의 공격이 섞인다.
무언가 스킬이 발동한다.
미궁의 시스템에 정통해서라기보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니까 안다는 느낌이다.
창이 기묘한 각도로 들어오는 동시에 정상적이지 않은 파괴력이 휘감긴다.
저런 것을 정면으로 받아내면 진다.
미궁에 들어 온 후 자주 당했던 일이다. 무기술에는 익숙하나, 아니, 어쩌면 무기술에 너무 익숙하니 그 사이에 끼어든 이상 현상에 대응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에길은 25년 차 유배자였고 이제는 적응했다.
큰 힘에 저항하지 않는다.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몸을 굴린다.
이 거구로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게 힘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죄다 미궁의 기묘한 힘에 익숙해져서다.
현실에서는 힘이 세다면 움직임도 재빠르다.
미궁은 현실과 이상함이 공존하는 곳.
첫 번째 쾅 하는 소리는 에길이 달음박질치는 것.
두 번째 쾅 하는 소리는 상대의 창이 대지를 내려치는 것.
이상한 각도에 이상한 힘이지만 결국 인간의 몸으로 구현되는 동작이다.
상대 역시 아직 종족이 인간이기에 그 범주는 벗어나지 않는다.
안다면 상대할 수 있다.
에길은 대부분의 경우 잘 몰라서 죽었다.
상대가 창에 빛을 휘감은 채 그 크기를 늘리기 시작했을 때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의 리더가 다 이미 일러준 스킬이다.
어떤 형태로, 어떤 위험을 가하는지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위대한 전사 에길은 지지 않는다.
"흐아아압!"
기합, 고함, 전사의 소리치기는 상징적인 의미이자 힘을 주는 주문이다.
창이 만든 파괴와 흙먼지 사이로 다시 일어나 달려간다.
어렴풋이 보이는 빛의 창에다 대고 외친다.
"좋은 창이다! 더 보여봐라!"
* * *
일그림은 당혹스러웠다.
그래, 뭐 척 봐도 말 같지도 않은 피지컬임은 알고 있었다.
기초 스탯이 대체 얼마나 높을까?
그래서 단순한 근력에서 밀리는 점에 놀라진 않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모조리 읽히고 있다.
처음부터 아티팩트를 소환하여 들고 달려들었다.
롱기누스의 창은 상당히 수수한 효과를 가졌다.
압도적인 재질이다.
아다만타이드를 상대로도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무기를 갉아먹고 갑옷을 꿰뚫는다.
애초부터 미궁에 떨어진 별 볼 일 없던 게이머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안정성, 최대한 안정적이고 생존율이 높은 전법.
필살의 일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더라도 나 역시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쓰러진다면 의미 없다.
차라리 비기는 게 낫다.
그러니 이렇게 버티며 갉아먹고 확실한 순간에만 치명타를 노린다.
길게 보는 싸움이 그의 특기였다.
"어떻게 된 게! 아다만타이드가 얼마나 있는 거야!"
전투 중에 말은 잘하지 않는다.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하지만 비명이 나오는 상황이다.
벌써 깨부순 도끼가 다섯이다.
그런데 저 쌍도끼는 몇 개나 있는 건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다시 꺼낸다.
전부 순도 높은 아다만타이드다. 지금 같은 상황의 왕국에서는 결코 구할 수 없는 수준의 무장이다.
"훌륭하군!"
게다가 [광화]를 쓴 상태에서도 이성이 유지된다는 건 고레벨 광전사니 그렇겠다 싶다만.
뭔데 저렇게 신나해?
"즐겁지 않은가!"
안 즐거우니까 제발 죽어줘!
"그 빛의 창은 아주 신기하군!"
신기해하지 말고 좀 맞아!
그래도 틈은 생겼다. 뒤로 펄쩍 뛰며 거리를 벌린다.
휘두르는 창은 최대 수십 미터까지 뻗어나간다.
그 열선에 닿는 것들은 모조리 이글거리며 녹아내리고 있다.
전사는 필살기에 해당하는 액티브 스킬보다 이런 식의 강화형 액티브가 더 많다.
[광명의 창]은 게임 시절에도 고성능이었던 스킬로 안 그래도 긴 창의 리치를 끔찍하게 늘려주며, 강력한 신성 속성 타격을 추가한다.
같은 전사라도 제대로 맞는다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흐으으읍!"
도끼를 교차해서 내리찍은 창을 받아내었다.
특별한 스킬조차도 아니다.
막대한 깡스탯과 이 공격을 버텨낼 수 있는 재질의 무기로 그걸 그냥 받아낸 것이다.
무슨 대련하듯이 말이다.
크게 휘돌며 찌르기.
반응하며 튕겨낸다. 힘의 방향이 틀어진다.
그러나 그 틀어진 방향 그대로 돌려치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내려찍으면서 무마한다.
단순한 힘에서 밀리는 게 제일 크다.
일그림은 천재가 아니다. 노력으로 쌓아 올린 기술에는 그런 열세를 뒤집을 만큼 대단한 무언가가 없다.
3천 렙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힘으로 진다고? 에리나가 이쪽을 맡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비행이 자유자재인 천사를 상대는 같은 천사가 하는 편이 제일 효율적이다.
그래 효율.
유배자로서 일그림의 삶을 지배해 온 가치. 기본적인 게임을 플레이해 본 적이 있으니 추구할 수 있는 가치.
그렇게 건실하게 파티를 키워왔다. 훌륭한 동료들, 그만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정보들.
그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렇게! 잃을 수는 없다!"
어울리지 않게 전사 같은 고함을 지르며 다시 창을 내지른다.
이 빛의 창은 무게감을 더해주지만, 그것이 하이 랭커 전사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정도는 아니다.
한순간에 수십 회의 찌르기가 들어간다.
죽어라 제발. 죽어라.
하지만 다시 들려오는 바이킹의 외침 소리.
터져 나가서 구멍이 숭숭 난 평야에서 높이 치솟은 근육 괴물의 모습이 보인다.
뛰어올랐군! 대공은……!
몇 가지 힘을 강화하고 타격력을 올리는 버프형 액티브가 가동한다.
[광명의 창]이 대지를 갈아엎으며 올려 쳤다.
바이킹의 높이는 10미터가 넘었으나 그곳을 향하는 올려 치는 창끝은 이미 음속을 넘어섰다.
마찰에 의한 불길이 치솟고 귀가 먹먹해지는 소리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막대한 질량과 열량을 동반한 필살에 가까운 올려 치기였다.
그것이 턱 하고 가로막혔다.
상대도 무언가 스킬을 썼나?
두 무기는 허공에서 길항하다가 멈춰 섰다.
스펙에서 지고 있다. 말도 안 된다. 그는 100위 안에 드는 랭커인데.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난 것이지? 심지어 그때 그 남자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속았나.
왕국을 경영하는 자들이 마침내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제거하려고 드는가.
"이건 좀 힘겹군! 토르와도 같은 일격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저 바이킹도 타격을 입었다.
상처를 회복하는 모습이 보인다.
처음이 아니다. 제대로 갉아먹고 있다.
반면 일그림은 아직 포션 한 번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 우세다.
분명히 우세일 텐데.
왜 우세한 상대를 갉아먹고 있어야 하지?
전황이 너무 답답하다.
다시 자세를 잡고 창을 겨누고, 충돌했을 때.
레베카의 마법이 작렬했다.
막대한 중력과 추가적인 압력이 지상을 찍어 누른다.
몇 가지 약속된 패턴 중 하나다.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파티원들은 필요에 따라 다양한 환경이 조성됨을 알고 있다. 이건 천사를 노린 것이군.
익숙한 일이다. 일그림은 꽉 붙잡힌 상태를 타개할 해결책이라고 여기고, 그대로 방향을 바꿔 돌진했다.
바이킹은 분명 근력은 그보다 강하지만 상황의 변화에 즉시 적응하지 못했다.
걷는 법을 바꿔야 하는데, 그걸 모른다면 체중만으로 바위를 파고드는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
창을 휘두르며 달려든다.
추락하는 두 천사, 더 익숙한 에리나가 달려들어 기천사의 날개부터 잡아 뜯으려고 하는 모습.
그렇다면 일그림은 찌르기, 일격에 절명하면 좋다. 그게 아니더라도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면 문제없다.
이 이상할 정도의 균형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나 기천사는 놀라울 정도의 균형 감각으로 중력 속에서도 중심을 잡는다.
에리나의 공격을 무시하고 일그림의 창을 받아낸다.
이쪽은 근력에서 우위다.
고스란히 밀어낸다.
단검 하나로 받아내기에는 [광명의 창]의 범위가 너무 클 것이다.
찌그러뜨린다!
* * *
희우는 난데없는 상황 변화에 대한 주의를 많이 받았다.
어떤 식으로건 아군 마법사가 잠깐 이탈하는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곧장 적의 마법이 개입한다.
그게 중력의 형태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대응은 연습했다.
몸을 틀고 날개부터 지키며 갑자기 들어오는 창을 받아낸다.
그 창의 옆으로 에리나가 거세게 밀고 들어왔다.
[점멸 단검]을 던져보았다.
중력 덕에 충분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에리나가 받아서 되던진다.
이건 안 되겠군.
한 대 맞을 각오를 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으로 내리찍힌다.
창이 방향을 바꾼다.
희우를 땅에 메다꽂아 버린 에리나가 자리를 비킨다.
거대한 빛의 창이 번쩍였다.
땅 속 깊이 아주 깊이 파고든다. 시야가 암전하고 눈에 불꽃이 튄다.
천사의 내구도로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광역 공격이었다.
한순간에 빈사에 몰렸고, 동시에 패시브가 발동함을 느꼈다.
아주 긴 쿨다운을 대가로 단 한 번,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해주는 패시브.
새로운 유니크 스킬과 함께 중요하게 다룬 스킬이다.
이게 빠지면 오빠한테 자랑을 못 하는데.
심지어 상대는 그것을 예측했다.
확인 사살이 사정없이 내리꽂힌다.
그 순간, 중력이 사라졌다.
상대 마법사가 이탈했나?
생각할 시간은 없다.
힘껏 추진하며 병을 깨끗이 비운다.
회복이 따라오지 못해 너덜너덜한 몸으로 내려치는 창을 쳐올리고.
곧바로 받아내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튼다.
에리나가 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는 포격.
아티팩트에 딸려 있는 액티브 스킬.
분해된 건틀렛의 거대한 포신이 이쪽을 겨눈다.
빛이 모여들고.
아, 잠깐만. 이거 죽었는데.
라고 생각했다.
* * *
나서지 않았다. 미아를 짊어진 제니가 이미 상공에 도착했다.
미아는 제니의 품에 안긴 채 지상을 관측했다.
그렇다면 대응해 줘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희우가 죽는다.
부활 패시브도 달아줬지만 그게 여기서 빠지는 건 정말로 한 번 죽은 것과 큰 차이가 없는 손실이다.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땀이 흐른다.
미아는 제대로 해내었다.
공간이 움직인다. 모든 마력의 흐름을 지켜보는 [원소의 눈]이 가지는 가장 큰 이점은 배움의 편리가 아니다.
발동 속도의 편리다.
술식을 직접 눈으로 보고 짜는 것과, 막연히 감지하며 구현하는 것은 찰나가 목숨을 가르는 전투 상황에서 제일 빛을 발한다.
포격이 왜곡되었다.
이전처럼 단단히 준비하고 적에게 되돌려 줄 시간은 없었으나, 공간을 접어 방향이 조금 틀어짐으로써 희우가 살아났다.
다만, 이러면 아무리 그래도 반쯤은 힘으로 밀어서 발동한 공간왜곡이라 마력 탈진이 올 텐데…….
아니었다.
미아는 [공간 왜곡]을 메모라이즈하면서 왔다.
역시, 내 딸.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전부 계산하고 있었군.
귀가 따갑도록 마법사의 유틸리티를 주입한 보람이 있다.
마법사는 아군을 유리하게 만들며, 비상시에는 구해야 한다.
이건 백 점 만점에 백 점을 줘야겠군.
미아를 안고 착지한 제니가 형체조차 남지 않고 파헤쳐진 평야를 본다.
이젠 황무지다.
눈을 질끈 감더니 검을 들고 일그림과 에리나에게 달려들었다.
희우가 회복할 한 호흡을 더 벌었다. 에길도 그사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물론 제니는 에리나에게 한 대 맞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결정적인 행동이었다.
마법사를 잃은 일그림과 에리아는 천천히 갉아 먹히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들에게 유리한 상황은 나오지 않았다.
이건 개개인의 기량의 문제가 아니다. 파티 조합의 문제다.
결국 일그림이 창을 놓았다.
그는 밸런스 잡힌 만능형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수비적인 전사다.
그러니 더 버틴다면 며칠이고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연명일 뿐이란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미아는 끊임없이 둘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매 순간 치명적일 수 있는 위기가 지나갔다.
레베카와 맥이 돌아올 것이라 믿고 버텼겠으나, 이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나갔다.
나를 본 일그림의 표정이 지독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갑옷처럼.
내가 지금 나온다는 것은, 돌아오지 않는 동료 쪽에 내가 있었다는 뜻으로 느껴졌겠지.
"레베카와 맥은 죽었나……?"
삶을 포기한 하이랭커는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속삭였다.
"네가 하고자하는 일을 알고 있다. 대화해 볼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지."
"대화……?"
분노한건 알겠지만, 한마디 할 필요가 있겠군.
"처음에 다짜고짜 우릴 죽이려고 든 건 너희야."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 이 나쁜 놈아.
물론, 우리가 오해의 소지를 잔뜩 준 것 같긴 하지만.
쌍방 폭행에서 나만 나쁜 놈 되고 싶진 않군 그래.
"그래서, 네 바깥에서의 닉네임은 무엇이었지?"
프로방스의 경우가 이미 있다. 나는 이미 이번 회차가 이상함을 인지하고 있다.
기분이 찝찝해지기 시작하지만 확인해야만 한다.
일그림이 비장하게 대답했다.
"똥망겜다시는하나봐라……."
다행이군. 모르는 닉네임이다.
이 녀석 10자 제한 꽉 채웠네?
일단 손을 내밀었다.
예의상 밝히고.
"난 오르골이다."
"……오르골?"
잠깐만. 왜 안다는 표정이 되는 거야. 제발 그러지 마!
그러나 내 마음속의 외침과 다르게 일그림의 표정은 차례로 여러 가지 감정을 만들어낸다.
처음의 절망에서, 놀람, 의문, 그리고 기억을 되새기는 듯한 아련한 얼굴까지.
내가 선수 쳤다.
"……음.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 동네 타임어택 1위 닉네임이……?"
"……오르골."
"이런 젠장."
일그림이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물어본다.
"당신, 혹시 유튜브 했었나……?"
"이런 젠장!"
"……나도 구독했었다."
"하……. 그래. 구독과 좋아요. 감사합니다."
"좋아요는 눌러본 적 없는 것 같지만……."
하나면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둘이면, 셋도 있다는 뜻인 거 같은데.
불쾌한 가설이 하나 떠오른다.
사실 이미 떠올리고 있던 것이다.
그래.
내가 유배자 고정 NPC인가? 프로방스와 일그림까지 모두 같은 세계관인?
유배자인 고정 NPC의 특징이다.
그 이전 회차까지는 그 어떤 확실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한다. 심어진 기억일 뿐이니까.
그래서 보통 생성된 회차는, 그들의 기억으로 판단하기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상한 회차가 된다.
마치 처음 겪는 듯한 그런 일이 잔뜩 생기고 말이다.
블랑쉐도 그렇다.
그녀의 기억 속 회차에서는 그 누구도 그녀를 고정 NPC라고 알지 못한 채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전혀 모르다가 멘탈이 바스러진다.
그런데 지금 내 과거의 어느 회차와도 다른 회차가 펼쳐지고 있다.
확실하게 다른 회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