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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46화 (24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46화

왕국 - Lv.2701 일그림 파티(5)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가끔 내 스스로도 왜 그렇게까지 두려워 하는가 의아할 때가 있다.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다.

이미 가족과 만났을 사냥꾼은 자신이 NPC이거나 말거나 콧방귀도 뀌지 않을 거다.

희우는 나만 있으면 된다는 모양이다. 언제나 그렇듯 자기 긍정의 화신 같은 아이니까.

하지만 아닌 자들도 있다.

블랑쉐는 자신을 진짜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녀의 동생들, 그녀의 삶, 그녀의 임무.

모든 것이 진짜라고.

에길 역시도 자신이 진짜냐 가짜냐 그 자체보다는 그가 믿어온 세계관이 부정된다는 점을 기피한다.

그는 결국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미궁을 떠나고 싶어 한다.

제니는 이런 일에 관심조차 없다. 진짜면 그게 밥 먹여주고 가짜면 밥그릇 뺏어가기라도 하냐고 되묻겠지.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법은 다르다.

나는 그 의문들이 꽤나 견디기 힘들었다.

이번 회차에서 프로방스를 만나고, 스스로가 제법 약해져 있었나 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혼자 궁리하기엔 무거웠다. 여신님이나 희우가 들어주었다. 때로는 누군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위안을 찾을 수 있다.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미궁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리고 NPC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것은.

이 미궁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탈출해야 할 게임 속 세상.

어차피 모두 거짓.

필요에 따라 진짜로서 대하고 있을 뿐인 가상현실.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이 모형 상자 속에 나를 조립하겠는가.

나는 항상 나를 미궁과 분리해서 생각해 왔다.

헤어질 사람들, 의미 없는 인연, 언제 건 내던질 수 있는 목숨.

모든 것이 클리어를 위한 트라이의 일부였다.

원래는 말이다.

희우를 슬쩍 본다. 방금 죽을 뻔했음에도 내 표정을 살피더니 배시시 웃는다.

유배자들은 기본적으로 남을 의심한다. 그리고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죽음이 끝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유배자는 그 후가 있으니까.

그러니 저도 모르게 감정을 아끼고, 정을 아끼고, 어느샌가 서로 이름조차 교환하지 않는 것이 당연해졌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는 이 미궁은 그렇게 저주를 받았다.

유배자들 역시 똑같은 저주를 받았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랬다.

부활은 저주다. 끝없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많은 부분을 포기하게 한다.

나도 결국 지키고자했던 것의 일부는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은 100년의 기한이 다하면 다시 찾아온다. 그와 함께 잃었던 것도 다시 돌아온다.

그 100년이 끝나가는 지금에야,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지금에야.

나는 미궁을 온전히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이 없다면 이곳은 내 세계다. 나만의 세계다.

혹여 실패하더라도 온전히 이 곳에서 삶을 마치게 될 그런 세계다.

그러니 괜찮다.

불안은 찾아오지 않았다. 괴로움도 없었다. 그냥 그랬다.

자연스럽게,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일그림은 내가 말을 하다 말고 멈춰 서 있자 지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패자는 처분을 기다린다, 그런 태도다.

에리나는 그런 일그림의 모습을 씁쓸하게 보며 서 있다.

이 [게이머]도, 어쩌면 100년이 다하고 나서야 파티를, 어쩌면 가족을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신님은 보고계셨다.

최근에는 고블린들을 굽어 살피시느라 그리 많이 말을 걸어오지 않지만, 이럴 때는 꼭 보고 계신다.

「것 봐라.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는 법이지.」

‘그렇군요. 다 해보았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100년을 꽉 채워본 적은 없었습니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 하하. 너무 성실했던 게 문제겠지. 최근에야 좀 느슨했다만, 정말이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여신님도 영감님도, 하다못해 이젠 죽고 없는 요정 마법사도 그런 소리를 했던 모양이다.

정을 붙이라고.

그렇지 못한다면 삶은 괴로울 뿐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요정 마법사의 말로를 떠올려 본다.

중세 시절에 보았던 그는 그런 곳에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 기나긴 세월 동안 그가 몸 바쳐왔던, 그리고 헌신해 왔던 모든 것이 스러졌던 게 아닐까.

그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싫다고 떠난 양반이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다시 유배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다니.

요정의 수명이 너무 길었던 탓이 아닐까.

불편해서 외면하고 괴로워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 순간, 이전의 사색이 떠오른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외면해 온 서랍장을 열어본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지러운 그 속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느낌.

나는 웃으면서 일그림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럴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은 차분하다.

"너희는 여기서 계속 살아가려고 하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 왕국을 지키려는 거고."

맥이 좀 많이 떠들었지.

핵심은 말하지 않았지만, 워낙 유명한 파티니 알려진 것과 합쳐서 퍼즐을 맞춰보았다. 별로 어렵지 않았다.

왕국의 경영자들은 유배자가 아니게 되었음에도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영원한 삶과 불멸의 권력을 갈구하고 있겠지.

미궁은 어쩌면 인간을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만들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이 파티는 하이랭커씩이나 되었으면서도 참으로 인간적이다.

"레베카와 맥은 살아 있어."

일그림과 에리나 둘 모두의 표정이 아주 밝아졌다. 여전히 영문은 모르겠으나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과거의 나는 죽은 줄 알았던 파티원이 살아 있다고 하면 저런 표정을 지었을까?

짓긴 했겠지.

하지만 진심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니까 만들어낸 표정이 아니었을까.

나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일그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흔들었다.

"잡아야 할 것 같으니 잡긴 하겠는데……. 당신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설명이나 좀 해주지그래. 처음부터 우릴 어떻게 하겠단 생각도 없었던 것 같고……."

그 설명을 안 했군.

"난 미궁을 클리어할 생각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이 왕국을 지켜야 하고, 반대하는 녀석들을 쓸어버려야 하지."

"난……. 아니, 우리는……. 처음부터 당신을 적대할 이유가 없었던 거군."

허탈한 표정.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게 보이는 몸짓.

"그래도 그거 할 수 있는 거 맞나? 우리 전사 하나는 모든 게 망해 버릴 경우를 대비해 신좌를 찾아 떠났다고. 불확실한 보험이지만."

비상시에 동료 하나가 신좌를 차지했다면 보험이 되긴 하겠지.

이쪽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던 모양인지.

"걱정 마. 다 이루어질 테니. 아니, 이미 이루어졌어. 내 손을 잡았잖아?"

"개 같은 소린데 그 낯짝으로 하니 설득력이 생기네."

"나 유튜브도 이런 태도로 촬영한 것 같은데."

"음……. 보고 있으면 게임이 참 쉬워 보이긴 했지. 내가 하면 아니었지만."

일그림이 한숨을 내쉰다. 사실 그에게는 선택지도 없다.

그리고 손해 볼 일도 없다.

"믿어 보지."

* * *

다들 수습해서 우리 숙소로 돌아왔다.

"비겁해! 하지만 굉장해! 내 제자 짱이야!"

레베카가 우는 듯 웃는 듯한 이상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품에 미아를 꽉 끌어안은 상태다.

"그럼, 누구 딸인데."

"너는 싫어."

으르렁대는 강아지 같다.

레베카는 자신과 맥이 그 자리에서 제거당하지 않음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 일그림과 에리나가 우리와 함께 터덜터덜 걸어오자 형용하기 힘든 표정이 되었다.

뭔가 잘못된 걸 본 눈.

굳이 묘사하자면 제 뇌를 꺼내서 세척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아니,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 거야.

어쨌건 희우만큼이나 얼굴근육의 표현력이 풍부하신 우리 레베카 교수님은 사정을 다 듣고 나서는 몹시 분노했다.

하지만 일단 승자인 우리 파티원에게 대놓고 분노할 수는 없으니 나에게 화를 낸다.

"역시! 쓰레기! 나쁜 놈!"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 좋아, 그냥 넘어가지.

맥은 빅맥을 만들어줬더니 만족스러워했다.

"목숨도 건지고, 빅맥도 건지고. 운이 좋군."

미친놈이 맞는 것 같다.

에리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유배자의 이합집산. 그 자체다.

"필요한 게 있다면 일그림을 통해 시켜. 이제 한 편이니까."

나에게 딱 그 말만 했다.

오, 세상에. 찐따가 아닌 블랑쉐 같잖아.

물론 블랑쉐와는 전혀 다른 인상이다.

타오르는 듯한 적발의 치천사는 차갑거나 표정이 없다는 느낌보다는, 과격하다는 느낌을 준다.

원래 격투가는 대부분 성질이 급하다. 무기 휘두를 시간도 아쉬우니 주먹질을 하겠다는 인간들이라.

그 급한 성질에 희우가 휘말렸다.

"따라와."

"네?"

"따라 오라고. 한 판 더 뜨자."

"어?! 어어라라라?"

사실상 일대일에서 판정패한 것이 아주 분한 모양인데…….

결국 전투에 대한 피드백은 저녁에 하기로 했다.

일그림과는 어떤 일을 진행 중이었는지, 어떤 전력을 가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그는 아직도 떨떠름하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전혀 몰랐던 것 같으니까.

전체적으로 심드렁했다.

"으음, 그래. 오르골 나으리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대충 저런 태도다.

갑자기 없던 신뢰가 뚝딱 생기기는 힘들지.

내 구독자였던 것도 피차 100년은 된 이야기고.

그리고 체크해야 할 것은 신앙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맥과 에리나가 결투의 신.

레베카가 마법의 신.

일그림은 신앙이 없었다. [용사]의 조건 중 하나여서 그랬다.

특별히 협조적이지 않거나 적대적일 수 있는 신앙은 없었다.

하긴 그랬다면 일그림 파티가 이런 마음 자체도 못 먹었겠지.

왕국의 근간인 세 파티가 제 마음대로 왕국을 주무르는데 신들은 완전히 배제하고 그럴 수는 없다.

협력자인 신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강연이 코앞이란 말이야."

햄버거를 쥔 맥이 말한다.

"어, 그것도 뭐 계획에 있는 거였어?"

"지금까지 말하고 있었잖아. 왕국의 경영들을 전복시킬 거라고. 대형 어그로를 투척하고 떡밥을 무는 놈들부터 부수러 간다."

맥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음, 뭐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그런 게 아니라?"

"지금까지 조심스러웠는데."

"오우, 그런가?"

일그림도 멍청해졌다.

"아니, 잠깐만. 그거 며칠 이따가 아니었어? 싸운다고? 바로?"

"시비를 걸어온다면 싸우겠지. 그보다는 인식시키는 거야. 내버려 두면 다른 동료가 위험해지거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이미 오랜 기간 저항하려고 노력해 온 파티의 리더로서, 일그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하다는 것은 알겠다. 잠깐 안 본 새 할 수 있었던 스펙업이 아니야. 전법 자체는 원래도 좋았고, 우리가 스파링 상대였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바로 붙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뭐 이길 수 있다는 거지. 나도 그게 좋다고는 안 했다.

"그쪽도 생각이 있다면 두고 보겠지. 특히 마법사인 양반들이니 가만히 두고 볼 거야. 애초에 말이야 [아케인] 멤버의 얼굴을 아는 사람?"

"없지. [하드스록]도, [더 시티즌]도, 그리고 [아케인]도 대놓고 나서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달리 말하면 기습으로 슥삭 하면 끝이기도 해. 그놈들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니까."

우리 [아케인] 선생님들. 흑흑. 하며 레지스탕스가 될 대량의 추종자들은 없단 말이야.

교류 같은 것도 없다. 그저 힘이 세서 위에 있는 거니까.

어차피 필요하다면 밀어버릴 왕국이다.

관리하기 위한 이들은 왕국의 문을 통해 꾸준히 넘어온다.

그들만 자신들을 윗사람이라 인식하고 있다면 되는 것이다.

힘이 다인 세상이다. 개인이 집단을 이기지 못하는 바깥에서나 높으신 분들이 아랫것들 눈치를 보는 것이지.

충분한 힘이 있다면 정치는 필요 없다.

몇 번 상대해 보았으나 왕국을 경영하려고 드는 녀석들은 대부분 그런 이들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경영자라기보다는 폭군이라고 해야 할까.

힘센 미치광이들.

그러지 않고서야 세계정복 같은 걸 실현하려고 들겠나.

하지만 힘센 미치광이들이니 도리어 쉬워진다. 찾아서 죽이면 된다.

소수 정예의 추종자들이 있겠으나 어차피 힘 앞에 굴복한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더라도 왕국의 대부분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미궁이 좀 더 정치가 필요한 세상이었다면 훨씬 복잡해졌을 게 분명하다.

힘이 정의인 세상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이야기를 듣자 일그림은 여전히 미심쩍어 했지만, ‘그래, 뭐. 그 오르골이라면.’ 같은 소리를 하고선 돌아갔다.

일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질 필요는 없다.

이들은 그저 레베카를 만나러 온 것이다.

일단 그런 것으로 해둔다.

그리고 해가 기울어갈 무렵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트동트 영감님은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오크의 수명을 생각하면…….

하지만 노주술사는 그만큼 후련해 보였다.

그동안 왕국 여기저기를 떠돌며 그가 원하던 다른 세상, 어떤 의미로는 그에게 바깥인 세상을 충분히 지켜본 모양이다.

노인이 말했다.

"오랜만이군."

"그러네요."

"와아! 영감님 완전 오랜만!"

블랑쉐는 낯선 오크를 보고선 조용히 구석으로 가서 지켜보고 있다.

경계하는 건가?

에길의 눈은 등에 메인 짐을 향했다. 자루가 삐죽 나와 있다.

묠니르.

바이킹의 눈이 감동과 희열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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