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48화
왕국 - Lv.545 강연(3)
학장의 죽음은 또 하나의 불편함을 불러왔다.
트동트 영감님은 나름대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방랑하는 마법사를 건드리는 자는 드물다.
마법사는 어딜 가나 귀한 인력이며 뒤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종족이 오크일지라도 수염을 기른 로브 입은 노인은 함부로 습격하기 부담스럽다.
혹여 그런 짓을 저지르는 얼치기들이 있다면 뇌신의 망치가 혼내주었을 것이고.
그러니 나는 영감님이 도착한다면 아케인에서 머무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술은 마법의 한 분류지만 그 특징은 크게 다르다.
그린 스킨의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 야성적이며 원시적인 마법이다.
그리고 그린스킨이 되어 주술을 익히려고 하는 유배자는 극히 드물다.
마법의 본질인 유틸리티보다는 딜링에 치중하고 활용성이 낮기에 그 한계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 기법상 서로 상호보완점은 있다.
주술의 대가가 마법의 나라 아케인에 나타난다면 한 자리 차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학생은 없겠지만, 연구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일 테니까.
학장이 죽음으로서 물거품으로 돌아간 계획이다.
물론 영감님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돌려주지. 이거나 받게."
"아, 저는 아직 뱀파이어라서 안 됩니다."
묠니르는 에길이 받아갔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 망치를 관찰했다.
만지지도 않았다. 정말로 경건한 태도로 바라본다. 때때로 어떤 기도 같은 시를 읊기도 했다.
에길은 그렇게 이따금씩 번갯불이 번뜩이는 망치를 하루 종일 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는 망치를 들었다.
인간이며 특별히 악한 속성을 지니지도 않았고, 충분한 근력을 가진 그가 묠니르를 장비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내가 알기로도 에길이 소속된 욤스비킹은 어느 정도 기사수도회 같은 부분이 있었다.
성전기사단 같은 것 있지 않은가. 단지 믿음의 대상이 북구신화일 뿐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중요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 * *
레바테인은 이제 붉은색을 띠고 있지 않았다.
대신 푸르스름한 냉기가 흐른다. 그럼에도 그 불꽃이라는 형태는 유지되었다.
이 마검에 흐르는 불꽃은 열을 내뿜는 것이 아니라 열을 빨아들인다.
의외로 이건 게임 시절에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심연이라는 거대한 [메인 던전]의 깊은 곳에서 간혹 만날 수 있는 심연의 전당에서 보스를 쓰러뜨린 후 얻는 보상이 아티팩트의 속성 변환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에 존재하는 시스템을 비틀어 인위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그런 전당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훨씬 위대한 위업으로 보일 것이다.
신화적인 힘으로 잠겨 있는 아티팩트에 손댄다는 것 자체가 드문 발상이니까.
마법과 미궁의 관련성에 대해 탐구하는 마법사는 많지만, 그 깊은 곳까지 닿는 이는 드물다.
게임적 관점이 필요한 분야라 별수 없다.
사실 이 미궁을 이미 게임으로 접해본 게 아니더라도, 그 감각을 알만한 겜돌이들이 미궁에 끌려오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하여 마지막 담금질을 도왔던 트동트 영감님 역시 감탄했다.
"이건 아주 이질적이군. 존재할 수 없는 원소야."
"냉기의 불 말이죠?"
"그래. 분명 불의 원소인데 실제로 일으키는 현상은 전혀 다르군."
"마법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이죠. 하지만 미궁이 그걸 원하니 일어나고요."
"자네는 미궁에 의지가 있는 것처럼 말하곤 하는군. 정말 그런 게 있나?"
"그것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학장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미궁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은 드문 일이다. 혹여 하더라도 굉장히 간소하다.
학장의 부모였던 1세대 유배자들은 이미 이 왕국에 없었고 그는 자식도 없었다.
임신 기간이 10년이나 되는 요정들은 독신으로 사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단지 고인과 친분이 있었던 이들이 모여 식사 정도나 하는 자리에 불과했다.
장례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니다.
미궁은 많은 허례허식을 간소화시킨다.
무수한 죽음을 뚫고 왕국에 도달한 이들은 점점 그런 것을 벗어던지게 되니까.
에길처럼 확고한 신념을 유지할 수 있는 이들은 적다. 에길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식장에서 그가 학장으로 있던 학회의 다른 마법사들과 다시 만났다.
정확한 사정을 아는 이는 없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들은 안전할 테니까.
학장의 연구자료가 폭발에 소실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아케인]의 멤버라면 그런 요란함 없이 제거하기도 쉬웠을 텐데 말이지.
애초부터 학장이 노려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연구와 관련된 문제일 것 같다.
하지만 합리적 사고를 언제나 가정하는 것 또한 좋지 않은 습관이다. 오래 산 유배자에게는 광기가 스며드는 경우가 많으니까.
세계 경영이 어찌 멀쩡한 사고에서 나올 발상인가?
왕국의 지배세력은 보통 제정신인 자가 드물었다.
학장은 다른 이가 이어받았다.
불의 마탑 그랜드 마스터씩이나 되는 위대한 마법사가 의문스러운 사고사를 당했으나 크게 동요하는 이들은 없었다.
미궁이 그러하고, 왕국이 그러하며, 마법사가 그러하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으며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당신이 구사하던 마법에는 큰 감명을 받았었지요. 전 학장님께서 하던 지원을 거둘 생각은 없습니다. 원한다면 강연 이후에 이 탑에 남으셔도 좋습니다."
그래도 입이 무겁다는 점은 좋다.
학회의 마법사들은 몽환의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어느 곳에서도 말하지 않은 듯 한다.
마법사의 신비란 그런 식으로 유지되기도 하는 법이다.
뭐, 그게 아니라면 내 손에 죽을 걱정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게 미궁이니까.
다만, [아케인]이 몰랐던 사실이 있다.
마법의 신이 내 편이라는 점이다.
아케인의 마법사 대부분은 마법의 신의 신도이며 학장 역시 그랬다.
그리고 마법의 신은 학장의 죽음 당시 자신의 시야가 그곳에 닿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보를 차단당하는 것 또한 정보다.
「대신격의 힘이 간섭했겠군.」
"그게 아니면 신좌의 신도 감시 시스템을 무력화할 수 없으니까요."
마법의 신은 학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신도의 목숨 때문은 아니다. 내 부탁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 친구가 그러던데. [아케인]을 신경 쓸 필요가 있냐고. 그냥 싸워서 이기면 그뿐이지 않냐는 식으로 묻더군. 솔직히 말하지. 나도 그냥 그러면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여신님이나 마법신 양반은 신좌에 앉은 지 너무 오래된 모양입니다. 사람은 쉽게 죽어요."
「네가?」
과대평가는 또 새로운 기분이군. 실제로 충분히 위험한 상태다.
이제 슬슬 총에 맞았다고 죽지는 않는 스펙이지만, 운석에 직통으로 맞으면 죽는다고.
왜 다들 내가 안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 그거야…….」
"반박은 받지 않습니다. 아케인 멤버 중에는 여신님이 아는 그 녀석이 없었죠?"
「그래.」
"성물이 썩어나는 모양인데 정말 이 왕국은 너무 오래된 모양입니다."
「성물은 아주 귀하지만, 작정하고 시간을 들여 파밍한다면 수단은 있는 것이니.」
"해보셨습니까?"
「나 때는 심연 스캐빈저들이 핫한 직업이었어. 온갖 세상과 스테이지들이 무너져 떨어지는 곳 아닌가. 거기서 뭐라도 건져야지. 안 그러면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개척 초기는 다 그런 법이죠."
「넌 이해해 줄 줄 알았다. 개척도 해봤었나?」
"이 미궁에서는 한 번이군요."
「게임에서 많이 해봤단 거군. 알겠다.」
많은 대비를 했다.
언제 습격이 들어올지 모른다.
특히 미아가 고생해 주었다.
나는 특수한 마인드맵 빌드를 탔기에 마법의 지속력에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이 또한 미궁의 보정이니 우회하기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뱀파이어인 미아가 잠시도 쉬지 않고서 넓은 범위를 감시했다.
심연이나 시간의 성물의 교란 역시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안다면 쉽다. 기이한 공백이 감지된다면 거기가 바로 대신격의 권능이 발현한 곳일 테니.
하지만 저쪽이 과연 그렇게나 우리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레베카가 그랬듯이 마법신의 참석은 루머로 판단하기 쉬우리라.
"원한이 있다는 건 몰랐지만 그게 오히려 좋군요."
「몰아냈다던데? 마법신을 감당할 수 없어서 비겁하게 다구리를 쳤다고 들었다.」
"어허, 여신다운 말투."
「이런 제기랄.」
"어허! 프로듀서 말 들으세요."
「비겁한 자들이 올바른 이를 핍박하니 이 어찌 옳은 일이겠느냐.」
"그건 너무 고루한데."
「나 화낸다?!」
* * *
날이 밝았다.
아케인 전역에 화제가 되는 어느 초청강사의 특별 강연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처음부터 화제를 몰고 다니기는 했다. 마법의 신께서 어찌 신언을 내려 참석하겠다는 둥, 직접 강림하실 것이라는 둥.
혹은 강연자가 마법의 신 본인이라는 말도 떠돌았으며, 바깥세상에서부터 아득한 세월 동안 은거하여 마법을 갈고 닦았던 현자가 유배자가 되어 이 왕국에 합류했다는 말도 있었다.
상위 랭커 정도의 경험이 있는 자들은 ‘멀린……?’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혹은 NPC를 떠올리는 이도 있었다.
요정왕이나 샤크마 따위의 그런 서버 내의 존재들.
처음에는 단지 뜬소문으로 치부될 사소한 내용이었으나 본격적으로 격화된 것은, 그 강사의 양녀가 벌인 사고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유명해진 일이다. 그 몽환의 숲이 아케인 한가운데에 강림할 뻔했다.
그것을 이루어낸 것은 불과 진학반에 편입한 어린 마법사였다.
그 마법사가 강사의 수양딸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문의 신빙성이 상당히 상승했다.
유명하고도 또 유명한 하이랭커 파티의 일원, ‘푸른 달의 따님’ 레베카 교수가 칠고초려를 하여 그 아이를 제자로 받아갔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건 소문이 아니었다. 그 소식에 확인하러 갔던 이들이 실제로 목격했으니까.
그 와중 몽환의 숲에서 돌아온 그랜드 마스터가 살해당하는 일도 있었으며 여러모로 평지풍파가 가득한 때였다.
물론, 그것은 이 마법의 나라에서는 일상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마침내 그 날이 밝았을 때, 암표의 가격은 최고조에 도달했다.
주제조차 공개되지 않은 비밀스럽고 의문이 가득한 초청강사의 강연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복권이 따로 없군."
"그랜드 마스터들이 추첨에 당첨된 자들에게서 암표를 구매하고 있다던데."
"마스터들은 명함도 못 내미는 아비규환이라더군."
"마법의 신께서 정말로 찾아오실까?"
때로는 상황의 본질보다는 그에 딸려오는 현상에 더 관심이 많은 자들도 있다.
강연 시간이 다가오고 있지만 이 의문의 초청강사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널리 퍼진 유명세를 의식한 것일까?
조급한 그랜드 마스터는 값비싼 추첨권이 사실 사기당한 것이 아니었나 의심하기도 했다.
사실 이제 와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을 주관했던 불의 마탑의 그랜드 마스터는 몽환의 숲을 정복하고 돌아와 유명해졌으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죽은 자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
사령술에 정통한 검은 마탑의 누군가가 영혼을 불러내려다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만은 헛소문일 것이다.
어찌 되었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온갖 교수들이 모여든 진풍경 속에서 운수 좋게도 초기에 신청하여 추첨을 받았던 일부 대학생들은 오들오들 떨고 있다.
다들 강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그는 누구인지, 소문 중에 얼마나 진실인지.
강연 장소 내부에서 기다리는 이들보다 밖으로 나와 입구의 광장에서 기다리는 이들이 더 많았다.
마법사들답게 호기심을 잔뜩 발휘하여, 한시라도 먼저 그 의문의 대마법사를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강연 시간 10분 전, 그 광장의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다.
모두가 마법사이니만큼 그것이 마력이 아님을 다들 알아보았다.
근원 입자인 마나가 일으키는 현상임은 동일하지만, 신성이라는 이름으로 가공된 또 다른 힘이다.
푸른빛의 신성은 전쟁의 붉은 신성과 대비되는 이지적인 신좌를 상징한다.
빛기둥 사이에 장년의 사내가 하나 나타났다.
날개와 뿔.
누가 보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악마의 형상.
그리고 푸른 신성을 두르고 나타난 존재.
장내가 얼어붙었다.
마법의 신이 강림했다.
모두가 입만 벌리고 있는 가운데, 마법의 신은 주변을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으며.
다섯 번의 심호흡을 한 후, 장내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