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54화
왕국 – Lv.3956 [아케인](4)
[소우주]라는 마법은 이름을 잘못 지었다.
아니, 사실 이것조차도 미궁이 엿 먹이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혹은 개발자가.
강력한 마법은 대개 일반적인 물리현상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그리하여 직관적인 이해를 방해한다.
물론 구체적으로는 잘 몰라도 된다. 단지 스킬을 습득할 때 주어지는 사용법대로만 사용해도 엄청나게 강력하다.
그러니 사실 대다수의 고레벨 유배자들은 작고 기본적인 부분에서만 응용하고, 그들이 가진 ‘필살기’는 굳이 분석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쯤 도달했다면 당 회차 유배자들의 정점에 가까이 서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그럴 동기부여도 없다.
게임이었다면 하루 종일 온갖 경우의 수를 수집할 변태들도 마찬가지다.
그 게임이 현실이 된다면 그야말로 현실적인 고난 앞에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우주]의 작동 방식을 아는 유배자를 본 적이 없다.
지극히 희귀하며 보기 힘든 마법에 대한 대응을 짜낼 이유는 더더욱 없기도 하다.
거창한 이름과 다르게 이건 ‘태서랙트’, 다른 말로는 ‘초입방체’ 형태의 공간을 만드는 마법에 불과하다.
마력을 퍼뜨린다. 통상적인 감각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곳에 소년의 형체가 감지된다.
거기 있다는 건 알아도 어떻게 거기 있는지는 알 수 없고, 그 방향도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곳이다.
게임이라면 버그가 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때때로 현실은 버그 같은 현상을 온전히 보여준다.
나는 레바테인을 들고 소년을 찔렀다.
그쪽에서도 이미 익숙해진 탓에 내 공격을 피해 물러난다.
앞이나 뒤 옆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다.
3차원을 구성하는 3개의 축이 아닌 제4의 축으로 물러났다.
나는 그대로 검을 휘두르며 추격한다.
소년은 공간계열 하나에만 특화된 마법사가 아니었다.
직접적인 공격력이 아쉬울 수밖에 없는 공간계이니만큼 서브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제법 마이너한 마법을 구사하고 있다.
푸르스름한 마력의 검이 내 오러 블레이드를 받아낸다.
물질 분해 블레이드는 쓰지 않는다. 소모가 너무 격심하며 이제는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제4의 축에서 생성된 푸른 검이 나를 찌른다. 3차원 공간만을 인식하는 눈에는 허공에서 불쑥 치솟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다른 방향에서도 공격이 들어온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아래에서 솟고, 사방을 포위하듯 내 목숨을 노린다.
속도는 거의 동시지만 위험도는 모두 다르다. 공격마다의 우선순위를 정한 후, 마력을 모아 내뿜는 부스터와 함께 회전한다.
가장 위협적으로 찔러 들어오던 마력의 검이 오러 블레이드와 닿아 부서진다.
그대로 한 번의 회전으로 모든 공격을 해소한다.
그리고 어느새 나와 가까이, 하지만 3차원 상에 살아가는 내 감각기로는 인지할 수 없는 위치의 소년이 마력을 통해 느껴졌다.
단 두 걸음 만에 사정권에 넣고 벤다. 허겁지겁 공간마저 열어 뒤편으로 이탈하고 다시 거리를 벌리는 소년.
나는 미소 지었고, 마력을 통해 소년이 몹시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떻게 내 공간을 침범할 수 있는 거지?"
"이플릭셔스 씨라면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닥쳐라!"
이번에 닥쳐오는 것은 원소 마법.
내 사정거리를 이용한 좋은 수단이지만 단숨에 달려가서 마법이 형성되기 전에 벤다.
지금의 나는 힘과 지능 두 가지 듀얼로 빌드를 짠 마검사지만 PVP에서의 특성은 사정거리가 짧은 전사에 더 가깝다.
다만 전사의 튼튼함 대신 압도적인 공격력을 가진 전사 말이다.
소드 마스터 자체도 그러한 클래스기도 하다.
따라서 작정하고 도망치는 소년을 쉽게 쫓지는 못했다.
막대한 마력과 무수한 패시브의 보정은 거의 딜레이 없는 공간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빌어먹을!"
소년이 마법을 구사한다. 여러 가지 대마법이 동시에 캐스팅된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의 마법 [소우주]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충분한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모른다.
다시 한번 제4의 축으로 달려든다. 소년은 구현되던 마법을 포기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팔 한 짝을 날려 버렸다.
피가 튄다. 냉기가 스며들며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붉은 서리가 흩뿌려지고 다시 허겁지겁 도망친다.
소년은 공간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대마탑의 한 층을 길쭉하게 늘여 버린 그 마법, [역설의 제논]이다.
이제 3차원적으로는 나와의 거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내 짧은 사정거리의 마력탐지로는 도저히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이대로는 제4의 축에서는 오히려 가까워져. 너 공간마법 잘 못 쓰는구나?"
"크아아악!"
인지하지 못하고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니 [역설의 제논]이 4차원상의 공간으로는 미치지 못했다.
원래 같으면 능숙하게 다룰 공간 확장의 형태가 일그러져 불안정하게 뒤틀린다.
불안정하게 변형된 공간은 제멋대로 구부러지고, 본래는 없을 방향의 지름길을 만들어낸다.
그 사이로 파고들어 다시 베어 든다. 이번엔 내장이 쏟아졌다. 내 피의 샘은 거의 소모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저쪽만이 포션을 소모하고 있다.
"어떻게…….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좀 더 쉬운 설명이 있다.
격투 게임을 생각해 보라.
2D 격투 게임에는 방향이 상하좌우밖에 없다.
하지만 3D 격투 게임은 거기서 축이 하나 더 추가된다.
상대 캐릭터의 주먹을 숙이거나 점프하거나 뒤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피할 수 있다.
게임에서는 횡이동이라고 부르는 동작이다.
하지만 2D 격투 게임의 캐릭터가 갑자기 3D 격투 게임에 출연하게 된 상태라면 그의 눈에는 그 동작을 한 적이 아예 사라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가 등장하던 2D 게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옆’으로 회피한 것이니까.
지금 이 공간이 정확히 그러하다.
6개의 면으로 3차원상의 정육면체가 만들어지듯, 6개의 정육면체로 만들어진 초입방체가 [소우주]라는 마법의 정체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네놈은 어떻게 보정도 없이 마음대로 네 번째 축을 넘나들고 있는 거지?"
"그 비밀이 궁금한가?"
후후후.
"부단한 훈련과 노력이다. 애송이."
"이 썩을 놈이!"
미궁은 신비한 곳이다. 없던 날개나 꼬리가 생길 수도 있고 그것을 움직이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수학적으로 예측만 되던 4차원상의 물리적 공간도 실존할 수 있다.
그 속에서 네 번째 축으로 이동하는 법? 생각보다 쉽다.
마나는 모든 것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다.
따라서 마력은 의도하지 않아도 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그 방향이 어디인지를 지켜보고 연습하면 할 수 있다.
"필살기란 상대가 몰라야 필살기가 되는 법이다. 내가 더 잘 아는 걸 필살기라고 꺼내봐야 바보가 될 뿐이지."
내가 그래서 이런 걸 연습한다.
매 회차마다 왕국은 치워야 하고 왕국의 꼭대기에 있는 놈들은 다들 이런 꼴이다.
궁극의 마법, 궁극의 스킬 이런 거 몇 개 꿰찬 다음에 그걸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들끼리 싸우지도 않는다.
다음 회차가 없는 놈들이 하도 많아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 된다.
그래서 이런 수준의 싸움에 대한 숙련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소년은 급기야 [소우주]를 해제하려고 했다. 확실히 차라리 바깥이 더 유리할 것이다.
저 녀석 입장에선 근접하면 감당할 수 없는 소드마스터가 자유자재로 공간을 넘나드는 것으로 느껴질 테니까.
거리를 아무리 벌려도 다른 축으로 쫓아온다. 최선을 다해 도망쳐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다.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변수가 많은 정상적인 공간으로 달아가는 것이 낫다.
"그렇게는 안 되지!"
이런 최종 티어 마법은 해제해도 시간이 필요하다. 얍 하고 [소우주]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럴 시간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쫓아다닌다.
시간을 벌기 위하여 마법을 있는 대로 짜내어 사용한다.
소년이 가진 모든 스킬들이 마법이 되어 쏟아진다.
하늘에서 푸른 마법의 검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마력의 조짐만 약간 보인 후 허공에서 날이 솟는다.
창이 나를 찌르고 낫이 회전하며 나를 벤다.
도리어 3차원 공간에서라면 결코 회피할 수 없고 나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를 공격이지만, 제4의 축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깔아대는 포화는 듬성듬성하다.
‘옆’으로 탄막을 피하며 다가가서 베고 또 벤다.
결말은 정해져 있다.
언제 도달하느냐의 문제일 뿐.
소년은 최선을 다해 발악했다.
그리고 마침내 쓰러졌다.
그런데 부활했다.
포인트가 남아도니 부활도 찍어뒀다 이거지?
두 번을 더 죽였다.
마침내 소년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제 꾀에 넘어가서 생각보다 쉬웠군.
여신님께 묻는다.
‘바깥은 잘하고 있습니까?’
「어어, 그래. 지금 막 [블루 제트]가 떨어졌고, 그걸 회피한 참이다. 한데 여기가 더 신기해서 여기만 보고 있었네.」
‘[블루 제트]라, 피했으니 다행이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맞으면 죽죠. 그런데 여신님도 제4의 축으로 걷는 법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못해 미친놈아!」
에이, 뭐 그럴 수 있지.
* * *
[블루 제트]의 전조를 감지하는 순간 더 침착했던 것은 미아였다.
육성으로 말할 시간이 없다. 의지를 전달한다.
[벽을 부수고 나가요! 아무거나! 전력으로!]
다행스럽게도 희우도 같은 생각에 도달한 참이었다.
대마탑의 측면은 몹시 튼튼하다. 세로로 내리꽂으며 뚫어버릴 때 어땠더라?
희우는 두말없이 스킬을 가동하고, 미아를 안고 날았다.
[유니크 액티브 – 섬광 재생]
천장을 50여 개 정도 꿰어버린 충격이 작렬했다. 그러나 멈춘 시간 속의 벽은 타격을 입었음에도 붕괴하지 않는다.
미아가 최선을 다해 마력을 불어넣었다.
시간의 틈새에 들어온 마법사가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자 잠깐 동안 벽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잠깐이면 충분했다.
막대한 충격량은 통째로 벽을 날려버렸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
희우는 미아의 상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천사의 신성력에 불타는 흡혈귀 마법사는 동시에 초음속으로 가속하는 공기의 벽에 두들겨 맞고 의식을 잃었다.
심장이 손상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흡혈귀 특유의 재생력으로 다시 재구축 되는 미아를 허공에 띄워 올린다.
뒤편으로 푸른 번개가 치솟았다.
서늘한 죽음의 푸른빛이 천사의 시야마저 가렸다.
초인적인 시각도 그 막대한 광량을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도리어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음에도 휩쓸릴 걱정을 해야 했다.
희우는 다시 미아를 들고 도망칠까 생각을 했으나 그럴 틈도 없다.
몸으로 미아를 가린다.
마법이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공중에 내던져진 그 상태 그대로 자유낙하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재생 중인 지금 천사가 닿았다가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몸으로 최대한 여파를 막는다.
딱 지금만큼은 근육질의 거구가 아닌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다행스럽게도 블루 제트는 지속형 마법이 아니다.
한순간의 열량이 대마탑을 지져 버리고 그 주변도 지져 버리고 천사의 날개마저 지져 버렸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미아는 재생했고 반대로 의식이 희미한 채 추락하려는 희우를 마법으로 띄워 올렸다.
남은 마력은 얼마 없다.
정지한 시간 속에서 물체에 마력을 불어넣어 자신의 시간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끔찍하게 효율이 나쁜 행위였다.
미아는 생각했다.
저 안에서 시간이 멈춰 있는 동료들은 무사할 것이다. 그들의 시간은 멈춰 있으니까.
마법은 시간이 멈춘 가운데, 살아있고 마력을 지닌 생명에게 직접 간섭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간 정지를 사용하는 마법사는 술식을 완성하지 않고 미리 깔아 둬야 한다.
그런 형태로 시간이 흐르자마자 마법이 직격하게 만드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타이밍 좋게 그 순간 시간의 틈으로 발을 디딘 것이 아니라면 무사하다.
하지만 시간 정지가 끝난 직후에 남는 것은 붕괴를 시작하는 대마탑, 아직 해소되지 않은 압도적인 열기.
갑작스레 노출되면 즉사하는 환경.
마법사는 그런 환경으로부터 파티원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남은 마력을 짜내어 지연되는 공간 이동을 구축한다.
연습한 대로, 혹은 연습하지 않은 대로.
자신의 재능을 믿고 술식을 구축하여 만들어낸다.
시간이 다시 흐르는 순간 이곳으로 불러오도록.
그리고 시간의 성물이 일으킨 시간 정지가 끝났다.
터져 나가는 대마탑, 이온화된 공기의 열기.
공간의 균열이 입을 벌리고 치명적인 손상을 입기 전에 미아의 동료들을 구해내었다.
제니가 비명을 질렀다.
"앗 뜨거!"
그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시간이 멈춘다.
미아는 가장 먼저 다시 시간의 틈으로 진입했고, 그다음은 다른 파티원들도 들어왔다.
훨씬 난이도 높은 권능에 의한 시간 정지가 아니었기에 합류는 압도적으로 빨랐다.
미아가 마력탈진을 느끼며 마지막 힘을 짜낸다. 파티원들을 공중에 띄우려 했다.
에길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대신 허공에 발을 디뎠다.
공중전을 위해 습득한 스킬이다. 마법보다 훨씬 느리지만, 이 경우엔 동료의 부담을 덜어주는 편이 옳다.
블랑쉐는 날개가 있는 종족, 하피로 모습을 바꾸고 비행을 시작했다.
튼튼함이나 마력적 특성까지 따라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신체적 특성이라면 변신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 와중 기진맥진한 희우도 시간 속으로 진입했다.
에길이 병을 뿌렸다.
"좋아. 내가 아주 늦었군. 상황을 설명해주겠나?"
희우는 회복되는 몸을 느끼며 대답했다.
"다들 잘 못 들어오는 것 같으니까, 시간의 성물부터 날려 버려야겠어요."
"사수의 일이군. 내가 하지."
블랑쉐는 그렇게 대답하고 그걸 이루어냈다.
"시간이 멈춘 덕에 발판이 아주 많군."
다시 멈춘 시간 속의 대마탑 잔해들은 추락을 멈추고 허공에 떠 있다.
잔해는 아주 많았고, 아주 넓게 퍼져 있었다.
에길은 발을 굴러보았다.
든든하기 짝이 없다.
희우와 에길이 동시에 지팡이를 잃은 노인을 향해 뛰어들었다.
다시 하늘에 번개가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