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256화 (25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56화

왕국 – Lv.3956 [아케인](6)

입을 딱 벌린 희우 앞에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기억들이 보인다.

아마 전쟁의 화신이 휘두르던 힘, 그걸 구경만 해야 했던 자신.

그리고 그걸 상대로 뭐가 될까 하는 고민.

진짜로 보인 건 아니지만 보나마나 그거겠지.

턱이 빠져라 벌렸음에도 조그마한 입이 다시 오므라든다.

그리고 당황스럽게 말한다.

"우리 또 신이랑 싸워요?"

「싸움이라뇨. 그렇게 과격한 말은 삼가주시지요. 전쟁은 돈이 안 됩니다.」

"그래, 너무 넘겨짚기야."

전쟁은 돈이 안 된다라.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 반대겠지만, 규율의 신이 하는 말은 아마 이 왕국이 자기 것이라는 뜻에 더 가깝겠지.

이 나라도 저 나라도 다 자기 거라면 전쟁은 돈이 안 된다.

강 건너 불구경이어야만 돈이 되는 법이니까.

대충 이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신들은 대부분 은퇴한 유배자와 비슷한 존재들이다.

신과 유배자는 비즈니스적 관계로 서로를 대하는 편이며, 필요에 따라 갈아타기도 한다.

배교하면 징벌이 떨어지겠지만 랭커나 하이랭커 정도라면 이겨낼 수단 정도는 있으니 더더욱 그런 관계가 되어간다.

사실 여신님과 내 관계도 이미 그와 비슷하다. 여신님은 처음에 날 무시할 수 없었고, 나 역시 까면 깔수록 생각보다 더 강력한 신이었던 여신님을 무시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비호하는 정경유착적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규율의 신이 구축한 것도 그런 것일 터.

나는 일단 말해보았다.

"거 얼마면 메인 던전 통행시켜 주십니까?"

「그거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당신과 적대하는건 제게도 좋은 생각은 아니니까요. 저에게 쌓아둔 빚이 아직 있지 않습니까. 그거면 충분합니다.」

"[더 시티즌]과 [하드쓰록]을 당신이 컨트롤할 수 있습니까?"

「통행만이라면.」

간을 보는 듯한 목소리. 애초부터 멀끔하고 듣기 좋은 톤으로 말한다. 나와 친분이 있는 다른 신들과 달리 이런 일에 능한 자다.

「어차피 당신의 목적이 온전히 클리어뿐이라는 건, 저 역시 알고 있으니까요. 그걸 굳이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거 개소리군. 날 어르고 달랠 수 있다면 아주 싸게 먹힌다고 생각하는 상황이다.

애초에 실현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말은 저렇게 해도 정말로 클리어가 눈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면 들고 일어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클리어보다는 지금 당장의 부귀영화가 소중해진 자들이 너무 많을 테니.

내 지난 회차가 바로 그래서 실패했다.

누군가를 쉬이 믿어서는 안 된다. 내가 믿을 것은 우리 파티원,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 파티원도 믿어서는 안 되니까.

미궁이 내게 가르쳐 준 교훈은 대체로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말을 바꾸어 보죠. 미궁의 클리어에 전면적으로 협조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까?"

「침공 방어를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들어가서 메인 던전을 공략하기 시작한다면 결국 밀려들 테니까요."

규율의 신은 잠깐 동안 침묵했다.

내가 어디까지 진심인지 가늠하고자 하는 듯했다.

새로운 기득권으로서 자리 잡고 싶어 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클리어를 노리고 있는 것인지.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 이상을 읽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안타깝지만 나에게 가식은 없다. 난 정말로 클리어할 생각이니까.

규율의 신도 같은 결론을 내린 듯했다.

「후우, 진심인가요. 그렇다면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금까진 좋은 관계였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일 수 있었겠지만…….」

"여기까지군요."

「그렇게 단언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능성을 닫아둘 필요는 없으니까요.」

규율의 신좌는, 더 정확히 말해서 규율과 금전의 신좌는 앉은 자로 하여금 이윤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이윤의 계산은 완전히 공정하지 않다.

더 큰 이득이 존재한다면 작은 손해는 무시하는 편으로 신을 인도한다.

그리고 이 규율의 신은 철저하게 그것을 따르고 있다.

그러니 결국 적이 될 것이다. 왕국을 이대로 유지하다가, 유지가 힘들어진다면 침공을 불러들여 리셋하고.

다시 새로운 이들을 불러들여 재화를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축적한다.

금전은 곧 규율의 신의 힘이다. 그것이 그의 규율이며 신앙이니까.

정말로 이런 환경을 구축한 유배자들과 결탁하기 최적의 신이다.

나는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다른 도시에서 다시 뵙죠."

「……그러도록 하지요. 우선 이 둘의 죽음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충분히 빚이 있으니까요. 물론 더 남은 빚은 없습니다.」

이야, 내가 만들어준 이윤도 대단할 텐데.

그걸 퉁 치는 걸 신좌가 허용할 정도로 왕국 경영이 짭짤하단 말이지?

「호의로 경고하지요. [더 시티즌]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정말로요.」

이것은 또 여신님마저도 안면이 있다는 그 오래된 유배자의 이야기인가.

아마 정말로 호의가 아닐까 싶다.

내가 언제 튜토리얼을 건너왔는지 아는 바로서는 그 세월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게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제 힘을 넌지시 과시하는군. 시티즌 역시 제 손에 있다. 그런 말 아니겠나.

신성이 사라졌다. 제 할 말을 다 했으니 더 이상 낭비하지 않는다.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신이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전에 여신님께 물어보았다.

"여신님은 이길 수 있습니까?"

「누구를?」

"규율의 신."

「난 잘 모르는 애다.」

"기억할 필요도 없는 애송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시군요."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은 하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군.」

여신님은 최초 이 왕국이 열렸을 당시의 개척시대부터 지금까지 생존해온 유배자다.

고대신이라고 불러야 할 수준의 존재지.

이렇게 말하니까 정말로 있어 보이네.

* * *

하늘이 무너진다.

더 정확하게는 대마탑의 상층이 통째로 무너진다.

그 돌더미들은 이제 잔뜩 달아오른 무언가가 되어 쏟아졌다.

이미 전쟁을 겪은 바 있던 아케인은 최소한의 자동 방어 시스템을 구축해 두었다.

여러 학교와 연구소의 고명한 교수들이 구축해 둔 마력로가 거칠게 회전한다.

막대한 질량이 쏟아져 내렸으나 지상의 시가지에는 아무 피해도 없었다.

수준 높은 마법사들은 몇 차례의 [시간 정지]를 감지했다. 그러나 누구도 제대로 그 사실을 느끼지는 못했다.

시간 정지의 진원이 멀리 있을수록 감지하기 힘들어진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의 어느 곳에서 누군가 시간을 멈출 때마다 불편을 느꼈으리라.

그랜드 마스터들은 자신들이 느낀 시간 감지의 감각을 바탕으로 진원을 추정했다.

저 하늘 높은 곳 대마탑의 꼭대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그러나 그 결론에 고명한 마법사들만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구름 낀 우중충한 날씨가 단 한순간에 바뀌었다.

시야가 닿는 곳 어디에도 구름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맑은 하늘.

그리고 그저 맑기만 한 하늘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잔해들을 방어한 후에 당직자들이 마력방벽을 수동으로 내리려고 할 때, 기상에 민감한 번개 계통의 그랜드 마스터 몇몇이 서둘러 달려와 말렸다.

"안 된다! 지금 그걸 내리면 아케인은 멸망한다!"

"바깥의 새들이 떨어져 죽고 있는 게 보이지 않나?!"

"지금 바깥은 지옥이야! 저 위쪽 성층권부터 대기가 증발해 버렸어! 대량의 방사선이 쏟아지고 있다고!"

당직 마법사는 당연히 의문스럽게 되물었다.

"예? 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랜드 마스터들은 설명했다. 몇 번의 반복적인 시간 정지. 그리고 아마도 상공에서 발생했을 거대한 규모의 마법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아케인 상공에 집약되었던 흔적이 보인다. 신화적인 수준의 번개가 지나갔을 거야. 당장 도시 전체를 점검해야 해!"

실제로 많은 마도공학적 장비들이 이상을 일으켰다.

멈춰서는 안 될 기계가 멈추자 사망사고도 속출했다.

뒤늦게 방어막이 올라가기 직전, 방사선으로 인해 빛나는 체렌코프 현상을 관측했다는 증언도 나타났다.

무슨 재해가 들이닥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케인은 두려움에 떨었다.

"대마탑이 무너지다니. [아케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가?"

"복구되지 않겠나. 그분들이 패했다면 우리가 멀쩡할 리가 없지."

일부 연구자들은 상공에 있었던 마법전에 대해 재구축하기도 했다.

그 흔적들은 충분히 대지에 상처를 드리우고 있다.

다음 날, 몇 명의 그랜드 마스터들이 발표했다.

[상공에 작렬한 마법은 번개 원소 계통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인 ‘블루 제트’로 추정된다. 우리는 한동안 방어막을 유지해야 한다. 왕국은 행성이 아니기 때문에 교란된 자기장이나 사라진 대기도 일주일 이내에 복구될 것이다. 기상 이변 정도는 있을 수 있으며 이어질 후속 피해에도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날 밤, 아케인의 상공에서는 오로라도 관측되었다.

* * *

"우리가 이걸 수리할 의리는 없어. 아케인의 멤버 몇 명이 더 남아 있을 테니 그들이 오기 전에 털어버리자."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우리는 그 신과 싸우나?"

블랑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단서는 찾을 수 없겠지."

"흠."

"그런데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마법사 둘을 상대로, 아니지. 실제론 내가 하나를 전담했으니 번개쟁이 하나를 상대로 꽤 힘겨웠지?"

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레벨 마법사 겨우 하나를 상대하는데 그 꼴이라니. 갈 길이 아직 멀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제때 안 돌아왔다면 전멸했을 수도 있지."

"여신님이 조언하셨겠죠?"

「어? 그 그럼. 물론이지.」

여신님이 참으로도 수상쩍게 대답하신다.

뭐, 그게 중요한건 아니니까.

"그래도 이 다음은 더 쉬워…… 지는 것과는 다른가? 하여튼 더 평범한 전투가 될 거야."

"마법사를 제일 먼저 노린 게 그래선가요?"

"그래. 완전히 대비를 다한 상태에서 우리의 습격을 기다리고 있다고 가정 한다면, 마법사가 가장 어려운 상대거든."

굳이 고르라면 최고로 완벽한 기습이 성립하는 지금 마법사를 줄여 두는 게 옳다.

장거리 기동력이 가장 뛰어나기에 도망을 너무 잘 친다.

게릴라로서 상대하기 최고로 위험한 존재다.

암살자는 순간적인 기동력이라면 모를까 수십 ㎞를 순간적으로 넘나들 수는 없으니까.

에길이 우려를 표했다.

"[아케인]이 전멸한 것은 아니지 않나?"

"둘 더 남은 걸로 아는데. 사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 지하에 있던 그 녀석을 죽인 걸로 갑자기 활동을 멈춘 마법사가 있을 수도 있어."

"[마리오네트]로군. 마법사들은 다 그런 수단을 동원하는가."

"기습에 엄청나게 취약한 클래스니까. 제 목숨이 걱정된다면 그런짓을 곧잘하곤 하지. 리치가 되는 마법사가 은근히 많은 것도 그래서고."

뭐, 그렇다하더라도 다음이 더 편해질 가장 큰 이유가 있다.

"어떠냐! 우리 딸. 보물창고가 따로 없지?"

"후와아."

레벨링은 유배자보다는 대량의 몬스터나 NPC를 잡는 편이 좋다.

하지만 아이템 파밍이라면 이미 남이 모아둔 것을, 혹은 걸치고 있는 것을 슬쩍하는 것보다 좋은 게 없다.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의 세월 간 쌓아 올린 재보는 끔찍하게 넓은 대마탑의 공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무엇보다 본인들이 사용하던 마법사로서의 장비는 모조리 아티팩트다.

미아의 눈에 플래시가 켜졌다.

별빛처럼 빛나고 있다.

"이번에 제 마력량의 부족을 실감했어요. 단지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의 소모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마력량을 보조하는 종류의 아티팩트들이 엄청나게 많아. 이것 봐라, 소형 마력로네? 배터리처럼 쓰면 되겠는데."

미아만이 혜택을 보는 것은 아니다.

마법사가 사용할 법한 장비는 기본적으로 마법저항력이 높다.

"목걸이 형태로 마법 저항력을 높여주는 물건인데. 에길? 제니? 어때 보여?"

에길은 이빨을 엮어 만든 듯한 장신구를 마음에 들어 했다.

제니는 투명한 나비 같은 걸 원했다.

딱 하루만 털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눈부실 정도로 많은 장비들이 곳곳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걸 그냥 우리한테 넘길 정도로 규율의 신은 이미 이득을 보고 있단 말이지."

"네에? 이걸 다 넘긴다는 의미였어요?"

"이 정도가 치명적인 손실이었다면 규율의 신좌가 그를 가만히 두진 않았겠지."

희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어쩌면 그 신도 신좌에 묶여서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요?"

"그렇진 않아. 우리 여신님 봐. 신좌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없잖아. 뭐 접미가 자유라서 그런 것도 있긴 한데."

"혼돈의 신좌는 무엇을 요구하는데요?"

"신도한테 시비 털기."

"으잉?"

신좌의 뜻에 충실한 혼돈의 신은 신도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하게 굴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불운, 그리고 의미불명의 행운.

그런 것을 제멋대로 부여하는 것이 혼돈다운 행위이기에.

"안 해도 되는 거예요?"

"반하는 행위만 안하면 대단한 문제는 없어. 물론 신앙에서의 이득도 못 보겠지만."

"아하……. 그럼 규율의 신은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인거네요?"

"전쟁의 신도 원래 그런 트롤 같지 않아?"

"정말 완벽하게 이해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 나와 계약했던 세 번의 확률 조작이 그래서 여신님께 치명적인 일이다.

혼돈은 확률이며, 혼돈의 신좌에게 응당 그리 흘러야 할 확률에 반하는 것보다 더한 반항은 없다.

행운에게마저 밉보일 수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다.

뭐,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행운의 여신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배시시 웃어 보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