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58화
왕국 – Lv.1967 불의 마탑(6)
비밀조직은 비밀스럽게 움직인다.
그 비밀스러움의 정도야 조직마다 다르겠지만, 마법의 나라 아케인이라면 병적인 수준의 집착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비밀스러움은 조직의 수장에게만큼은 예외다.
[아케인]의 멤버는 모든 것의 위에 군림한다.
갑작스럽게 공간이 열리고 소년이 나타났다.
아케인 의회의 의원이자 방위위원회의 위원장인 마법사는 다양한 표정을 얼굴 위에 스쳐 보냈다.
놀람, 다행스러움, 황송함, 그리고 불편함.
당연히 표정관리는 생활화되어 있다. 저것이 순간이나마 드러났던 것은 이곳이 그의 자택이었기 때문이다.
공간이동을 방어하는 마법은 상시로 작동하고 있으나 지금 찾아온 소년에게는 무의미하다.
자신이 놀랐다는 것을, 혹은 흐트러졌다는 것을 최대한 숨기며 고개를 조아린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무사? 그래. 다행이지. 귀찮은 일이었다. 내 꼭두각시는 제대로 처리했더군."
"물론입니다. 불상사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던 덕입니다."
"통제를 놓을 정도라니 추태였다. 다른 일들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나?"
일?
그런 건 없다.
위원장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마법사 특유의 높은 지능 스탯은 문제없이 그의 사고를 도왔다.
하지만 여전히 짚이는 것이 없다.
그러나 소년의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고압적인 윗사람이다. 솔직히 말하면 대하기 피곤한 상사였다.
그러면서 비밀은 또 어찌나 많은지.
위원장이 가만히 있자 소년이 나직하게 말한다.
따분하다는 듯 반개한 눈을 내리깔며 오연하게 대꾸한다.
"설마……. 모르나?"
위원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혀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서 모른다고 대답했다가는 좋은 꼴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물론입니다. 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
마력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마나를 움직여 마력으로 자아내는 것은 결국 정신의 힘이다.
마력을 잘 다룬다면 단지 이렇게 마력을 흘리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만들어 누군가를 내리 누를 수 있다.
위원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 역시 곧잘 하곤 하는 행동이었지만 당해보는 것은 처음이다.
소년이 지닌 막대한 마력은 그 편린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게 만들었다.
"내가 뭘 말하는지는 아는가?"
살아야 한다. 몸이 지금을 극한의 상황이라고 인식한다.
이 얼굴 비칠 줄 모르던 상관이 갑자기 자신의 자택에 나타난 것이 이미 비상사태였다.
뭔지는 몰라도 잘 해결되었거니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게 잘못이다.
순수한 마력의 흐름만으로도 이미 실내의 물건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근원 입자의 사나운 폭풍은 신체에도 타격을 입힌다.
마법사의 뛰어난 정신력은 아직 이성을 유지시키고 있다.
위원장은 지금 이 상황을 재빨리 옳은 대답을 하지 못하면 죽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마력방벽도 칠 수 없는 마당에 그의 몸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 정도 이상의 밀도를 지닌 순수한 마력 격류, 그 다른 이름이 방사능이다.
빨리 분노를 거두게 하지 못한다면 이대로 불구가 되거나 죽으리라.
그런 와중에도 냉철한 마법사의 사고는 원활하게 가동한다.
극한 상황에 처한 두뇌는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되었다.
주어진 정보는 거의 없지만, 그는 마침내 윗사람이 좋아할 만한 답을 짜내었다.
"실행하겠습니다! 왕국을 다시 재창조할 계획을! 살아남는 이가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지만 근래 들어 메인 던전이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저하게 통제당하고 있으니 그러니 종말을 막겠다면 각국의 정상에 있는 경영자의 파티들이 나서야 한다.
하나 벌써 1년 이상 출정이 없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리라.
추측건대 그 원인은 46서버.
그곳에서 살아나온 일부 실력자들이 경영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렇군. 어디 무식한 전사들이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대마탑이 파손될 수준의 전투.
일그림 파티라는 불온한 존재들이 근래 들어 이 주변에 나타났던 사실.
원인이 그 녀석들이라는 것.
늘 반항하는 이들은 있어 왔다.
이제 바깥에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했던 신이 그러했듯,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갈 때다.
이룩한 것을 모두 때려 부수고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틀림없이 필요한 일이다.
왕국의 지배자와 그들의 선택을 받은 위원장과도 같은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결국 언젠가 찾아올 종말 후에, 다시 왕국을 찾아올 유배자들을 맞이하고 기반을 닦아줄 누군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좌에 묶인 죄수들은 하지 못하는 일을 말이다.
제 스스로의 추론과 생각에 취한 위원장은 소년이 약간 질린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다시 엄숙하고 오만한 태도가 드러난다.
"그래……. 너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배신자는 아닌 모양이구나."
"배신자? 말씀이십니까?!"
한데 진실을 알아내는 마법이 존재하던가? 아니다. 생각하지 마라. 그렇다고 하신다면 그런 것이다.
위대한 [아케인]의 리더 아닌가.
소년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하드스록]은 이 왕국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런……. 어째, 아니, 알겠습니다. 추적해 내겠습니다. 무식한 전사들이 마법을 넘보려고 하는 것이군요."
위원장은 지금의 상황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전사들이라면 그럴 수 있다. 이미 수차례 전쟁을 벌여온 사이 아닌가.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경영자들도 사이는 썩 좋지 않다. 왕국을 다시 창조할 때 주도권을 어느 쪽이 더 크게 쥐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더 시티즌]의 중재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곳에 그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평화도 없었으리라.
위원장은 무언가 더 입을 열려다가 침묵했다.
용건이 더 있다면 말하시리라. 그게 아니라면 지금 전달된 것이 전부이리라.
그는 단지 고개를 숙이고 기다릴 뿐이다.
마력의 격류가 사라졌다.
공간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위원장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그만의 경의였다.
* * *
"세상에, 오늘은 그만했으면 좋겠군. 나는 지쳤다네."
"그만해도 될 것 같습니다. 월척이군요."
"미친놈들이로군.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자네 말이 맞았어.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야."
소년의 모습을 한 학장이 한숨을 내쉰다.
이곳에서 유배자 2세로서 살아온 NPC인 그에게, 그리고 요정으로서 살아온 그에게 저런 악의에 찬 계획이란 이해하기 힘든 것일 터.
미친 요정도 저렇게 사고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합리화 없는 순수 악이었다면 학장은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인간, 그래. 날 때는 인간이었단 자들의 사고방식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욕심이 어찌 그리 끝이 없나."
"인간이 그렇죠 뭐."
"부모가 유배자인 나는 인간을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네. 그것도 아니었나 보군."
뭐, 게임적으로 생각하자면 인간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유사 인종들은 인간이 지닌 특징의 일부를 가지지 않고, 대신 다른 일부를 극단적으로 증폭해서 가진다.
요정은 인간의 어두운 부분이 대체로 결여된 종족이다.
그들은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만큼, 그 반대편의 질척한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다.
미친 요정조차도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지 욕심을 위해 그렇게 변모하지는 않으니까.
사고방식이 순수함은 여전하고 말이야.
"뭐, 항상 저런 놈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가끔은 정말로 영웅들이 있었으니까요."
"왕국을 진정으로 유지하고 싶어 힘쓰는 하이 랭커들 말인가."
"예, 드물지만요."
학장이 대마탑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마력방벽은 아직도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 위에 쌓인 잔해조차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현실감 없는 크기의 대마탑은 보인다.
사실 왕국 대부분의 장소에서도 보일 것이다.
왕국은 둥근 행성이 아닌 평면이니까.
"우린 저것이 우리를 지키기 위한 탑이라고 믿었다네."
"실제로 하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요."
"아케인 전체를 수용하고도 남는 크기 아닌가. 다들 위대한 시조 마법사 파티를 믿고 따랐지. 개척자들이자 선구자들이니까."
학장이 씁쓸하게 말을 끝맺었다.
"아마 이 나라의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위대한 마법사들은 우리의 수호자가 아니라 그저 주인님이었군. 우리는 가축이었나."
유배자의 자식인 만큼 NPC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생의 어딘가에서 갈등을 겪어보았으리라.
자신이 진짜냐 아니냐와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마인드맵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멸시당할 수 있는 곳이니까.
학장이라는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긴 세월 간 겪었을 차별과 불편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의를 버리지 않았다.
이미 눈치채고 있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선의라고 믿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게 요정이니까.
학장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법의 신께서는 이런 일에 관심이 없으신가?"
"신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적죠. 무엇보다 하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
"그런가."
유배자가 특별히 대단한 이득이 아닌 일에 신경을 쓸 리가 있는가. 신씩이나 된 유배자의 정점들은 이미 자신들 안에 확실한 선을 그어놓았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도가 제로가 되거나 도전자에게 패하지 않는 이상 신은 불멸이다.
여신님처럼 오래 살아 노망이라도 나는 게 아닌 이상 왕국이 리셋된다고, 그리하여 신도들이 죽어간다고 신경 쓰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새로운 마법사들이 등장하면, 새로운 신도들이 생긴다.
단순한 순환의 일부, 그것을 몇몇 유배자들이 주도한다고 별 생각이나 있을까.
마법의 신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것이다.
학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왜 자네는 저런 걸 할 생각 안 하나?"
"그런 생각을 왜 합니까?"
"저들보다 강하지 않나."
"하하."
나이 지긋한 요정이 나를 본다. 너는 저들을 몰아내고 똑같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냐고 묻듯이.
다만 아직도 그는 요정이었다.
악의가 담긴, 그런 의문이 아니라 그저 궁금하다는 듯 보고 있다.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거 재미없어요. 진짜 더럽게 재미없어요."
* * *
새로운 육체에 더 적응할 겸, 아케인을 전복할 준비도 할 겸, 학장은 대마탑으로 돌아갔다.
대마탑의 모든 보안은 소년의 인형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제 학장이 저 탑의 주인이었다.
남은 아케인 멤버는 이쪽으로 오지 못하겠지. 우리를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규율의 신이 말릴 것이다.
패를 더 잃고 싶진 않을 테니까.
거기에 규율의 신은 우리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다.
이미 기습의 우위는 끝났다고 보는 편이 좋겠지.
희우가 물었다.
"학장님한테 시켜서 떠들게 했던 말들 다 진실인가요?"
"슬슬 침공을 발동시키려고 했던 건 진실일걸?"
"어떻게 알아요?"
"이게 슬슬 관리가 힘들어질 인구거든. 도리어 46서버에서 유배자가 많이 건너오지 않아 늦춰진 걸지도 몰라."
"그건 어떻게 알고요?"
희우가 어딘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온다.
이건 변명이 필요하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저런 친구들을 다 쓸어버리고 나면 누가 관리했겠냐고."
"아……. 이전 회차에서 왕국을 장악한 길드를 굴렸었다고……."
"그래. 직접 관리했다고. 그때는 왕국의 유일한 길드였으니까."
"에, 그것도 그것대로 독재……?"
"시끄러 임마. 그렇게 하면 클리어할 수 있는 줄 알았지. 그럼 미궁에서 민주사회를 이룩하리?"
희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여긴 개인이 집단보다 강할 수 있는 곳이네요."
"뭐 정확히는 집단이 결코 개인을 이길 수 없는 거에 가깝지만."
다굴 앞에 장사는 없지만 애초부터 싸움에서 정정당당할 필요가 없다. 강자가 지지 않고자 한다면 영원히 지지 않을 수도 있다.
거기에 강력한 개개인들이 어째서 모두의 똑같은 한 표를 지지하겠나. 자기들끼리 뭉쳐서 세력을 형성하지.
미궁은 결국 현실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그러니까 저런 세계정복적 정신병도 발병하는 것이리라.
책임지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알아서 살게 두면 될 것인데.
"그래도 오빠는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뭐? 민주주의? 여기선 못해. 해봤어."
살인에 대한 거부감도 없으며, 실제로 총칼을 겨누고 치고받는 세상에서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찍어 눌러 공정한 한 표를 강제하면 아예 반대표를 물리적으로 줄이려고 들더라니까.
강력한 클래스 간 상성이 없었다면 대부분의 왕국들이 훨씬 더 작은 소국으로 쪼개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왕노릇 하려는 녀석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왕국의 경영자들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들도 나름대로는 왕국을 더 나은 모습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이들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름대로에 그쳐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