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59화
왕국 – Lv.288 마법사의 나라
불을 붙였다. 마법적인 불길은 시신을 활활 태운다. 영혼을 거두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아케인]의 하수인들은 모두 유배자였다. 유배자의 영혼은 죽으면 사라진다.
더 이상 다음 회차가 없는 유배자조차도 그렇다.
일전의 사냥꾼은 운이 좋았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대기하던 사령술사가 없다면 그도 어디론가 사라졌으리라.
유배자의 영혼은 NPC들처럼 그 자리에 머물다가 언데드 몬스터가 되는 일도 없다.
[아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게 되어있던 중간 다리의 의원들은 소리 소문 없이 제거당했다.
그리고 학장이 죽었을 때처럼 큰일은 없으리라. 시신조차 없으니 별다른 심증이 생길 일 역시 없을 것이고.
[길드석]의 랭킹에서도 이름이 사라졌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몇몇을 상대하며 느꼈는데, 이 녀석들도 사실 통째로 버림패였을지도 모르겠다.
정보를 제한하는 수준이 그 정도였다.
그저 압도적인 힘과 그것으로 만들어낸 믿음으로 지배하고 있었을 뿐이다.
뭐, 압도적인 힘이 있다면 잔머리는 원래 필요 없다.
[아케인]의 둘은 충분히 강했다.
그 번개의 여파만으로도 아케인 주변의 기후가 변하고 있다.
성층권은 조금 더 있으면 복구되겠지만 그간 내리쬔 우주 방사선이라거나, 거름막 없는 자외선 따위가 생태계를 갈아 마셔 버릴 것이다.
레베카가 특히 그점을 많이 걱정했다.
"그런데 ‘푸른 달의 따님’이란 건 뭐야?"
"뭐……? 아니, 잠깐만! 닥쳐! 몰라도 되는 거야!"
레베카가 제니처럼 으르렁대었다. 꽃잎 요정인데 어쩜 이렇게 잎사귀 요정 같을까?
미아가 총총히 다가와서 대답했다.
"마법의 신님의 왕팬이라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들었어요!"
"앗! 내 제자야! 어째서!"
"와우."
"기억을 지워! 빨리 지우라고!"
푸른색은 확실히 마법의 상징이긴 하다. 마법의 신이 그런 색의 신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나는 실실 웃으며 품속에서 마법의 신과 맞교환한 사인을 내밀었다.
레베카가 얼어붙었다.
"어? 그거 혹시?"
"딱 강연만 끝나니 즉시 신좌로 돌아가서 얼굴만 봤다며?"
"제…… 기랄. 내놔!"
"말을 더 곱게 해야지?"
"주세요……. 일생의 소원입니다."
"좋아. 그 정도라면."
경애의 대상이 원수의 팬이다.
이건 아주 기분이 묘해지는 일이지 않을까.
레베카의 표정도 그래서 괴상했다.
"얼마나 빠순이였던 거야?"
"으으으."
내가 미아를 보자 레베카가 움찔했다.
그러더니 대뜸 자진납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 그 그냥, 신전에 매일 기도하러 가는 정도?"
"제가 봤는데, 읍읍."
"쉿!"
레베카가 마법사답지 않은 움직임으로 미아의 입을 막는다. 미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흠, 그래봐야 나중에 미아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대체 무엇을 하는 거지.
"제자야. 넌 내 편이니? 저 녀석 편이니?"
"전 모두의 것이에요."
"그 대답이 아니야!"
미아가 생글생글 웃는다. 가만 보고 있으면 레베카 다루는 법을 깨달아가는 것 같다.
맥이 왜 레베카를 좋아하는지 참 잘 알 것 같단 말이지.
"교수님, 교수님, 저쪽에서 모의 마법전 할래요?"
"음? 좋아. 이번엔 안 봐준다."
"봐주신 거 아니면서."
"봐준 거야!"
두 꼬마가 잠깐 사라진다.
레베카는 미아가 정말로 마음에 든 모양이다. 연구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순수한 부분이 상당히 닮아 있다.
레베카는 유배자니까 태생 요정도 아닐 텐데 말이야.
학장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이쪽도 꼬마다. 그래도 소년 인형은 저 둘보다는 키가 약간 크긴 했다.
"좋아, 그럼 이제 다 처리한 겐가."
"그렇습니다. 점조직이라 다행이군요. 의원 정도의 지위를 가진 이들 위주로 추리고 모습을 보여주니 다들 고개부터 숙이지 않습니까."
"나도 원래 [아케인] 멤버의 모습을 알고 지내진 못했지. 아는 시점에서 접점이 있는 중간관리자라니 편리하다면 편리하군."
"더 아래에서는 의심조차 못할 겁니다. 그나마 뭘 아는 녀석들은 다 제거 당했고, 어느 누구도 학장을 의심할 수 없겠죠."
비밀 조직의 머리를 삼켜 버리니 일이 참 쉬워졌다.
그러나 학장은 그래도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내가 앞으로 [아케인]이 되어야 하다니. 유배자조차도 아닌데."
"마법 대부분은 그 인형 안에 들어있지 않습니까. 시비 거는 하이랭커가 있지 않다면 거의 들키지 않을 겁니다."
샤크마가 하던 연구가 더 진보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마리오네트]는 본디 그렇게 좋은 수단이 아니다.
본체보다 현격하게 약하니 누구를 숨기기도 힘들어진다.
술자였던 원주인은 인형마다 마력로를 심고 스킬을 부여했다.
스킬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지만, 바로 그렇기에 스킬 그 자체에 대해 연구했던 모양이다.
스킬은 일반적인 NPC들에게는 아주 제한적으로 타고나거나, 고통 끝에 단련한 기술이라는 형태로 주어진다.
아예 생물도 아닌 인형 따위에게 그걸 새겨 넣었다는 것은 이 역시 미궁을 어느 정도 속이고 있는 짓이란 뜻.
그렇게 만들어진 인형 속에 들어간 학장은 자연스럽게 원래의 소년이 구사하던 마법을 상당수 가지게 되었다.
유배자였던 적이 없으며 마법을 스킬로서 가져본 적이 없는 학장에게는 모두 어색한 일이었다.
"끄으응. 역시 이런 건 마법이 아니야."
"꼰대 같은 소리 그만하시고 연습 많이 해두십쇼."
"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마법사의 우두머리는 순수한 마법사가 어울립니다. 마법의 신처럼요."
"으음."
실제로는 학장이 마법의 신보다 더 잘해 나갈 것이다.
마법의 신은 마법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유배자 2세로서의 유배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그리고 누구나 인정할 만큼 뛰어난 마법사였던 경력, 태생 요정으로서의 타고난 선량함.
학장을 잘해낼 것이다. 아케인의 새로운 통치자로서.
"자네들이 없는 동안 내가 암살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그 인형 엄청 이기적인 PVP 설계라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최소한 지지는 않을 수 있겠죠. 숙련되어야겠지만."
"그렇군."
못내 이 상황이 찝찝한 듯하지만 이미 이전의 그 요정 영감탱이 에제키엘 씨는 죽고 없다.
이제는 하이랭커 소년 에제키엘만이 있다.
* * *
다음 날, 흉흉한 일의 연속으로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빈자리가 적었다.
하지만 그 빈자리가 문제였다.
연구에 파묻혀 있던 그랜드 마스터들도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사라진 의원들이 많았고 그들은 모두 최소한 마스터의 칭호를 가진 마법사들이었다.
비어 있는 좌석의 주인들이다.
이쯤 흘러가면 연구실에서 두문불출하던 이들도 뭔가 이상함을 알고 있었다.
무너진 대마탑도 복구되지 않고 있다.
불안에 떠는 자들도 많았다.
[아케인]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궁금해하는 이들도 생겼다.
소집된 그리고 회의실의 공간이 뒤틀렸다.
마법사들은 모두 그것을 느꼈다.
평면에 발을 딛고 있음에도 공간이 휘어지며 이어붙어진다.
출구는 사라졌다.
얼굴도 모르지만 그 이적만큼은 알고 있다. 공간계열은 지극히 까다롭고 위험한 마법이다.
그것을 이리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는 극히 드물고, 또 유명하다.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대마탑의 주인.
아케인의 시초.
멸망하고 비어 있던 이 땅에 처음으로 길드를 세우고 마법사의 대표로서 살아온 위대한 마법사.
그 이름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신비 속에서 공경받는 자.
아케인 의회의 의장도 실종되었다. 그 빈자리에 소년이 가서 앉았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소년의 발언에 주목했다. 이 위기상황에서 시초의 파티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년은 조용히 말했다.
아무 허례허식 없는 본론이었다.
"침공에 대비한다."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한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의 종말이 임박하였습니까?"
"그렇다."
마법사 의회는 술렁이지 않았다.
소년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소란은 없되 사색은 있었다. 각자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학장은 새삼 이 마법의 나라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생각했다.
아케인의 대부분은 요정이며 요정과 함께 사는 이들은 요정과 닮아간다.
유배자들이 간혹 말하곤 하는 요정의 덫이라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냥 내버려 두면 침공으로부터 살아남을지도 모를 이들이다.
이렇게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냉정하게 미래를 대비하고 있지 않은가.
새삼스럽게 경영자라는 이들의 악의를 이해할 수 없어졌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바깥을 모르는 요정인 그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세상은 미궁이 전부이며, 왕국이 전부이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는 생각하지만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자리에 앉으리라.
학장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레베카가 도울 것이다. 그녀는 전투력으로서 하이랭커에 걸맞은 워메이지다.
그러니 혹여 누군가 학장의 권위에 도전하더라도 문제없다.
푸른 달의 풉 따님이 옆을 지킬 테니까.
"마법전은 많이 이겼어?"
"승률이 좋진 않아요."
"어느 정도인데?"
"반 약간 안 되게 이겼어요."
"칭찬받을 만한 전적인데."
"교수님도 그렇게 말하긴 했어요."
미아는 요즘 들어 훨씬 더 진지하게 워메이지로서의 기량을 갈고닦는 것에 임하고 있다.
연구나 개인의 흥미는 조금씩 정리하더니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더 강해져야 할 것 같아요."
"왜?"
"하이랭커들은 강해요. 하지만 그렇게 강해도 미궁을 클리어할 생각은 못 한 것이죠?"
"그래."
"그러니까요."
아유, 기특해라.
슥슥 머리를 쓰다듬는 내 모습을 희우가 부럽게 보며 신성을 차단하는 장갑을 꺼낸다.
왕국에 막 입성했을 무렵 선물로 받은 장갑은 하도 자주 써서 헤지려고 한다.
"나도! 나도!"
"옛다."
희우가 미아의 볼따구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그런데 침공 방어를 한번 해야 한다는 건 진짜인가요?"
"응. 지금 열린 메인 던전으로 진입해 봤었는데, 이미 조져놨더라. 어차피 진행은 불가능해."
잠입이었기에 혼자 움직였다.
메인 던전의 통제 방식은 대체로 악질적이다.
어떤 식으로 악질적이냐 하면 그 안에서 개판을 쳐둔다.
거대한 홀수 층인 메인 던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며 거대한 연계 퀘스트다.
짝수 층의 배경인 대륙만큼이나 거대한 세계.
당연히 그 속에도 NPC 주민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메인 던전의 진입 난이도를 생각하면 46서버보다 훨씬 더 유배자를 낯설게 여기는 이들이다.
그러니까 도리어 쉽다.
좋은 유배자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패악질을 부리는 것이다.
연계되어 미궁의 끝으로 도달하는 퀘스트를 망가뜨리고, 그곳의 모든 NPC가 유배자라면 치를 떨도록 만든다.
그렇게 해버린다면 자연히 진행할 수도 없게 되며 함부로 진입하는 자도 사라진다.
가장 편리하게 메인 던전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침공이 한번 진행되고 다시 돌아가면 메인 던전은 리셋 되지."
"그거 방어하는 것 쉬울까요? 수르트 같은 게 공격해 오는 거죠?"
"방법을 알면 은근히 할 만해. 난 PVP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럼 일단 왕국 정리부터군요."
"이번엔 더 쉬울 거야. 상대가 전사거든."
"으, 그거 전사 멸시에요!"
레미는 꾸준히 소식을 보내왔다.
하드스록 삼의회의 일원, 친애하는 마이어 씨와 관계도 계속 유지했다.
[하드스록]은 [아케인]과 달리 그다지 간섭이나 직접적인 장악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자들인 모양이었다.
적어도 마이어 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레미를 통해 그런 확신을 얻었다.
하지만 나머지 둘은 어떨지 모른다.
용인과 트롤.
일단 거하게 어그로를 끈 덕에 우리 파티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신님의 신전 자체는 안녕하지 않을까?
최근에 드디어 혼돈의 교단이 성직자의 나라에 신전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규율의 신도 특별히 행동을 보이지는 않고 있다고 한다.
가서 보면 알겠지.
열차를 타지는 않았다. 시티즌을 경유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대신 대마탑에서 좋은걸 찾았거든.
하늘을 나는 배.
비행기를 만드는 것보다는 배를 만드는 편이 마법적으로는 더 효율적이다.
최고속도를 내겠다면 좀 다르겠지만 적당히 빠른 여객선 느낌이라면 말이다.
다양한 배가 있었는데, 에길이 롱쉽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이 배는 노르드인의 긍지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블랑쉐도 옆에서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끄덕인다.
그래, 속도가 빠른 편이긴 하겠군. 원래 좀 유선형의 배지.
그렇게 결정되었다.
에길은 혼자서 힘차게 노를 젓고 있다. 동작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지만 저러는 편이 더 마음에 든다나 뭐라나.
재밌어 보였는지 블랑쉐도 따라 하기 시작했고 제니도 앞으로 가서 노를 젓는다.
일단은 마법으로 운행하는 것이며, 마력 자체를 다루는 것은 정신이다.
동작에는 당연히 정신이 깃든다.
배가 점점 더 가속을 받아 빨라지고 있다.
뒤편으로 무너진 대마탑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성직자의 나라 상공은 조금 피해서 진행했다.
랭커들과 하이랭커들이 가장 많이 머물고 있는 곳이 성직자의 나라다.
격추하려고 드는 바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고도가 높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기에 기온은 아주 낮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기온에 영향을 받는 파티원도 없다.
그저 다들 춥구나 하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 온종일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의 그 병원 구역이 보인다.
신전에선 의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선량한 뱀파이어!"
"으엑?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용사가 위험하다."
"예?"
"인류가 위험에 처했다고!"
나이트크로우 성애자 러셀이 후드를 벗으며 눈을 부릅떴다.
"나를 도와 너의 순수를 증명해라!"
혹시 울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