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61화
43서버 – Lv.1780 용사 방어전(2)
많은 게임들이 그렇듯, 이 게임 역시 출시 후 유저가 늘면서 온갖 비밀들이 파헤쳐졌다.
그래서 위키에 다양한 조건과 확률 보정에 대한 정보가 좌르륵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리하기 전에 누군가는 그걸 발견을 해야 한다.
유저 수가 아주 적지는 않지만 결코 아주 많다고도 못할 게임이었기에 정말로 은밀한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는 시일이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그 최전선에 있었고 말이다.
개발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는 게 불가능하도록 비밀을 숨기지는 않는다.
게임은 즐기려고 하는 것이지 일생일대의 업적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용사]라는 스킬은 꽤 빨리 발견된 편이었다.
용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계 퀘스트의 트리거이며 랜덤 인카운터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히어로 유닛은 보통 이런 귀찮은 조건 사이에 숨겨져 있는지라 낱낱이 파헤쳐지기까지 많은 탐구와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 결과 밝혀진 사실은 인류가 명운을 건 전쟁에 돌입하면 나타난다는 것, 후보자인 여러 소년소녀들 사이에서 진짜 용사로 각성하는 것은 하나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용사의 운명을 유배자가 개입하여 이리저리 뒤틀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 정도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인류의 배신자로서 멸망의 첨병에 세울 수도 있다.
그랬다간 러셀이 정말로 날 찢어버리려고 들겠지.
용사 어머니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로켓은 목에 거는 줄만을 분리해서 바쳤다.
우습게도 러셀 역시 43서버 출신은 아니었기에 결국 불려온 것은 제니다.
"여기가 처음으로 들어가 봤던 리프트인데!"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 추억처럼 이야기 하지 마."
"하지만 천만년쯤 전에 떠난 곳 같은 걸요!"
희우가 방방 뛰는 동안 제니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장을 기록하러 간다.
"저기 투구 잠깐만 빌릴게요."
에길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투구를 벗어서 준다.
바이킹은 흔히 알려진 웃통 깐 전사 이미지와는 다르게 갑옷을 좋아한다.
전장에서 태어나 전장에서 죽는 이들에게 잘 손질된 갑옷과 투구는 비즈니스를 위한 정장과도 다를 게 없지.
크기가 전혀 맞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제니가 터덜터덜 걸어갔다.
저 위장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들킨다.
"제니? 제니 아냐. 뭐 그런 걸 쓰고 왔어."
"아하하하……."
"설마 내가 몰라볼 줄 알았나? 여기서 몇 십 년을 일했는데. 껄껄."
"어디 갔다 왔나? 다음 회차로 간 줄 알았잖아. 요즘 로건도 잘 안 보이던데."
접수원 마법사들이 인사를 건네자 결국 투구를 벗은 제니가 어색하게 웃는다.
접수원 마법사는 아마 제니가 죽은 줄 알았을 것 같다. 로건이 뭐라고 말했을까.
제니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일단 표정에서 싱숭생숭함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살아 있었으면 살아 있다고 말이나 해주지 그랬어. 다음에 또 보자고."
"하하, 고마워요."
제니가 웃는다.
이번엔 조금 덜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서 30년 쯤 짐승 사냥을 했다고 하던가.
미궁에서는 사실상 고향이나 다름없는 느낌이겠지.
조금 밝아진 얼굴로 제니가 돌아왔다.
제단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은 여전하다. 하드스록은 리프트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다.
리프트 사용률만 따지자면 이곳이 가장 높으리라.
우리 차례가 왔고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 * *
러셀이 주변을 살폈다.
"이상하군."
"그러네요. 어째서 용사 주변으로 떨어지질 않은 거지?"
전장의 한가운데라거나, 적어도 나이트크로우 지부 같은 곳에 도착할 것이라 생각했다.
용사와의 연결고리를 가지게 된 후 제단으로 입장한다면 아무래도 위기상황이건 뭐건 좀 더 격렬한 배경으로 진입하는 법이다.
그래야 그 인연이 강화되건 악화되건 할 테니까.
이런 허허벌판의 황무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와이드 맵도 안 떴지 않습니까. 그럼 이 주변에 있긴 하단 건데."
그야말로 황무지다. 사막이라고 부르기엔 좀 아쉽지만, 식생이 아주 적게 분포하고 있으며 붉은 토양이 드러나 있다.
작열하는 햇살을 보면 꽤나 더운 지역인 데다가 위험한 괴물들도 많아 보인다.
그래, 환경 자체는 가혹한 게 맞군.
"전쟁 중에 들어올 위치는 아닌데."
"나 역시 용사 후보자들을 모두 마크하고 있지는 못했다. 나이트 크로우에 이미 한 명이 있다는 것도 좀 늦게 알았지."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는 거군요,"
"접근하려고 했으나 리프트는 나를 용사의 곁으로 보내주지 않더군."
그럼 그거군. 짝수 층에서 이미 다른 유배자가 맵으로서 점거하고 있는 구역은 침입할 수 없다.
심연의 성물 정도 쓰지 않는 이상에는 절대적인 규칙이다.
"항상 제가 곁에 있었다?"
"선량한 뱀파이어. 네놈의 수완으로 볼 때 나 못지않게 용사를 케어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그렇군요. 한데 그럼 지금 용사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걸 모르겠군."
"어휴, 일단 제가 정찰 다녀오겠습니다!"
숨겨져 있던 핀 모양의 날개가 나타난다.
희우가 날아올랐다. 러셀이 눈썹을 꿈틀했다.
"천사?"
"왜 그럽니까."
"아니. 아니다. 미래에서 확인한 용사 전설에……. 음, 아니야."
천사는 보기 드문 종족이지만 러셀을 공격해 그의 용사를 처리한 이들 중에도 있을 법은 한데.
용사의 기억에 희우가 강렬하게 남아 후세에 전해지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러고 보면 저쪽은 심연의 성물이 남아도는 모양이군요."
"나 역시 너처럼 용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아 방어하려고 해봤으나 침입해 오더군. 성물이 분명하다."
흠, 사이에 가로챈 것이 아니라 정말로 침입을 해온 것이었군.
확실히 [하드스록]이 배후에 있는 모양이다.
비행이 자유로운 것은 블랑쉐도 마찬가지다.
일단은 뱀파이어인 나와 미아는 햇빛을 피해 천막을 치고, 안에서 마법적인 탐지를 시도한다.
제니와 에길은 러셀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경우에는 마력탐지보다는 [천리안]을 쓰는 게 좋겠다.
미아가 주변을 관찰한다. 사정거리가 짧은 나는 미아가 구축한 술식을 이용하여 함께 관측한다.
하나는 마법적 시야, 다른 하나는 가시광선.
"언데드가 많네요."
"죽음의 황무지인 모양이군."
"원래 이런 곳일까요 아니면 뭔가 다른……."
"육안으론 별거 안 보이는데."
"마력의 흐름이 이상하긴 해요. 정상적인 환경은 아닌 것 같아요."
그 말에 흐름에 집중해 본다.
확실히 뭔가 큰일이 있었던 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원래 대륙에는 홀수 층 뺨치는 미친 공간도 많아. 그런 곳의 일부일 수도 있지."
"아빠도 몰라요?"
"랜덤 요소가 어떤 식으로 조합되어 생성된 지형인지 짐작은 몇 가지 할 수 있지. 하지만 지금은 경우의 수가 너무 많구나."
그리고 불길한 예측도 하나 가능한데, 맵이 크지 않게 잘려서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맵이 더 크다면 상관없을 텐데. 심연의 성물을 쓸까?
아티팩트 형태가 아닌 조각 형태의 소모품 성물이라면 대마탑에서 제법 많이 챙겨왔다.
아낄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쓸 생각을 하고 들어온 게 아니다. 성물은 입장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로켓을……. 음. 유품일지도 모르는 걸 바쳐서 날려 버리는 건 좀 그렇지. 이미 훼손도 했는데.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
이미 유품 도둑이라면 호감도가 좀 날아갔을 것 같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그렇다면 재입장을 위해서는 다시 용사를 만나서 다른 키 아이템을 챙겨야 하는데.
어차피 유품도둑이 될 거, 그때 뭐 좀 더 뜯어올 걸 그랬나.
"엄마가 돌아오는데요."
"오, 누굴 안고 있군."
좋은 소식이었다.
희우는 너덜너덜해진 소년 하나를 안아 들고 돌아왔다.
팔이 하나 없었다. 다리는 둘 다 없다.
몸 곳곳의 상처는 깊게 패여 썩어들어 가고 있었으며 갑옷이 파고들어 녹슬어가고 있다.
그 참상에 제니는 사색이 되었으며 미아조차 인상을 찡그렸다.
"포션! 포션 안 뿌리고 데려왔어요?"
"한 병 다 들이부은 거예요."
도리어 희우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미미한 떨림이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몸이 헤진 좀비류의 적을 눈 똑바로 뜨고 보지도 못하던 녀석이다.
그리고 용사 꼬마의 참상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희우가 심호흡을 하고는 용사를 내려놓는다. 상처가 재생되고 있는 것은 보인다.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미미하다.
"좋아, 너는 가서 먼 곳 보고 있어."
"그럴게요……."
희우가 구석으로 가서 헛구역질을 시작한다.
저건 NPC에게 성격 태그로 달려 있는 종류의 문제다. 솔직히 말해서 자력으로 여기까지 극복해 낼 수 있는 게 더 신기한 일이다.
왕국에 들어선 이후로 많은 생각과 노력을 한 것일까?
알러지 반응에 가까운 거라 노력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러셀이 용사를 진단했다.
"상처가 너무 오래되었어. 이미 이 상태가 정상이라고 정착되어 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게 기적이군."
팔다리도 0.1초 만에 다시 돋아나고 하는 재생력은 말 그대로 다치자마자 포션을 들이켜서 그렇다.
손상을 입은 후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그 손상은 ‘정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년 단위로 시간이 지나면 어떤 효력도 없게 된다.
용사의 회복은 너무 더디다.
"이 정도면 이미 석 달 이상 지난 것 같은데요. 죽기 직전에 간신히 발견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회복속도만 보고도 그걸 알다니."
미아를 불러 마력을 불어넣게 했다. 몸을 흐르는 마력, 그러니까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힘도 거의 바닥나 가고 있다.
수혈과 비슷한 행위다.
여기서 죽게 둘 수는 없지.
그리고 어찌 보면 다행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한다면 유품 도둑 정도는 잊히겠지.
얼굴도 참담하게 망가져 있지만 어렴풋이 그때 보았던 후드 속의 앳된 느낌이 남아 있다.
골격도 큰 변화는 없어 보이고, 유품을 털고 나서 시간이 오래 지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반년 정도.
그리고 용사가 입은 상처 중에 가장 오래된 것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문제가 있었다.
"이거……. 여기서 그걸 터뜨렸군요. 난쟁이 왕국인가?"
"무엇을?"
"키메라 연구도 벌이는 근미래 시대 아닙니까. 마력로 원리 아시죠?"
러셀이 인상을 썼다.
"수도가 날아가서 난쟁이들이 미쳐 버린 모양이군."
아니, 그건 미쳐 버릴 만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한 짓이긴 한데.
미아가 그 단서로만 추측해 낸다.
"아, 핵융합보다는 핵분열이 먼저 개발되었을 거니까……."
"평화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에너지지. 좋지 않은데."
마도공학이란 것은 결국 과학을 마법으로 보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세계건 현대 지구가 겪은 과정을 비슷하게 거친다.
차이점이 있다면 과학으로만 해결해야 했던 난점들을 마법을 이용해 메꿀 수 있기에 발전의 속도가 차원이 다르다는 점.
대체로 그 선두에 서는 것은 난쟁이와 인간이다.
요정이 상징하는 것은 순수한 마법의 고대.
난쟁이가 상징하는 것은 마도공학의 미래니까.
그래서 보통 제일 먼저 이런 종류의 더티밤을 만드는 것이 난쟁이다.
드래곤 따위가 눈을 크게 뜨고 있기에 본격적인 핵전쟁은 잘 벌어지지 않는 법인데…….
"좋아, 좋아. 다 내 업보로군."
"무슨 말인가?"
"아닙니다."
알게 된 이상 최소한의 책임감을 가지긴 해야겠군.
이래서 한번 레벨링에 써먹은 서버와는 관여되기 싫은 건데.
그래도 용사는 각성 전의 후보자일지라도 이미 초인적인 존재다.
힐링 포션 역시 초월적인 무언가인 건 마찬가지고 말이다.
상처는 느리지만 꾸준히 회복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목숨은 건지리라. 후유증을 장담할 수가 없긴 한데.
그리고 러셀이 말했다.
"슬슬 오겠군."
"굳이 침입해서 당신이 돌보던 용사들을 척살했다는 건 그거겠죠."
"그래. 내가 용사 후보자와 함께 짝수 층에 있을 때를 노린다. 직접 용사를 찾아다니는 것보다 그게 편할 테니까."
우리가 이곳에 있음으로써 용사의 위치가 특정되었을 수가 있다.
심연의 성물은 심연의 권능으로서 짝수 층의 공간적 제약을 해소해 주는 방향으로 기능한다.
예를 들자면 제단에 바쳐서 [길드석]의 랭킹에 존재하는 이름이 들어간 곳을 추적할 수도 있다.
러셀은 아직도 랭킹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황무지의 먼 곳에 추적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 *
제니는 처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상대가 [검은 곰] 길드라는 걸 알게 된 후에 계속 그랬다.
로건의 길드다.
로건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제니가 하드스록을 떠날 결심을 하는 그 순간, 둘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갈렸을지도 모른다.
모험다운 모험, 랭커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는 자부심.
어찌 되었건 고통을 이겨내고 성장하고 있다는 성취감.
그 모든 것의 사이에서 간혹 로건과 이전 파티원들을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버리고 갔다는 생각에 기분이 암담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제니는 차라리 로건을 다시 만나지 못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잎사귀 요정은 눈이 좋다.
전사로서 레벨만 따져도 이전의 몇 배가 된 제니의 시야에는 황무지 저편에 나타나는 일단의 무리들 하나하나가 똑똑히 보였다.
무리 사이에 섞여 있는 사슬낫을 본 제니는 처연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