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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62화 (26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62화

43서버 - Lv.1780 용사 방어전(3)

원래 왕국에 입성한 후, 어느 정도 전력을 갖추고 난다면 빠른 파밍을 위해 하는 짓이 있다.

보통 초보자들의 입문을 위해 고수들이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의 일부다.

일단 클리어 한 번 하고 나면 재밌다고 계속 정착할 것이란 검은 속셈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들 접으면 게임 망해!

따라서 그 가이드라인은 극한의 저난이도와 효율을 추구한다.

랭커 사냥을 준비하는 것이 그 과정이다.

심연의 성물은 대놓고 심연에 존재하는 심연의 신전 덕에 약간의 위험부담을 감수한다면 꽤 초반에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랭커로 등장하는 NPC들 중에선 틀림없이 극단적인 빌드를 탄 녀석도 있다.

완벽하게 카운터칠 수 있는 랭커를 찾아 심연의 성물로 따라 들어가 살해한다.

그럼 그 장비는 그대로 자신의 것이 된다.

물론 직업과 맞지 않겠으나 처분 후에 원하는 것을 구하면 된다.

게임이니 가능했던 방법이다.

AI가 전투를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꼼수는 많다.

현실이 된 후에는 말이지, 카운터 빌드라고 랭커를 이길 수가 없다. 상대도 바보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랭커들은 사냥의 위험에 노출되기는 했다.

같은 랭커가 사냥하러 오는 경우다.

심연의 성물은 길드석에 등재된 랭커들만을 추적할 수 있으니 당연하다.

랭커급의 장비는 대체로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의 결과물이며, 차라리 유배자를 사냥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은 얼마건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이 된 후에도 랭커 간의 인간 사냥은 그리 드문 일까진 아니다.

반대로 러셀은 그랬기에 살아남았다.

언제건 누군가 자신을 집단으로 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파티 없는 솔로인 러셀만큼 먹음직스러운 사냥감도 드물지.

"수가 생각보다 많군요. 러셀 씨, 고평가받으십니다. 그려."

"나는 솔로랭커다. 당연한 일이지."

물론, 이번 손님들은 단순히 사냥이 목적은 아니었다.

약 십여 명의 전사들은 반 정도는 긴장한 채, 나머지 반은 여유롭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이 집단이라는 것은 의외였던 모양이다.

선두의 덩치 큰 중장갑의 남자가 머리를 투구 위로 벅벅 긁더니 말했다.

"어이 형씨들! 어쩌다가 그쪽에 붙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이라도 비켜줄 수 없을까? 우리 볼일은 그쪽이 아니라서 말이지! 우린 용사만 죽이면 되거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 사태를 물어보기 적절한 인물이, 어디 보자. 제니가 있겠군.

"제니, 뭐 좀 물어봐도 되겠어?"

어쩐지 표정이 안 좋던 제니가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아, 넵. 그러세요."

"저 친구들 [검은 곰] 길드랬지? 내가 알기로는 용병길드와 비슷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저렇게 말이 둥글둥글해도 되나?"

"원래 저런 사람들이긴 해요. 사람 죽이는 건 미궁에서 대단한 일도 아니니까……. 저런 감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그렇긴 한데. 특이하네."

단 한마디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도 쉽지 않다.

윽박지름도, 위협적인 으르렁거림도, 방금 제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우리가 걱정된다거나 혹은 귀찮은 일이 생기지 말았으면 하며 말하고 있다.

친근한 동네 노가다 아재처럼 말이다.

러셀을 보았다.

"방심하진 말게. 결국 인간 백정이니까."

흠, 뭐 그러니까. 노가다하듯이 사람 죽이는 의뢰도 받고 그렇단 거군.

특별히 좋게 생각할 이유도 없으나 나쁘게 생각할 이유도 없는 집단인 모양이다.

실력 있는 용병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존재가 되곤 한다.

돈을 받고 그만큼 일하면 된다. 그 이상으로 사연에 발을 디딜 필요는 없다.

인간관계란 그런 이유로 복잡해지니까 말이지.

"일단 살인마 사이코 새끼들은 아니군요."

"그래. 그냥 받은 만큼 일하는 녀석들이지."

검방 랭커를 굳이 노린다기에 좀 맛이 간 녀석들을 생각했는데 그냥 실력에 자신이 있는 평범한 유배자인 모양이다.

이러면, 흠. 좋아. 생각을 좀 바꿔볼까.

여기서 다 죽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드스록]이 저들에게 일을 맡긴 것은 일단 추적이 귀찮아서가 제일 클 것이며, 그다음엔 우리가 여기로 곧장 올 줄 몰라서다.

저들을 전멸시킨다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

엉덩이가 무거운 녀석들이 과연 함부로 움직일까?

기습이지만 [아케인]의 두 명이 당했다.

최소한의 신중함은 생겼으리라.

죽이지 않되 깨부숴서 존재를 알리자.

저쪽이 적당히 우리를 관찰할 시간을 주고, 정보를 제공하자.

까고 말해서 가장 피곤해지는 경우는 겁먹은 녀석들이 냅다 [더 시티즌] 및 [아케인]의 잔당과 합류해 버리는 것이다.

일그림과 그 파티원들, 그리고 이미 경영자들에 대한 불만으로 뭉쳐있던 자들에 따르면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럴 확률도 상당히 낮다. 전사란 어쩌니저쩌니해도 자존심이 강한 생물이다.

쫄아서 도망치느니 죽더라도 들이받아 보는 게 더 말이 된다.

그나저나 경영자들은 이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만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규율의 신이 나를 고평가하고 있긴 할 텐데.

그래도 최소한의 경계는 할 것이라 생각하고 대응하자.

각개격파는 언제나 옳다.

지금 [하드스록]을 꾀어낸다.

* * *

집단이 있으면 직위가 있다.

길드마스터를 제외하면 그런 직위가 구체화되지 않은 길드들도 많지만, 대부분 작아서 가능한 일이다.

[검은 곰] 정도 되는 덩치라면 필요에 의해 직위가 나뉘고 책임자가 생긴다.

이 의뢰의 책임자는 길드 내에서 대장이라고 불리는 위치였다.

하이랭커도 포진하고 있는 [검은 곰]에서 대장이라는 직위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랭킹에 이름을 올리는 이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상위 랭커 파티의 탱커로 활약하는 이름난 전사였다.

그리고 랭킹 작업이 끝난 후, 잠정적으로 파티가 해체되고는 길드에 돌아와 노닥거리며 지내고 있었다.

"야, [하드스록]에서 뭐 시키더라. 너 이거 좀 해봐라."

"살인 의뢰유? 별론데."

"새끼, 랭킹 놀음하더니 초심 잃었네. 한 대 맞을래?"

"행님한테 맞으면 죽는데. 아아아, 알았수. 할 테니까 방패 내려놔. 길드 무너져."

대충 그런 느낌으로 [검은 곰]의 수장에게 의뢰를 떠맡았다.

어차피 돈 욕심은 없으니 안전빵으로 인원을 모은다.

상대는 검방 전사 랭커.

인간 백정이라 불리기 딱 좋은 살인마의 빌드다.

심지어 러셀은 솔로 랭커로서 300위 안쪽에 들었다.

이 의뢰를 책임지는 슈투카 본인의 랭킹은 그보다 높지만 파티라는 점에서 러셀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적어도 슈투카 본인은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다굴 앞에 장사는 없지."

수는 언제나 옳다. 상대는 하나다.

마법사씩이나 데려갈 필요도 없다.

상황을 파악하고 의뢰내용을 확실히 이해한 후, 슈투카는 안심하고 출정했다.

다만 43서버가 의뢰의 무대였기에 하나 구해야 했다.

"43서버가 출신이 생각보다 없네?"

길드원 명부를 본다. 은퇴하겠다고 어디 짜져 있던 난쟁이 탱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레벨은 쓸 만한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차피 입장용이다.

로건이라는 이름의 난쟁이는 공돈이란 말에 솔깃하여 쉬이 끼어들었다.

애초에 목적은 43서버 용사의 말살이다.

꼭 러셀을 죽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체로 좀 연식이 되는 서버들은 용사에 대한 퀘스트가 끝나 있다.

최근 미래가 갈아엎어진 43서버를 제외하곤 말이다.

이걸 왜 손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돈만 받으면 그만인 게 또 용병이다.

슈투카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만큼 추가수당 없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전투 또한 사양이다.

"쟤들은 누구냐? 아는 사람 있어?"

러셀이 혼자가 아니었다.

일단의 무리와 함께 있다. 솔로 랭커는 드문 존재이며 러셀의 인간관계도 대체로 알려져 있다.

애초에 자신을 숨길 생각이 없는 미친 사람이니까.

그에게 의지할 만한 파티가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든든한 동생, 그의 후배이자 같은 대장의 직위를 꿰차고 있는 랭커, 랭커스터가 대답한다.

"모르겠습니다! 형님!"

"그래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일단 점잖게 제안을 해보자. 유배자를 상대로 마구 윽박지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상대의 관계도 모른다. 저 미친놈에게 목숨을 걸 만큼 좋은 지인이 있을까?

그러니 좋은 말로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뢰 대상은 용사다. 용사만 죽이면 된다.

저 러셀이라는 양반이 미쳐서 용사를 보호하고 다니는 게 문제일 뿐이지.

크게 소리쳐 이쪽의 목적을 알린다. 쾌락 살인마도 아니고 일부러 죽이고 다니는 게 좋을 리는 없다.

돈도 더 못 받는 살인은 사양이다.

"하, 진짜 귀찮네. 용사 쫓아다닐 때마다 격렬하게 저항해서 힘들었는데."

러셀을 번번이 놓친 것도 문제다. 이럴 거면 진작 죽여 놨어야 했는데.

"용사가 뭐라고 그렇게 과몰입하는 거야. 그래 봐야 NPC인데."

"그래도 보고 있으면 그냥 사람이랑 구분도 못 하겠지 않습니까?"

"그래서 뭐, 넌 누가 좀 죽이겠다는데 저렇게 기를 쓰고 말려?"

"에이, 그건 아니지 말입니다."

저런 녀석들이 있다. NPC를 NPC로 대하지 못하는 녀석들.

그게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이 있을 때, 귀찮게 만드는 것도 그 녀석들이다.

어차피 서버가 열릴 때마다 미궁이 찍어내는 놈들한테 무슨 애착이 그리 큰지.

"결국 인간은 유배자 뿐인데. 저 씹덕 놈의 새끼들."

슈투카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다.

대답을 기다리며 또다시 투구 위로 머리를 긁적이는데 저쪽에서 뭔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러셀이 날카롭게 이쪽을 노려본다.

생긴 건 또 묘하게 느낌 있게 생겨서 움찔하고 만다.

저 개눈깔 저거. 어떻게 사람 눈빛이 저렇담?

쓰읍 하며 입맛을 다시는데.

갑자기 누군가 날아올랐다.

에라이, 그러면 그렇지.

슈투카는 한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얘들아 싸움이다!"

전사들이 함성과 함께 돌격한다.

* * *

적들은 전원 전사다. 이 경우 마법사의 개입이 있다면 아주 쉬워진다.

다만 항상 미아나 내가 있다는 보장은 없지.

전면에 나서는 특성상 전사들은 자기들끼리 부대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마법사와 민첩직들은 각자 서로를 견제하며 고착상태가 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 상황을 한번 가정해 보자. 지금 마법 구사자인 나와 미아가 빠진다면 딱 적절한 밸런스가 나온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좋아요! 그럼 제가 지휘하는 거죠?"

"그래."

희우가 에길과 블랑쉐, 그리고 제니를 모아두고 쑥덕거린다.

러셀이 무표정으로 나를 본다.

"지금 뭐하는 짓인가?"

"훈련이요."

"훈련?"

"실전 경험이 부족한 친구들이라서……."

"[아케인] 둘을 때려잡아 두고 할 말인가?"

"아니, 그게 랭커나 하이랭커급 전투는 미숙한 게 맞습니다."

"내가 살면서 들어본 농담 중 가장 웃긴 소리군. 미숙의 미 자라도 있다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럼 이 파티에 처발린 일그림은?"

"그건 질 수가 없는 판을 깔아두고 시작한 거라."

"미친 소리."

말로는 농담이라고 하지만 러셀은 시종일관 정색이다. 음, 이 정도로 자신의 컨셉에 진지하면 좀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뭐, 다 각자의 생각이 있는 법이지. 네 생각은 존중하겠다만. 나는 여기 끼겠다."

"그러십쇼."

러셀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희우에게 말을 건다. 희우는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곰]의 멤버들은 뭣하나 싶어서 기다리고 있다.

먼저 칠 만도 한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자신감인 듯하다.

뭐 척 보기에도 장비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멤버 구성인지는 알 만하다.

이쪽도 호화롭긴 하지만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겉모습은 최대한 지양하고 있다.

언뜻 보면 낡아 보이고 거적때기 같겠지.

신경 써서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 두었다.

아다만타이드는 잘 흠집이 나지 않기에 피곤한 작업이지만, 그렇기에 우리 장비가 죄다 최상의 금속이란 것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반면 저쪽은 한껏 과시하듯이 번쩍번쩍한 고급 금속 재질을 자랑하고 있다.

미궁에서 겉모습으로 상대를 평가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대충 걸친 것 같아 보이게 신경 쓰면 속아 넘어갈 수밖에.

희우와 동료들이 탱커라는 역할군의 튼튼함을 마법 없이 어찌 극복하는지 한번 보자.

희우가 날아오르기 직전에 러셀이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여전히 정색이지만, 동시에 어딘가 묘한 표정이었다.

날 미친놈처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러셀이 날 저렇게 보니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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