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69화
43서버 – Lv.897 용사 키우기(5)
대마탑이 그러했듯, [하드스록]의 전사들도 그들의 요새를 구축한다.
침공이란 역전의 용사라 할 수 있는 하이랭커들에게도 대단한 위협이며 미리 대비를 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다.
다만 그들은 실로 전사답게 대마탑처럼 기만과 협잡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당당하다.
“언제쯤 터질까?”
“뭘 말하는 거냐.”
“침공 말이야 침공. 거인도 트롤만큼 머리가 나쁘던가?”
“……임박했다. [아케인]의 재수 없는 녀석들이 당했으니 더 빨라지겠지.”
“마지막까지 뭐가 아쉬운지 시간을 벌고 있는 건 또 그 녀석들이었지.”
담당구역, 네 곳의 메인 던전 중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는 [심연]을 제외한 곳을 각자 관리하고 있다.
시티즌에 있던 둘을 제외하면 그 둘은 죽었다.
갑작스레 그들이 랭킹에서 사라진 후, 그 일은 여러 곳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대체로 하드스록의 넷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다.
전사로서 경지에 이르는 이들이란 대개 자신만의 길을 걷기 마련이다.
사실 전사가 아니라 유배자 전반이 그럴지도 모른다.
“거길 좀 더 다듬어 두지그래.”
“좋은 생각 같군.”
왕국의 지하, 더 정확하게는 하드스록의 지하는 힘으로 파낸 길고 긴 던전들이 얽혀 있다.
용암의 강이 흐르고 불길의 간헐천이 존재하는 이 땅은 [지옥]이라고 흔히 불리는 깊은 지하의 번외 던전 직전까지 도달해 있다.
다른 누구도 돕지 않았다. 길고 긴 던전과도 같은 개미굴을 파낸 것은 [하드스록] 본인들과 그 아래에서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다.
하드스록이라는 길드명 아래에 묶인 다른 길드들도 많지만, 직속이라고 불릴 이들만이 이곳을 안다.
침공에 대항하기 위한 지하요새로서.
“누가 처음 알았을까?”
“뭘?”
“이런 식으로 침공을 대비하는 방식을.”
“그분이 알고 있지 않았나.”
“누군가에게 들었지 않겠어.”
“그도 그렇군.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알 수 없으니.”
다만 둘의 대화는 아주 큰 높이 차이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한 명이 트롤이어서였다.
트롤은 고개를 들어 파티원을 올려다보았다.
거인이 말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가 침공을 다시 감당할 수 있냐는 거지.”
“그 말이 옳군.”
거인이 해머를 들었다.
제 신장이 15미터인데 그보다도 더 긴 거대한 해머다.
이미 무기도 병기도 아니다.
건물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무기가 휘둘러진다.
쾅!
벽이 터져 나갔다. 천장이 흔들거리고 돌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트롤이 힘을 발휘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는 고레벨 트롤 전사의 힘을 받아 있을 수 없는 내구도와 위력으로 천장을 타격한다.
힘의 방향이 매끄럽게 전환된다.
거인의 타격으로 흔들리고 자칫 무너지려고 하던 천장이 진정된다.
힘과 힘이 맞부딪쳤으나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스킬을 통해 무효화되었다.
거인은 계속 작업했다.
벽이 으스러지다가 결국 터진다.
지하에 고여 있던 용암의 호수가 나타났다.
시야가 이지러질 정도의 열기가 후끈 피어오른다. 매캐한 가스가 타오르면 용암이 흘러 내렸다.
어둑한 동굴에 빛이 생겨났다.
“뜨끈하군.”
거인의 하반신이 흘러내리는 용암에 묻혔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맞는 갑옷이 없다는 게 거인의 가장 큰 단점이다. 그럼에도 거인이라는 종족과 레벨에서 비롯된 막대한 불 저항력은 용암의 열기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트롤이 인상을 쓰며 물러났다.
“너에게나 뜨겁겠지. 나는 불탄다.”
“나약한 녀석.”
트롤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그 뒤편의 관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장의 그 모습은 전사라기보다는 기사.
등에 메인 빛나는 대검은 그 유명한 [엑스칼리버].
고정 NPC지만, 바로 그렇기에 같은 파티원이 된 존재.
“또 용암 터졌나? 지옥이 가깝긴 한 모양이군.”
“뭐야, 아서냐?”
“본명으로 부르지 좀 마시지.”
“어차피 네놈 이름은 다들 알 건데.”
“하이랭커급 아니면 모른다. 그리고 리더가 너희를 부르더군.”
백발의 산발, 그럼에도 눈부신 은빛으로 보일 정도의 미남자.
노쇠한 육체에서도 흉흉한 기세가 감돈다.
노인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기세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만다.
트롤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만큼이나, 어쩌면 리더보다도 강한 존재다.
고정 유배자 NPC가 다들 그렇지만, 그중 최강을 꼽으라면 대부분 아서의 이름을 댈 것이다.
그의 존재를 알 정도로 연차가 찬 유배자라면 말이다.
그런 남자가 이렇게 늙었다.
인간이 아니게 되기를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으면서.
오로지 멀린을 찾기 위하여.
그리고 그 목적 끝에서 방황한 결말로서, 허무맹랑한 클리어의 꿈을 가진 채.
트롤은 피식 웃었다. 멍청한 남자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야말로 전사답다.
너무 오랫동안 그린스킨으로 살아온 그의 뇌가 그렇게 사고했다.
“흠, 좀 X 같긴 한데 그래도 멋진 녀석.”
거인이 미친놈 보듯이 트롤을 보았다.
* * *
변화무쌍하게 나타나는 유배자들을 제외하고, 오로지 리온의 시점에서 한 달이 지났다.
중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대체로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나날이었다.
이제는 며칠 만에 보는 유배자들이 그를 방금 전에 만났던 것처럼 대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키 아이템]이 될 만한 물건을 파악하는 요령도 생겼다.
그렇게 쌓인 숙련도와 함께, 리온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냥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사실 숨을 쉴 수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수압이 지금도 몸을 짓누르고 있다. 물속에서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이 아니었다면 진작 익사했을 깊이다.
차가운 심해의 소금물은 언제나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그간 단련된 시각이 깊은 바닷속의 어둠을 꿰뚫고 거대한 오징어의 모습을 망막에 새긴다.
인간의 육체는 신기하다. 고생에 고생만 거듭하는 것 같은데도 점점 강해진다.
자신을 러셀이라고 소개한 다른 세계의 나이트 크로우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용사라서 가능한 것이다. 다른 이들도 이런 고난 끝에 성장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몸이 망가지겠지.”
리온도 공감하는 바였다.
고아원에서부터 싸움은 져본 적이 없다.
다쳐도 금방 낫고, 몸도 쉽게 단련되었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형들보다도 더 힘이 강했을 정도니 자신의 특이성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바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거대한 오징어 ‘크라켄’이 리온을 눈치챘다.
기습이 반드시 유리하건만, 정신 집중이 흐트러졌다.
수중에서 15분에 달하는 혈투 끝에 괴물 오징어의 숨통을 끊어낼 수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터득하지 못했다면 이루어낼 수 없는 성과였다.
몸에 대단한 상처도 없다. 한 달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매일 같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거나 정말로 죽음의 문턱에 도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런 빈도가 줄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전 같았으면 도주조차 할 수 없었을 괴물들과의 연속된 전투마저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승리에, 그리고 성장에 뿌듯하기는 쉽지 않았다.
천사가 다가온다.
“뽁! 뽀그르륵 보글보그륵!(와! 이번에는 금방 잡았네!)”
그렇게 다가온 천사의 뒤편에는 조각조각 해체된 다른 크라켄들이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먹물 주머니가 터지며 심해의 어둠을 더 짙게 만든다.
전부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유배자들이 한 일이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뿌듯할 수 있겠냐고.’
리온은 쓰게 웃었다.
그는 약하다. 너무나도 약하다.
하나를 상대로 무난한 승리를 거둘 동안 과연 이 사람들은 몇 마리의 크라켄을 처리했을까?
하물며 리온의 씁쓸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변을 지키던 수백의 크라켄들을 처리하고 진입한 해저 신전에는 공기가 있었다.
고로 물이 들어차 있지 않았다.
매캐한 해산물의 내음이 폐부에 파고든다.
“아, 그렇게 심호흡하지 마. 여기 공기 맹독이야.”
“크헉. 쿨럭.”
리온은 피를 토했고 치유받았다.
이제는 잊힌 고대신의 신좌가 자리하고 있다는 해저 신전.
이들과 함께하는 여정은 리온이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곳으로 이어졌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희미한 빛이 있어 길게 이어진 복도가 보이는 가운데 분위기를 깨는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자, 피드백의 시간이다.”
거기서 오르골이라고 이름을 밝힌 유배자 파티의 리더가 파티원들을 모았다.
그리고 수백의 크라켄을 도륙 낸 천사와 그 동료들을 혼낸다.
신 정도는 죽여야 만족하는 걸까? 리온은 그저 웃었다.
* * *
희우는 분명히 천재다.
정씨 집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천재였을 것이다.
그런 희우에게 내가 무술에 대해서 더 가르칠 것은 없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짧지 않았으며, 희우의 빛나는 재능은 내가 취하는 효율적인 동작을 충분히 흡수해냈다.
이 귀여운 천사는 단순히 체술 대련이라면 나조차도 바짝 긴장해야 하는 수준의 무술가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희우는 좀, 느슨한 부분이 있다.
“자, 거기서 쿨다운을 생각하면 그걸 그렇게 써서는 안 되겠지?”
“으으윽, 그 생각은 못했어요.”
“기본기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으면 [은빛 섬광]은 탑재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거 단 하나만을 필살기로서 채용한 이상 응용에 익숙해야 해. 알겠어?”
스킬 활용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동안 보유했던 스킬들은 결국 신체 동작의 연장선이었으나, [은빛 섬광] 녹화와 재생만큼은 상상의 영역에 가까운 불합리의 결정체다.
그 불합리함은 직관성을 낮추고, 사용자의 응용을 힘들게 한다.
“게임 많이 해봤다면서. 그 액션 RPG는 잘 안 했나 봐?”
“해도 항상 근접 무기 캐릭터만 해서. 헤헤.”
게임에서 마법사 경험 전무.
이건 귀하다.
“솔직히 말해봐. 너 스스로 개척하는 타입 아니었지? 검색하고 빌드가 나오면 그거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했지?”
“정확히는 오라버니가 잘했어요. 저는 피지컬로 게임하는 스타일이어서!”
그 호색한 오라버니? 흠. 오랜만에 듣는군.
“어쨌든 대인전을 상정한 상황과 이런 대괴수전을 상정한 상황에선 녹화의 순서가 달라야 해.”
녹화하는 공격의 종류도 중요해진다. 단검은 대형 몬스터에게 충분한 깊이의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한 녹화와 재생이다.
엄청나게 길게 공격 판정을 유지하며 궤적을 만들어 녹화할 필요가 있다.
“하려고 한다면 달도 베어버릴 수 있는 스킬이라고.”
“그건 잘 상상이 안 가네요.”
“원래 스킬 활용은 상상력이다. 애송이.”
“상상……. 상상력……. 노력으로 해결해 보이겠어요!”
노력으로 해결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필요한 건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한다.
어릴 적부터 제 몸을 쓰는 것에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 몸에서 벗어나는 무언가에 대해 너무 취약하다.
아니면 그냥 바보라서 그런가.
상상력 그 자체를 다루는 마법사, 미아가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희우를 본다.
희우가 경악했다.
“너 너! 엄마를 그렇게 보는 거 아니야!”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제길! 부탁해!”
대충 그렇게 미아 교수님의 마법 교실 수강생이 늘어날 예감이다.
반면 에길은 문제없었다. 우려했던 터널시야는 확실히 개선되었다.
블랑쉐 역시 단순 사격에서는 결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묘기에 가까운 사격술은 정신없이 움직이는 적과 아군 사이에서도 약간의 틈만 있다면 정확히 저격해 낸다.
그러나, 여전히 디테일에서의 연계는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내가 뭘 가르친다기보다는 피드백이다.
프로 스포츠팀이 서로의 호흡을 맞추듯, 같은 순간에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조율이다.
이 경우 1에 1을 더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2가 되지는 않는다.
비교적 약한 제니 역시 그 사이에 끼어 있다.
의외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는 이 쌍검사는 메인 딜러나 메인 탱커의 자리에는 결코 서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소방수로서 존재감을 충분히 과시하고 있다.
대체로는 미아와 블랑쉐의 호위에 가까운 역할이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에길과 희우에게도 타이밍을 벌어준다.
“이거 어째, 사령탑은 제니가…….”
“절대 안 할 거예요?!”
“제가 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용사 후보생 리온을 본다.
용사 각성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
레벨로 친다면 한 달 사이에 엄청나게 성장했다. 처음이 500대 정도였다면 이제는 900에 가까운 스펙을 보여주는 와중이다.
조만간 일반적인 히어로 유닛의 영역에는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각성한 용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칭호는 용사 하나를 각성시켜야 얻는 거니 피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용사 치고도 몹시도 성실한 이 아이에게는 칭찬이 필요하다.
“리온은 아주 잘하고 있어. 흠잡을 데가 없어. 저 오징어들 레벨 몇인지 알아?”
“조금……. 아니, 많이 작은 녀석이니까 1200?”
“정확해.”
리온이 약간 풀죽은 목소리로 묻는다.
“저기 저 큰 녀석들은 몇 정도였을까요?”
“2천 좀 넘을걸.”
리온이 완전히 시무룩해졌다.
이런 이런.
이래서 타고난 천재 놈들은 말이야.
좌절이란 거에 익숙하지가 않아. 씩씩하게 ‘그렇군요.’ 하고 대답하란 말이야.
잠시 시무룩한 후, 리온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다만, 희우 쪽을 보고 무언가 결심하듯이 그렇게 한다.
의도했으나 그럼에도 이건 좀 기분이 나쁜데. 쟤는 내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직후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은 나머지 벽에 머리를 박았다.
“후, 좋아. 진정하자. 이런 건 오랜만이야.”
질투라니. 사람은 부끄러움으로 죽을 수 있다.
좋아. 인정하자. 희우는 나에게도 첫사랑이다.
서툴 수 있지. 처음엔 누구나 그런 법.
이렇듯 뇌에서 일어나는 호르몬과 전기신호의 상호작용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나 리온을 굴림에 결코 사심은 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인류에 공헌하는 것이다.
다음 스케줄의 몬스터 난이도를 조금 더 올리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리온은 잘하고 있으니 이 정도는 이겨낼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