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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74화 (27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74화

43서버 - Lv.3365 언더 그라운드(4)

이변이 일어났음은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다.

기동하지 않고 휴면 상태였을 천사가 비행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음 던전 룸으로 진입하기 전, 이미 완전히 제압한 곳인데도 말이다.

제니는 에길의 포션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병을 대신 사용했었고, 병을 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 병의 수면이 이유 없이 살짝 흔들렸다.

아주 미미했으나 제니는 그 흔들림을 포착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쌍검을 발검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서브 리더와 에길도 거의 동시에 움직인다.

반대편 방에서 출발한 천사가 날아들기 전까지 모두가 사태를 파악했다.

좁은 복도로 먼저 날아가는 천사들을 상대로 다시 전투가 벌어진다.

이쪽이라고 제대로 진형이 갖추어진 것은 아니지만 저쪽 역시 서둘러 달려오는 느낌이다.

기계적인 움직임에 촉박함이 느껴졌다.

리더가 외쳤다.

“아끼지 마!”

그것은 전술의 변화를 뜻한다.

지속 가능한 전투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가장 달라지는 것은 마법사다.

미아가 지팡이를 흔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등 뒤에 띄우고 다니던 [메모라이즈]의 구슬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깨졌다.

새파란 불길이 피어올랐다. 열기가 훅 끼쳐온다. 공기의 부피가 늘어남이 느껴진다.

아다만타이드 벽체는 끄떡없으나 옷가지는 연기를 피워 올리게 될 정도의 열기다.

푸른 불길 [헬 파이어]는 그대로 보스룸 방향 복도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재빠르기에 이미 던전 룸으로 진입한 기천사들을 빼고, 뒤편의 모든 천사가 불길에 휩쓸린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우선 마법이다.

마력을 아끼지 않는 마법사다.

순간적으로는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클래스다.

[헬 파이어] 정도 되면 제 아무리 마법 저항력이 높은 천사들이라도 멈칫할 수밖에 없다.

그 멈칫은 10초도 되지 않으나, 그것이면 충분하다.

안에 먼저 뛰어든 천사들이 쓰러졌다.

숨통을 끊을 시간은 없다. 천사는 너무 튼튼하고 현재는 위급 상황이다.

리더가 검을 빼 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대신 지팡이처럼 앞으로 내민다.

방향은 뒤편, 이미 지나온 길이다.

그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일단 앞으로 전진한다. 상황을 파악하고 아닐 시에는 바로 이탈할 거야.”

그 말에 서브 리더가 품속을 확인하는 것이 보였다.

제니도 확인했다. 작은 성물 조각은 무사하다.

심연의 보랏빛으로 번뜩이는 이 으스스한 결정이 비상탈출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계단을 발견치 못할 경우의 보험이다.

“명심해. 사태 파악이 먼저야. 신호하면 전부 동시에 이탈해야 하니 쫄아서 빼지 마!”

리더가 검을 지팡이처럼 휘두른다.

냉기가 되어버린 레바테인의 마력이 얼음의 장벽을 만들어낸다.

마법적인 동시에 물리적인 장벽이다.

마검 레바테인이 살짝 빛을 잃는다. 검의 마력이 소진되는 것 같아 보인다.

뒤편의 유적에서 던전으로 진입해 올 천사 떼를 지연시키기 위해 충전을 상당히 많이 소모한 모양이다.

허공에 아무런 수분 없이 마력만으로 이루어진 얼음이 갑작스레 나타났다.

그 얼어붙는 소리도 소름 끼쳤다. 주변에는 열을 흡수하는 불길이 타오른다.

그렇게 발생한 냉기가 [헬 파이어]로 달궈진 공기와 닿으며 기괴한 수증기를 만들었다.

폭발에 가까운 그 굉음은 근방의 천사들을 다 깨울 만큼 컸고, 좁은 곳을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하지만 이미 큰 소리는 어디선가 났다.

가장 가까운 방에서 온 천사들을 제외하고는 적이 더 나타나지 않았다.

제니는 움직이는 동시에 귀를 기울인다. 로건과의 파티에서는 제니가 척후였다.

이 또한 습관적인 행동이다.

그 잎사귀 요정의 귀에조차 던전의 벽을 타고 은은하게 전투의 소음이 들렸다.

훨씬 앞, 하지만 그렇게 멀지는 않은 곳.

제니는 생각했다. 보스룸인가?

블랑쉐가 그 생각을 긍정했다.

“이 정도 거리면 보스룸이다. 무언가 나타나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다만, 갑옷과…… 방패를 치는 소리? 그런 느낌이군.”

제 한 몸의 전투 기능보다 다른 곳에 포인트를 투자하는 척후 담당의 말이다.

신뢰도는 아주 높다. 모두의 표정이 굳어진다.

불길로 달궈진 자리를 돌파한다. 불타고 있는 천사들과 마주치지만 에길과 서브 리더가 정면에서 쳐낸다.

확실하게 제거하는 게 아니라 제치고 달리는 것이기에 어렵지 않다.

모두 한 번씩 의도적으로 천사를 걷어차고 달렸다. 정신을 차리는 게 늦어질수록 좋다.

다만, 이 경우 후방을 맡는 것은 제니와 리더다.

리온과 미아는 앞으로 보내야 한다.

그 역시 모두 숙지 중이다.

대열이 몇 걸음 만에 바뀐다.

그러는 중 제니는 하얗게 질린 어린 용사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은 처음 겪는 것이겠지.

아니, 사실 제니도 이렇게 꽉 짜여 돌아가는 전투 구도는 처음이었다.

임기응변이 아니라 정해진 방식에서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긴다면 모든 것이 망가지는 던전 공략.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 압박감을 파티원 모두 느끼고 있었으리라.

가장 이 비상식적인 파티의 경력이 짧은 리온이 한계에 도달했는가.

제니는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뻗어 나간 툭 치는 손길.

가볍게 등을, 격려하듯이.

작게 속삭였다.

“괜찮을 거야. 리더가 있잖아.”

리온의 목이 순간 뻣뻣해졌다. 자신의 긴장을, 그리고 불안을 자각한 모양일까?

곧바로 다시 살짝 끄덕인다.

제니는 피식 웃었다.

이제 그런 여유가 생겼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어떻게 매번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드는 걸까?

정신 건강에 너무 나쁘다.

오늘도 튜토리얼로 돌아가는 일은 없기를…….

* * *

생각을 해보자. 우리를 노리는 쪽에서도 어떻게든 조치를 취할 수는 있을 거라고 여겼다.

묘하게 미적대기에 도리어 수상했다.

무슨 목적이라도 있는가.

[하드 스록]이 용사 말살을 원했다는 것까지는 확인된 사실.

하지만 그 의뢰를 수행하는 [검은 곰] 길드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러셀이 이탈하는 것만으로도 추적해 오지 못했다.

이건 러셀의 제안이었다.

그는 용사를 육성하는 내 방식에 아주 만족했으며, 유일하게 랭킹에 오른 자신이 빠진다면 훨씬 더 추적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기에 그는 왕국에서 레미와 헨리 신관, 그리고 일그림의 도움을 받아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다.

그쪽을 통해서도 별다른 활동이 전달되지 않았다.

여신님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혼돈의 교단은 이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

기간이 짧아 주축이던 이들이 여전히 업무에 치이고 있으나, 신도도 체계도 멀쩡하게 굴러간다.

여신님은 전문적이냐면 확실히 아마추어지만, 그럼에도 교단의 우두머리로서의 경험은 풍부하다.

날이 갈수록 승천하는 교세의 힘을 빌려 혼돈의 눈은 어디에나 있다.

구원을 바라는 슬럼의 주민이 넘쳐나는 이곳은 더더욱 말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정황이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러셀과 내가 판단하기를.

“이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놀라울 정도로 의욕이 없군요. 사실 처음에 봤을 때도 귀찮아 보이긴 했어요.”

정말 목숨 걸고 수행하는 의뢰였다면?

슈투카와 랭커스트는 고위 랭커다.

그런 이름을 내걸고 용병 짓을 하는데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살아왔을 리는 없다.

처음부터 [검은 곰]은 크게 의욕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면 [하드스록]이 그것을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것이다.

한번 일을 단순하게 보기 시작하면 다른 것도 단순해진다.

심리전이라거나, 계획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것이 전사의 나라에 어울리기도 하니까.

“애초에 [하드스록]은 아무 생각도 없다면?”

“기득권 지키기에 말입니까?”

“그건 비약일 수도 있지만.”

‘이제 와서?’라고 생각을 해보았으나 그 결론이 가장 타당하다.

“예의니 캐묻지는 않았다만 애초에 넌 용사를 왜 싸고돌지? 내 부탁 뿐이라기엔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아닐 텐데.”

러셀이 물었다. 그렇다.

보통은 모른다. [용사]라는 유니크 스킬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

일그림은 게이머이기에 알고 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경영자들 사이에 충성심 같은 건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제각각 제 욕심으로 움직일 테니.

“분열?”

“거기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설득력은 있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뇌가 잠깐 상념에 잠겨도 내 몸을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한다.

내가 지휘를 전부 떠맡은 것도 아니며 파티원들은 아무 지휘 없이도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흐뭇함이 차오르는 와중, 우리는 보스룸에 도달했다.

대량의 천사를 상대로 저항하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보인다.

“저대로 싸우게 내버려 둬. 잠깐 보고 오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은신] 따위와 함께 시선을 잘 끌어주고 있는 탱커무리와 제단을 관찰하고 온다.

보스룸인 만큼 넓다. 그리고 천사들은 여전히 제단을 지키고 있다.

접근하는 순간 치고 들어올 것이다.

시간이 없다.

지능 스탯으로 인한 사고력의 향상이 주어지는 만큼 후반부의 전투는 더 빠른 판단을 요구한다.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는 튜토리얼 초기에서의 1분은 지금의 1초와 다를 게 없다.

미궁은 모든 면에서 사람의 능력을 인플레이션 시킨다.

내가 입을 열었다.

다들 내 입만을 보고 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특히나 희우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얼굴에 그려낸다.

공부하겠다는 것은 언제나 진심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판단을 참고하여 머릿속에 메모하려는 모양이다.

아이고 귀여워라. 우리 파티원들 어찌 이리 예쁠꼬.

“제니! 검은 곰 길드는 어떤 놈들이지?”

제니는 상황 판단이 좋다. 머리 회전도 빠르다.

적응한 이후부터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가장 빠르게 파악하는 파티원 중 하나다.

“야망보다는 안주를 좋아하는 녀석들이죠. 하지만 그만큼 정은 있어요! 로건이 오래 있어서 압니다!”

“그럼, 저놈들을 구한다.”

의문이 제기될 법도 하지만 다들 그냥 따른다.

새삼스럽지만 감동했다.

이게 파티지.

이 유적에 천사가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기 저놈들을 공짜 고기 방패로 세우고 다 잡아볼 기회다.

하이랭커 포함 전원 랭커급 탱커 다섯? 이걸 어떻게 참아.

* * *

그런 점은 블랙 베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뢰받은 길드 마스터이자 파티 리더이다.

길드의 주축은 함께 리프트를 드나들며 힘을 쌓아 올린 동료들이다.

호흡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일치하는 것이며 생각도 언제나 한 몸과도 같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파티플레이 내에서조차도 지금의 상황이 아주 위험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방패는 일견 만능 같아 보이지만 대단한 숙련도를 요구한다.

단지 들고 서서 버티는 용도뿐이라면 갑옷을 더 단단하게 입으면 그뿐이다.

방패의 묘미는 흘림, 반격, 그리고 [패리]로 최대한 상대의 소모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데 있다.

그건 적을 알아야 성립되는 행위다.

많은 이들이 방패 전사 혹은 탱커를 무식한 놈들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외모와 거친 언행에서 오는 오해일 뿐.

실제로는 그 어느 형태의 클래스보다도 적을 잘 알고 자신의 한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나쁘다.

랭커라 한들, 천사를 상대한 경험이 많을 수는 없다.

거기에 명백하게 스펙에서도 밀린다. 심지어 수적 우세도 없다.

탈출용 성물, 탈출용도 받아와야 했다. 아닌가? 탈출용도 쥐여준 것이었나? 그걸 다 털어 넣은 내가 문제인가?

행동의 짧은 틈마다 더 나은 방향을 찾으려고 한다.

방패에 엄청난 힘이 가해지고 몸이 뒤로 살짝 밀려났다.

“교대!”

재빨리 뒤와 교대한다. 수적 우위마저도 천사들에게 있으나 방의 사각 모서리로 달려가 단단한 방진을 형성하자 그 우위는 상쇄된다.

블랙 베어는 제 몸에 난 상처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포션을 찔끔 삼켰다.

지구전이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일단은 버텨 활로를 찾아야 한다.

베여 피가 흐르던 곳이 제법 잦아든다.

앞에 방패를 들고 나선 슈투카 뒤에서 검을 찌른다.

기천사 하나가 그 찌르기에 걸려들 듯하다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치천사가 양손 대검을 치켜들고 내려쳤다.

슈투카는 잘 받아내었다. 몇 번의 광채가 방패에 깃들며 신성으로 타오르는 대검의 일격을 흘렸다.

“다시 교대!”

블랙 베어가 앞으로 나선다. 천사들 역시 순차적으로 찔러 들어온다.

비행을 하니 위에서도 온다.

몸 전체를 가리는 대형 방패를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패리]

기계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 유일한 자비다.

타이밍은 이미 방패에 익숙한 블랙 베어가 쉽게 측정할 수 있다.

팅 하고 신성의 불꽃째로 휘감아 되돌려준다.

기천사 하나가 휙 물러난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제대로 된 타격이긴 할까?

다음 공격을 안간힘을 다해 받아냈다.

급기야 유니크 스킬을 발동한다.

유니크 액티브 [흐름의 원]

주변의 모든 공격이 뒤틀린다. 빨려 들어가 하나로 모이고 다시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천사들의 힘이 그대로 되돌아간다.

약간의 여유.

그 사이에 블랙 타이거가 다른 유니크 스킬을 발동했다.

유니크 액티브 [불침의 산맥]

방패를 바닥에 내리찍음과 동시에 방패의 크기와 형태가 변하며 장벽을 만들어냈다.

천장까지 닿아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 형성된다.

폭음과도 같은 천사들의 추가적인 공격이 바깥에서 들어온다.

분리의 순간 빠져나가지 못하고 붙들린 기천사 하나를 다 같이 두들겨 패서 쓰러뜨렸다.

랭커스트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이미 갑옷이 성한 곳이 없다.

“형님, 우리 X된 겁니까?”

“그래.”

“그럼 형님들이 살아야죠.”

“시끄러 닥쳐봐. 계단이 보이긴 했어. 제단 뒤쪽에.”

멋없게 튜토리얼 운운하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다음이 없는 두 명.

하이랭커인 둘이다.

“저희는 아직 100년 덜 찼습니다.”

“좀 닥치라고. 하, 시발 X같은 거 느낌 안 좋을 때 바로 차버려야 했는데. 이딴 걸 왜 해서.”

그냥 어디 변방에 숨어나 지낼걸. [하드스록]이 뭐라고.

슈투카가 피식 웃었다.

“전 하기 싫다고 했었습니다. 형님.”

그 말에 체념이 들어 있어 화가 난다.

누구 멋대로 각오를 하고 있나.

이 자식들을 다시 튜토리얼로 돌려보낸다고? 그럴 수는 없지.

심지어 그 계단은 우리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심연의 성물을 많이 써보진 않았다. 이건 너무 귀한 소모품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대충 안다. 그렇게 형편 좋게 계단 앞에 뚝 떨어질 리가 없지 않나.

그럼 이 녀석들이 희생해도 개죽음이다.

통로가 보였던 걸 떠올린다. 그리고 지금 보유하고 있는 스킬들도.

“끄으으.”

쟁여놓은 열매도 다 꺼내며 생각한다. 뭘 어떻게든 해야 한다. 길드 마스터는 책임을 지는 자리다.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곰탱아. 내 스킬 깨진다.”

의형인 블랙 타이거가 말한다. 재촉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담담히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 들린다.

블랙 베어는 화가 났다. 이 X신 같은 의뢰를 받아들인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그때, 일시적으로 형성된 작은 방 속으로 누가 스며들어 온다.

“암살자?”

이런 상황임에도 눈에 확 들어오는 늘씬한 미모.

고혹적이면서도 냉혹한 미소가 어린 암살자.

외모만큼은 인상적이었기에 슈투카는 기억하고 있다.

한 발 갈긴 후에 구경만 하던 러셀 파티의 일원이다.

“힘들어 보이는데?”

암살자가 말했다.

블랙 베어는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너무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이라곤 하나 이 녀석들을 죽이러 온 거 아닌가.

애초에 이 유적 자체가 자신들을 위한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원하는 말이 거짓말처럼 암살자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죽는 것보단 [하드스록]을 배반하는 편이 낫겠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이는 없다. 블랙 베어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신에게 맹세도 할 수 있다! 살려만 다오!”

“방패를 여는 즉시다. 달려서 합류해라. 우리가 원호하지.”

암살자는 바닥에 짙은 보랏빛의 결정을 던져 깨뜨렸다.

심연의 신성이 그 몸을 휘감는다.

탈출수단! 블랙 베어는 그 모든 것이 탈출수단을 보여주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연출된 장면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상대 파티의 노파심과는 별개로 그걸 눈치채더라도 잡을 지푸라기는 이것뿐이었다.

“들었냐? 도와준단다! 다들 죽지 마라!”

유배자끼리 만날 수 없는 짝수 층과 달리, 홀수층에서는 간혹 있는 일이다.

큰 위기에서 즉석으로 연합할 수밖에 없는 경우.

염치없게도 블랙 베어는 좀 더 젊던 시절. 모험을 그만두지 않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의 생각에는 왕국도 좀 더 낭만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그렇지 않았지만.

엉덩이에 곰팡이가 피고 나서부터일까?

그래도 지금은 일단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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