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75화
43서버 - Lv.3365 언더 그라운드(5)
블랑쉐가 돌아왔다. 심연의 신성이 흩어지고 그 사이에서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교섭은 성공했다.
나로서도 방해가 좀 들어왔다고 이 던전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그리고 저들을 회유해서 살릴 수 있다면 무조건 좋다.
[검은 곰] 길드는 로건 같은 인물이 무탈하게 소속되어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인상은 없다.
하이랭커 씩이나 보유한 길드라면 무슨 꿍꿍이라도 500레벨 미만은 활용할 곳이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살려둔다면 [침공]을 막기에 좋은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내가 모든 곳을 방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인력은 다다익선인 법.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할 뿐이다.
다만 지금부터는 파티 플레이가 아니다.
그저 난전.
서로 더 이상 자세하게 전술을 수립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까지가 정교하게 짜둔 전술적 행동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모조리 임기응변이다.
살얼음판이 아니라, 물에 떠 있는 얼음 조각을 밟고 강을 건너는 것과 다름없다.
묘기를 부려야하는 상황이라는 것인데, 스릴 넘치는 건 좋지만 실수하는 순간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해 심연의 성물을 분배해 두긴 했다.
그래도 세상일은 알 수 없는지라 걱정을 시작하자면 속이 쓰리다.
하나 이겨낼 것이다.
나는 믿는다. 우리 파티원들을, 그리고 그들을 길러낸 나를.
고로 내 입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지령도 없다.
그럴 시간도 없다.
지금부터는 파티원들이 각자 알아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야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말없이 움직인다.
제니와 리온은 미아를 지키고 선다.
천사들의 눈이 번뜩였다.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우선순위에 대한 정보는 이미 공유했다.
천사란 기계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다.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정해진 패턴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 패턴은 아주 합리적이다.
쉬운 상대.
어둠을 띈 상대.
언데드를 가장 우선해서 노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미아가 노려져서는 안 된다. 천사들이 뱀파이어 마법사의 존재를 깨닫는 것은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
한순간 희우보다 앞으로 나선다. 저쪽의 방패가 무너지기 전에 시선을 끈다.
파티가 안정되고 나서는 이렇게 직접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줄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일도 생기는 것이다.
“원호할게요!”
내 생각을 눈치챈 희우가 엄청나게 빠르게 말했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았다면 원할게요로 들리겠다. 이 녀석아.
뭘 원하는 거야.
거대한 방벽의 뒤에 숨은 탱커들에게 관심이 쏠려있던 천사들이 우리의 존재를 깨닫는다.
현재 보스룸의 천사는 모두 50체 남짓. 아마도 기존보다 많다.
원래 우리가 돌파하며 나눠 잡았어야 할 천사들이 몰린 탓이다.
생각한다.
일이 발생하고, 텅 비어버려 공짜로 통과한 던전 룸이 5개였다.
지금까지의 배치대로면 각 룸마다 10체 가까이는 존재했을 것이다.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줄었을까?
보스룸에 원래 존재하던 ‘보스급 천사’는 몇일까?
기천사의 숫자를 세려고 했다.
셀 수가 없다. 너무 빠르다.
그리고 검을 바로 들어 올려 세워야 했다.
불길이 지나친다.
새하얀 신성의 불길.
“있구만.”
눈으로 제대로 볼 수 없는 속도였다.
그리고 속도는 곧 힘. 끔찍한 수준의 충격이 내 몸을 뒤로 밀어내었다.
다시 노려지는 것은 언데드인 나다.
상대가 선회할 것을 예측하며 몸을 박쥐로 흩는다. 몸의 절반 정도만.
전투기의 채프와도 같다. 내 본체가 어디인가를 순간이나마 교란시킨다.
검을 역수로 쥐고 바닥에 내리꽂는다.
현재 본질적으로 소드 마스터이자 마투사인 나는 결국 마법직에 걸쳐져 있다.
전문 전사에 가까운 천사와 칼로 치고받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다시 서늘한 기척.
얼음이 피어올라 주변을 감싼다.
그렇게 속도를 늦추고도 간신히 받아낸다. 정확히 심장을 노릴 것을 아니 막아낼 수 있었다.
속도 차이가 현격하다. 이건 내가 상대하면 안 된다.
희우가 따라붙는 것이 느껴진다. 보인 것이 아니다. 느껴졌다.
내 마력이 아닌 검의 마력을 소모하여 주변에 냉기를 흩뿌렸다.
흔히 게임에서는 적을 느리게 만드는 것이 물의 원소인 냉기지만 현실이 된 미궁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물이란 결국 물리다.
뾰족한 얼음 결정의 형체를 가진 물리적 실체가 사방에 수없이 발생한다.
비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기천사들이 주변을 난다.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니 이런 사소한 장애물도 타격으로 누적된다.
그 사실을 아니 천사들도 한호흡 정도 속도를 늦춘다.
그렇게 적이 잠깐 느려진 순간 말한다.
“셀 수 있냐!”
“못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희우가 비명처럼 달려들며 나를 공격하는 천사 하나를 쳐냈다.
레바테인을 한 손으로 든다. 대신 왼손에는 챙겨온 천사의 세라믹 검을 들었다.
레바테인은 냉기의 마력을 두르고 오러 블레이드는 세라믹 검에 두른다.
목표는 단지 나를 노리는 적들의 무기에 마주 대기.
쾅 쾅 하는 소음이 울렸다.
정신없이 사방에서 타격이 들어온다.
치천사들이 도달할 무렵 나는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갑옷이 내구도를 다한다.
그리고 에길이 내 위치에 도달했다.
“정비!”
에길이 외치며 도끼를 휘둘렀다. 그는 나보다 근력이 높으며 체구도 크다. 더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다.
특히나 팔꿈치나 어깨 같은 중요 부위는 방패에 견줄 만큼 단단하게 덧대어둔 갑옷이다.
재질은 통짜 아다만타이드.
관절을 노리는 것을 알기에 몸을 회전하며 떨쳐낸다.
그러면 내게는 빈틈이 생기겠지만 그 틈새로는 블랑쉐의 총격이 파고들어 메꾼다.
천사 몇몇이 에길의 빈틈을 노리다가 물러났다.
나는 그대로 차원 수납 주머니를 열고 갑옷을 바꿨다.
환복 속도도 전장에선 중요할 수 있다.
몸을 박쥐로 분해하여 갑옷을 벗는다. 의복을 박쥐화하지 않으면 빠르게 알몸이 된다.
새로 꺼낸 갑옷 속에 파고들어 육체를 형성.
그 짧은 틈에 대천사 몇몇이 마법을 자아낸다.
그리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 마력이 끊어졌다.
미아가 마법전을 시작했다.
다른 천사들의 눈길이 우리 마법사에게 가서 닿는다.
나는 생각했다. 미아를 지켜? 아니지, 그 시간에 적을 하나라도 먼저 제거하는 편이 난전에서는 이득이다.
단련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제니와 리온이 충분히 지켜 내리라 믿고 다시 달린다.
치천사들과 마주쳤다.
마력을 아끼기 위해 오러 블레이드까지만 사용한다.
치천사의 속도는 따라갈 수 있다.
기천사를 희우에게 맡기고 치천사와 충돌한다.
날개를 공격 수단으로 활용하는 이 녀석들은 팔이 넷이나 다름없다.
레바테인으로 받아내고, 마력으로 흘리며 세라믹 검을 찔러 넣는다.
무기 자체의 성능에 더해 오러 블레이드가 발해지며 날개를 가른다.
제 날개가 저항 없이 부드럽게 갈라진 것이 의외라는 듯 치천사가 몸을 부딪쳐 온다.
그 뒤로 다른 놈 하나가 더 보였다.
기억해 둬야 한다.
자세를 숙인다. 베기가 위로 지나간다. 신성한 화염이 머리카락에 스치며 옮겨붙었다.
근력조차 적이 위지만 유연하지 못한 움직임은 컨트롤하기 비교적 쉽다.
품으로 파고들며,
으아아악 신성 겁나 따갑네.
씨알도 먹히지 않을 관절기 대신 세라믹 검을 하나 더 꺼내어 찌른다.
힘은 거의 싣지 못했으나 오러 블레이드만큼은 발동한다.
치천사의 힘찬 베기에 실린 힘은 그대로 카운터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역시 내구도가 문제지 성능은 좋단 말이야.
몸이 불타는 것을 감수하고 박치기.
숨이 끊어져 가기에 힘이 빠진 치천사를 밀어붙인다.
이럴 때, 제 동료를 냉정하게 찌르는 것은 미친 요정들이다.
천사들조차도 그런 짓은 쉽게 하지 않는다.
그 틈에 날개에 박아둔 검을 회수하고.
무너진 시체 사이에서 레바테인을 땅에 박고.
냉기가 다시 퍼진다. 물리적 방벽으로서 사용될 얼음이 피어나고 검을 든 치천사가 강력한 비틀어 찌르기를 구사하는 모습을 인지한다.
검에 더 힘을 준다.
레바테인이 약간이지만 아다만타이드 바닥을 파고들었다.
한 손으로 저런 일점 돌파를 흘려내려면 이런 지지대가 필요하다.
레바테인의 내구도가 그대로 내가 가진 저지력이 되었다.
아티팩트는, 그것도 멸망의 거신 수르트의 마검은 세라믹 창보다도 튼튼하다.
냉기의 볼길 사이에서 열기를 띤 불꽃이 튀고, 옆으로 흐른 찌르기가 내 옆구리를 스치고.
세라믹 검을 목에 꽂아 넣었다.
신성한 화염이 내 몸에 옮겨붙는다.
다시 에길의 위치를 확인한다. 돌아볼 틈은 없다. 기척으로 조금 뒤까지 따라오고 있음을 안다.
“에길!”
“그러지!”
짧은 한두 마디로 무엇을 원하는지 전해진다.
몸이 회복되는 동안 에길이 다시 앞으로 나서 시선을 모았다.
다만 이번에는 내 어그로가 조금 강했다.
무시하고 나를 향해 달려들던 기천사 하나를 검으로 받아내려고 한다. 총탄이 지나간다.
기천사가 비틀거린다.
레바테인을 전력으로 찔러 몸에 꽂아 넣는다.
한 손 베기보다 이게 더 확실하다.
그리고 검을 비틀어 뽑으며 발로 차버렸다.
천사가 버둥거리며 이질적인 혈액을 바닥으로 뿌린다.
이건 마실 수가 없다. 바르바로이의 권능으로도 컨트롤할 수 없다. 아쉽네.
손해 생각을 안 한다면 가끔 이런 전투도 즐겁다.
난전. 좋지 않은가.
* * *
블랙 베어는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난전을 보며 감탄했다.
파티 제각각의 판단이 잘 맞물려 돌아간다. 그가 하이랭커가 되기 위해 속했던 파티에서도 저렇게까지 정교한 연계는 보기 힘들었다.
거기에 개개인의 기량도 월등하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상적인 절도가 보인다.
물론 그 사실을 오래 지켜볼 수는 없었다.
달리는 와중에 그럴 여유는 아주 잠시일 뿐이다.
가장 앞으로 튀어나와 푸르게 불타는 마검과 천사의 세라믹 검을 쌍수로 휘두르는 사내가 모든 시선을 받았다.
이미 구석으로 몰려 있던 탱커들은 천사들의 주위에서 살짝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달리고 또 달린다.
순간적인 동작 속도에서 따라가기 힘들 뿐, 탱커의 이동속도는 아주 빠르다.
힘에 엄청나게 투자하기 때문이다.
금방 저쪽 파티의 선두와 합류할 수 있었다.
몸을 틀고 방패를 천사들을 향해 돌린다.
의형, 타이거가 가장 뒤편에서 공격을 받으며 달려오고 있다. 쓰러진 자는 없다.
아직은.
해야 할 일은 분명.
탱커는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이 역할이다.
대방패를 바닥에 크게 내려친다.
[방벽]
스킬이 발동하며 흐릿한 막이 나타났다.
몇몇 천사들의 공격이 그곳에 닿아 튕겨 나간다.
“이봐! 그게 아니야!”
푸른 마검을 휘두르는 사내가 소리친다.
그를 원호하고 보스를 상대할 생각이었던 블랙 베어가 생각을 바꾼다.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틈은 없으니까.
사내가 가리킨다.
그들이 달려 들어온 입구.
보스룸의 입구.
“아!”
노련한 탱커는 무의식 아래까지 잠들어 있던 악몽을 떠올렸다.
[언더 그라운드 유적].
무수히 많은 천사들이 바깥에 존재한다.
잘못 건드린다면 그 천사들이 모두 깨어나 끝없이 추적해 온다.
하이랭커로서 쌓아온 경험이 현재의 상황을 짜 맞춘다.
유적에 이런 형태의 던전이 있다는 사실은 들어본 적조차도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그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이 파티가 공략법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아는 천사들의 습성.
이 보스룸에 존재하는 강력한 천사들의 지위.
무언가를 지키는 듯한 제단.
그렇다면 여긴 유적의 깊숙한 곳.
바깥에 있는 천사들 역시 이곳을 지키기 위해.
“타임어택인가?”
“맞아! 가서 막아!”
“미안하다!”
“그건 나중에!”
달린다. 길드원들에게 손짓한다.
그가 이해한 것을 설명할 틈이 없다.
하지만 모두 믿고 따라온다.
지금 해야 할 것은 그게 아니다.
이 파티는 여기까지 진입하기는 했으나 바깥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천사들을 모두 제압하고 온 것이 아니다.
그게 가능할 것이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마도 자신들이 여기 나타났기에.
그 무수한 천사들이 보스룸으로 몰려들고 있을 것이다.
이런 설계의 던전이었나.
처음부터 시간제한이 있는 보스전이나 다름없다.
“방진을 펼쳐라!”
탱커라면 너무나도 익숙한 적을 막아서는 포지션.
하이랭커 둘과 랭커 셋이서 보스룸으로 진입하는 입구 앞에 선다.
“아무것도 통과할 수 없도록 막아!”
스킬들이 터져 나온다.
유니크 스킬은 이미 조금 전에 소모했다.
하지만 쿨다운은 돌아온다.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안쪽의 보스전이 끝날 때까지 바깥의 천사들을 누구 하나 들이지 않는다.
불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결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수많은 형체들이 몰려든다.
복도의 옅은 빛 사이에서 무심하고 투명한 눈 위의 링만이 으스스하게 빛나 눈에 들어온다.
“여긴! 못 지나간다!”
군집이라고 부르기도 두렵다.
차라리 천사의 격류라고 불러야 할 것들이 탱커들에게 들이닥쳤다.
* * *
와와와, 잠깐만, 이거 대응이 너무. 으아악.
희우는 그 와중 여기저기 베이고 있었다.
천사의 세라믹 검은 당연히 천사에게도 잘 통하는 고로, 희우 역시 종족 특성적인 물리 방어력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가뜩이나 암살자와 전사의 중간쯤인 클래스라 장비의 장갑이 얇다.
중갑을 걸칠 수도 있겠으나 기천사가 그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상대도 같은 기천사만 아니라면 말이다.
이미 종족 자체의 기동력이 이상할 정도인데 [오버클럭 익스텐션]이라는 추가적인 부스터도 달고 나온 천사들은 더더욱 이상했다.
동작의 속도마저도 부스트한다.
막아내려면 예측이 필요했다.
그런 속도의 상대가 셋이다.
반격은 애초에 접어두었다.
가능하면 막고, 피하고.
사고의 속도만큼은 빨라진 속도만큼 부스트되지 않은 모양이다.
입체적인 기동!
천사의 비행에 어릴 적부터 배워왔던 그늘진 움직임을 접목하려는 시도는 계속해 보고 있었다.
대인전에 가까운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빛을 발한다.
한 번의 움직임, 그리고 비행에도 여러 번의 페인트가 섞인다.
방향을 꺾을 때도, 위치를 바꿀 때도, 하다못해 몸을 틀 때도.
기계적이고 정직한 반응을 보이는 천사들에게 이런 모션은 익숙한 것이 아니다.
저런 속도를 낼 수 있다면 냅다 달려가 찌르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적은 쓰러질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희우가 몰리는 것은 적이 5체나 되어서였다.
현재 이 전장에서 저 속도에 제대로 대응하고 반격마저 넣을 수 있는 것은 희우뿐이다.
그렇기에 모든 공격이 집중되고 있다.
역할은 우선 살아남기.
일부러 거리를 벌리고 자신에게 주목하지 않는 보스 천사만을 노려 시비를 건다.
그리고 몇 군데 상처를 입으며 다시 도망.
꼬리에 꼬리를 잡는 숨바꼭질이다.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슬슬 화가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할 때 어깨에 다시 크게 베였다.
몸의 방향을 뒤집으며 수직 낙하. 그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번쩍임.
빛으로만 보이는 그 움직임에 가까스로 검을 교차해 막는다.
사실 막았다기보다는 어떻게 튕겼다는 게 더 옳다.
미처 다시 무언가를 하기 전에 상대 천사의 다음 공격이 들어온다.
하지만 이미 빠지는 도중.
위와 옆에서 다시 들어오는 공격.
역으로 한쪽을 돌파했다. 몸에 상처가 다시 늘어난다.
피가 죽 뿌려진다.
오래는 못 버티겠는데.
하지만 이 상황에서 탱킹은 자신이 맡을 수밖에 없다.
포션은 마지막까지 아낀다.
날개가 손상되면 복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핀 하나가 뜯겨 나갔다.
공격의 끝자락에 걸린 탓이다.
병을 꺼내 공격을 병으로 튕겨낸다.
그 와중 손가락이 둘 잘렸다.
병의 내용물 튕겨 올리고 날름 핥는다.
날개와 손가락이 복구되기 시작한다.
다른 공격을 단검으로 쳐내며 병을 갈무리.
이 비겁한 녀석들. 포션 타임 매너 몰라?
불평하며 다시 빙글빙글 돌며 곡예비행.
예측 불허하는 방향으로, 은밀한 그림자 같은 비행을 구사하며.
다섯 중 둘 이상의 인지에서 순간이나마 벗어난다.
그러나 모두의 사각에 몸을 담을 수는 없다.
다시 들어오는 찌르기.
아이고 죽겠네!
* * *
보호받는 마법사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미아는 사고를 분할했다.
한쪽은 눈앞의 호위를 지원하는 쪽으로.
다른 하나는 이 상황에서, 완전히 자신에게 자율이 주어진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상황을 호전시킬 것인가.
대마탑에서 털어온 무수한 장비들은 대부분 마법사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 덕에 소위 말하는 장비빨은 미아에게 모두 집중되었다.
단독으로는 천사를 상대하기 버거운 제니와 리온은 그럼에도 든든한 인간 방벽으로서 언데드인 미아를 보호한다.
생각을 해야 한다.
이렇게 인력을 잡아먹고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우선은 근접 대응이 전혀 되지 않는 미아 본연의 약함.
그리고 단체전에서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전장 컨트롤의 중요성.
밥값을 해야 할 때다.
배운 것을 되새기고, 한 번 더 검토한 끝에.
“내가 더 강해.”
천사는 본질적으로 마법의 종족은 아니다. 마력을 다루는 것에 능숙할 뿐 전사의 종족이다.
그중 하나인 대천사는 어디까지나 마검사형 천사일 뿐.
순수한 마법사에 적합하지는 않다.
비록 태생에 의하여 강력한 마력량을 자랑하며 마법사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저것들은 결국 반푼이다.
그러니 스펙 격차가 있음에도, 제 아무리 미아가 순수한 마법사이며 하이랭커 이상의 장비 보정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10 대 1에 가까운 마법전이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확인된 순간.
미아는 결단했다.
마법전을 잠깐 멈추고 한 방에 엎어버린다.
아빠가 그랬다.
[천사는 마법에 강하지. 그렇게만 말하면 마법으로 상대해서는 안 된다고만 들리지만.]
그야 말로 위대한 마법사답게,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듯이.
[그건 약한 놈들의 변명이긴 해.]
혹시나 모를 실패를 대비하여 행운의 성물 하나를 바닥에 깨뜨렸다.
함부로 쓰기엔 귀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쓸까.
바람 정령의 결정 역시 쏟아낸다.
비상시 부족한 마력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만 지금이 비상시다.
[아케인]의 노인이 쓰던 지팡이를 오른손에 든다.
더 큰 보정을 위해 왼손에는 소년의 인형이 사용하던 완드 역시 든다.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여러 장신구와 장비들에게서 마력을 끌어모은다.
임시 배터리처럼 마력량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아티팩트나 혹은 그와 유사한 것들.
“리온, 제니. 부탁해요.”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강렬한 마력,
한 개인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거대한 존재감이 보스룸을 잠식했다.
천사들 몇몇이 멈칫하며 이쪽을 본다.
[역설의 제논]
천사들과의 공간이 주욱 늘어나고.
리온과 제니가 미아의 앞으로 당겨진다.
갑작스럽게 적과의 거리가 벌어지자 둘이 당황한다.
“1분만 벌어줘요.”
제니는 상황을 알기 위해 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메모라이즈 구슬들이 터져 나간다. 그 자리를 비우고 새로운 마법들이 새겨져 간다.
아다만타이드 바닥을 칠판 삼아 무수한 마력의 실이 진을 그려간다.
층층이 쌓여 올라가는 마법은 지나치게 뭉쳐 이미 미아를 감싼 고치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주변을 장악하고 잠식하듯이 마법이 뻗어 나간다.
그것이 술식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니는 그만 오싹함을 느꼈다.
리온도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몇 걸음 더 앞으로 나가서 멀어진다.
눈이 돌아간 몇몇 기천사들과 마법전에서 해방된 대천사들이 밀려들고 있다.
어쩐지 차라리 이쪽이 더 안전해 보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