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80화
왕국 - Lv.3212 [하드스록](3)
[용사]란 어떤 스킬인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소유자의 기초 스펙을 ‘드래곤’으로 만들어주는 스킬이다.
물론 용으로서의 브레스나 천연 마력로인 드래곤 하트 같은 건 없다.
그러니 정말로 드래곤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드래곤에 비견되는 것은 육체의 내구도와 생명력, 근력과 지구력 전반을 포함한 신체능력의 초인적인 향상.
그리고 마력을 다루는 데 붙는 온갖 보너스 덕분이다.
단순 스펙이라면 정말로 최강의 고위종족인 드래곤에 비견될 만하다.
범용성도 높다.
힘 전사 베이스기에 민첩직과는 그다지 호환이 되지 않지만 신체능력은 언제나 옳다.
그러므로 주력 플레이스타일에 무관하게 호환되는 유니크 스킬이다.
유일하면서도 치명적인 단점은 약체 종족인 인간 상태를 유지하거나 이후에 인간으로 종족 변경을 할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건 미궁의 종족 변경 시스템 상 보기보다 더 큰 리스크다.
카드로 인한 종족 변경은 시스템적으로나 마법적으로나 환생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종족을 바꾸면 유배자로서의 삶의 궤적도 뒤틀린다.
그것은 마인드맵이 부분적으로 초기화 되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미 뻗어 나간 가지와 스킬의 열매가 가지치기 당하고, 새로운 종족으로 감당할 수 있는 스킬들만이 변경 후에도 살아남는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종족 제한’으로 사라지는 스킬은 포인트로 환원되지만…….
인간은 너무 약한 종족이다.
그렇기에 종족 기본값이 너무 낮다.
그래서 더 강한 다른 종족에서 인간이 된다면 마인드맵의 대부분이 그대로 증발해 버린다.
실제로 나는 다시 인간이 됨으로써 뱀파이어일 때만 사용 가능한 모든 스킬을 포인트로 돌려받았다.
하지만 [피의 군주]를 포함한 뱀파이어의 스킬들만 그렇다.
종족 제한이 없는 스킬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평균값 혹은 기본값이라고 부르는 범위를 벗어난 탓이다.
뻗어나간 가지가 포인트로 환원되지도 않으며 그 수치만큼 레벨도 감소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인간이 [소드 마스터]거나 [마투사]라면 그것은 이미 ‘대단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다.
만약 내가 변경한 종족이 태생적으로 마법사인 그루터기 요정이었다면 좀 더 많은 스킬들이 보존되었을 것이다.
요정은 인간과 근력은 큰 차이가 없겠지만 더 민첩하고, 더 마법적이다.
고로 소드 마스터 루트의 일부 스킬들이 남았을 것이며.
마투사는 거의 고스란히 남았으리라.
만약 변경한 종족이 천사나 악마였다면?
그 종족의 기본값은 소드 마스터나 마투사인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높다.
그 경우 내 원래 마인드맵은 고스란히 보존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용사 빌드는 처음부터 인간을 계속 유지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포인트를 아껴 손실을 줄이는 방식으로 빌드한다.
이건 언제 훅 갈지 모르는 미궁에서는 대단한 리스크다.
실행하려고 했던 일그림도 간이 참 큰 거지.
게임 시절이라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게이머들은 원래 손해 보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러니 보통 손실을 감수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인간으로 계속 가면서 용사 빌드를 쌓아가는데.
게임 시절이나 지금이나 연약한 인간 플레이 그 자체도 이미 리스크임은 변함 없다.
인간은 알다시피 미궁에서 가장 장점이 없는 종족이다.
특징이라고 해보아야 강점이 없는 만큼 단점도 없다는 것.
그러나 만능은 육각형 그래프가 클 경우에나 의미가 있다.
스펙 자체가 낮은 인간은 명백한 무능이다.
그저 모든 유배자는 본래 인간이며, 지정된 [메인 던전]을 클리어하고 상징하는 룬을 손에 넣어 미궁의 마지막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상징성뿐.
최후의 최후에 모든 괴물과 마법과 신비를 넘어 결국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인간이다.
대충 게임 난이도 조절과 나름대로 인간찬가적인 설정을 넣기 위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거침없이 마인드 맵 위의 가지를 뻗어나간다.
본래의 내 마인드맵은 상당히 기형적이었다.
포인트 투자를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버그성으로 바르바로이의 권능을 획득함으로서 조건을 강제로 만족 시켰다.
마투사 루트를 간 것도, 바르바로이 클랜의 특성과 가장 잘 맞을 뿐만 아니라 마법 사용을 보조하는 패시브를 찍을 수 있는 클래스기 때문이다.
그때는 선택지가 없었다.
나중에 소드 마스터를 취득한 것도 가성비 좋은 화력의 추구 때문이다.
파티가 더 불안정하던 시기에는 내가 조커로 기능할 필요가 있었고 극단적인 고화력 빌드가 제격이었다.
기형적으로 포인트 가성비를 추구하며 극한의 대미지 딜링을 뽑아내는 대가로 안정성이 시궁창에 처박혀 있다.
따라서 PVE에서의 내 전술적 움직임은 언제나 희우나 에길, 경우에 따라서는 미아와 제니마저 미끼로 삼아야 했다.
치고받는 것은 최소한으로 하며 일방적인 공격 기회를 노린다.
주고받으며 합을 겨루는 시점에서 내 몸이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암살자의 방식이지만 막상 암살자로서 기능할 수 있는 패시브 스택은 없다.
적들의 수준도 점점 올라가는 마당에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스타일이다.
딜찍누도 한계는 있다. 앞으로 마주할 적들은 점점 더 기괴하고 비범해질 것이다.
기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용사]의 근간인 힘 스탯을 우선 찍는다.
이건 내 약점이기도 하다.
빈약한 기초 스탯 덕에 스탯 효율이 아주 나쁘다.
그러니 운동도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힘을 나타내는 빨간 점들이 가지를 이루고 뻗어나가며 여러 가지 스킬들이 확률에 맞춰 나타난다.
[강격]같은 기본 스킬을 포함하여 물리적 전투력을 온갖 방식으로 보정하는 패시브들.
[용사]는 만능이기에 권능까지 동원해 미세 조정할 필요는 없다.
마인드맵이 중심의 내 얼굴과 멀리 뻗어나간다.
중위 스킬의 영역에 도달하며 기본적인 갑옷관련 패시브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숫자를 세며 하나하나 쌓아 올린다.
10스택이 쌓였을 때, 잠깐 마인드 맵을 닫았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가죽 위주의 얇은 갑옷을 벗고 체인 메일을 주섬주섬 걸친다.
다시 마인드맵을 달리고.
잠시 후에는 판금 갑옷을 걸친다.
방패 마스터리도 확보한다.
다만 방패 관련 패시브는 많이 스택하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방패 활용보다는 정확히 [패리]만 사용 가능한 정도로 억제한다.
옆에서 보면 우스울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장비를 바꾸고, 검을 쥐는 법을 바꾸고, 방패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흠, 이 정도면 되려나?”
레바테인은 내구도가 아쉬우니 다른 검을 들고 바위를 벤다.
한손 검 마스터리가 충분히 쌓였다. 검날에 서린 공격력이 오러 블레이드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충분한 예리함을 부여한다.
몇 번 더 베며 실험한다. 마스터리의 정도에 따라 무기 내구도 소모도 달라진다.
레바테인을 당분간 혹사해야 하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잠시 후, 파삭하고 적당히 집어든 롱소드가 산산조각 난다.
“딱 괜찮은데.”
다시 명상.
갑옷 마스터리를 좀 더 쌓고, 마법 방향으로 패시브도 다시 확보한다.
마법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마법을 활용하는 전사 수준까지는 올려둘 필요가 있다.
이전과 비교하면 마투사로서의 사거리 제한에서 해방되지만 시전 속도는 좀 늦어질 것이다.
“중거리에서는 마법전도 가능하게.”
그때쯤 미아가 잠에 취한 상태로 눈을 비비며 이쪽으로 왔다. 희우가 장갑을 낀 채 손을 잡고 끌고오는 모양새다.
“오, 딱 좋을 때 와 주었어. 한판 붙어보자.”
“네?”
우선은 미아.
약 10미터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는 내가 손쉽게 우위를 점했다.
제대로 술식을 구축하기 전에 마력의 실이 제멋대로 헝클어져 마력이 역류한 미아가 어이없어했다.
“말도 안 돼요.”
“조금 거리를 더 벌려볼까?”
50미터 정도 멀어진 상태에서는 미아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미아도 타격을 입었다.
“으으윽.”
“괜찮니?”
“이것도 말도 안 돼요.”
미아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인다.
“더 멀어지면 네가 이길걸? 간섭력을 거의 확보하지 않은 상태라서.”
“아무 보정 없이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어떻게 그게 되는 거죠?”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아? 마인드맵 없잖아.”
“저는 [초마도사]가 있는 건데…….”
“없이도 할 수 있게 되면 종족 바꿀 거야. 그것도 거쳐 가는 스킬이야.”
그 말에 미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모의 마법전을 계속한다.
100미터 이상 멀어지자 전력을 다해도 내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어떻게 마법사 대응도 할 수 있겠군.”
“민첩 클래스는 완전히 배제하는 건가요?”
희우가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 파티에 필요한 건 에길의 부담을 덜어줄 전사니까. 당분간 그 역할을 수행할 거야.”
안 그래도 포인트가 빠듯하다.
[용사]는 전사 베이스인 만큼 민첩직 상대로는 원래 강하다. 암살당해서 끝나는 용사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보통 용사의 적은 사악한 마법사다. 미궁의 밸런스도 그렇다. 그러니 마법 대응을 제일 신경쓸 필요가 있다.
정말 오랜만에 희우와도 대련해 본다.
날개를 펴고 찌르면서 태연하게 대화.
“아서라는 할아버지 영입할 수는 없을까요?”
“좋은 발상이야. 시도는 해볼 생각이야. 아서가 원하는 건 일단 뻔하거든.”
“뭐죠?”
“멀린의 행방이겠지.”
도플러 효과 때문에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
희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멀린이면 할아버지 마법사 아닌가요? 그 전설의 마법사.”
“맞아.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트롤이나 오우거도 사실 원래는 요정이란 말이야.”
“요…… 정? 그런게?”
원전을 따라간다면 요정이 그 뿌리가 맞긴 하다.
좀 더 페어리 계열? 사실 고블린도 그렇다.
게다가 에길 스칼라그림손은 아예 실존인물임에도 각색이 되어 있지 않은가.
공격을 어깨갑주로 받아내며 팔을 붙잡으려고 했다. 희우가 빠르게 빠져나간다.
“멀린은 여자야. 아서왕의 연인이지.”
“정말요?! 저는 뭐 대마법사를 찾아 함께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그런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것도 맞을 거야. 카멜롯은 아서에게 아주 소중한 곳이니까.”
대충 이렇게 저렇게 뒤섞여 있긴 하지만 원본인 기사도 문학, 아서왕 전설에서 뒤틀린 것들이다.
사실 그 원본부터가 온갖 영국 전설의 총집편 같은 잡탕이기도 하다. 전설이란 것은 본래 그런 법이다.
희우의 말이 끊어진다.
슬슬 여력이 없는 모양이다.
가속이 최고조에 달한다.
눈으로 좇기도 어렵다.
하지만 사람의 움직임은 결국 사람의 상상을 벗어나기 힘들다.
치고 들어올 때마다 조금씩 대미지 교환이 일어난다.
희우는 언제나 경장이다. 천사 자체의 육체적 강인함도 있으니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다.
반면 중장갑 상태의 나는 단검의 공격으로는 단번에 치명타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하자.”
“대체 어떻게 그걸 다 반응하는 거예요?”
희우가 입맛을 다시며 내려왔다.
땀을 닦고 있다.
“너도 초음속이면 보고 반응하는 건 아니지 않아?”
“대충은 보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전혀 안 보이는 걸 그냥 감으로만 반응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은데.”
“그게 직관적인 예측이지. 더 가다으면 가능해.”
“말이 되는 거예요?”
“스킬로 경험해 보면 몸에 익게 되는 법이야.”
[예지], [미래시] 같은 것 말이다.
미아 같은 경우도 결국 스킬로 강제로 새겨진 재능이지만 그것이 몸에 밸 것이다.
없던 재능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미궁의 보정이니까.
거기에 이미 미아는 단순히 [초마도사]의 보유자 이상의 단계에 접근해가고 있다.
스킬을 떼더라도 평범한 천재 정도로는 재능이 있었던 게 아닐까?
“이렇게 유배자는 거듭되는 삶에서 영혼에 격을 쌓아 올리지. 고참들이 강한 것은 그래서고.”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닌 것 같지만…….”
대부분이 현대인데 어떻게 하늘을 찢어버리고 땅을 가르는 싸움에 적응하겠는가.
이거저거 찍어보는 게 중요한 건 그래서다.
하지만 내가 일반적인 현대인이 아닌 이들을 모아 파티를 꾸리는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하다.
뒤늦게 몸에 익히는 재능에 열심인 자는 생각 외로 없다. 제 목숨 내버려가며 익혀야 하니까.
랭커나 하이 랭커들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미궁 전반에 존재하는 ‘운이 좋으면 어떻게든 된다.’는 의식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에길이나 블랑쉐와도 대련했다. 다양한 클래스를 상대하며 의식과 몸을 일체화시킨다.
에길과의 대련은 우회 없이 정면충돌을 하자 힘겨웠다. 힘으로는 받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흘려내는 것도 간신히 가능한 수준.
블랑쉐는 상대적으로 쉬웠다.
사격을 결국 총탄은 내 몸에 정직하게 꽂힐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가드할 수 있다.
사선에 검을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된다.
블랑쉐가 미친 소리라고 투덜거렸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나.
“좋아, 감을 되찾을 정도는 된 거 같네. 용사 뽑으러 갔다 올게요. 다들 할 거 하고 있어요. 블랑쉐는 무슨 일이야?”
블랑쉐가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다가와 있다.
내가 물어보자 투덜거리듯이 대답한다. 피드백이 부족했나?
“혹시 내 사격법에 근간에 문제가 있는가.”
“약간은 있어. 그건 그렇게 쏘라고 있는 총이 아니거든.”
“정상적이지 않은 총기가 많군. 탄도학은 의미가 있는 건가?”
“미궁이 그렇지 뭐.”
캣틀링 건의 회수도 생각해야 한다.
여궁수는 잘 있겠지? 이미 사람이 지나갈 만큼 지나간 후다 보니 큰 위험은 없었을 것이다.
블랑쉐의 최종 무기는 그 고양이가 될 테니까.
하지만 튜토리얼에 남은 사람을 빼 오려면 메인 던전의 일각인 [심연]을 클리어 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