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81화
왕국 - Lv.3212 [하드스록](4)
“이제 습격 걱정은 없으니 제니만 데리고 가도 되겠군.”
“저도 가고 싶은데!”
“음, 아냐. 너는 리온의 정신 건강에 나쁠거야.”
“그래서 가고 싶은 건데요?”
“응? 왜?”
“죄 많은 여자가 된 기분이 좋아서?”
“악질이야.”
“이히히.”
나름대로 그윽한 눈빛을 보내보지만 어림도 없다.
제니만 챙겨가지고 리프트를 열심히 드나든다.
우선 리온을 [데이 워커]부터 따게 만들어야 한다.
뱀파이어는 격이 올라갈수록 인간과 구분이 힘들어진다.
우리가 처음 구해주고 석 달 후 시점에는 이미 나이트 크로우에 합류해있었다.
그 시점에서 내가 즉시 리온이 뱀파이어임을 깨닫지 못했단 것은 충분한 수준의 고위 뱀파이어, 아니 사실 [마왕]에 도달한 뱀파이어어서였겠지.
남은 기간은 한 달이다.
이젠 같이 어디를 구르는 게 아니니 중간 중간 시간을 건너뛰며 봐주기만 하면 된다. 고생은 리온이 할 것이다.
리온의 관점에서는 바로 [언더 그라운드 유적]에서 빠져나온 직후였다.
기운 없는 표정의 소년이 나타나는 나를 힘없이 맞아준다.
“그 마왕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되나요?”
“미아 덕분에 이미 조건은 대충 만족되어 있어.”
용사 후보생이란 가능서의 결집체다.
그 성장 보정은 반드시 용사로 나아가는 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마왕]은 결국 타락한 용사를 위한 자리다.
어떤 식으로건 재능은 충만하다.
“거기에 넌 미아 덕분에 격을 그렇게 흡혈로만 올릴 필요도 없어.”
“이것 말인가요…….”
리온이 제 몸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기운을 가리킨다.
아직 원소로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시대임에도 명백하게 실체를 가진 힘.
이미 정상적인 뱀파이어는 아니다.
리온은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
당시의 미아는 이미 시조 뱀파이어니 다름없는 격을 가지고 있었다.
마인드맵이 없다는 것은 때로는 장점이다.
NPC들은 포인트를 투자하지 않고도 스킬을 얻는다.
미아는 이미 햇빛을 포함한 대부분의 약점으로부터 면역이었다.
포인트 투자를 하지 않은 내가 도리어 햇빛을 신경은 쓸 필요가 있을 정도였지.
그리고 리온이 다시 태어나던 그 순간의 환경.
미아가 어둠이란 어둠은 모조리 모아 가상 마력로를 가동하고 있던 상황.
그리고 그 내용물이 줄줄 새어나와 미아를 보호하는 어둠의 장막이 되어있던 상황.
그것이 리온을 한 발자국 더 마왕에 가까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용사의 타락이란 언제나 극적인 법이다.
정황 자체는 우습겠지만 말이다.
본래도 타락하는 길이 존재하는 용사의 가능성에 시조급 뱀파이어인 미아의 피를 받고, 어둠의 세례를 받아 태어난 존재.
그냥 내버려두더라도 저절로 [마왕]으로서 군림할 인재로다.
나는 리온에게 어둠을 갈무리하는 법을 조언했다.
“양이 너무 막대해서 쉽게 처리하지 못할 수는 있지. 하지만 결국 그냥 마력이란 말이야. 지금까지의 요령 그대로 활용하면 문제없어.”
어둠 원소의 존재가 논의되고 있을 시기니 크게 거부감을 살 걱정도 없다.
어둠의 정령 같은 게 존재도 하지 않는 시간대다.
애당초 어둠이 원소로 인정받는 것은 [마왕]의 출현 이후다.
“가장 편한 형태로 어둠을 다루어 봐. 마법의 기초는 우리 마법사에게 배웠잖아.”
“지금은 클랜 마스터님이시군요.”
급격한 인생 드리프트지만 그럼에도 리온은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
성실한 정통파 용사는 이게 좋다.
리온은 곧 어둠을 불길의 형태로 만들어 내었다.
“잘 이미지화 했군. 그런데 왜 불이야?”
“본 게 이거라서…….”
미아의 흑염이 많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군.
“좋아, 잘 하고 있어. 다크 플레임 마스터. 이제 함께 세상을 불태워보자고. 일단은 한달 안에 [데이 워커]를 획득한다.”
“네에…….”
그 처량한 대답을 보며 제니가 씁쓸하게 웃는다. 인생 드리프트는 저쪽도 비슷하긴 했군.
내가 나쁜 짓 하는 것 같잖아. 그러지 마.
시간을 빠르게 건너뛴다. 리온은 잘 해냈다.
흡혈로 격을 올리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다.
[마왕]의 취득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나는 리온의 미래로 향하기 위해 끊임없이 리프트를 들락날락했다.
리온이 마왕이 되어 용사를 찾아낸 미래.
내 기준에서는 몇 시간 걸리지도 않았지만 리온에게는 몇 개월, 그리고 몇 년이 빠르게도 흘러갔다.
부지런하게 방지와 앞으로의 지침을 제공했다.
그러나 전부 러셀 몰래 해야 한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 어쩔 수 없도록 말이다.
그 후에 짜잔하고 새로운 용사를 보여줘야 해.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안배에 이끌려 용사가 나타났다.
[마왕]은 [용사]가 각성하여 자신을 죽이기 전에 처리해야하는 운명을 타고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여자애네?”
이제는 노련한 뱀파이어 로드이자 나이트 크로우의 단장, 불로불패의 아르바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고아였습니다. 하지만 이 재능은 틀림없이 진짜입니다.”
“좋아, 당한 대로 굴려. 다만, 그 이전에.”
내 존재감은 각인 시켜야 한다. 얼굴을 덜 비추고도 나에 대한 인식을 확고하게 해야 용사의 각성에 기여하는 것이 된다.
그래야 칭호가 나오는 법이니까.
“아가야. 사탕 먹을래?”
“네? 네에?”
꾀죄죄한 꼬맹이가 경계하며 눈을 깜빡인다.
신전에서 여신님께 바칠 공물을 좀 훔쳐왔다. 아주 좋아하는군.
하지만 사탕 주는 아저씨보다는 더 강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법 배워볼래?”
용사 후보생이 마법에 재능이 없을 리가 있나. 마법 스승 정도의 포지션만 취하자.
가끔 나타나는 신비한 마법사로 말이다.
속성 강의를 마치고 자리에 일어서자 리온이 머뭇거렸다.
“왜 그래?”
“다음번은 언제 오시나요? 간격이 점점 길어지셔서.”
“한동안은 금방금방 다시 올 거야.”
“그렇군요…….”
* * *
이미 몇 년간 제니와 오르골을 제외한 그 시절의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유배자란 본디 그런 존재겠으나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쪽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지만 저쪽의 시간은 거의 변치 않는다.
방금 전에 1년 전의 자신을 보고 온 것 같은 태도다.
게다가 아마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리온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제 일이 끝나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어서요.”
물론 이미 돌아가버린 상대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첫사랑의 열병도 끝난 지 오래다.
이미 몇 년이나 전의 일인 것이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고 발로 이불을 차는 일이 더 많다.
그때의 모험도 추억도.
이제는 간혹 찾아오는 리더와 제니로부터 떠올릴 수밖에 없다.
리온은 한숨을 내쉬며 주워온 아이를 보았다.
오들오들 떨고 있다. 언젠가의 자신처럼.
아니, 그때는 평화롭던 시절이기라도 했으니 훨씬 나았다.
“자, 지금부터 너는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든.”
뱀파이어가 되는 그 순간 사라졌던 사명감. 그것이 지금 이 아이의 어깨를 누르고 있을 것이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본디 마왕은 살아남기 위해 용사의 싹을 잘라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리온은 반대로 용사를 길러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당했던 것을 그대로 실행하면서.
* * *
러셀은 제 일을 아주 잘 수행했다.
훌륭한 나이트 크로우의 소양에는 미행과 추적도 있다.
흡혈귀라는 족속들은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르며, 그 외의 인류의 암적 존재들은 언제나 인간 사회 내에 스며들어있다.
그러니 본거지를 알아내고 박멸하는 방식을 연마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고로 이 유능한 솔로 랭커는 민첩직의 방식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포인트를 투자하여 얻어낸 능력은 아니다.
과거에 나이트 크로우의 암살단이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몸에 체득한 기술은 트롤을 어렵지 않게 뒤쫓을 수 있게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스펙은 높다.
삼의회의 트롤보다도 러셀이 더 강하다.
일단은 몽환의 숲 심부까지 단독으로 도달하여 갇힐 정도의 실력자인 것이다.
“흠, 위치는 알겠군.”
[하드스록]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대놓고 알리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안간힘을 다해 숨기지도 않았다.
하드스록이라는 국가는 왕국의 북부, 추운 지역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더 북쪽으로 간다면 아예 눈덮인 산맥이 펼쳐진다.
그 산맥조차 넘어간다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경계가 있다.
절대적 경계는 아니다.
이 왕국이라는 곳에서 유배자들이 개척을 거듭한 끝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겠다고 판단된 곳이다.
굳이 인간의 영역을 넘볼 이유가 없는 강력한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요새는 그 바로 직전의 산맥에 있었다.
“이건, 지키려는 건가? 확실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긴 하군.”
삼의회의 트롤이 말한 그대로였다.
마지막까지 반신반의했으나 이들은 침공으로부터 하드스록을 방어해보려는 모양이었다.
“최근 길드원들이 자취를 많이 감추었다고 생각했는데…….”
길드 연합체인 국가, 그 소속인 길드들이 아닌 전사 길드의 수장인 하드스록 길드 소속의 인원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된지는 오래 지났다.
이쪽으로 이동했던 모양이다.
침공이 다가온다면 최전선이 될 바로 그 자리로.
러셀은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들과 싸워야할 이유가 있는가?
삼의회의 트롤 의원이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이쪽으로 오라고.
오르골이라는 그 사내에게 전달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고 했다.
“너는 누구냐.”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기척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즉시 공격당하는 일은 없었다.
투구를 제외하고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노인이었다.
그 갑옷은 낡았지만 아주 훌륭한 것이었으며 등에는 대검을 메고 손에는 한손 장검을 들고 있다.
눈발에 휘날리는 백발 사이로 주름진 눈이 번뜩였다.
러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항복하겠소. 당신이 아서요?”
“나를 아는 것 보니 의도가 있어서 찾아온 손님이군.”
“안 죽이는가?”
“뭣하러.”
노인은 표표히 걸었다. 러셀은 그것을 따라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어쭙잖게 도망치려고 해봐야 아무것도 안 되겠지.
아서는 걸으면서 말했다.
“[아케인]을 잡은 파티인가.”
“아니오. 그쪽에 고용된 것에 더 가깝지.”
“그런가? 그래도 전령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어디로 가는 것이오?”
“요새. 우리가 만든 요새.”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어찌 발견했소?”
“삼의회를 너무 바보로 생각하지 마라. 누군가 따라다닌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챌 만 했으니.”
“후, 이번에는 너무 전사로만 빌드했군.”
“러셀이라고 했던가.”
“나를 아는군.”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을 구하겠다며 나이트 크로우를 자처하고 다니는 바보 이야기는 하이랭커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유명하지.”
“비웃는 것이오?”
“아니. 좋은 의미로 유명하다. 대가 없는 선행 아닌가. 정말 산 자인지 불확실한 자를 상대로도 말이다.”
“그건 고맙군.”
러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요새는 거대했다.
화산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는 식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면 트롤 같은 거대한 종족은 물론 거인이라도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규모였다.
“이렇게 크게 만들 이유가 있었소?”
“우리 파티에는 거인이 하나 있지.”
“방어에는 불리할 텐데.”
“이렇게 널찍하게 입구를 열어두어야 [침공]으로 들어오는 녀석들이 뒤로 새지 않고 들어오지 않겠나.”
러셀은 그 발언에 조금 감명 받았다.
그가 알던 경영자에 속한 이들의 마인드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래왔을 것이다.
러셀도 알고 있다. [하드스록]은 이전 침공으로부터도 이어지고 있는 파티다.
그때 아마 아서는 없었겠지만, 아니 그게 아닌가?
어쩌면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왕국의 서버 번호는 46까지 있다.
그럼 적어도 460여년은 된 것이다.
약 10년마다 한번 나타나는 게 새로운 서버니까.
그럼 경영자들은 전원 가볍게 400살 이상이 아닌가?
문득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아서는 인간일 것이다.
인간인 채로 400년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요새는 깊었다.
흐르는 용암을 조명삼아 곳곳이 비춰진다.
수많은 전사들이 제 위치를 지키고 있다.
정말로 언제 침공이 들어오더라도 지켜내겠다는 그런 의지가 느껴졌다.
화포나 함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무언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무슨 소리요.”
“더 깊이 파는 소리. 그럴수록 많은 적들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겠나.”
“거인이 해머를 후려치는 소리 같군.”
“맞을게다.”
거인……. 물리적 공격력이라면 가장 강력한 고위종족.
드래곤마저도 근력에서는 몇 수 밀린다고 하는 강대하기 짝이 없는 전사의 종족이다.
러셀은 입맛을 다셨다.
마침내 요새의 끝자락에 가까운 어느 곳에 도달했다.
거대한 공동이다.
뚫은 곳이 아니라 자연히 생성된 곳으로 보였다.
한 가운데에는 용암의 강이 흐르고 있다.
그 안에는 거대한 모루가 하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나이든 거인 하나가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정말로 나이 들어보였다. 쭈글쭈글한 얼굴과 손의 주름.
하지만 그럼에도 러셀은 무의식 중에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느꼈다.
거인의 수명이 얼마더라? 엄청나게 길다.
요정에도 비견될 정도로 긴 세월을 살아가는 강대한 종족.
그럼 저렇게 폭삭 늙은 거인은 대체 얼마나 긴 세월을 이 왕국에서 살아왔는가?
“리더, 데려왔소.”
아서가 하는 말에야 납득할 수 있었다.
가장 위대한 전사 길드 하드스록의 길드마스터이자 전사의 정점에 선 하이 랭커 파티 [하드스록]의 리더.
대장간인 것처럼 제 망치를 놀려 모루 위에서 무기를 벼리고 있던 노거인이 고개를 들었다.
공동 전체에 울리는 낮고 나이든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베라고 하네. 그쪽은 지금 경영을 막겠다고 하는 그 파티인가?”
“고용된 이라고 하더군.”
“그런가.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정말로 잠깐의 이야기 끝에 러셀은 풀려났다. 전언을 가진 채로.
* * *
러셀은 다시 하드스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고용주이자 협력자라고 할 수 있는 오르골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흠, 언제 건 도전 하라고?”
“클리어를 노린다면 그 힘을 증명하라고 하더군.”
“아무래도 그 리더인 거인을 제외하고는 이전 침공부터 살아온 멤버가 아닌 모양이군.”
“그런 것 같다.”
러셀이 피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물었다.
“리온은? 리온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43서버의 일이라도 잘 풀렸으면 좋겠군. 슬슬 상황을 따라가기 벅찬데.”
오르골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러셀은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무언가 잘못된 후에 그걸 무마하려고하는 이들의 표정.
“음, 그래. 새로운 용사를 소개해야하는데.”
“뭣이?”
내막을 들은 러셀은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