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83화
왕국 - Lv.3212 [하드스록](6)
문을 두드릴 필요는 없었다. 요새에 문은 없었으니까. 문을 만들 수도 없다. 애초에 요새라고 부를 수 있는가도 의문이었다.
러셀의 말대로 정말 활짝 열려 있는 곳이긴 했다.
요새는 왕국의 바깥을 향해 아가리를 벌린 깔때기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해서는 이 장엄한 구조물을 설명할 수 없다.
하나의 산맥을 통째로 깎아내서 만들었다.
눈 덮인 산 중턱은 지붕이 되었고 산기슭은 깎여 나간 끝에 지하로 뻗은 요새의 입구가 되었다.
본래 같으면 무너져 내려야 할 불균형한 산은 기둥처럼 남겨둔 산맥의 뿌리 일부로 겨우 지탱되고 있다.
그 자체로 곡예와도 같은 건축물이자 자연물이었다.
희우가 감탄한다.
“지금까지가 그저 판타지였다면 이건 굉장히 하이 판타지네요.”
“나도 이런 건 본 적이 없는데. 산맥 전체를 요새로 쓸 생각인거군. 속이 텅 비진 않았더라도 공간이 많을 것 같아.”
그 공사에는 거인의 흔적이 보인다. 남아도는 것이 힘인 그 종족이라면 토목공사라고 부르기도 뭣할 정도의 이런 위업을 비교적 쉽게 수행해 낼 수 있었으리라.
“어쨌건 정말로 한판 해볼 생각인 건 확실하군. 제 목숨만 챙길 생각이라면 이렇게 거창할 이유가 없지.”
요새. 그야말로 요새다.
하지만 방어를 위한 요새라기보다는 들어오는 모든 적들이 빨려 들어오도록 만들어진 지옥이다.
뒤로 흘러나가는 녀석들이 없도록 아주 광대한 영역의 산맥을 깎아냈다.
어떤 괴물이 몰려오더라도 여기서 지켜내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게 맞나요? 겨우 이 정도로…….”
희우가 말한다.
찰싹 달라붙은 채로 말하다 보니 속삭이는 것 같다. 요 며칠 내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인간이 돼서 잠을 자게 되니까 베개를 들고 매일같이 찾아온다.
물론 불미스러운 일은 없다. 그냥 기분 좋은 꿈을 꾸는 얼굴을 매일 아침 보게 되었을 뿐이다.
천사도 잠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종족인데도 잘도 잔다.
그게 좋은 걸까.
오늘 아침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그리고 이어서 설명했다.
“쉽게 감당 못 하니까 저렇게 해둔 거겠지. 러셀은 요새가 아주 깊다고 했잖아. 아마 끌어들일 수 있는 만큼 끌어들일 생각일 거야.”
왕국의 주변은 인외마경 그 자체다.
상공으로 올라가면 외계의 괴물들이 기다리고 있듯이 지하로 파고 들어가면 지옥이 있다.
[하드스록]이 노리는 것은 생매장일 것이다.
자신들이 나갈 길은 어떻게 마련해 두었을 테니 최대한 많은 [침공]의 병력을 끌어안고 이 요새 전체를 무너뜨릴 생각이겠지.
“말로 들어도 전혀 쉬워 보이진 않네요…….”
“전선을 유지할 정도의 전력은 있어야 유인이 될 테니까. 저기 투석기 보이지?”
“저게 투석기였어요?”
요새의 입구는 정말 엄청나게 넓다.
산맥의 반절을 깎아 만든 요새다.
장대한 규모만큼이나 장대한 기둥들 사이를 겨누고 있는 빌딩과도 같은 구조물들.
장전된 암석은 왕국의 지하 깊은 곳에서 캐낸 암반이다.
“저건 대충 지옥석이라고 부르는 물건인데, 저 정도 부피면 질량도 어마어마하겠네. 강한 충격을 주면 질량에 비례한 폭발을 일으켜서 병기로 쓸 수 있어.”
“태양처럼 보여요. 거의 불의 원소 결정에 가까운 바위네요.”
미아가 거든다.
바위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 맞을까 싶긴 하다.
진짜로 암반의 일부를 뚝 떼와서 63빌딩만 한 투석기 비슷한 무언가에 올려뒀다.
모습만 보자면 중세 판타지의 수성전이지만 그 스케일이 과히 아름답다.
“병력들도 꽤 많군.”
“다 길드원일까요?”
“하드스록은 꾸준히 덩치를 불려왔다고 그랬어. 아마 처음부터 이런 일을 염두에 뒀던 거겠지.”
진입장벽이 낮은 전사의 나라에 슬럼이 가장 크게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이 왕국의 전사국가인 하드스록이 유난히 크게 슬럼을 떠안고 있었던 게 저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케인]이 조용했던 것이 자신들의 욕심 때문이었다면 [하드스록]은 정말로 모든 것을 삼의회에게 맡겨두고 전쟁에 대비했던 것이리라.
“이제 와서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지. 정면으로 간다.”
요새의 방향은 왕국의 바깥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뒤에서, 요새화된 산맥의 중턱에서 낙하하여 돌입하는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전하라고 초대까지 받은 이상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 * *
이전 회차에도 하이랭커였으며, 그 이전 회차에서도 하이랭커였던 트롤 카롤리는 이번 회차에서도 하이랭커다.
그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재능이 있었다.
미궁의 대부분의 시련들은 그에게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유배자 생활 최초로 왕국에 도달한 것이 유배자가 된 후 1년이 채 지나기 전이었다는 점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실패를 썩 많이 겪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미치지도 않았다.
바깥에서의 경험도 그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위대한 스포츠 선수였으며 좌절을 겪어도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몹시 잘 유지한 채로 이 트롤은 카베의 의견에 동의했다.
카베는 가끔 웃고는 했다. 30년 차 애송이다운 젊은 사고방식이라고.
가끔은 발끈했지만 카베의 나이를 듣고 나서는 입을 다물게 되었다.
아직 인간을 초월하는 세월에 다가가지 못한 카롤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세월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 왈가불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지금 하나 더 있다.
“이 녀석들이 과연 진짜로 올까?”
항상 긍정적으로 시련을 뛰어넘어온 카롤리가 생각하기에도 이 요새에 침투하는 것은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다.
“당장 인원이 몇 명인데.”
당장 하드스록 직속으로 소속되어 단련된 유배자 병력만 해도 1만에 가깝다.
무장 수준도 아주 높다. 최근 46서버의 자원들이 흘러들고 있었기에 대단히 질 좋게 보강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도 하이랭커나 다름없는 수준임은 안다.
그러나 같은 하이랭커로서, 연차는 낮더라고 누구보다 많은 하이랭커급의 경험을 가진 유배자로서.
“이건 자살행위야.”
혼잣말로 절로 그런 말이 새어 나올 정도로 요새는 단단하다.
침공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다.
일반적인 하이랭커 이상 가는 힘을 지닌 침공의 수장들, 보스급 존재를 상대하기 위한 대응도 준비하고 있다.
하물며 막대한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는 침공군도 아니면서 이 요새로 뛰어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카롤리는 생각했다.
어디 이상한 구멍으로 숨어 들어올 것 같은데.
안 그러고서야 답이 보이지 않는다.
상대의 전력은 규율의 신이 어느 정도 팔아넘겼다.
최신화된 정보는 아니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46 서버를 통과하고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정상적인 난이도? 충격적인 수준의 파밍?
다 부질없다.
세월만이 해결해 주는 것도 있는 법이다.
유배자로서 누구보다 빛나는 길만 걸어온 카롤리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자부심을 바탕으로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랬기에.
“적습입니다!”
“엥?”
“적습입니다……?”
보고하러 들어온 병사도 사실 확신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든든한 길드의 하이랭커로서, 시작의 세 파티에 들어간 위대한 전사로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병사도 당황했다.
“진짜?”
“넵! 정말입니다. 당당하게 요새 앞에 나타나서 전진 중입니다.”
목적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여길 찾아올 손님이라면 그 소문의 파티뿐이니까.
어쨌든 [더 시티즌]에서조차 최소한의 경계는 하기 위하여 몇 가지 날로 먹는 스킬의 획득을 제한하기 위한 지령을 내렸을 정도다.
그래.
너무 단시간이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파티가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날먹 스킬을 막는다는 정도의 대응으로 그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여 카롤리의 생각에는 시티즌의 평가도 과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3년은 있어야 뭘 하지.
치트키라도 쓰는 게 아닌 이상 말이야.
어쨌건 할 일은 해야 했다.
카롤리는 달려 나갔다. 트롤의 거대한 몸도 작아 보이는 수준으로 넓은 통로다.
거칠 것이 없으니 요새의 앞까지 도달하는 것도 한달음이다.
정말로 파티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멀지만 카롤리의 뛰어난 시력에는 제대로 포착된다. 인상착의도 일치한다.
“뭐, 아무래도 좋지. 얘들아 장전!”
투석과 발리스타 따위의 병기들이 적들을 조준한다.
“마지막 훈련이다!”
저 녀석들이 여기까지 올 수는 있을까? 하나는 천사니까 가능하겠군. 요격할 준비를 하자.
“발사!”
* * *
“뭐가 안 쏠지도 모른다예요!”
“이걸 쏘네!”
날아들기 시작한 무수한 포화는 조금 의외였다.
아니, 정말 안 쏠 줄 알았는데. 그 뭐 정정당당하게 일기토 그런 거 하려고 했던 거 아니냐 니들?
분위기 좀 잡아주고 장엄하게 싸움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하다못해 전력으로 공격하진 않을 줄 알았는데.
“좋아, 이번에는 내 생각이 좀 짧았군. 로망 넘치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레벨 유배자는 분명히 강력한 존재다.
전사라면 운석이 소나기처럼 쏟아져도 몸으로 때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하지만 그런 이상한 세계에선 당연히 그에 걸맞은 병기도 존재할 수 있다.
투석기 같은 시대착오적인 병기가 저쪽에 존재하는 것도 그래서다.
운석 낙하는 결국 평범한 암석이 좀 빠르게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암석이라면?
“크레이터 보이지?”
“네!”
“그거 지옥석 투석기 시험 발사로 생긴 거야.”
“오! 세상에!”
그 말을 마지막으로 희우가 날아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화력을 감당해야 한다면 분산시키는 편이 옳다.
기동력이 좋은 천사는 최적이다.
저쪽에서 빛의 창들이 일제히 솟구쳤다.
일그림이 사용하던 견제기, 바로 그거다.
날아오른 천사를 향해 랭커급의 스킬들이 빗발친다.
날아드는 투사체는 일견 수백이 넘는다.
드래곤이라도 저걸 그냥 다 맞으면 죽는다.
블랑쉐가 요격하기 위해 무기를 겨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딸아!”
공간이 변형된다. 소년이 쓰던 완드는 본래 연비가 나쁜 공간계 마법을 아주 적은 소모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여러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간이 입을 쩍쩍 벌린다.
수백 발의 투사체가 삼켜지기 시작한다.
강력하더라도 마법적이지도 않은 단순한 병기라면 PVP에서 무력하다. 이런 것 때문에.
애초부터 전사 집단으로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거겠지만.
“으윽…….”
미아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위를 보았다. 아직도 입을 벌리고 투사체를 삼키는 중인 공간 균열에 여러 색의 마력 실이 날아들고 있다.
규모가 제법 크다.
요새 내부 인원은 러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노골적으로 정보를 흘리는 행위였겠지만 자세하지는 않다.
“이런, 하긴 마법사 랭커들을 섭외하지 못했으면 이런 요새를 만들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러기 위한 [용사]다.
취득이 좀 아슬아슬하기는 했다.
리온이 새로 키워낸 용사는 나를 딱 마법 스승으로만 인식했다.
육성 자체는 내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니 시간도 마음대로 건너뛰며 배분할 수도 있다.
NPC인 부하가 있으면 이런 점이 참 편리해진다. 시간을 아주 확실하게 단축할 수 있거든.
고블린들에게도 늘 감사하고 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것은 일종의 소매틱.
마법적 행위를 동작으로 더 구체화하여 인식하기 위한 동작.
인간이지만, 유니크 스킬 [용사]로 인해 드래곤만큼이나 증폭된 마법 관련 스탯이 느껴진다.
마력량을 제외한다면 순수마법사였던 직전 회차에 근접한 수준의 감각이다.
나는 마력의 실을 뻗지 않았다.
이렇게 먼 거리까지 간섭하기 위해 마력을 뽑아내는 저쪽 진영 마법사들은 분명 뛰어나다.
하지만 간섭력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낮아지는 법이다.
뻗은 손을 움켜쥔다.
하늘에 색색이 뻗은 마력의 실들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잡아 뜯었다.
간섭이 멈춘다. 신음을 흘리던 미아의 표정이 돌아온다.
공간 균열은 마지막까지 포화를 삼켰다.
하지만 균열에서 벗어난 지옥석 덩어리 몇 개가 주변에 떨어진다.
충격에 내재된 화염이 들끓는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지옥석의 원소, 그리고 그 존재감.
에길이 방패를 들었다.
그는 전문 탱커는 아니다.
하지만 방패라는 장비만이라면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방패라기에는 너무나도 컸다.
차원 수납 주머니에서 나오면서도 비현실적인 크기를 부풀려 간다.
거인과 팔씨름도 할 것 같은 에길이 비틀거리며 자세를 가눌 정도다.
제니와 블랑쉐가 붙어서 함께 들었다. 지옥석의 폭발이 덮친다.
내가 살짝 간섭했다.
마력의 흐름을 비스듬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가상 마력로를 만드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지금은 그렇게 정밀한 작업을 할 수 없다.
방향을 바꾸고 집채만 한 크기의 방패가 부력을 받도록 한다.
“올라타!”
미아는 정신이 없기 때문에 내가 들쳐 멘다.
지옥석의 폭압이 쏟아져 온다. 주인 없는 불의 원소는 그대로 내 뜻대로 휘어졌다.
방패를 타고 하늘로 발사된다.
막대한 G가 걸린다. 방패가 으스러지려고 한다.
상관없다. 일회용이니까.
그리고 부른다.
준비할 시간은 많았다.
대놓고 도전하라고 하니 철저하게 박살내야 하지 않겠나.
“실피드!”
몸에 지니고 있던 모든 녹색의 결정이 터져 나간다.
그곳에서 피어난 짙은 바람의 향기가 뭉쳐 모습을 드러낸다.
이 소환 한 번에 보유한 바람의 결정을 모두 털어 넣었다.
46서버의 시간이 흘러, 신과 유배자의 시대를 넘어, 그들만의 역사가 시작되기 직전.
가장 나이를 많이 먹은 실피드를 모셔뒀다.
거대한 은빛의 드래곤이 한순간 전장에 출현했다.
미아가 공간 균열을 거둔다.
균열에 가려진 적들의 시야에는 갑작스럽게 드래곤이 나타난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니들만 쏘냐! 우리도 발사!”
용 형상의 실피드가 입을 벌리고, 한순간 우리 주변만 제외하고 일대의 모든 공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