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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87화 (287/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87화

왕국 - Lv.2116 [정령왕의 계약자] 아젤리아(1)

제니는 한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고양이를 닮은 요정은 고양이의 특성도 어느 정도 따라간다.

고양이는 높은 곳을 좋아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한다.

생전 없던 고소공포증은 잎사귀 요정으로 지내며 생긴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지금 처음 깨달았다.

머리털이 잔뜩 곤두선 가운데 미아의 자그마한 등에 달라붙어 거칠게 날아다니는 용의 등 위에 납작 엎드린다.

겁에 질린 채로 잔뜩 감각이 곤두 선 제니는 그것을 느꼈다.

잎사귀 요정은 본래 정령사에도 적성이 높은 종족이다.

어떤 파문, 어떠한 힘.

저 아래 어느 지점에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대지의 정령이 발한 신호였다.

굉음이 울려 퍼진다.

물리적 충격으로 피부에 느껴질 정도의 음파가 온 사방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대지의 권화가 일으킨 횡포에 산맥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그리고 고스란히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거인의 유적 같은 인공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지만, 자연물이라기에도 지나치게 인위적이었다.

그 기둥들이, 기둥을 이루고 있던 암석들이 정령왕의 의지로 기울어진다.

기둥이 쓰러지며 지지대를 잃은 천장은 고스란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제니 역시 이 요새의, 그 입구의 구조를 알고 있다.

바깥에서 보고 그 규모에 어이없어했으니 모를 수가 없다.

산맥의 뿌리를 깎아 거대한 공간을 만들고 지붕처럼 산의 중턱부터는 지붕처럼 얹혀 있다.

단언컨대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미궁이기에 가능한 구조물이다.

히말라야 산맥보다 더한 험준한 산세 전체가 파내어져 동굴이 되어 있다.

동굴이라는 말조차도 어폐가 있다.

산맥을 깎아 뚫어낸 지옥의 아가리.

그야말로 판타지이기에 가능한 현실감 없는 규모의 공동이다.

그 비현실적인 장관이 비현실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하늘이 무너질 것을 걱정하는 것은 기우이겠으나,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은 산맥이다.

그리고 그 산 아래에서 올려다본다면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다.

제니는 정령과 친한 잎사귀 요정으로서 지금 이 전장에 발해지는 의지를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숨이 막힌다.

제니가 본 적 있는 정령왕은 하늘 유적의 노정령왕, 그리고 적어도 아군이기는 했던 실피드.

그것이 전부다.

모두 이렇게 첨예하게 적대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오싹하다 못해 전율이 몸을 내달린다.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발해지는 힘의 규모에 몸이 계속해서 떨린다.

종국에는 이것이 고소공포증인지, 정령왕공포증인지, 하다못해 공포이기는 한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고통스러운 와중이다.

하지만 제니는 그렇게 겁에 질린 와중에도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자신이리라 확신했다.

마법 계통에 포인트를 투자한 적은 없으나 종족적 특성으로서 상대 정령왕의 힘이 어찌 움직이는지를 선명하게 느낀다.

다음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저 아래 쪽에서 원소들을 향해 발해지는 의지가 느껴졌다.

제니는 그 의지의 크기에 몸을 떨며 꼭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자신에게 속한 원소를 속박하는 강대한 의지다. 그것은 자유 낙하하던 파편들은 중력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했다.

한순간 이 종말의 시간이 잠시 멈춰 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무너진 산맥의 막대한 질량들이 관성에 따라 조금 더 낙하하다가 마침내 정지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방향성을 지니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온다아…….”

보이지는 않지만 선명하게 느껴진다.

정령왕의 의지가 무너져 내리던 산맥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그 의지에 의하여 두둥실 떠오른 부유암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가지 방향성을 지니고.

“이쪽으로 온다……. 산이……. 산이 우리를 덮칠 거야. 다 무너뜨리고 압착하려고 하고 있어…….”

미아의 시야는 조금 흐려진 참이었다. 마력을 본다고는 하지만 온 사방이 이렇게 미쳐 날뛴다면 흐름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긴 해도 제니는 지금 가장 직관적으로 상황을 느끼고 있다.

제니가 전달한 말로 상대의 의도를 파악했다.

실피드가 부리는 바람은 일반적인 암석을 가볍게 갈아버릴 정도로 강력하지만 저쪽의 원소 역시 정령왕이 제어하고 있다.

뚫어내고 갈아버려 모래알로 만들어도 움직인다.

열기로 녹여내지 않는 이상 그것은 고체다.

이대로면 무슨 수를 쓰건 결국 조여 오는 대지의 장막에 가두어질 것이다.

바람이 대지보다 빠르듯, 대지는 바람보다 강하다.

정령의 속성에서 물리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양대 산맥으로서 서로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한 전법이다.

미아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전황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환경을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가.

마법사의 소양이자 워 메이지의 진면목을 시험받고 있는 상황이다.

침묵하는 미아를 대신하여 실피드는 갇히지 않는 방향으로 비행했다.

비행하는 속도가 빨라지자 제니가 헛숨을 들이키며 다시 눈을 감았다.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요새의 입구가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장면은 이미 인외의 마경과도 같다.

차라리 SF영화에서 소행성 지역을 주파하는 우주선에 탄 기분이다.

하지만 소행성들은 의지를 가지고 추격해 오지는 않는다.

시야에 들어오는 온 사방이 움직이는 바위와 암석들로 가득 차있다.

막대한 질량은 점차 대열을 이루고 형태를 갖춘다.

실피드가 바람으로 밀어내자 그 마찰에 의해 벌겋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부서지고 흩어진 암석들은 열기에 녹아 붙은 벽이 되어 압착해 온다.

일점으로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날카롭고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회오리가 바위를 순식간에 파내며 포위망의 한구석을 뚫어낸다.

그러나 한 꺼풀 바깥에는 또 다른 장벽이 몰려들고 있을 뿐이다.

미아는 여전히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지 않은 시야는 이 모든 상황을 눈에 담고 있을 것이다.

제니가 코를 훌쩍이며 소리쳤다.

“방법이 있는 거지?”

제니의 눈에도 보였다.

바람으로 산을 파낼 수는 없다.

실피드는 자의적 판단으로 최대한 위험을 피해 움직이고 있으나 곧 사방이 가득 차버릴 것이다.

바람이 통과할 틈조차 없다면 그대로 으깨질 뿐이다.

소용돌이치는 바위는 부서지더라도 모래가 되어, 고운 가루가 되어 달라붙어 온다.

미아가 눈을 떴다.

“실피드, 이거 할 수 있어?”

은빛용은 긍정했다.

* * *

아젤리아와 대지의 정령왕 오르트의 계약은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었다.

둘의 교감은 길었으며 공고했다.

정령사의 꿈이라는 정령왕과의 계약은 운이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다.

아젤리아는 계약 성공하고 살아남았을 때, 이 회차에 뼈를 묻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다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걸어 다니는 병기가 된 아젤리아를 원하는 곳은 너무 많았고, 그만큼 그냥 사라졌으면 하는 곳도 많았다.

[더 시티즌]이 아젤리아를 불러주었다면 기꺼이 달려갔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정령왕은 너무 위험했다.

회유대상이 아닌 제거대상이다.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했으나 정령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정령 소환뿐이다.

몇 번의 고비를 오르트의 힘을 넘긴 끝에 그녀는 추적해 죽여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때, 그녀를 구해주고 비밀로 해준 자가 노거인 대장장이 카베다.

[하드스록]의 그늘에서 아젤리아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카베가 벼려낸 검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더 시티즌]의 목을 쳐야 한다.

그 와중 카베에게 미궁의 클리어에 도전하려 하는 파티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그게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대체 왜?

무엇을 위해 바깥으로 돌아가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노력을?

물론 세상에는 별의 별 미친놈이 다 있음을 미궁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놈도 하나 정도는 있을 수 있지.

문제는 그 미친놈의 파티가 너무 강하다는 점이다.

정령왕은 대체 왜 있는데?

막대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상대의 동향을 살핀다.

오르트는 효과적으로 바람의 정령왕을 억제하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왕이 무너지는 산을 떠받칠 수는 없다.

위쪽이 무너져 내리며 점점 이 공간의 공기는 줄어든다.

마법사가 무언가 수작을 부리기 전에 찌그러뜨리면 된다.

카베가 죽이지 말라고 했으니 마지막 순간에만 힘을 조금 느슨하게 해주면 되겠지.

그때, 바깥으로 공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환자인 아젤리아를 직접 공격하려는 것인가?

오르트가 바위에서 정련된 금속을 뽑아낸다.

단순히 정령왕의 제어력으로 붙잡고 있는 암석도 튼튼하지만, 그것을 넘어 아다만타이드 이상의 강력한 내구도 보정이 존재하는 벙커가 솟아난다.

주변에 모여든 마법사들도 함께 보호하는 형태다.

상대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든다면 곧장 마법전으로 이행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암석 사이에서 질식해라!

먼 곳에서 보면 저 상공의 동심원은 하나의 마법진과도 같다.

암석이 켜켜이 쌓여 상대를 포위하고 점차 조여가는, 이상적인 압박 상태.

벗어날 틈은 주지 않는다.

산맥을 이루던 수준의 암석들이 모두 네 녀석의 적이다!

움직이던 공기는 점차 압축되며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무언가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아젤리아와 마법사들이 모두 깨달았다.

“마법진이다! 치워 버려!”

바람의 원소로만 이루어진 마법진은 당연히 바람만을 불러일으킨다.

거대한 회오리바람이라도 불러올 셈인가?

아니지, 그것이라면 그냥 정령의 힘을 빌려 오는 편이 낫다.

무언가 저걸로 발동하려는 마법이 있다는 건데.

형태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몇 명의 마법사가 그 마법진이 구축하고자하는 술식을 알아냈다.

“[인페르노]?”

마법진의 범위만큼의 영역을 일순 가열하는 마법.

하지만 바람만을 모아서 그게 되진 않을 텐데?

정령왕을 다루는 아멜리아만이 일어날 일을 깨달았다.

“압축되면 플라즈마야! 불이라고!”

비로소 마법사들이 바짝 긴장했다.

* * *

실피드의 제어력은 한참 바위에 밀려나고 있는 대기를 결집시켰다.

직접적인 공격에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미아가 온 마력을 다해 발동시키려고 하는 마법을 구현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다.

설치형 마법인 [인페르노]의 출력은 투입되는 마력 외에도 마법진의 정교함과 크기에도 달려 있다.

정령왕에게 원소는 제 육신과도 다를 바 없다.

한순간에 허공에 형태를 지닌 마법진이 새겨진다.

미아의 정신을 읽고 구상하는 형태를 정확하게 구현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한번 압축된다.

주변을 진공으로 만들 정도로 공기들이 모여들고 강력한 힘으로 찌그러진다.

가해지는 에너지는 고스란히 열로 전환되고 마침내 물질의 상태변화까지 이루어낸다.

하늘에 고온의 플라즈마의 선이 출현한다.

그 순간 그것은 불의 원소로 그려진 것이 되었다.

미아는 마법을 발현하려고 했다.

술식은 머리에 있다. 트리거로서 자신이 지팡이를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무수한 마법의 선들이 뻗어와 술식을 어그러뜨린다.

미아 역시 대항하지만 거대한 규모의 술식을 다 대 일의 마법전으로 무사히 안착시켜 발동하는 것은 어렵다.

마법진이라는 명확한 매개가 있으니 더욱 간섭이 쉽게 들어온다.

설치형 마법의 단점이다.

“으으그윽!”

제니도 무언가 계획대로 되고 있지 않음을 느꼈다.

실피드는 여전히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다.

조여오는 암석의 벽이 점점 더 밀도가 높아진다.

오래 버틸 수는 없을뿐더러, 실피드의 지속시간이 다하여 사라진다면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일단 공간이라도 열어서 도망치는 게……?”

잠깐이나마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그 순간 지하로 내려간 파티원들이 위험해져요…….”

그 말이 옳다. 제니가 침통하게 입술을 깨문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런 싸움에서 일개 쌍검사는 짐덩이일 뿐이다.

* * *

희우는 돌더미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단단히 가드를 올리고 치명적인 피해만 면한다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천히 파고 올라가면 된다.

천사는 식량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므로.

하지만 쏟아지던 암석들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무언가를 노리듯이 쏘아지기 시작하고, 이윽고 뭉쳐서 포위망을 형성했다.

그리고 마법진이 생겨나는 것도 보았다.

동시에 화려하게 출현한 마법진에도 불구하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음도 보았다.

미아는 그렇게 발동속도가 느린 마법사가 아니다.

장비도 둘둘 감은 마당에 완성되는 순간 무언가 일어나야 했다.

그러니까 일이 틀어진 것이다.

트롤 전사를 흘깃 본다.

재생하고는 있으나 [섬광 재생]이 치명적인 타격이었음은 분명하다.

날개를 움직여 본다.

조금 기동력의 하락은 있으나 엄청난 문제는 없다.

[슈퍼 히어로 랜딩]의 쿨다운을 본다.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

희우는 출격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기 갑자기 솟아난 강철의 벙커를 괴롭히면 되는 거겠지?

저곳에 정령사가 있음이 분명하다.

딸아! 엄마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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