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88화
왕국 - Lv.2116 [정령왕의 계약자] 아젤리아(2)
미아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폈다.
긍정적 사고, 훌륭한 사고, 냉철한 사고.
마법사는 본디 준비가 잘 되어 있을수록 강력해지는 클래스다.
미아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자신이 현재 공격하는 입장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마법사에게는 그 자체가 이미 패널티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무래도 전사 길드의 요새다보니 마법사의 수나 질은 낮지 않겠는가.
그 생각은 정확했다.
다만, 미아는 숫자의 폭력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파고드는 마력의 실은 많아도 너무 많다. 그것도 광대한 영역의 어느 구간을 망가뜨려도 되는 마법진을 상대로 파고든다.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좋겠다.
일제히 열로 달구어 범위 내를 기화 암석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고열의 기체를 활용하여 직격할 생각이었다.
발상은 좋았다.
마법사가 다루는 정령왕의 본질은 마냥 화력이 아니다.
마법을 다루며 동시에 정령을 다루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고레벨 마법사의 영역에서는 분명 필요하다.
마법은 원소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정령은 원소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원소 마법사에게 정령의 존재는 어떠한가.
마법사가 해야할 준비를 대신 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플라즈마 마법진처럼.
하나 미궁에는 그런 영역까지 생각이 미치는 자가 적다.
응용보다는 단순하고 강력한 힘을 추구하는 경향이 팽배하다.
막연히 응용의 높은 산을 바라보아도 어차피 그곳에 도달할 수 없으니까.
처음부터 높은 곳을 보며 지낸 미아에게는 숨 쉬듯이 당연한 발상이 적들에게는 생소한 것일 수 있다.
미아 역시 그간의 반응이나 짧은 학창 생활로 그 차이를 알고 있다.
상대의 심리를 이용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먹힐 줄 알았다.
실제로 먹혔을 것이다. 수의 폭력을 간과하지만 않았다면.
우선은 술식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게 막아내고 수복하는 것에만 온 정신을 집중해야했다.
한끝 차이로 수가 읽혔다.
실피드가 스스로 회피기동을 하기에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수십의, 어쩌면 수백일지도 모르는 마법사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개입하고 있다.
마법진은 너무나도 크다.
차라리 규모를 더 작게 잡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객기와 용기 사이의 어딘가에서 줄타기를 약간 실패한 셈일까.
미아는 고민한다. 방어를 하면서도 정신 한구석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에 대하여 고민했다.
이미 시간은 30초 이상이 흘렀다.
주어진 시간은 썩 많지 않다.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해야할까?
적어도 10초 이내로는 결정해야했다.
방어가 당장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피드가 돌아가고 나면 정령왕을 단독으로 상대해야한다.
이 수많은 마법사들의 견제를 받으면서.
그건 아무리 그래도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사고를 가속하는 요령으로 머리에 마력까지 흘려 사용하면서 맹렬하게 생각한다.
뇌에 부하가 걸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코에서 혈액이 새어나감을 느꼈다.
이제 클랜 마스터인 미아는 아까운 혈액을 재빨리 회수했다.
뇌쪽의 약간 발생한 손상은 재생되고 있다.
실피드가 말했다.
[원한다면 연산을 보조할게요.]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제 계약자는 지금까지도 한 명 뿐이며, 그 동안 보고 배운 게 있으니까요.]
미아는 그 말에 다시금 떠올렸다.
아빠가 언젠가 일러줬던 말이었다.
대부분의 유배자나 NPC 정령사들이 하는 착각.
유배자 정령사들은 정령을 소환수로만 여긴다.
그리고 도구로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을 테니 어쩔 수 없다.
한번 굳어진 인식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반면 NPC 정령사는 정령은 완전한 하나의 객체로 여긴다.
온전한 인격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
어린 시절부터 친구처럼 지내온 탓이다.
모두 사실이 아니다. 정령은 어디까지나 계약자를 투영하는 존재다.
그 인격과 성격은 계약자를 비추는 거울.
최초의 실피드가 형체조차 불분명하고 자아조차 희박했던 것은 그 탓이었다.
정령은 계약자의 거울.
그 순간 미아는 깨달았다.
실피드는 한때 마법의 신이었던 유배자와 계약한 정령이다.
가장 좋은 활용방식은 애초부터 마법 보조다.
미아는 마침내 아빠가 의도한 정답에 도달했다.
* * *
“힌트를 좀 주니까 잘 받아먹네.”
“뭐가?”
달리는 와중 블랑쉐가 의아함을 표했다.
“실피드를 통해, 약간 힌트를.”
“정령왕……. 그 아이에게 줄 건가?”
“제니 혼자 지키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 비상시에 사용할 호위수단은 있어야지.”
“그렇군.”
블랑쉐는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제손에 쥐어진 언더그라운드산 고대문명 병기가 참 마음에 들어서일 것이다.
행운의 성물은 이제 함부로 쓰기 꺼려질 만큼 소모되었지만 나쁘지 않다.
다양한 경험을 쌓고, 파밍을 최적화하는데 알차게 사용되고 있다.
“대충 이 던전의 구조를 알 것 같아. [하드스록] 멤버와 전투가 벌어진다면 각각 일대일이야.”
“일대일인가.”
이번에는 에길이 반응했다.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이다. 그러나 잡담을 좀 나눈다고 해서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하로 뻗은 요새는, 오히려 던전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광대했다.
침공의 군세를 끌어들이기 위한 깔대기가 산맥 스케일이니 그렇게 모아서 구겨 넣는 쪽도 무시무시한 스케일이다.
그야말로 대군이 지나갈 수 있는 스케일로 뚫려있다.
지하로 입을 벌린 아가리라기보다는 차라리 지하도시를 만들려고 했던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물론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기는 했다.
“일대일이지. 생각해봐. 정령사의 존재는 의외였지만 그건 열심히 은폐한 히든 카드일 테고. 그런 게 많지는 않을 거야.”
“왜지?”
“그랬으면 이런 혼란을 기다리지도 않았겠지. 곧바로 [더 시티즌]을 밀어버리면 된다.”
“그렇군.”
이거 참, 둘 모두 과묵한 타입이다 보니 잡담은 재미가 없다.
먼저 내려간 일부 병력들이 저항을 시도하는 정황이 포착된다.
블랑쉐가 자신의 새로운 장난감을 기쁘게 치켜들었다.
미궁의 무기들은 높은 급으로 갈수록 외형이 비현실적이게 되어간다.
어딘가에 원전을 두고 있는 [묠니르]나 [레바테인] 같은 것이 아닌 미궁의 오리지널일수록 더하다.
그것이 그만큼 현실과 괴리되어가는 모습을 나타내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블랑쉐가 [언더 그라운드 유적]에서 손에 넣은 총기 역시 외형만 보면 총기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블랑쉐의 오른 손에 장착된 장갑에서 기천사의 날개와 같은 핀들이 펼쳐진다.
어깨까지 이어지던 장갑의 부피가 줄어들면서 하나하나 핀이 달린 드론들로 분리된다.
장갑의 손등에 박혀있는 코어가 빛난다.
드론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수는 언제나 무기빨의 클래스다.
그런 클래스가 최종티어에 도달하면 단일 포구로는 화력의 부족을 느끼기 쉽다.
그렇기에 후반부의 총기들은 대개 이런 옵션을 달고 있다.
제작이 끔찍하게 까다롭거나, 획득 장소가 아주 흉험한 곳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용자는 극히 적다.
하지만 사수 플레이의 난이도는 이런 보조 화력이 존재하는 장비를 얻는 순간부터 극적으로 내려간다.
이 순간부터 사수는 일인군단이 된다.
드론들은 기천사의 날개와 같은 핀을 달고 있으며 크기도 작고 질량도 작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저항하기 위해 진영을 갖춘 병력들 머리 위로 이동해있었다.
랭커인 그 전사들은 당연히 드론에 반응하려고 하지만.
드론은 그대로 전사들을 지나쳤다.
자그마한 파편들이 흘러내린다.
그것이 위협적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작은 사이즈.
빛이 번쩍였다.
방패를 들고 있는 전사들은 다치지 않았으나 예상치 못한 공격에 크게 밀려났다.
진영이 흐트러지고 블랑쉐가 추가적인 공격을 실행한다.
각지로 흩어진 드론들이 재빠르게 날아다니며 하전입자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고블레타리아 연방 제식 소총과는 출력자체가 다르다.
애초부터 기천사를 만든 기술이 고스란히 적용되어있는 드론이다.
폭음과 섬광이 여러 번 더 번쩍인 후, 우리가 그 곳에 도달했을 때 이미 저항 가능한 병력은 남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화력이야. 조작은 아직 힘들지만.”
블랑쉐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한다.
하지만 즐겁다는 듯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다.
이런 상황에서 느끼기엔 이상하지만 블랑쉐는 원래 이런 사람이긴 하다.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살인, 살의, 훈련, 증오.
그런 어린 시절과 삶만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남는 것이 그것뿐이다.
블랑쉐는 잔혹무도한 살인마지만 달리 말하면 그것 말고 아무것도 몰랐던 암살자다.
지금만 보아도 죽지 않을 정도로 힘을 조절하고 있다.
그래도 된다는 것을 알아서다.
블랑쉐 역시 희우나 에길, 제니 등을 보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있는 모양이다.
순해지고, 유해졌다. 날카롭고 불안에 가득 차있으며 언제나 경계심뿐이던 표정이 어느 순간부터는 부드럽게 풀리지 않았나.
물론 무기를 보며 그러고 있는 것이니 아직 갈 길은 더 멀다.
“온도가 점점 올라가는군.”
“[지옥]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래. 용암 강이나 호수가 점점 늘어날 거야.”
“모두 침공을 막기 위한 장벽으로 기능하나?”
“그렇지. 머리를 잘 썼어. 카베는 경험 많은 유배자가 맞을 거야. 엄청나게 많은 침공을 경험해본 모양이군.”
지름이 1km쯤 되는 용암의 호수가 나타났다. 고여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우리는 달려온 거리를 도움닫기 삼아 그대로 뛰어올랐다.
건너편에서 투사체들이 날아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 투사체를 밟으며 건넜다.
블랑쉐는 아예 공중에서 기동할 수단이 어럿 있다.
에길은 궤도가 조금 달랐다.
포탄처럼 날아가 천장에 부딪힌 후에 그대로 천장을 박차고 직선으로 날아갔다.
* * *
희우는 최근 몸에 익히며 감이 잡히기 시작한 형태로 비행했다.
현재 정령왕과 다른 모든 병력들의 시선은 미아 쪽으로 향해있다.
그렇다면 요란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다.
필살기성 스킬 둘이 아직 쿨다운이다.
힘살자는 일대일에서는 좋은 성능을 내겠으나 액티브가 쿨인 상황에서 다대일에 유리할 것은 없다.
속도를 조금 낮추는 대신 은밀하고 기척 없는 비행 끝에, 적 정령사 곁에 도달했다.
많은 마법사들이 모여있다.
정령사는 가장 안전한 위치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희우는 눈을 열심히 비빈다음에 부릅뜨고 벙커를 다시 보았다.
처음부터 마법에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마법을 사용할 성향이 아니었을 뿐.
그러니 감각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다.
무수히 뻗은 마법의 실들이 보인다.
오빠는 저걸 아무렇게나 잡아뜯을 수 있었지만 희우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면 술자들을 괴롭히면 된다.
날개를 접고 달려 접근한다.
비행으로 은밀한 것보다 여전히 두발로 땅을 딛고 은밀한 것이 편하다.
난리통이라 예리하게 발달했을 랭커들의 감각도 희우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가가면 결국 들키기는 한다.
희우도 서두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전사 하나가 문득 돌아보았다.
희우는 날개를 접고 자세를 낮추고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전사의 얼굴에 여러 가지 생각이 순간적으로 흘렀다.
카롤리, 천사, 등등, 그러나 날개를 접고 있어 아직 떠올리지 못한 모양인지.
혹은 카롤리가 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는지.
“누구냐!”
“애 엄마다!”
희우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플레이트 아머가 느껴지지만 단검의 손잡이로 때려 찍는다.
갑옷이 움푹 파였다.
그대로 땅을 짓밟으며 그 힘을 퍼올려 왼손으로 펀치를 날렸다.
움푹 파인 곳이 뚫리며 배를 강타했다.
북치는 소리와 함께 전사가 기절한다.
랭킹에 이름을 올릴만한 전사도 이제 이 정도로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미궁은 쉴틈없이 유배자를 강하게 만든다.
어쩐지 바깥으로 돌아가 다시 괴물과 싸우더라도 훨씬 잘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투의 소음에 가까운 이들이 눈치 채기 전에 다시 달렸다.
벙커가 보였고, 일단 날개를 펴고 달려가서 그대로 킥을 날렸다.
쾅하고 큰 소리가 울려퍼졌다.
희우는 그대로 날개를 펴고 날아서 도망쳤다.
잠시 후에 같은 일을 반복했다.
대지의 정령왕이 여기에 눈을 돌릴 때까지.
그리고 [슈퍼 히어로 랜딩]의 쿨다운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