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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89화 (289/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89화

왕국 - Lv.2116 [정령왕의 계약자] 아젤리아(3)

정령은 일종의 AI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렇다.

초고레벨의 사수에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보조무기가 주어지는 것처럼 마법사에게는 정령이 주어진다.

미궁의 마인드맵은 끝없이 뻗어 나간다.

그러니 결국 효율적인 설계를 하여 빨리 도달하건, 막연히 레벨만 엄청나게 올려 도달하건 같은 곳에 도착한다.

결국 극에 도달한다면 같은 스탯을 공유하는 클래스끼리는 통합되고 병합된다.

대다수의 유배자는 모르는 사실이었으며, 미아도 이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빠는 이 사실을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암시하는 정보 자체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미아는 스스로 생각해야 했다.

실피드가 할 수 있는 일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위대한 마법사를 투영하고 있는 바람의 정령왕은 술식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아니, 이해가 높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디선가 불러오는 느낌이었다.

저장된 장소가 있고 그것을 그대로 가져오는.

마법사 단독으로는 [메모라이즈]가 비슷한 기능을 하겠으나 결국 미리 짜둔 것일 뿐이다.

실시간 처리속도에서 차원이 달라졌다.

원하는 형태를 생각하고 구축을 시작하려고 하면 이미 실피드가 줄기를 제공한다.

그것에 살을 붙이려고 한다면 마음을 읽은 것처럼 한발 먼저 틀을 짠다.

미아가 해야 할 일은 계산이 아니라 발상이었다.

생각.

그동안 약간의 문제로 밀어두었던 온갖 발상들.

형태.

구상.

마법.

그러는 동시에 여전히 정령왕으로서의 권능은 여전하다.

주변을 조여 오는 암석의 층은 이제 너무 촘촘해져서 물리적으로 탈출할 공간이 없을 지경이었다.

미아는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마력의 저장소를 해방했다.

그런 식으로 완전히 제어하는 마력은 당연히 제한이 있다.

하지만 실피드가 그것을 보조한다.

미아는 가장 먼저 원소의 변환에 관한 술식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크게 구상만 한다.

붓질을 하면 실피드가 디테일한 부분을 마저 채운다.

의도만 분명하게 남긴다면 완성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미아는 편안함을 느꼈다.

거의 앗 하는 순간 완성된 것은 레베카 교수님도 입을 벌릴 만한 것이었다.

바람의 원소를 정제하여 불의 원소로 만들어낸다.

대기 압축에 의한 플라즈마 화를 통한 원소 변환은 그 과정에서 순수한 마력으로서 방출되는 손실이 많았다.

이렇게 하면 여과 없이 걸러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바람으로서 존재하며 불의 성질을 가지게 하는 식의 신기는 불가능하지만 이 정도라면 가능하다.

차갑게 불타는 레바테인을 볼 때마다 생각했던 술식이었다.

다만 그것에 드는 품은 현실적이지 못했으며 홀로 며칠 밤낮을 싸매어야 겨우 가동할 만큼 복잡했다.

연구실에서나 할 수 있지 실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준비된 마법사의 요새에나 존재할 수 있는 술식이다.

그것이 즉석에서 만들어졌다.

조여 들어오는 암석 벽 사이에 남아 있는 모든 공기가 그 안을 통과했다.

손실 없이 있는 그대로 불의 원소가 되고, 제어를 고스란히 미아가 방출한 자신의 마력에 융화된다.

전체를 직접 제어할 필요는 없다.

바깥에서 공방을 벌이고 있는 거대한 마법진에 이것을 채워넣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력은 거기까지의 길만 터주면 될 뿐.

술식을 짜는 속도가 차원이 달라지자 대응 속도도 달라진다.

바깥의 마법사들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이 밀려나고 있다.

저쪽에도 정령왕이 있고, 미아에 못지않은 강력한 연결을 가진 마법사들이 있으나 그들은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미궁이 간혹 다수의 폭력을 이겨낼 수 있는 개인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 * *

아젤리아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는 조짐을 느꼈다.

상대를 찌그러뜨리기 직전이다.

정령왕의 가동 시간도 아직 넉넉하다. 애초에 그녀가 가진 것이 마력뿐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죽어가며 새긴 경험들이 직관이 되어 뇌리를 강타한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것은 아젤리아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전율했다. 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마법사는 없다.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저 상공까지 닿는다면 그들은 이미 하이랭커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마법사들 역시 침공을 방어하겠다는 신념에 동의하여 모인 역전의 용사들.

마력을 다루다 보면 별의별 것에 다 예민해진다.

거대한 힘이 움직이면 어떤 식으로건 여파가 미치고 그것은 미미할지라도 작은 정보가 되어 주변에 퍼진다.

오랜 세월 단련한 달인의 감각이라는 것의 정체는 사실 그것이다.

개개인이 달인이라 부를 만한 이들만 모인 이 땅에서 그 조짐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이들은 없었다.

무언가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느낄 수 있는 현상으로도 다가왔다.

마법전을 위해 내뻗어진, 각자만의 방식 버릇대로 움직이며 상대의 거대한 [인페르노]가 완성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던 실들.

기나긴 마력의 실들이 전부 밀려나고 있었다.

한군데 힘을 집중했다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압도적인 힘으로, 여기서는 연산능력으로 밀려나고 있다.

뒤틀어둔 술식이 복구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건드리는 순간 이미 원상태로 돌아가 있다.

알아보기 힘들게 다시 고쳐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접촉해서 뭔가 하려는 순간 이미 무언가가 찾아와 밀어내고 차단시킨다.

다시 접근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막아낼 수는 있었을 것이다. 마법사의 숫자는 많았고 개개인의 능력이 결코 어디 가서 아쉽지 않았다.

쾅!

펑!

바깥에서 계속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추격전이었다.

천사 하나가 끊임없이 정령왕이 형성한 벙커를 두들기고 있다.

당장 위협적이진 않으나 타격이 있긴 하다는 게 문제다.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저런 불온한 사운드 이펙트가 귓가에 아른거리면 집중력이 약간이라도 분산되기 마련.

동시에 그것이 의미하는 사실을 깨달은 아젤리아가 신음했다.

카롤리가 쓰러졌나?

그럴 수는 있다.

애초에 [아케인]의 둘이 저 파티에 당했다.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어떻게 카롤리가 쓰러졌는데 그 상대가 저렇게까지 멀쩡하지?

상성이 정말로 나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아젤리아가 알기로는 같은 전사였다.

이렇게 현격한 차이가 난다고?

어지러워지고 있지만 발을 강하게 디딘다.

주먹을 꽉 쥐고.

온몸에 품고 있는 모든 마력을 쏟아냈다.

마력 방출량은 정령사에게 가장 중요한 스탯 중 하나다.

정령왕 외에도 그녀와 계약한 수많은 대정령, 그리고 바로 아래급의 최상급 정령들이 소환된다.

이렇게 되면 정령의 일부가 희생되어 한동안 소환할 수 없게 될지라도 돌격시켜야 한다.

일인군단이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고위 정령사의 군세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 * *

미아는 자신의 최초 계획이 좌초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실피드의 보조가 시작된 이후로 무너져가던 마법진과 술식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복구되고 있었다.

다만, 실피드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5초가 안 된다.

그리고 닥쳐오고 있는 대지의 정령왕의 바위 감옥 역시 조만간 도달한다.

공기가 압축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는 좋은 일이었다.

감옥이 공고해지며 점점 빠져나갈 곳을 잃은 공기들은 압축되기 시작한다.

단숨에 플라즈마화 되지는 않으나 명백하게 열기를 띠고 있다.

이미 호흡은 불가능하다. 제니는 숨을 참았고 미아는 원래 숨을 쉬지 않는다.

그 열은 바람의 원소를 불의 원소로 재구성하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효율은 가파르게 상승한다.

하지만 죽음도 그만큼 빠르게 다가온다.

빈틈없이 압축되어 실피드도 마침내 더 이상 빠져나갈 공간을 찾지 못했다.

바람을 일으켜 0.1초라도 끝을 막으려고 할 뿐이다.

이 거대한 대지의 구체 속은 이미 하나의 마력로였다.

암석끼리도 서로 눌려 일그러지고 비틀리며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간다.

미아의 몸이 타들어간다. 제니가 꼭 끌어안고 최대한 견뎌냈다.

남은 시간 10초.

열기가 너무 뜨거워졌다. 불의 원소도 너무 많아졌다.

동시에 실피드가 제어하여 저항할 바람의 원소도 줄어든다.

남은 시간 9초.

미아는 견디기 위한 곳에도 마력과 술식을 할애해야 했다.

붉게 달아오른 암석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제니는 미아를 많이 가리기 위해서 끌어안아야 했다. 이미 눈물은 증발하고 없다.

남은 시간 8초.

바람의 원소가 거의 사라졌다.

이것은 동시에 모든 것이 불이 되었다는 뜻이다.

열과 압력이 얼마 남지 않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바위들이 더 가열차게 좁혀온다.

남은 시간 7초.

바깥의 마법진으로 모든 불의 원소를 이어 흘려보낸다.

정령왕의 제어하에 있는 땅의 원소가 사방을 포위하고 있기에 그 또한 지난한 일이다.

그것을 위한 술식은 이미 준비되어 깔려 있는 상태였다.

미아는 제니의 허리춤에서 포션병을 꺼냈다.

제니는 눈치채지 못했다.

남은 시간 6초.

미아가 제니의 입에 포션병을 쑤셔 박았다. 그러지 않으면 제니가 죽을 것이다.

남은 시간 5초.

[인페르노]의 마법진에 빛이 차오른다.

하지만 그 순간, 적 정령의 군세가 마법진을 들이받았다.

마법전도 뭣도 아닌 순수한 힘의 충돌.

최후의 수단에 가까운 정령 희생.

그 여파로 다시 수리해야 할 부분이 생겼다.

실피드도 신음을 흘렸다.

남은 시간 4초.

복구가 진행 중이다.

아직은 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2초는 남겨야 한다.

남은 시간 2초.

상대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름만 수㎞인 거대한 마법진이 가동했다.

미아는 실피드에게 속삭였다.

‘실피드! 살려줘!’

다음 순간, 주변에 있던 모든 암석들이 일제히 승화하여 암석가스가 되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다.

미아는 의식을 잃었다.

* * *

세로로 긴 화염의 기둥이 출현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화염이 아니었다.

주변에 작열지옥을 흩뿌리는 암석 가스의 기둥이었다.

그것은 기체였으며 실피드의 지배하에 있었다.

실피드는 용의 형상을 포기하고 자신의 계약자가 무의식 중에 투영하고 있는 모습을 취했다.

단발의 발랄한 소녀.

키가 더 자라기 전의 자그마한 모습.

하지만 더 작은 미아를 끌어안기엔 충분했다.

손상과 재생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제니가 비명을 지른다.

실피드는 암석가스를 제어하여 진공을 만들어냈다.

진공에선 열전도가 일어나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열기는 아주 잠깐 제니와 미아의 피부를 지졌을 뿐 더 이상 닿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막대한 암석 가스는 그대로 방향성을 부여받았다.

갑작스러운 부피 증가에 폭발하여 터져 나가는 모든 힘이 고스란히 한 방향으로 향한다.

저 아래 대지의 정령왕이 존재하는 방향으로.

이미 솟구치고 있는 장벽이 이 공격을 막아내려고 준비 중이다.

실피드는 이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저쪽이 견뎌낸다면 이쪽은 이제 여력이 없다.

실피드는 이 명령을 마지막으로 돌아갈 것이다.

휘몰아치는 암석 가스의 폭풍 속에서 진공으로 된 안전한 길을 죽 이어간다.

버둥거리는 제니에게 미아를 안겨준다.

그리고 그대로 쏘아버렸다.

희우의 어린 시절 모습을 한 실피드는 그대로 제니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안전한 곳까진 날아가야지.

하지만 실피드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모습의 원주인을 보았다.

정확히는 느꼈다.

내리꽂히는 암석가스보다 먼저 앞서서 돌격하고 있다.

날개를 접고, 도리어 실피드의 공격을 추진력 삼아서 급강하하고 있는 천사의 모습을.

계약자를 닮은 정확한 상황 파악 능력으로 실피드는 승리를 점쳤다.

그리고 제 모습의 주인에게 미소 지으며 정령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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