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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90화 (290/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90화

왕국 - Lv.2923 [끝의 대지] 멜메르(1)

충격과 공포.

그렇게 표현하기 너무나도 적절한 파괴가 요새의 입구였던 곳에 작렬했다.

그 시작은 어떤 천사의 내려찍기.

그러나 그 일점에 담겨 있는 힘은 아젤리아가 온힘을 다해 세운 벽을 꿰뚫기 충분했다.

광대한 열기의 폭풍을 받아내고 피해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슈퍼 히어로 랜딩] 같은 것은 애초부터 고려되지 않은 타격이었다.

심지어 희우는 최대한 관통력이 높은 형태로 힘을 집중했다.

그 결과로 체격에 비하면 커다란, 하지만 벽의 규모에 비해서는 그다지 크지 않은 구멍을 뚫어냈다.

동시에 그대로 벽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상황에서 충격을 잔뜩 머금고 뛰어든, 심지어 신성한 화염으로 불타고 있는 무기를 휘두르는 천사를 상대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하드스록]의 병력들은 각자 살길을 모색했다.

우습게도 희우 역시 미아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온 폭풍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어, 어어어라?”

어째 너무 빠르더라.

나도 위험한가?

사실이었다.

아젤리아가 기겁을 하며 구멍을 막으려고 했으나 광폭한 암석가스의 세례는 거침없이 흘러들었다.

견고한 댐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지는 법이다.

아젤리아는 정신적인 비명을 내질렀고. 사실 그건 육성으로도 새어나오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

전사들 몇몇이, 개중에 방패를 들고 탱킹 스킬을 보유한 전사들이 서둘러 스크럼을 짰다.

여러 [방벽]을 비롯한 상위 스킬들이 발동하고 몰아치는 재앙에 대비했다.

희우는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은근슬쩍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압도적인 재앙 속에서 그 사실을 눈치챈 자들도 있었으나 어찌할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희우도 곤란했다.

더 이상 포션도 없고 애초부터 [슈퍼 히어로 랜딩]은 시전자의 안전을 전혀 보장하지 않는 스킬이다.

격돌의 순간 충격을 전달하는 매개인 팔과 다리에 큰 손상을 입었다.

날개가 무사한 덕에 비행은 가능하지만 걷는 것도 쉽지 않다.

벽이 붕괴하고 파괴적인 격류가 거침없이 들이닥친다.

충격에 대비하고 있었으나 모두가 무사하지는 못했다.

암석 가스의 격류는 그 온도만 해도 5천 도를 가볍게 넘었으면 지닌 물리력은 그보다 더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식으며 다시 용암이, 그리고 암석이 되었다.

모두의 시야가 부분적으로 검붉은 회색 연기로 뒤덮였다.

그것은 일종의 화산쇄설류라고 볼 수도 있었다.

물론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고온의, 사실 이름 붙이기도 힘든 새로운 현상이다.

어찌 되었건 그것이 지닌 위험만큼은 흡사했다.

바깥의 폼페이에 일어났던 재앙이 수천 배는 되는 스케일로 재현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요새의 병력들은 전원 랭커급이거나 그에 준하는 이들이었으면 튼튼한 전사 계열의 초인이다.

가장 최초의 충격에 맞선 전사들이 어떻게든 파국을 미루고 있는 동안 마법사들도 간신히 그곳에 힘을 더했다.

실피드의 보조를 받은 미아가 너무 손쉽게 뿌리친 덕분에 마법사들의 마력은 아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였다.

마법사들은 사력을 다해 마법을 짜냈다.

아껴두었던 소모품 따위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죽음 후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부에게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검은 안개가, 다른 이들에게는 되돌아갈 1층의 밤하늘이 아른거린다.

시야는 가려졌지만 훈련으로 혹은 경험으로 서로를 지탱하며 이 재해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들은 애초에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준비했던 자들이다.

다음 순간 방벽 계열 스킬들도 붕괴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마력장벽과 같은 계통의 스킬들이 그 뒤를 잇는다.

선두였던 일부 탱커들이 노출되었으나 그들은 굳건히 이 정령쇄설류를 이겨내며 밀려나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선두의 탱커들이 제 몸으로 기세를 죽인 흐름을 바로 뒤편의 비탱커 계열의 전사들이 몸으로 다시 받아낸다.

마법사들과 정령들이 그 뒤편에서 술식을, 그리고 원소를 제어하며 전사들이 버틸 수 있게 지탱한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쇄설류의 흐름은 방향이 꺾여 버티고 있는 이들의 위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아젤리아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면서도 대지의 정령왕, 오르트의 시야를 통해 그것을 느꼈다.

식어서 다시 암석이 되는 것들은 그녀의 영역이다.

기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고체로 순식간에 식어가는 것들을 어떻게든 퍼 올린다.

함량으로 치자면 얼마 되지 않겠으나 결국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그리고 대지가 솟아오른다.

열전도가 일어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기에 아직도 고체인 대지가 솟구치며 추가적으로 지붕을 형성한다.

하지만 [인페르노]에 의해 기화한 암석의 규모는 너무 컸다.

산이 한두 개는 증발한 수준이다.

문득 모두가 느꼈다.

이대로면 다들 죽을지도 모른다.

희우 역시 그것을 느꼈다.

우리 딸 너무 세잖아! 힘 조절 좀 해!

물론 미아 쪽도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한계의 끝자락까지 몰린 지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은 모른다.

이들을 살리려면 무언가 해야 한다.

이겼는데 죽게 둘 필요는 없다.

이 꼴을 당하고 항복하지 않을 리는 없지 않은가.

무언가 해야 했다.

희우는 자연스럽게 탱커 뒤편에서 빠져나왔다.

몸 여기저기와 날개에도 고열의 용암과 암석이 달라붙고 있어 괴롭다.

기억에 의지하여 정령사가 있던 방향으로 간다. 그 주변에 마법사들도 잔뜩 모여 있었다.

그쪽은 시야도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방벽 사이로 여기저기 용암이나 고열의 암석 혹은 기체들이 흘러들고 있으나 마력 방벽이 제 일을 하고 있다.

용암범벅의 천사가 다가오자 기겁을 한 아젤리아가 입을 뻐끔거렸다.

“일단 누가 포션 좀 줄래요?”

그렇게 말해도 당연히 다들 경계한다. 희우는 그럴 수밖에 없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지금 싸우러 온 거 아니거든요? 살아남아야죠? 일단?”

아젤리아가 비명 지르듯이 말했다.

“너 너너! 너 때문이잖아! 너희 파티원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래!”

“사실 저도 휘말렸어요.”

“뭐?!”

“막아볼 테니까 좀 줘봐요!”

아젤리아가 미간을 팍 찌푸리고는 병을 던졌다.

곳곳에 불순물이 많지만 기적의 샘물은 어쨌든 신체기능을 회복시킨다.

희우는 일단 신체기능이 돌아왔음을 느끼고 생각했다.

좋아 이제 어떻게 하지?

희우는 일단 시간을 멈췄다.

시간의 신의 황금빛 권능이 그의 천사 주변의 시간을 모두 얼어붙게 만든다.

생각해 보면 마법사들은 이런 식으로 탈출할 수는 있겠구나.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봐야 요격당할테니 그럴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지.

시간 속에 얼어붙은 쇄설류와 온갖 기타 등등을 보며 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수저가 좋긴 해.

시간의 신앙은 그동안 고갈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 해도 조금씩 차오르는 것이 시간의 신의 신앙이다.

어찌 [시간 정지] 한 번 정도는 할 여력이 있어 다행이다.

전투에서 이걸 쓰지 않았기에 계속 아껴두려고 했는데.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지?

여신님께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시간의 천사인 그녀는 더 이상 혼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정지한 시간은 지속이 아주 길지는 않을 터.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꼭 희우가 직접 어떻게할 필요는 없다.

사실 그녀가 벙커에 구멍을 뚫지만 않았어도 적당한 피해 수준으로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걸 했던 이가 다시 하면 된다.

아젤리아를 보고 있지만 그쪽은 반응이 없다.

“기껏 모은 신앙을 다 쓰게 생겼지만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언제나 보람차지!”

남은 신앙을 박박 긁어모아 아젤리아를 시간의 틈새로 불러들였다.

아젤리아가 어안이 벙벙하게 둘러본다.

“일단 밖으로 다 빼내죠!”

“……?”

아젤리아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의 천사…….”

“여기서 다시 정령왕 불러올 수 있나요?”

오르트는 독립된 존재기에 여전히 굳어있다.

아젤리아는 몹시 기묘한 기분으로 오르트를 돌려보내고 다시 불러왔다.

어쨌든 살아남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천사는, 그리고 아마 상대 파티는 진심으로 사상자를 많이 만들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병 주고 약주고’였지만 당장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기에 아젤리아는 침묵했다.

시간도 많지 않았다.

* * *

바깥에서 굉음이 들렸다.

이미 지하 깊은 곳까지 거침없이 달려왔음에도 느껴진다.

용암이 흐르고 열기로 지하가 달아올라있는 거리임에도 바깥에서 대단한 일이 일어났음은 알겠다.

“실피드가 돌아갔어. 너무 과하지 않나 걱정인데.”

“다 죽으면 곤란하긴 하지.”

“여유가 없었나?”

“아슬아슬했더라고. 하지만 저대로 다 죽으면 어떻게 되어 버릴 테니 곤란한데. 제발 잘 버티기를.”

그쪽은 그쪽이고 이쪽은 이쪽이다.

용암 호수를 몇 개 더 넘어가며 요격을 시도하는 이들을 제쳤다.

다시 공간이 넓어졌다.

전체적으로 병목현상을 유도하면서 침공의 군세를 잘라먹기 하기 위해 설계된 구조다.

수르트 같은 강력한 개체를 어떻게 처리할까를 생각해 보면 아마 중간에 [하드스록] 멤버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넓은 공간이 드러나자 장관이 펼쳐졌다.

요새 속에 다시 한번 요새가 있었다.

이번은 함정에 더 가까운 입구 쪽과 다르다.

그야말로 지하의 암반을 깎아 성채를 만들어 두었다.

벽 전체가 총안구가 나와 있는 요새였다.

지하로 깊어질수록 지옥에 가까워지고 지옥에 가까워질수록 암반 자체도 더욱 단단해진다.

이 정도 깊이면 지상과 다르게 고레벨 유배자도 아무렇게나 때려 부술 수 있는 무른 지반이 아니다.

구조상 처음의 입구에서 최대한 자잘한 것들의 수를 줄이고 후퇴하며 지연전, 이쯤에서 강력한 개체가 앞으로 나설 것이라 판단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높이만 수백 미터는 될 거대한 규모의 요새보다 더욱 시선을 잡아채는 것은.

“나와 싸워 힘을 증명해 보라!”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는 거인이었다.

역할은 아마도 수르트 같은 강력한 개체들을 상대로 버티며 요새가 다른 잡졸들을 처리할 시간을 버는 것.

카베는 아닐 것이다. 훨씬 젊은 거인이었다.

그리고 거인으로서는 놀랍게도, 그 거대한 몸에 중장갑을 두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고스란히 다 가릴 수 있는 굉장한 사이즈의 방패를 왼손에 들고 있었다.

무기는 오른손의 거대한 둔기.

불길한 검은색을 띤 나무 몽둥이.

저건 매번 형태가 달라지는 아티팩트다. 검은 목재라는 점만 같을 뿐, 회차마다 다른 종류의 장비로 나타나는 [미스틸테인].

거인이 다시 고함을 내지른다.

전사들은 저런걸 좋아한다. 어쩔 수 없다.

“내 이름은 멜메르! 이 요새도 통과할 수 없다면 [메인 던전]에서도 통하지 않을 터!”

거인 방패전사라.

거인의 단점은 장비 문제로 방어력에 하자가 생긴다는 것, 방패전사의 단점은 거대한 괴물들을 상대로 한손 무기의 효율이 별로라는 점.

거인과 방패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조합이다. 좋은 세팅이군.

에길이 나를 보았다.

그는 방패를 위해 거병을 준비했다.

그렇다면 저것과 부딪쳐 보고 싶은 생각이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블랑쉐. 맡긴다.”

“나인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지 않아?”

에길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평소에는 과묵하고, 간혹 입을 열더라도 현명한 전사지만, 호승심이 없는 전사란 것도 이상하지.

“내가…….”

“아니요. 에길. 인간 사이즈의 거병도 거인에게는 한 손 무기입니다. 도리어 저 방패를 뚫어내는 데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렇군. 납득하겠다.”

반대로 블랑쉐가 고개를 갸웃한다.

“저걸? 내가?”

아직 모르나 보군. 하지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혹여 지더라도 죽이진 않을 테니 문제 없다. 여기선 그냥 던져두고 가자.

“에길, 당신은 카베를 맡아주시죠.”

“흠.”

만족스러운 표정. 전사들은 다들 어찌 이렇게 쉬운지.

어안이 벙벙해하는 블랑쉐를 남겨두고 우리 둘은 다시 달린다.

멜메르라고 자신을 밝힌 젊은 거인이 그렇게 두지 않으려고 했다.

블랑쉐가 습관적으로 지원사격을 했다.

본래 쓰던 레일건의 탄환이 거인의 머리를 노린다.

쾅쾅 하는 소리와 함께 멜메르의 시선이 돌아간다.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

거인이 무시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요새에서의 투척 무기들도 날아들기 시작한다.

나는 달리면서 그대로 몇 가지 마법을 캐스팅했다.

우리의 모습은 사라지고 공간의 균열이 곳곳에 열린다.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

거인은 마법적 소양이 전무하다.

연속된 수십차례의 순간이동 끝에 요새를 통과했다.

PVP를 상정하진 않은 요새니까 가능한 방식이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하드스록]도 우리를 아주 나쁘게 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다만, 우리가 자신들 아래로 들어와 줬으면 하는거겠지.

서로 죽이려고 들 필요는 없다.

결국 목적은 같다.

내 목적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있을 뿐.

* * *

블랑쉐는 생각했다.

“어떡하지?”

마법을 좀 구사할 줄 아는 사수 겸 암살자가.

탱커에 준할 정도로 중무장한 거인 전사를?

멜메르가 사라진 리더와 에길을 찾아 헤매는 동안 블랑쉐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이 나왔다.

“일단 쏴보고. 생각나는 대로 해야겠군.”

전혀 모르겠다.

블랑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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