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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91화 (291/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91화

왕국 - Lv.2923 [끝의 대지] 멜메르(2)

생각해 보면 ‘오르골’의 교육 방식은 몹시도 독선적이었다.

그 남자에게는 그 자신만이 정의였다.

좀 더 재주가 좋았다면 그 자신이 잔혹한 독재의 왕좌에 올랐으리라.

그러지 못한 이유는 블랑쉐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녀는 분명 바깥에서 그녀가 소속된 국가의 가장 뛰어난 첩보요원이자 암살자였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다.

결국 ‘오르골’은 커녕 국가의 수뇌부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왜 그녀가 그런 임무들을 수행해야했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도 허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원이니 암살자니 해도 결국 본질은 병기로 길러진 아이들일 뿐.

그리고 그저 소모품일 뿐이다.

블랑쉐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오르골’은 거역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그 주박에서 벗어나는데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그랬다.

처음 미궁에 발을 디뎠을 때조차도 복귀할 생각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없으면 여동생들이 투입될 것이다.

블랑쉐가 해결하면 적어도 여동생들은 위험으로 몸을 던질 필요가 없다.

기실 블랑쉐가 최고의 암살자이자 첩보원이 된 것은 그래서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가 없었으니까.

그녀 역시 점차 언니들이 죽어간 덕분에 위험한 일을 맡기 시작했다.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 남자야.”

제 아비를 그리 부르며 총을 겨눈다.

그의 독선적인 교육은 살인기계를 만드는 데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사람을 만드는 교육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그것을 느끼고 있다.

[길을 찾는 날개] 기동.

사수는 본디 마스터리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총기를 하나만 사용하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이다.

레일건은 들고 쏘되, 새로이 얻은 아티팩트 [길을 찾는 날개]는 보조 화력으로서 사용한다.

무기를 더 보강해야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바깥에서 볼 수 없는 비현실적인 성능의 총기들은 이걸로 부족하다고?

대체 왜?

같은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오르골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블랑쉐는 25년차다.

초기는 17년차다.

왕국에서 홀로 증오를 곱씹다가, 그리고 그것이 타들어가며 재만 남은 시간이 8년이다.

한번 무너졌다가 다시 일으켜 세운 마음은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오르골’의 주박도 그때 허물어져 사라진 게 아닐까?

지금의 블랑쉐는…… 스스로가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이건 오르골이 시간을 벌어준 셈이군.”

틀림없이 의도일 것이다.

여기 블랑쉐를 남겨두고 앞장서서 에길과 달리며 시선이란 시선을 다 끌어 모으고 마법을 탈출.

자리를 잡을 시간 정도는 충분하다.

날개들이 날아간다.

아직 사라진 두 사람을 찾아 시선이 분산된 시점에서 날개들의 포지션을 결정한다.

아직도 완전히 익숙해지지는 못했다. 드론의 최대 개수는 24기지만 현재 활용할 수 있는 숫자는 8기에 불과하다.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전력전개를 한다면 화력은 강하겠으나 가동 시간은 줄어든다.

효율적인 운용은 8기다.

그리고 역시 주력은, 이제 완전히 손에 익은 레일건.

저 크기의 중장거인에게는 어지간한 화력은 타격도 아니다.

그러니 좀 더 대구경으로.

사수 특유의 차원 수납 주머니인 병기창이 열린다.

보통은 무수히 많은 총기가 진열된 곳이지만 블랑쉐의 병기창에는 다른 총기 대신 탄환만이 가득히 들어있다.

모두 고블레타리아 연방제다.

그 고블린들의 신앙은 왕국이라는 머나먼 곳에서 불을 뿜는다.

그 중 가장 구경이 큰 것은 155mm.

탄종은 아다만타이드 철갑탄.

상대의 갑주가 어떤 것이건 관통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레일건이 변형한다.

바닥에 지지대가 심어지고 확장포신이 에너지로 연결된다.

초탄이니까 먹일 수 있다.

이건 이미 개인화기의 영역이 아니다.

그보다는 함포에 더 가깝다.

저 거인이 블랑쉐를 주목하게 된 후에는 결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다.

레일이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충전되었다.

새삼 느끼지만, 소총에서 함포까지 구경 조절이 자유로운 총기라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미궁은 원래 말이 되었던 적이 없다.

* * *

멜메르는 사수 하나의 공격을 무시했다.

중요한 것은 적의 주력으로 보이는 전사 둘.

중장갑의 거구와 좀 더 날렵한 아서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이것은 전사들이 마법사를 싫어하는 만큼이나 민첩직을 경시해서기도 하다.

사수는 대부분의 경우 전사의 갑주를 효과적으로 관통하지 못한다.

총기의 문제도 있으나 탄환의 문제도 있다.

레벨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킬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수가 일견 아주 좋아 보임에도 균형이 맞는 것은 그래서다.

그냥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돈이 드는 직업.

게다가 더 강한 공격을 위해서는 더 좋은 탄환이 필요하고, 그러면 더 많은 돈이 든다.

농담삼아 사수는 돈을 쏜다고들 그런다.

하지만 진실이다.

그리고 멜메르는 방패를 든 중장갑의 거인이었다.

카베가 직접 만든 이 거대한 갑주는 [하드스록]의 영향력을 총동원하여 제작되었다.

사수가 이것을 뚫는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굉음과 함께 충격이 들어왔을 때, 저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옆구리가 화끈해졌을 때 멜메르는 약간 당황했다.

관통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갑옷에 타격이 있었다. 깨지지도 뚫리지도 않았으나 끝이 찌그러졌다.

사수를 확인하기 보다는 일단 방패를 세우고 탄자를 찾았다.

검고 매끄러운 동시에 뾰족하게 가공된 것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집어 들고 갑주에 긁었다.

검은 불꽃 반응이 튄다.

“아다만타이드……?”

그럴 수는 없다. 이걸 탄으로 쓸 생각을 누가 한단 말인가.

그것도 이 사이즈라면 녹여서 무기를 만들건 무엇이건 할 수 있다.

합금을 해도 좋다.

그때 다시 탄이 날았다.

방패에 묵직함이 느껴진다.

방금과 같은 포격이 틀림없었다.

몇 가지 떠오르는 정보.

최근 하드스록의 삼의회가 주관하여 풀고 있는 다량의 재화.

혼돈의 신전이 출처인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신전에 저 파티의 입김이 강하게 닿았음도 틀림없다.

46 서버의 재화는 그곳을 통해서만 흘러나오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가공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제 아무리 46서버를 독점으로 장악한다 하더라도 이런게 가능한 기술력을 가진 집단의 존재와는 또 다른 문제다.

협박만으로 그러기는 쉽지 않다. 완전히 장악을 하고 있어야 한다.

왕국에 가져온 후에 가공? 그건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시티즌은 저 파티의 명백한 적일 테니까.

집어든 탄자를 다시 본다.

화약병기는 아니다. 형태로 보아 레일건.

탄자에는 각인이 있었다.

[신성 고블레타리아 연방]

멜메르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고 탄을 던져버렸다.

한 발이 더 날아왔다.

방패에 충격은 주었으나 그뿐이다.

괜찮다.

겨우 이런걸로 쓰러질 정도라면 덩치가 운다.

그리고 뒤편에서 누가 전달해왔다.

“뒤로 빠져나갔습니다!”

“둘 모두?”

“예!”

이거 참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

멜메르는 조금 불쾌해졌다.

사수는 상성상 전사를 이기기 힘들다.

제 아무리 이리 비싼 탄을 펑펑 써댄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멜메르 역시 그에 걸맞은 수준의 장비와 스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거인은 방패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오른 손의 [미스틸테인]이 번쩍이는 빛을 발한다.

* * *

상대가 달려오고 있음을 보고 블랑쉐는 레일건을 서둘러 철수했다.

설치와 사격에 시간이 걸릴 뿐 회수는 순식간이다.

실제로는 힘이 곧 속도지만 거인이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지는 않았다.

이 지하 공간은 충분히 넓지만 신장 15미터 이상의 거구를 가진 하이랭커가 로켓처럼 날아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이 공동과 요새는 추측컨대, 수르트 따위를 지연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다.

아주 적절하게 좁고, 적절하게 넓다.

악마인 블랑쉐에게는 좋은 조건이다.

레일건이 철수하자마자 풍압이 느껴진다.

성큼 눈앞까지 다가온 거인이 전력으로 휘두른 몽둥이가 내리찍힌다.

말이 좋아 몽둥이지 손잡이에서 끝으로 갈수록 굵어지는 형상의 저 거대한 목재는 심어두면 세계수 묘목 정도로 보일 것이다.

블랑쉐는 침착하게 캐스팅했다.

공간의 균열이 열리고 간발의 차이로 빈 공간을 강타한다.

대지가 울렸다.

우르릉하는 인공적인 지진이 주변을 타고 번진다.

지하 깊은 곳이기에 단단한 암반임에도 천장에서 돌가루가 부슬부슬 떨어져 내렸다.

거인의 일격이 타격한 곳은 작은 [미티어]가 꽂힌 것 같은 구덩이가 생겼다.

힘의 종족인 거인에게는 세상이 너무나도 약한 탓이다.

블랑쉐는 거인의 뒤통수를 보고 있었다.

[표적 고정]

[사격 개시]

락온 기능은 편리하다. 이게 없다면 일일이 위치를 지정해줘야 한다.

날개들이 날아들어 거인의 몸 구석구석에 하전입자를 뿜어냈다.

노리는 위치는 갑옷의 틈새다.

피어오르는 열기와 타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인이 뒤돌아선다.

블랑쉐는 레일건의 모드를 40mm 정도로 전환하고 좀 더 작은 구경으로 돌아서는 순간 거인의 눈을 노렸다.

거인이 손으로 눈을 가린다.

그리고 몽둥이를 재차 휘두른다.

바람소리라기보다는 폭풍우 소리.

콰과과하는 굉음과 허공이 비명을 지른다.

좀 더 작은 구경이기에 연사가 가능했다.

몸의 질량을 순간적으로 줄이는 스킬을 가동하고 반동만으로 이동한다.

허공에서 병기창이 여러 번 번쩍인다.

총구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거인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집요하게 눈만 노린다.

날개들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갑옷의 관절부나 틈새를 노렸다.

술래잡기와도 비슷한 꼴이다.

전사는 타격을 입지 않으나 수월하게 사수를 잡아내지도 못한다.

흔히 일어나는 양상.

블랑쉐는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몽둥이를 피해 공간을 열었다.

“좋아, 전혀 효과가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하루 종일 쏘면 뭐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화력은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다.

[길을 찾는 날개]에 내장된 장비 액티브 스킬은 유효한 타격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걸 활용하고도 끝내지 못하면 답이 없다.

그래, 사실 상성상 처음부터 답은 없었다.

그러나 오르골은 블랑쉐가 상대하면 된다고 했다.

블랑쉐는 고민을 시작했다.

당분간 순식간에 살해당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자신이 사수로서의 면모만 보여주었기에 거인은 방심하고 있다.

경시하는 것도 당연하다. 실제로 그러하니.

그래서 요새의 붕괴를 피하기 위해서 힘을 억제 중이다.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약해보이는 것의 장점이다.

블랑쉐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즐거움을 느꼈다.

싸움이란 게 그리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살인도 그것에 쾌락이라도 느꼈냐고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효율적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오르골’의 가르침이었고 그 방법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블랑쉐의 세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궁에 와서 25년을 헤맨 끝에 또 다른 오르골을 만난 지금에야 넓어지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 고민을, 완전히 새로운 전법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를 하게 된 것이 그 증거다.

그 사실이 즐겁다.

단순히 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그 가치만큼의 대우를 받는 일이니까.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블랑쉐는 도구가 아니다.

인생의 20년, 그리고 미궁에서의 25년.

블랑쉐는 이제 사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녀는 사람이다.

* * *

멜메르는 사수가 마법을 구사하는 것을 보았다.

공간이동이면 이미 상당히 고단수의 마법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무언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법은 경계의 대상이다.

방패를 든 자는 신중해야한다.

그렇기에 파티의 방패다.

그렇기에 멜메르는 스킬도 무엇도 사용하지 않고 지구전을 위해 평범한 공격만을 휘둘렀다.

이 자그마한 사수가 그에게 무엇을 할 생각인가.

사실은 총을 든 마법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몇 차례의 지루한 술래잡기를 흘려보낸 끝에 멜메르는 결정했다.

그냥 죽인다.

카베가 가능한 죽이지 말라고 했으나,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력을 다한다.

유니크 액티브 [대지의 대리자]

이곳은 지하.

사방은 대지다.

그곳의 색이 빠져나간다.

모두 멜메르의 몸으로 빨려 들어왔다.

우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신체능력이 강화된다.

반쯤 정령화된 거인의 육신이 미스틸테인을 휘두른다.

지상보다 훨씬 단단한 암반이 마치 평범한 바위처럼 부스러지고 더 깊이 패였다.

지진파가 발생한다.

온 산이 흔들린다.

그리고 그 파문만큼의 범위가 다시 색이 사라졌다.

마법을 구사해서 빠져나가려던 사수가 충격에 휘말렸다.

“마법은 소용없다! 지금부터 이 곳은 나의 영역이다!”

정정당당.

탱커 된 자. 상대에게 자신의 스킬을 숨기지 말지어다.

멜메르가 발을 구른다.

[도발]

날파리 같은 녀석! 도망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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