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92화
왕국 - Lv.2923 [끝의 대지] 멜메르(3)
블랑쉐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암기해둔 무수한 유니크 스킬들의 성능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전사 계열이 가질 수 있는 유니크 스킬들 중 아주 고성능의 것들만 외우면 된다.
그런 성능의 스킬을 보유한 게 아니라면 하이랭커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블랑쉐는 곧바로 상대인 거인이 어떤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끝의 대지]
유니크 스킬에 달려있는 패시브들은 죄다 방어력, 체력, 회복력 따위의 육체적 내구도에 관여하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더 튼튼하고 지치지 않게 된다.
유니크 액티브조차도 고급스러운 단단해지기다.
[대지의 대리자]라는 것은 결국 대지의 정령을 뜻한다.
흡수된 색은 주변에 존재하는 대지의 원소의 특질.
그리고 그 범위 내의 원소는 모두 이용할 수 없도록 잠긴다.
원소를 다루는 것이 주력인 마법 클래스 대부분에게 치명적이다.
그렇게 마법계열을 봉쇄하는 동시에 시전자 본인은 대지의 원소를 흡수하여 물리적 내구력이 상승한다.
온전히 적의 공격을 감당해 내기 위한 구성의 유니크 스킬이다.
아마도 특별히 고화력을 내는 스킬은 없을 터.
그러니 블랑쉐는 자신에게 [도발]이 사용될 것임을 알았다.
사수 혹은 궁수 같은 원거리 딜러와 전사의 싸움은 도발 눈치싸움이 되기 쉽다.
전사는 힘을 찍어대다 보면 정화계 스킬이 안 생길 수가 없지만 사수는 일부러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경우에 너무 무력하기 때문에.
[구속할 수 없는 자유]
동종의 스킬로는 [구속할 수 없는 분노]가 있다.
그것은 디버프를 공격력으로 치환하지만 총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블랑쉐는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던 적의, 무작정 사격을 시작하려는 충동이 사라짐을 느꼈다.
대신 몸이 가벼워지고 동작이 더 빨라지는 기분이 든다. 사실이다. 버프로 전환되니까.
거인이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이 방패를 세우고 돌진해 왔다.
말이 좋아 방패지 빌딩이 통째로 달려오는 것과도 같다.
속도도 빠르다.
그 체격을 감당할 만큼의 근력이 몸에 깃들어 있음이다.
눈 깜짝할 새 다가오는 거인을 보며 블랑쉐는 점멸했다.
처음부터 숨겨둔 단검이다.
최초로 레일건으로 사격한 자리로 이동하고 거인이 벽에 부딪히는 모습을 본다.
마법은 봉인되었다.
신중함을 집어던지고 날뛰기 시작한 거인을 막을 수단이 달리 없다.
하지만 저쪽도 패를 이미 깠다.
뭔지 알고 있다면 대응할 수단도 있다.
[대지의 대리자]는 까다롭지만, 결국 단단해질 뿐인 스킬이다.
상대의 파티구성을 생각해 본다면 저 거대한 덩치를 바탕으로 전선을 형성하는 역할.
추측건대, 이 요새 자체가 침공의 보스들을 거인이 묶어두는 동안 상대적으로 약한 병력을 섬멸하기 위해서일 터.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궁은 역시 모르면 죽어야 하는 곳이다.
블랑쉐는 침착하게 거인의 다음 행동을 관찰하려고 했다.
다른 쪽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블랑쉐의 반응 속도에서 허를 찌를 정도는 아니었다.
거인은 지금 옆으로 돌진하여 물러나 있다.
블랑쉐는 요새의 사선에 노출되어 있다.
저 먼 곳에서부터 화력 지원이 들어온다.
투창부터 투검, 도끼, 활과 일부 스킬의 부산물인 투사체까지.
지옥석 투석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맞지 않으리라 여겨서일까.
화력이라.
고레벨 정령사나 사령술사는 보통 일인군단으로 칭해진다.
하지만 사수 역시 그러하다.
오히려 화력만이라면 더할 수도 있다.
그렇다.
돈이 아주 많고, 대단한 공업력을 지닌 집단과 친분이 있는 사수라면 말이다.
* * *
멜메르는 바보가 아니다.
거인은 트롤과 달리 지능 역보정 따위도 없다.
괜히 고위종족이 아니다. 장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 어느 힘전사계 종족보다도 우월하다.
물리 공격력에서만큼은 미궁의 정점에 서 있는 종족이다.
같은 거인인 카베가 대장장이기에, 그리고 왕국의 경영자 입장에서 입수할 수 있는 막대한 재화가 있기에.
중장갑을 두른 멜메르는 거인의 모든 단점을 덮을 수 있었다.
그가 화력을 내지 않는 것은 그저 그에게까지 차례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일격 일격이 어지간한 마법보다도 강력하다. 휘두름에 담긴 힘은 운석을 넘어서고, 단순한 기본기도 지진을 일으키는 재앙이다.
신화에서의 거인이 괜히 신적 존재로 묘사되겠는가.
그리고 멜메르 역시 카롤리만큼은 아니되 아직도 100년을 채우지 못한 와중 이렇게 강했던 회차가 없었다.
그는 중무장 거인이었다.
그렇기에 적수는 없다.
수르트가 나타나더라도 단독으로 맞서 싸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 충만하다.
카베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면, 전쟁의 신에게 도전하러 갔을지도 모른다.
그 자부심을 덕에 멜메르는 빈틈을 노출했다.
확실한 근거는 없는 확신.
하지만 상식에 비추어 볼 때 틀리기 힘든 확신.
이런 상황에서 마법사이며 사수인 저 여인이 저항할 여력이 있겠는가?
그렇게 무심코 단정 지었다.
근거가 전무하지도 않았다.
규율의 신은 그들에게 정보를 제한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규율의 신도를 그만둔 그들에 대해 느낀 바가 있을 것임이다.
그럼에도 그는 철저하게 이해타산적이었다.
규율의 신은 카베의 고집을 알았고, 그들이 충돌하리라 예측했을 것이다.
그 충돌의 결과가 충분히 좋지 않을 것이라고도 여겼으리라.
혹은 단지 어느 쪽이 이기고 어느 쪽을 흡수해도 좋다는 낙관적인 경시였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저 작은 날파리 같은 사수의 한계에 대해서는 안다.
종족이 악마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 역시 알려졌다.
애초부터 아케인에서 그런 일을 벌이고도 신의 눈을 속일 수 있겠는가.
신중한 거인은 그랬기에 상대를 다 안다고 판단했고 충분히 전초전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악마라는 종족에게 마법을 봉쇄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거의 없다.
이제 무자비한 짓밟기뿐이다.
애초부터 [끝의 대지]는 전사가 마법사를 사냥하도록 만들어주는 유니크 스킬인 탓이다.
요새에서 지원사격이 날아가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저런 도움은 필요 없다.
태산 같은 거인이 그대로 달려간다.
아무리 그래도 근접 전사의 견제기에는 쓰러지지 않을 테니 저들을 쓰러뜨리고 바깥으로 나가 파손을 수리해야 할 것이다.
아젤리아가 능히 적을 제압했겠지.
그리고 멜메르는 보았다.
* * *
고블린 만든 것이 단지 탄자일까?
레일건의 가장 큰 단점은 장약을 넣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정도 이상으로 가속된 전도체는 그것만으로도 폭발을 일으키고 충분한 충격을 가한다.
하지만 때로는 마법화학적 폭발이 더 큰 위력을 내거나 적절한 형태의 화력을 투사할 수도 있는 법이다.
블랑쉐는 병기창을 열었다.
그녀의 병기창은 다른 사수들과 다른 것들이 들어 있다.
개인화기의 화력이 아쉽다면 그 이상을 들고 다니면 된다.
서버가 미래로 넘어가면 설령 하이랭커라도 몸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주전은 랭커급이라면 겪어본 적 있는 것이겠으나, 우주에서 함대를 상대로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는 이들은 당연히 적다.
이미 한참 전부터 회수 중이었던 날개들이 돌아온다.
블랑쉐가 8기에서 날개를 더 늘리지 않으며 가장 열심히 연습한 것이 이런 정밀 조작이다.
병기창 속으로 들어가 또 다른 차원 수납 주머니들을 장착한다. 물론 그것들 또한 병기창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형태로 개조되어 있는 것.
‘병기창’은 미궁의 시스템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웨폰 마스터]의 기능을 흉내 낸 것.
차원 수납 주머니와 같은 형태의 기술은 각 서버에서도 개발되고 존재한다.
하지만 사수를 위해 다양한 무기를 그렇게 넣고 다닌다는 발상은 온전히 유배자의 창작이다.
그렇다면 다른 형식도 가능하다.
더 고난이도의 정밀한 마법이 필요하겠지만 ‘병기창’ 수준이 아니라.
포구 그 자체를 담는 것 역시 말이다.
그리고 블랑쉐는 깨달았다.
“아차.”
[대지의 대리자]의 범위가 어느 정도지?
병기창 역시 마력으로 작동한다.
원소가 잠금 당한 이 주변에서 원소의 형태로 존재하는 마법은 모두 힘을 잃는다.
거리를 더 벌려? 아니다.
소지하고 있는 채로 체내의 마력을 활용하면 열 수 있다.
날개들이 다시 돌아온다.
거인이 다시 달려와 둔기를 후려친다.
블랑쉐는 당황하며 그것을 피해 굴렀다.
사격을 이용한 반동으로 이동하는 방식은 이제 익숙해졌다.
몇 가지 이동기와 더불어 레일건 탄의 반동으로 몸을 밀어낸다.
휘말린 여파만으로도 몸이 저릿저릿한다.
물리공격에 극도로 강한 이블이 아니었다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블랑쉐는 입맛을 다신다.
여기서 멋있게 반격을 해야 했는데.
멋있는 장면은 지나가 버렸다.
빠르게 다시 회수된 날개에 마력을 주입하며 달린다.
거리를 수월하게 벌리지 못하자 거인이 무기 대신 방패화 다리를 휘두른다.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대지를 울리고 충격파를 만든다.
피할 수 없다.
차리라 다리 사이로 뛰어든다.
손끝을 변형하여 갑옷에 달라붙었다.
거인이 방패를 내려놓고 파리 잡듯이 손을 뻗었다.
와이어를 쏘아 감는다. 커다란 거인의 가랑이 사이 갑옷들에는 갈고리가 걸릴 곳이 많았다.
그대로 당기고 등 뒤로, 어깨너머로, 현란하게 움직인다. 몇 번의 페인트, 체조하듯 날렵하게.
큰 손바닥이 여러 차례 쾅 하고 갑옷에 부딪힌다.
틈을 보아 갑옷의 틈새로 사격 한 발.
폭음이 울리고 충격이 터져 나오지만 역시 충분치는 않다.
블랑쉐는 그런 와중 힘겹게 제 주변을 날아다니는 날개들에 마력을 주입했다.
몸을 벗어나는 순간 마력이 묶인다.
그러나 날개 자체는 마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초과학적인 것이다.
그러니 마력을 머금고 그것들이 지고 있는 주머니에 연동할 수 있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었다.
와이어 액션이 계속된다.
여기저기 걸린 와이어에 거인이 분노한다.
“잔재주를!”
다리를 힘껏 벌리자 와이어가 거칠게 뜯어졌다.
블랑쉐는 모습을 비행이 가능한 종족으로 바꾸었다.
다음 방향을 예측하던 손바닥이 갑작스러운 비행을 캐치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직후 그대로 발이 빠른 늑대인간으로 변한다.
근육의 형태가 달라지며 이동기 없이도 빠른 주파 속도를 낸다.
레일건은 끊임없이 사격하며 가속한다.
거인은 이제 총격을 무시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갑옷이 조금씩 손상되고 있지만 고치면 그뿐.
당장의 전투에서 지장을 초래하지는 못한다.
블랑쉐는 마지막에 다시 악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악마는 물리공격에 강하다.
거인이 거의 눈앞까지 다가온다.
한 방은 어떻게 맞아도 좋을 수도 있다.
의외성.
상대가 이쪽을 얕보고 있다는 확실한 감각.
암살자로 평생 살아온 블랑쉐가 가장 잘 캐치하는 순간이다.
완전한 사고의 사각에서 공격이 먹힌다면.
바로 지금이다.
날개들이 사방으로 퍼져 거인을 포위했다.
그리고 제 동체에 연결된 병기창에 동력을 주입한다.
그것은 결국 마력이다.
입자포를 쏘아낼 마력이 병기창에 깃든다.
허공이 일그러졌다.
공간의 균열이 뒤틀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거인이 당황하는 찰나, 그 사이에서 포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구경으로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거대한 함포.
본디 고블레타리아 연방의 기함급에 달리는 부포들.
주포는 너무 화력이 강해 한 대밖에 챙기지 못했으나, 부포라면 얼마든지 있다.
8개의 병기창이지만 펼쳐지며 쇼 윈도우처럼 펼쳐지며 각기 5개의 포구를 내민다.
원격 조절은 마력을 무효화하는 적을 대비하여 전파도 겸용으로, 필요하다면 날개에 의한 수동 조작도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블랑쉐는 그 차원의 틈새에 이름을 붙였다.
그녀의 코드네임은 희다는 뜻.
그렇다면 그녀가 가진 공간균열 속의 가공의 전함은 다른 그에 반하는 이름이어도 좋지 않을까.
블랑쉐는 오르골이 이런 구상을 알려준 그 순간부터 이 순간만을 기대했다.
“가상 전함 누아르(Noire). 전탄 발사.”
이 대사를 참을 수 있겠는가.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게 포인트다.
거의 영거리에서 주인마저 휘말릴 40개의 포구가 불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