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93화
왕국 - Lv.2923 [끝의 대지] 멜메르(4)
뒤돌아보며 상대의 마지막을 확인하지 않는 것은 월드 클래스의 증명이다.
블랑쉐는 스스로가 분명 월드 클래스의 첩보원이라고 생각했으나, 진지할 때는 진지할 줄 아는 것도 월드 클래스의 증명이다.
그렇기에 방심하지 않았으며 상성이 여전히 불리한 와중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블레타리아 연방의 기함은 전장만 1㎞에 가까운 초대형 우주 전함이며, 주포로는 하전입자포를 보유하고 있다.
부포들은 함대결전에서 적의 기함을 노리기 위한 무장이 아니다.
275㎜ 구경의 다연장 함포는 시대에 비하면 고전적인 화약추진 실탄 병기다.
그러나 그것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위력을 결정하는 것은 날아간 탄환이 지닌 에너지지 발사 방식이 아니다.
레일이나 코일로는 발사할 수 없는 장약들이 거인의 몸 위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애당초 마법의 땅이었던 각 서버에서 화약이란 구식이 아닌 새로운 기술이다.
마법이 깃든 화약은 그 화학 에너지를 훨씬 더 효율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방출한다.
블랑쉐도 처음에는 의문을 가졌다.
하이랭커급의 고성능 총기는 미궁의 기가 막힌 보정을 받아 개인화기 선에서 이미 함재포에 준하는 위력을 낸다.
심지어 그따위 화력을 지닌 주제에 형태는 돌격 소총이거나 기관총 따위여서 말 같지도 않은 비현실적인 화력 투사가 가능하다.
그 의문은 실제 사격을 보고 말끔히 해소되었었다.
마도공학에 의하여 기이할 정도로 에너지를 쥐어짜 내는 화학적 격발은 블랑쉐가 살아가던 시대에서는 이미 도태되어 가던 그 화약 병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추진력뿐만 아니라 장약의 폭발 역시 그러했다.
기가 막힌 수준의 마법적 물리 폭발이 지근거리에서 일어난다.
기저에 마도공학이 있음에도 저런 병기는 물리공격 판정이다.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악마라는 종족과 고레벨 유배자라는 보정에도 불구하고 모든 감각이 차단된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도 새하얀 빛뿐.
그 와중에도 기능하는 것은 촉각과 통각뿐이다.
한순간 이후, 블랑쉐는 폭압에 그야말로 로켓처럼 발사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미 몸은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 깊은 지하의 강도 높은 암반임에도 사람의 모양을 한 그대로 처박혔을 것이다.
포션을 들이부으며 악마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천사여도 즉사할 수 있는 위력이다.
물리에 강한 악마인 블랑쉐도 전신의 뼈가 무사하지 못했다. 직격이라면 뼈조차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히도 박혔군.”
몸을 빼내기가 힘들다. 아직도 상대의 스킬은 건재하다.
마법은 여전히 구사할 수 없다.
힘들게 몸을 뽑아내자 무너지고 있는 지하가 보였다.
아직도 굉음과 충격은 지하를 떠돌고 있었다.
멀쩡하지 않은 귀에도 우릉우릉 하는 소리가 들린다.
거인의 몽둥이질이 지진 같은 진동을 만들어냈다면, 블랑쉐의 전함은 문자 그대로의 지진을 만들었다.
대지가 울고 조각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블랑쉐는 자신이 멀리 보이던 성채까지 날아왔음을 깨달았다.
지금도 땅이 흔들리고 있다.
[하드스록] 산하의 병력들이 당황했음이 느껴진다.
성채 자체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암반 자체를 그대로 요새 모양으로 깎아 만든지라 한없이 견고하지만 정도 이상의 충격에는 더욱 취약하다.
강도와 지진에 견디는 능력은 또 다른 것인 법이다.
어차피 애초에 무너뜨려 차근차근 생매장해 가기 위한 요새기도 하였다.
블랑쉐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습을 바꾸었다.
이블의 능력에서 숙련해둔 프리셋 중에서는 평범해 보이는 남자 전사의 모습도 있다.
온 사방에 파편이 튀고 동굴 자체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대피하는 와중에 냉철할 수 있는 이들은 적었다.
조금 더 지나면 누군가 눈치채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블랑쉐도 그 사이에 섞여 흔들리는 요새를 빠져나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참상의 현장이 보인다.
구덩이가 생긴 자리에 거인이 웅크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
갑옷의 파손은 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무장해제가 된 수준은 아니다.
아티팩트인 [미스틸테인]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비록 온몸이 그슬리고 타올랐지만 삐걱대는 갑옷의 일부를 뜯어내고 거인이 몸을 일으킨다.
포션의 효과로 그나마 생긴 상처도 회복되는 중이다.
그러나 반쯤 정령화 되어 반투명한 느낌이 들던 육신이 완전히 돌아와 있다.
상승한 방어력이 방금의 포격으로 크게 무너졌다.
흡수한 땅의 원소가 점차 깨져 나가며 스킬의 효과가 충분히 약해졌을 타이밍이다.
블랑쉐는 날개들을 불러들였다.
폭발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날개들은 떨어지는 바위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치며 블랑쉐에게 모여들었다.
군중 속에서 스륵 하고 모습을 바꾸어 악마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 붉은 피부에 몇 명이 당황하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거인이 소리쳤다.
“그것이 다인가!”
블랑쉐는 중얼거렸다.
“아니.”
* * *
의식이 제법 길게 날아갔다.
그 자체로 이미 치욕스러웠다.
빌드가 완성되고 장비가 갖추어진 다음에 이런 상황을 겪은 적이 없다.
그는 단단했고, 전함을 상대로도 승부를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전함의 일제 포격을 그대로 온몸으로, 방패조차 없이 받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 정도의 충격이 몸을 강타했음은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살아남았음도 깨달았다.
어지러운 정신에서도 전사의 감각만은 여전하다.
사수의 모든 화기는 소모품이다.
총화포 그 자체의 소모보다는 무한탄창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끔찍한 화력에 노출되었음은 분명하나 그다음은 없을 확률이 높다.
그것이 타당하다.
그렇기에 멜메르는 벌떡 일어선 후, 고함을 쳤다.
살아남았기에 승자인 것이다.
우선 방패를 회수하러 달려가지 않은 그 판단은 그대로 실책이 되었다.
모습을 드러낸 상대의 몸 주변으로 드론이 모여든다.
8기밖에 없던 드론들이 더 늘어난다.
그때마다 오른손의 장갑이 더 얇아지고 있다.
멜메르는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방패.
방패가 필요하다.
그의 빌드에서 대부분의 방어 스킬은 방패를 기초로 한다.
방패 없이는 발동할 수 있는 것에 제한이 있다.
하얀색을 기조로 매끄럽게 만들어진 드론들이 붉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포지션을 취하고 도열한 24기의 드론들은 마치 마법진과도 같은 형태를 취한다.
장갑의 손등에서 코어가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법? 어떻게?
아니다. 저것은 마법이 아니다.
[아티팩트]라는 아이템에 새겨진 [아이템 스킬]이다.
스킬이란 본디 맥락 없이 작동하는 것.
그 원리가 마력일지라도 [아티팩트]의 반열에 든 장비에 새겨진 스킬은 이런 것으로 제한받지 않는다.
상대는 마법사가 아니다.
사수다.
멜메르는 방패까지 도달하기 전에 공격이 들어올 것임을 깨달았다.
든든한 건틀렛을 앞으로.
몸체의 갑옷은 파손되고 떨어져 나갔으나 하이 랭커 탱커의 육신은 그 자체로 이미 중장갑인 법이다.
[미스틸테인]을 내밀며 가드를 굳건히 한다.
방패만큼은 아니지만 이 굳건한 겨우살이 가지를 방패처럼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
피해를 최소화한다.
상대의 화력이 바닥나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승리다.
무기와 육신의 내구도를 걸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린다.
거인이 악마를 내려다보며 각오를 다진다.
그리고 번쩍이는 붉은 광선이 솟구쳤다.
드론들 사이를 잇는 강렬한 광선들은 한순간에 주변으로 퍼졌다가 악마가 내민 오른손의 코어로 집적되었다.
화려한 에너지의 분광, 그리고 그 끝에 집중.
멜메르는 저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광학병기다.
저 손등의 코어가 메인이고 저기서 공격이 들어올 것이다.
사수의 아티팩트란 보통 강력한 동력원을 가지고 그것을 쏟아내는 법이다.
형태에서 공격을 짐작하고 더욱 방어 태세를 굳건하게 한다.
몸을 웅크리고 최대한 빛을 산란할 수 있는 광학병기에 대응하는 스킬들을 발동시킨다.
거대한 탱커로서 기능하기 위해 쌓아 올린 액티브들이 하나하나 작동하며 단단함을 더한다.
방패를 놓은 것은 그의 판단이었으며, 상대의 화력을 예상치 못한 것은 그의 실책이다.
하나 지금만큼은 전력으로 대한다.
빛이 솟구쳤다.
붉은 광선이, 트롤 정도는 가볍게 삼킬 정도로 거대한 에너지의 격류가 [미스틸테인]에 닿았다.
열과 힘과 압력이 겨우살이의 나무로 만들어진 아티팩트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빛의 조각이 닿은 곳은 녹아내렸다.
동굴 내의 온도가 점점 상승했다.
함포사격으로 달아올랐던 열기가 더욱 더해지며 주변이 질척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다행스럽게도 거인은 열에 강하다.
멜메르는 견뎠다.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 와중에 다른 전사들이 끼어든다면 그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의 실책으로 이리되었으니 온전히 자신이 감당할 문제인 것이다.
빛은 지속되었다.
멜메르는 7초간을 견뎌냈다.
그리고 무기를 떨어뜨렸다.
블랑쉐는 서둘라 광선을 거두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무기를 놓치고 마스터리 보정이 빠져나간 거인의 몸은 몇 초간 더 노출되었다.
갑옷이 녹아내린다.
뼈와 살이 타오르고 일그러진다.
블랑쉐가 화력 투사를 멈추었을 때, 멜메르는 이미 신체의 절반 정도를 잃은 상태였다.
부활 패시브는 틀림없이 있겠으나 작동하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다.
[대지의 대리자]의 효과가 사라져간다.
공간의 균열을 열고 열기로 타오르는 거인의 위치까지 단숨에 이동했다.
악마가 거인을 내려다보았다.
상반신의 절반만 남아 쓰러진 채, 무너지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거인은 악마가 포션 병을 열고 있음을 깨달았다.
악마는 무언가 바라듯 지긋이 거인을 주시한다.
멜메르는 상대가 무엇을 바라는지 깨달았다.
깨끗한 패배였다.
방패가 있었다 한들 처절한 싸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랬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랐겠으나.
전사는 핑계를 대지 않는다.
“졌다.”
거인이 인정했다.
악마는 피식 웃으며 포션을 부었다.
속으로는 누아르의 주포까지 쏘아보지 못하여 아쉬워했다.
하지만 방패를 든 채였다면 [패링]을 경계하여 쉽게 발사하지 못했으리라.
무너지는 요새를 배경으로 전사들이 달려왔다.
블랑쉐는 병기창을 열고 날개들을 흩뿌렸다.
허공에 공간의 균열이 열리며 무수한 포신들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블랑쉐가 여유롭게 물었다.
아직 포탄은 많다.
“너희들은 계속할 테냐?”
전사들은 그들을 겨눈 포신을 보며 하나둘 손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 화력은 이미 체험한 바이다.
* * *
지진의 여파는 훨씬 깊은 곳까지도 전해졌다.
이제는 방해하는 함정이나 다른 것들도 없었다.
도리어 편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해둔 것인지 대로가 뚫려 있다.
“이거 그거네. 아마 그 대방패 중장 거인 선에서 보스급만 남기고 계속 아래로 유인하려는 속셈이었을 거야.”
에길이 고개를 끄덕인다.
“무너지고 있나 보군.”
“더 위쪽은 개판 났을걸요? 여긴 이제 아주 덥군. 지옥과 그리 멀지도 않을 거야. 러셀이 본 카베의 대장간이 조만간이겠군요.”
위는 아마 전체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와중일 거다.
나와 에길이 있는 곳은 이미 아주 깊은 곳이다.
대로가 뚫려 있으니 이동에 거칠 것이 없다.
수르트 같은 녀석들은 통과하기 불편하면 다 박살 내버린다.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해두는 편이 옳다.
모아서 지옥에 묻어버릴 생각인 걸까?
카베의 대장간이라는 곳은 아무래도 지옥용암을 통해 단조하는 곳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같은 재질이어도 더 강해지고, 다양한 속성이 깃든다.
여신님이 블랑쉐의 승리 소식을 전해왔다.
고레벨로 갈수록 수 싸움은 치열하지만 실제 전투 시간은 길어지지 않는다.
공격력이 방어력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서 제 포격에 휘말렸는데도 허세는 꿋꿋하구나. 그 덕에 다른 전사들도 전부 손을 들었다.」
“얼마나 가까이서 맞았습니까?”
「거의 눈앞에서 거인에게 직격했다.」
그 정도면 전투를 속행할 상태는 아니다.
악마의 물리방어력이 있다고 해도 사수 겸 암살자인 블랑쉐는 마인드맵 차원에서 방어력에 투자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이미 죽음의 위기였을 것이다.
“허세가 잘 통했으면 되었죠. 상황 정리는 여신님이 좀 봐주십쇼.”
「지금 무너지는 구간을 피해 안쪽으로 내려오는 상황이다. 입 다물고 쿨한 척하고 있으니 주변에서 여유가 넘치는 줄 알고 있군. 문제없을 것 같다.」
“사춘기가 이제 온 건지 거참…….”
같은 고정 NPC여도 회차마다 다른 사람이 되기는 한다.
바로 직전 회차의 블랑쉐는 좀 더 성숙하고 우아한 느낌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똑같은 아싸 찐따여도 그런 부분은 있었단 말이지.
아무래도 희우와 미아의 영향인가 싶기도 하다. 백지 같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어쩌면 우리 여신님…….
「너 또 뭔가 불경한 생각을 했구나. 이제는 집중하지 않아도 전해져 온다. 이 말이야.」
뭔가가 갑자기 뒤통수를 철썩 후려쳤다.
신벌이라기엔 약했다. 송어였다.
온도가 너무 높아 곧바로 잘 익어버린다.
“공물로 받으신 거 이렇게 써도 됩니까?”
「생선은 발라 먹기 힘들어서 안 좋아해.」
아마도 고블린들이 아직 작은 마을이던 시절의 공물이겠군.
이렇게 공물을 되돌려 줄 수도 있다는 건 신격으로서 많이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신좌 부품만 더 모으면 아주 든든한 아군으로 삼을 수 있겠다.
에길이 묵묵히 송어를 집어 들더니 뼈를 발랐다. 솜씨가 굉장했다.
그걸 다시 여신님께 바친다.
여신님이 얼떨떨해했다.
「고…… 고맙군.」
“리더는 좀 더 여신님을 공경하게.”
“아니. 음. 알겠습니다. 에길.
「쯧쯧, 대전사라는 놈이 말이야.」
에길이 고개를 저었다.
“여신님도 좀 더 근엄하도록 하시죠.”
「윽……!」
그런 와중 도달한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피부가 익는 느낌이 드는 왕국 지하 깊은 곳.
용암의 강이 흐르고 있는 거대한 공동.
그 가운데에서 나이든 거인이 모루에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마찬가지로 호호백발의 인간 노인이 풀플레이트 메일을 갖추고 거인을 바라보고 있다.
노거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서도 고개를 돌렸다.
“어찌 숫자가 맞군.”
노거인이 웃는다.
그 말에 한없이 근엄한 태도의 아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서가 내게 말했다.
“긴말은 필요 없다. 덤벼라. 그리고 증명해라. 우리가 너희의 힘을.”
늙은 기사, 아서의 검이 뽑혔다.
“그리고 우리가 너희를 도울 이유가 있는가를.”
아직 거리가 아득히 멂에도 귓가에 울리듯이 노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리어에 도전할 자격을 보겠다.”
아서의 검이 나를 겨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