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94화
왕국 – Lv.3212 [나이트 오브 카멜롯] 아서(1)
정말 우스운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아서는 자신이 NPC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수가 없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개발자들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미궁의 많은 [유니크 스킬]이나 [아티팩트]들은 여러 신화나 전설에서 따왔다.
가장 유명한 전설 중 하나인 아서왕 전설에서 따온 게 없을 리가.
그리고 유배자의 마인드맵은 그자가 걸어온 행적을 비춘다.
아서왕 그 자체인 아서는 그렇기에 언제나 같은 유니크 스킬을 얻는 경향이 있다.
조건을 생각하면 다른 이가 그것을 가로채기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고결한 기사일 수 있는 유배자가 얼마나 될까. 약자를 존중하고 지키라는 것에서 벌써 끝장이 난다.
약자를 보면 어느 정도 벗겨 먹어야 하는 것이 유배자다.
최강의 고정 NPC 유배자인 아서이기에 얻을 수 있는, 사실상의 전용 유니크 스킬인 셈이다.
그야말로 기사도 그 자체인 유니크 스킬.
그것이 [나이트 오브 카멜롯].
어떤 의미로는 [용사]와도 흡사한 구성을 가진 스킬이다.
전반적인 신체능력의 강화, 스펙 자체를 상승시켜 찍어 누르게 만들어주는 스킬.
그리고 그것이 아서라는 이름의 초인에게 주어진다면.
그 결과는 끔찍한 것이다.
아서는 내가 무기를 뽑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빠르게 달리기 위해 레바테인은 허리에 매고 있던 차다.
나는 레바테인을 뽑아 들고 자세를 취했다.
검술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내 마음대로 휘두르기 편한 자세일 뿐.
아서는 여전히 검으로 나를 겨누고 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대가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표정이 없었다기보다는 세월에 풍화되어 깎여 나간 듯한 무표정이었다.
수염은 단정하지 않았으며 흩날리는 백발도 산발이다.
기사리기보다는 광인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눈빛만큼은 온전한 기사.
한때 브리튼의 기사들을 이끌던 이글거리는 눈빛이 온전히 살아 있다.
마치 설원 속에 피어난 용암과도 같이.
과연 왕국에서 40여 년을 더 보낸 아서의 눈빛은 이렇다.
오래된 아서를 보는 건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이 기사를 죽일 수 있는 유배자는 극히 드물며,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아서는 선한 자의 대리인이며 기사도의 화신이다.
깐깐하고 고집 세며 언제나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관용과 포용이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서른 살의 아서.
칠십의 노인이 된 아서는 멀린을 찾는 여정에, 그리고 카멜롯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여정에.
제 전설 속으로 돌아가 한 폭의 그림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함을 끊임없이 느끼고 부딪히며 마모되어 왔으리라.
연차가 차오른 나 역시 그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다.
나 역시 그와 같이 미궁의 끝을 찾아 헤매는 방랑자이니.
“…….”
감상적이 되는 순간. 저 멀리의 아서가 살짝 움직였다.
단지,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는다.
나는 소름이 돋음을 느끼며 그 동작에 정확히 맞춰 검을 들었다.
충격에 대비하여 무게 중심을 옮기고.
단 한걸음에 아서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쾅 하고 검과 검이 맞부딪친다.
쇠붙이끼리 부딪쳤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굉음.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노인의 얼굴이 교차하여 맞댄 검 너머로 보인다.
여전히 무표정한 그는.
힘을 빼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내려 베기.
이미 밀고 있는 내 레바테인이 닿기도 전에.
그러나 나 역시 반응하여 쳐낸다.
이어지는 연속된 검격.
베고 찌르고 휘두르고 내리치고 올려 베고.
레벨이 몇인가 추정을 시작한다.
빠르다.
강하다.
[용사]를 장착했기에 어떻게 쫓아갈 수는 있으나.
마법 없이는 힘들다.
몸에 마법을 건다. 마력의 흐름을 바꾼다.
소드 마스터는 아니되 몸을 강화하는 여러 가지 요령들이 작동한다.
드래곤에 준하게 강화된 신체적 스펙이 요동친다.
마력이 흐르고 몸을 강하게 타고 돌며 부족한 근력을 보완한다.
하지만 이것은 근력이 아니다.
아서도 그것을 눈치채고, 검을 양손으로 쥐는 동시에 강하게 쳐내었다.
서로 잠깐 떨어지자는 신호.
실로 기사답다.
노인의 수염이 뜨거운 바람에 흔들린다.
“이상한 방법을 쓰는군. 그건 몸에 아주 나빠 보이는데.”
“당신을 이겨야 할 테니까 말이지.”
아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이상한 녀석이군. 초면인데.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어디선가 나를 보았나?”
“그럴지도.”
사실은 많이 봤지.
도움도 많이 받았고…….
당신이 나를 죽인 적도 많아.
침공의 조건은 두 가지.
지나치게 아무도 드나들지 않아 [메인 던전] 내의 이야기가 끝나 버릴 경우.
그리고…….
누군가가 이야기를 진행할 경우.
아서는 처음에는 누구보다 [메인 던전]을 열심히 드나든다.
그리고 소정의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역부족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 혼자서는 클리어할 수 없음을 깨닫고, 비로소 자신이 메인 던전을 진행함으로써 침공당한 왕국을 보게 된다.
죽은 자와 잿더미만이 있으며, 그 지옥에 또다시 새로운 희생자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낙원이라고 여기는 왕국으로 말이다.
그 후에는 누구보다 기사인 이 남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확실하지 않다면 누구도 메인 던전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내가 돌아갈 수 없더라도.
이 세계는 지켜져야 한다.
시티즌의 그분은 어떻게 했을까?
아서를 내버려 두었겠지.
싸워서 위험부담도 클 뿐만 아니라.
결국 어떤 식으로건 이렇게 왕국을 방어하려고 들 테니.
내버려 두면 침공에서 사망할 자인 것이다.
직접 보고 확신했다.
이번의 아서도, 나이 70을 먹은 노인이 된 아서도.
아직 꺾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는 이겨야겠습니다.”
도전자를.
메인 던전에 도전할 자를.
자신을 쓰러뜨리고 클리어를 향해 가거나.
혹은 자신과 함께 클리어를 향해 나아가거나.
어찌 되었건 이것은 왕국에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을 위한 시험이다.
나라도 백성도 잃은 왕이건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약자를 지키는 것이다.
아서가 서늘하게 대답한다. 의문은 가지지 않는다.
그를 이용하려고 했던 자들은 지난 세월 너무나도 많았을지도 모른다.
“좋을 대로.”
기사가 여전한 무표정으로 다시 발을 내딛는다.
* * *
먼저 시작된 싸움에서 에길도 카베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 둘은 서로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거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거리가 되자 자연스레 멈추어 섰다.
그 와중에도 한 유배자와 한 기사가 부딪히는 충격음과 물리적 충격파가 몸에 와닿는다.
에길은 감탄했다.
옆에서 일어나는 싸움이 아니라.
고목처럼 나이 먹은 노거인 대장장이의 모습에 감탄했다.
말라붙은 나무뿌리 같은 피부에는 무수한 상흔이 새겨져 있다.
거인의 거대한 몸을 도화지 삼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은 것도 있으며, 불로 지져진 화상 같은 것도 있다.
늘어진 백발은 윤기가 없고 수염은 제대로 자라지도 못해 기괴하게 달라붙어 있다.
세월의 무게에 내리눌려 키 마저 줄어들어 15미터의 당당한 거인의 모습이 아니라 10여 미터밖에 안 되어 보이기도 한다.
움푹하게 들어간 눈과 뺨은 생기가 없어 보였다.
들고 있는 망치도 무기라기보다는 도구였다.
거대한 모루를 어찌나 오래 두들겼는지 그 형태가 새겨지고만 망치.
그러나 에길은 느꼈다.
이 노인은 전사다.
그 누구보다 전사다.
노르드인은 언제나 노인을 존중했다.
그렇게 나이들 때까지 전장에서 살아남은 노인은 단지 지금 근육이 빠졌어도, 체격이 줄었어도, 힘이 옛날 같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존경받을 수 있는 이들이다.
나이 먹어 은퇴한 전사보다 두려운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이 신화적인 땅에서 거인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겠는가.
카베는 형상화된 전사의 마지막과도 같은 그러한 존재였다.
그랬기에 에길은 그 볼품없는 모습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강함을 느꼈다.
세월은 곧 힘이고 힘은 곧 세월이 된다.
때때로 그 말은 진실이다.
오래된 고목과도 같은 이가 에길을 내려다보았다.
갈라지고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내린다.
“어찌 우리 둘이 마주 서게 되었군. 전사여.”
“……그렇군.”
에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과묵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서로의 간격 안이다.
둘 모두 옆의 싸움처럼 빠르지는 않으리라.
민첩함보다는 힘을 중시하는 빌드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한순간에 제대로 적중한 공격 하나로 그대로 끝날 수도 있다.
무기를 쥔다.
[언더 그라운드 유적]에서 출토된 에길의 새로운 아티팩트는 얼핏 도끼라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작고 기묘한 형태를 한 사각형들이 서로 달라붙어 자루를 이루고 있다. 자루의 길이만 5미터가량.
정상적인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병기는 아니다.
실제로 이것은 트롤과 오우거 등을 위한 대형 무기다.
하물며 그 끝에 달린 것도 날이 아니다. 잘 알 수 없는 형태의 금속 덩어리가 붙어 있다.
언뜻 보자면 차라리 둔기라고 생각할 종류의 외형이었다.
자루에 악력을 가하고 마력을 불어넣자. 자루의 끝부분이 움직인다.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에길의 몸체만큼이나 거대한 날이 펼쳐지며 모습을 드러낸다.
숨겨져 있던 날이 기계장치에 반응하여 검고 투박한 날을 드러냈다.
용암의 열기가 날에 튕겨지며 빛을 낸다.
물리적이지 않은 서늘한 느낌에 에길은 이 뜨거운 지하가 잠깐이나마 식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카베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에길은 그것은 먼저 공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날개가 완전히 펼쳐진다. 한순간 거인의 몸체만큼이나 부풀어 오른다.
에길은 그대로 그것을 어깨너머 뒤편의 바닥으로 휘둘렀다.
날이 바닥에 박힌다. 마치 고정되듯이. 발사 직전의 로켓처럼.
“흐으읍!”
인간으로서는 이례적인 2미터 이상의 거구가 잔뜩 힘을 불어넣는다.
에길 역시 신화를 좇는 자. 발할라를 찾아 헤매는 자.
신화 속의 대장장이 같은 이 거인에게 최선의 일격으로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불꽃이 인다.
온도가 높아서가 아니다.
발사대처럼 땅에 박힌 에길의 도끼에서 불꽃이 치솟는다.
도끼의 날이 붉게 달아오르며 열을 내뿜었다.
박혀있는 땅속에서 추진체가 화염을 토해내었다.
커다란 폭발이, 그리고 추진이 에길의 도끼를 밀어 올린다.
에길은 온 힘을 다해 거대한 무기를 잡고 휘둘렀다.
추진체에 의한 가속은 도끼날의 끝부분을 한순간 음속에 도달할 정도로 가속시켰다.
카베가 망치를 머리 위로 들었다.
그리고 내려쳤다.
둔중한 충격과 충격파가 대장장이의 대장간에 울려 퍼진다.
공기가 들썩이고 공간이 굉음을 내지른다.
카베는 다시 망치를 들었다.
에길은 망치에 튕겨 나간 무기를 그 힘 그대로 휘두르며 한 바퀴 돌아 또다시 휘둘렀다.
불꽃이 일고, 도끼의 날이 폭발을 일으킨다.
카베는 마치 단조하듯이 망치를 내려쳤다.
노인이 담담하게 말한다.
“불길이라. 나 또한 불의 거인이지. [메기도의 화염]이여…….”
망치를 치켜드는 순간 사방에 불이 치솟았다.
스킬? 무슨 스킬이지?
에길은 개의치 않고 돌격했다.
망치와 부딪치고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에길은 질량의 문제로 크게 뒤로 밀려났다.
손맛은 없었다.
단순히 내리치는 것 같지만, 마치 이 도끼를 단련하듯 정확하게 알맞은 곳에 힘을 가한다.
완전히 힘이 들어간 일격이 적중하기 힘들다.
이것은 또 어떠한 노련함인가.
타오르는 화염이 시야를 가린다.
카베가 불길 속에서 서서히 걸어 나왔다.
에길은 볼품없다는 생각을 취소했다.
노거인은 아직 늙지 않았다.
일그러진 화염이 세월로 비어버린 몸을 메꾼다.
일반적인 거인보다는 훨씬 거대하다. 30미터에 준하는 거대한 형상이 불길을 휘감고 걸어 나온다.
피부 곳곳에 불길이 치솟고 있으며 갈라진 주름 사이로는 용암이 흐른다.
에길은 자연스럽게 종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종말의 거인인 수르트를.
방금 전과는 다른, 낮게 울리고 짙은 힘의 편린을 담고 있는 뜨거운 목소리가 말한다.
“젊은 전사여 증명하라! 내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에길은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카베 역시 지금 즐거워 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