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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97화 (297/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97화

왕국 - Lv.3805 [하르마게돈] 대장장이 카베(2)

붕괴하는 지반, 그리고 가라앉는 대지.

붉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저 아래.

제대로 발 디딜 곳을 찾기 힘든 낙하의 무중력.

무수한 소행성의 파편 속에 표류하는 우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에길에게 우주란 아주 낯선 개념이었으나 미궁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

그 또한 미지, 그리고 넓어지는 지평.

그리고 우주전의 경험은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무게가 아닌 질량의 문제기에, 디딜 곳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무기에 제대로 힘을 받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커다란 것을 하나 골라 힘껏 박차고 날아오른다.

카베는 그 모습을 보며 허리를 펴고 일어서고 있었다.

망치가 떨어진다.

에길은 다시 도끼로 조각난 암반을 긁고 그로 축적된 에너지로 비행했다.

[타오르는 날개]에 달린 추진체가 불을 뿜는다.

몸을 떠미는 추진력에 더하여 스킬을 몇 가지 섞는다.

카베와 만나는 순간, 전사를 위한 보조스킬.

발판을 만들어내는 종류의 스킬이 발동했다.

그 충돌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에길은 충분히 무기를 충전할 수 없었으나 카베는 처음부터 자신의 힘으로 찍어 누르는 차였다.

질량의 차이도 너무 크다.

에길은 멀리 날아가서 파편 수십을 부수며 처박혔다.

“문제가 있군.”

이대로면 돌아갈 수 없다. 부딪힐 때마다 날아다닐 뿐이다.

유효한 타격은 고사하고 애초에 겨루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유효한 전장의 설정은 몹시 중요하다. 카베는 단 한 번의 망치질로 그것을 해내었다.

곤란하기 짝이 없다.

에길은 생각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아서와 팽팽하게 싸우고 있을 리더에게 카베가 가세를 한다?

끔찍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파티의 행보는 오늘 여기서 끝날지도 모르는 것이다.

에길의 역할은 처음부터 카베를 상대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늙은 거인을 다른 짓을 하지 못하게 붙잡아 놓는 역할이다.

아서는 명백하게 카베보다 강하다.

고정 NPC란 그런 존재.

언제나 다른 유배자들에게 정보가 알려져 있으나 그럼에도 두려움 받을 스펙을 가지고 미궁에 나타난다.

에길 자신도 그러하며, 아서 역시 그러하다.

서브 리더인 천사 역시도 비슷한 종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인물이 이런 지원을 아낌없이 받을 상황에서 40년을 미궁에서 보냈다.

어느 영역에 도달할 것인가?

그렇기에 역할이 나누어졌다.

상대가 전사임을, 그리고 악의가 없을 것임에 기반을 둔 전략이었다.

그건 지금까지는 성공했다.

실제로 저쪽 역시 하나의 훈련으로 이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런 미궁답지 않은 전략이 먹혀들었다.

정정당당함은 전사로서 지내다 보면 싫더라도 몸에 익게 되는 것.

파티의 선봉에서 후열을 지키고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서라면 비겁할 수도 없게 되는 역할인 탓이다.

그리고 지금 그게 무너진다면 큰일이다.

에길은 혼란 속에서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다.

이미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금빛의 섬광이, 그리고 그에 맞서는 붉은 화염을 두른 반월의 궤적들이 보였다.

첫 번째 붉은 검기가 분쇄당하고, 힘을 잃은 금빛 검기에 두 번째 붉은 검기가 들이닥쳤다.

그 반월은 그대로 저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에길은 이겼노라 생각하였다.

* * *

아서는 일단은 다음 회차로 사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피하기에는 너무나도 빠른 검기였으며 그렇다고 막아내기에는 여력이 없었다.

아서왕으로서, 그의 인생을 걸고 발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일격이었다.

이 정도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메인 던전]에서 무언가 해낼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완벽하게 분쇄당했다.

그리고 그 여파가 남은 채로 갑옷 잃은 노인의 몸을 강타한다.

아서는 한 번 죽었다.

그리고 죽음 끝에서 부활하여 눈을 다시 뜬 순간, 패배를 인정했다.

시티즌의 ‘그분’이라 할지라도 회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을 공격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상대가 무엇을 하였는지도 이해한다.

방어력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 방어력 보정을 올려 막아서거나 길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공격했다.

서로 동시에 베어내는 순간 보였다.

다각도로 연결된 기괴한 움직임.

그 모션 하나하나는 연속된 여러 가지 스킬의 조합으로 보였다.

아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았다.

공격력 보정.

도저히 알 수 없는 기묘한 수단으로 여러 자잘한 스킬들의 공격력 보정을 단 일격에 모았다.

저런 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것도 가능하리라.

과연, 아케인의 그 고약한 마법사 둘이 어떻게 당했는지 알겠다.

“쿨럭.”

부활하였으나 몸은 만신창이다.

아서는 피를 토하면서도 웃었다.

다른 이유로 웃은 것이 아니다.

지금 상대한 저 남자는 진정으로 강자다.

그저 검술만 뛰어난 것이 아니며, 레벨만 높은 바보도 아니다.

미궁의 방식대로 강자다.

그것이 그가 바라던 리더였다.

자신으로는 역부족임을 알고, 미궁의 기묘함을 깨닫고, 그리고 부딪혀 절망한 끝에 찾아 헤매던 어떤 초인이었다.

“드디어……!”

카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서가 찾는 그런 자가 ‘그분’만큼이나 악독한 이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래도 좋다.

고목 같던 거인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의 일원으로, 길드의 일원으로 계속하여 잡아둘 이유는 없다면서.

같은 노인이나, 종족적 차이로 서로가 보낸 세월은 아득하게도 차이난다.

노거인은 죽을 자리를 찾고 있다.

노인은 떠날 파티를 찾고 있다.

남겨진 세 명은 자기들끼리도 잘해낼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어차피 일치하던 공동의 목표를 향해 힘을 모을 수 있으리라.

그들로서는 역부족이라 여겨 미뤄두고 있던 대업을.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 왕국을 장악하고 손아귀에서 주무르던 강력한 악.

한때 인간이었다기보다는 어떤 고대의 신적 존재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두려운 자.

이름으로 잘 불리지도 않고, 단지 그분이라고 불릴 뿐인 존재.

랭킹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본명은 물론 가명조차 잊힌 어떤 늙은 드래곤.

미궁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은 세월을 보낼수록 강해진다.

얼마나 긴 세월을 보내왔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도전할 수 있는 자도 없다.

아서 역시 그 앞에 선 후에 오싹함을 느꼈다.

맞서서는 안 된다.

지금은 개죽음이다.

그래. 지금 당장은 말이다.

당시에는 그리 생각하였다.

이제 마침내 때가 왔노라.

* * *

카베 역시 그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아서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도 깨달았다.

“쯧쯧. 뭐 이 정도면 되었군.”

저 멀리 쳐서 날려 버린 젊은 전사가 다가오고 있다.

이제 그에게 있는 것은 투지라기보다는 공경이었다.

전사란 얼마나 우스운 존재들인가.

바로 직전까지 서로를 죽일 듯이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결판이 난다면 그 순간 이렇게 된다.

모두가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하나 전사로 살아가며 그린스킨의 삶을 살아보고, 때로는 용인으로서, 어느 경우에는 단지 인간 기사로서.

그리 살아가며 전사의 명예라는 것을 배운다.

효율적인 삶을 추구하고 합리성을 생각하게 되는 현대인답지 않게 그런 낭만에 물드는 것이다.

뭐 어떤가. 낭만은 시대착오적이기에 낭만.

그리고 이런 곳에서는 그것이 옳은 것이리라.

무수한 유배자가 카베의 삶을 거쳐 갔다.

카베는 전사였고 그의 망치와 무기를 겨루었던 이들도 수없이 많다.

동화 속의 이야기인 것 같으나, 겨루어보면 알게 되는 상대의 속내도 있다.

그와 무기를 맞댄 젊은 전사는 순수한 이다. 그리고 현명한 이다.

그런 이가 따르는 리더가 그리 악한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리고 어느 정도 허물이 있다 한들, 악행이라면 이곳에서 카베를 따라갈 자가 있겠는가.

결국 그 역시 경영자의 일각으로 이 왕국을 지배해 왔다.

그분에게 굴복하여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찬동하며 지내온 세월이었다.

원래의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혼자 남은 끝에야 뒤늦게 인간이 무엇인지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미궁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든다.

여러 종족의 경험은 그 뇌리에 다른 것을 새기고, 본래 무엇이었는가가 잊히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미궁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인간만을 받아들이는 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일들을 겪고서도 인간으로 남아야만이 미궁을 나갈 자격을 지니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카베는 그의 고향에 전해지던 전설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악한 폭군이자 악룡인 아지다하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마침내 쓰러뜨린 전설 속의 인물.

오랜 세월 미뤄둔 이름값을 할 때가 왔다.

기나긴 삶의 끝이 이제 머지않았음을 안다.

마지막은 인간으로서 떠나고 싶었다.

* * *

미궁의 후반부 고난이도 지역은 대체로 서식하는 적들의 강력함만이 문제가 아니다.

환경 그 자체가 이미 무엇보다 큰 난관이 된다.

튜토리얼 구간의 단순한 자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온갖 뒤틀린 환경이 판친다.

만약 정상적인 대륙의 서버나, 왕국에서 발생한다면 이미 마력 재해로 분류될 수준의 재앙이다.

왕국의 번외 던전인 지옥 역시 그러하다.

이대로 추락하면 생환을 장담하기 힘들 수 있다.

카베와 에길의 모습을 보면 이미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아서와 나는 더 이상 전력이 아니며 본디 침공의 군세를 동귀어진시키기 위해 준비된 이 함정의 끝에는 온갖 악마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이블, 데빌, 데몬은 아니겠지만 플레이어블이 아닌 악마들도 그 이름에 걸맞게 강력하다.

그래도 이건 정말 좋지 않은데.

일단은 아서를 이긴 후에 생각하려고 했다.

노인 아서는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존재였으며 그 사실 자체는 분명 좋은 일이지만.

“이러면 이제 다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엄청나게 추락했지만 아직도 추락 중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

낙하의 충격만으로야 안 죽겠으나 저 아래에 펼쳐진 환경이 문제다.

뒤틀린 지옥의 마력은 마법 사용에 페널티를 부여하며, 끊임없는 도트 대미지를 가한다.

공략을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준비가 필요한 곳이다.

이런 식으로 진입해도 되는 곳이 절대 아니다.

‘혹시 뭐 좋은 생각 없으십니까?’

「블랑쉐가 위에 도착했다.」

‘오, 그건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네 위치를 일러주는 중이니 곧 구하러 갈 것이다. 하여간 비행 스킬 하나 없는 멍청한 전사 놈들.」

‘여신님도 전사 아니십니까? 그러시면 안 되죠.’

「난 날개 있거든?」

‘듣고 보니 그렇군요.’

곧 거만한 표정의 블랑쉐가 나타났다.

고블린들이 그녀에게 제공한 장비들은 심리적 안정을 위하여 블랑쉐가 바깥에서 가지고 들어오던 것들과 아주 흡사하거나, 사실상 똑같이 제작되어 있다.

거기에 이블로서의 유틸 마법 보정을 받아 슝슝 이동해서 다가온다.

해맑게 웃으면서 자랑부터 했다.

“후후, 나는 별다른 상처도 없이 이겼다. 오르골.”

“잘했어. 일단 좀 살려줘.”

“그러지.”

이제 그 쿨뷰티한 모습은 어디로 가버린 건가 싶긴 한데, 가만 생각해 보면 이전 회차의 블랑쉐도 간혹 저런 모습을 보였다.

그때는 상당히 노력했던 게 아닐까.

이쪽이 더 본성에 가까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가만 생각해 보면 스무 살밖에 안 되었구나.

내가 바깥에서 스물다섯이었으니 그때 보더라도 어려 보였을 나이다.

미궁에서의 경험은 사회적 정신연령과 그다지 큰 연관이 없다. 구르고 또 구를 뿐인 삶이니까.

거기에 블랑쉐는 바깥에서도 평범한 사회경험이 전무한 수준이니만큼 외견과 어울리지 않는 저런 모습도 어딘가 납득이 되기도 하고.

물론 블랑쉐라고 하면 치를 떠는 대다수의 유배자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다.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 빨리 다들 올려 보내 봐. 그 정도 공간 마법은 이제 익숙하지?”

“네가 원한다면.”

대놓고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으며 마법을 캐스팅한다.

카베가 멀리서 손을 흔든다.

블랑쉐가 경계했지만 내가 말렸다. 에길도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낙하 중이다.

블랑쉐는 한숨을 내쉬더니 끙끙대며 술식을 짜 올리기 시작했다.

미아라면 순식간일 것이 아직은 1분 이상 걸린다.

그러나 지옥까지의 거리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으며, 지옥의 환경에 노출되어 블랑쉐가 마법을 구사하지 못하게 되는 일 없이 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의식이 흐려짐을 느꼈다. 바깥에서 승리한 희우와 미아도 무너진 굴을 뚫고 있는 모양이니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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