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99화
왕국 - Lv.5162 [지옥](1)
좋은 일은 좋은 일을 또다시 불러온다.
유유상종이라고 운도 그런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서가 갑자기 생각에 잠겼을 때, 나는 어딘지 모르게 그런 조짐을 느꼈다.
기세를 타고 있을 때는 갑자기 모든 일이 잘 풀린다.
희우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나는 이번 회차에 아주 긍정적이다.
논리와 이성으로도 실패의 가능성을 낮게 점치고 있으며, 혹여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나를 묶고 있었던 주박을 이제야 깨닫고 조금씩 벗어나고 있지 않나. 그런 자가진단을 해본다.
아서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신좌 부품이라는 것 말일세. 혹시 [언더 그라운드 유적]에서 얻은 건가?”
정보 우위를 완전히 상실할 필요는 없다. 아서의 마음을 더 확실하게 알 때까지는 신중해도 된다.
그렇기에 전체적인 계획은 알려지되 핵심이 되는 부분은 숨겼다.
그럼에도 이렇게 눈치를 챈다는 것은.
“[하드스록]이 가지고 있군요.”
“역시 그런가. 좀 볼 수 있겠나?”
이 이상 신중할 필요는 없겠지.
차원 수납 주머니에서 신좌 부품을 꺼낸다.
까맣고 반짝이지 않으며, 기하학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 조각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튼튼하기에 이걸 무기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보았다.
당연히 너무 튼튼해서 가공이 불가능하기에 그런 일은 성공한 적이 없다.
아서가 탄식했다.
“이게 그런 용도를 가지고 있단 말이군.”
“어디 공략하셨습니까?”
“지옥을 사전 답사했지.”
과연, 침공의 군세를 거기로 몰아넣고 살아남아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대비는 되어 있었다는 거군.
“지옥의 왕은 잡았습니까?”
“아니, 그냥 구경하고 온 것이나 다름없지. 저 상공도 그렇고 지옥도 그렇고, 왕국 외부의 머나먼 땅도 그러하네. 어찌 유배자의 힘이 닿는 곳은 아니지 않나.”
아서는 그리 말하며 쓰게 웃는다.
“나는 그분, 아니, 이제 그렇게 부를 필요는 없겠지. 악룡이 긴 세월 왕국에 지내며 그런 곳에서 힘을 얻은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네.”
“아마 그럴 확률은 낮을 겁니다. 제대로 다 알고 있다면 당신과 카베가 아는 것보다 더 힘든 상황이었을 거니까요. 만신전내의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르죠.”
“그런가.”
“그렇습니다.”
아서는 내가 보라고 놓아둔 신좌부품을 만지려고 하지 않았다.
아직 자신이 완전한 신뢰가 없음을 아는 태도다.
역시 정직하고 올곧은 사람이다.
“자네는 그럼 게이머겠군.”
“그렇지요. 그 악룡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본인이 말한 적은 없지만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네. 아는 게 많았거든.”
“이번 회차의 왕국은 참으로 게이머가 많은 판이군요. 일그림도 게이머임을 아십니까?”
“중간쯤에 있던 하이 랭커였나. 그자도 그랬군. 몰랐네.”
“세상에 별로 관심이 없으셨군요.”
“더 위험하고 중요한 일들이 많았으니.”
이야기는 좀 더 길게 이어졌다.
단지 서로의 계획을 공유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저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기도 했다.
나는 아서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고정 NPC들은 모두 그렇다.
피했던 시절도 있고, 적극적으로 인연을 쌓아두려고 했던 시절도 있다.
최강의 NPC인 아서는 존재한다면 항상 어떤 식으로건 나와 교류가 있던 자였다.
노인도 썩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곧 전투 당시의 이야기로도 이어졌다.
“그것, 뭘 한 것이지? 나는 보고도 알 수 없었네. 두 번 발사한 것도 뭔가 편법인가?”
“두 번 쏜 건 스킬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공격력 보정을 모은 건 편법이죠.”
내가 이 현실을 끊임없이 게임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 그래서다.
게임이 아니라면 저따위 기묘한 편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아니. 없다.
게다가 언제나 되는 것도 아니며, 이용할 수 있는 용도도 한정적인 것을 보면 틀림없이 최초 의도는 아니었다.
누군가의 설계에서 허점이 생긴 것이다.
미궁의 법칙을 약간 비트는 편법.
레바테인의 속성을 바꾼 것이나, 미아가 정말로 몽환의 숲을 구현하여 가짜 나를 불러 온 것과도 같다.
모두 게임 시절에는 불가능했던 일이며, 이렇게 현실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게임 같은 현실인지 현실 같은 게임인지 모를 이 애매모호한 미궁의 상태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을 설계한 게 누군지는 몰라도 이런 편법을 활용할 필요는 있다.
나는 천천히 아서에게 내가 한 일의 작동 원리를 설명했다.
그것은 검술이 아니었으며 스킬도 아니었다.
정말로 잡기술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 였다.
아서는 그것이 몹시 흥미로웠던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해 보았다.
“잘 안 되는군.”
“저스트 타이밍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이건 애초에 논리적인 잡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일관성도 없습니다. 하나하나 타이밍을 익히셔야 할 겁니다.”
“자네 파티원들은 다 이런 걸 할 줄 아는 건가?”
“아니요. 그들도 이제부터 배워야죠.”
정석 이전에 꼼수부터 배우면 큰일난다.
정상적인 하이 랭커로서의 경험은 쌓았다.
어디까지나 미궁의 시스템 틀 내부에서는 이제 흠잡을 곳이 별로 없는 준수한 응용력을 보인다.
꼼수는 지금부터 배워야 한다.
* * *
에길은 카베와의 전투가 끝난 후, 한 가지 의문에 빠졌다.
자신의 전력으로서의 가치에 대한 의문이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 리더가 부여하고 기대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무쌍난무를 벌이는 역할이 아니다.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을 붙잡아두고 다른 짓을 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끄는 역할이다.
실제로 틀림없는 격상의 상대인 카베에게 그 역할을 나쁘지 않게 수행했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했다. 명예를 찾는 전사이자 위대한 전사 에길은 이 상황에 만족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명예로운 생각이 아니었다. 동료에게 한번 자신을 맡긴 이상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사로서의 욕구불만은 어딘가 조금씩 고여 간다.
이 사실을 리더에게 말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이번 회차에서의 에길은 독고다이가 아니다. 그는 더 이상 길 잃은 고독한 바이킹이 아니라 당당히 최고의 전사 길드 [하드스록]을 꺾어낸 파티의 일원인 것이다.
그리하여 에길은 자신의 고민을 안고서 친우를 찾아갔다.
그의 친우는 처음의 인상과 다르게 헤실헤실 웃으면서 자신의 장갑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에길의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표정을 다시 굳혔다.
에길은 그 행태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풀어질 때 제대로 풀어지지 못하는 전사는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전사의 귀감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블랑쉐가 말했다.
“오, 친구여. 무슨 일이지?”
“음. 상담할 것이 있다.”
에길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된 아름다운 여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글쎄? 그런 거라면 그냥 오르골에게 말하면 되지 않나?”
“흠. 하지만 역할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집단전에서 그만큼 중요한 게 달리 있는가.”
에길은 알고 있다. 이 파티는 끊임없이 아슬아슬한 싸움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기 위한 최적화다.
그 개념 자체는 에길 스칼라그림손으로서 이미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었다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의 친구인 이 흑표범 같은 여인도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명확하게 정리하여 전달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리더였다.
에길은 처음에는 그가 보인 퍼포먼스에 감탄하였으나, 점점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고방식부터가 다르다.
효율과 합리라는 것은 시대와 무관하게 경지에 오른 달인들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고도로 체계화된 전법은 적어도 노르드에는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궁의 대부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생각보다 주먹구구로 돌아가는 법이다.
하지만 블랑쉐는 바로 그 우려를 들어 에길의 고민을 긍정했다.
“오르골은 뭐든지 할 수 있다.”
“음?”
“전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전투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연습을 하고 싶다고 해라.”
에길은 과연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새로 합류하게 된 아서도 있다.
리더 본인도 전사계열로 전환했다.
홀로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전사가 전장의 주인공이 되어 다른 클래스의 보조를 받는 경우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리더가 강력한 전사의 추가 확충을 원했던 것이겠지.
블랑쉐가 미소 지었다.
“마침 우리의 다음 상대는 사수들의 집단이다.
“그렇군.”
에길은 곧바로 리더를 찾아갔다.
리더는 별로 의아할 것도 없다는 듯이 에길의 고민을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그런 것도 필요해요. 내가 왜 전사를 많이 모으려고 하고 마법사와 사수는 한 명으로 충분하다고 하는지 압니까?”
“나는 잘 모르겠다. 화력의 집중이란 면에서는 원거리 클래스가 훨씬 유리하지 않나?”
리더가 흔히 사용하는 전략도 대체로 딜찍누가 아닌가 하는 말은 삼켰다.
한번 리더로 인정했다면 순순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에길은 리더를 그만큼 신뢰하는 블랑쉐를 마찬가지로 신뢰했다.
물론 리더 자체도 신뢰하고 있고 말이다.
“미궁의 후반부로 갈수록 원거리는 제대로 뭔가를 하기 힘들어져요. 이게 게임 시절에는 안 그랬는데…….”
게임 시절.
거의 리더의 입버릇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에길이 몇 번 겪었던 게이머들은 저렇게 능수능란하게 해내지 못했다.
아는 것과 하는 것의 차이다.
모든 것을 아는 자가 모든 것을 할 줄 안다면.
그렇다면 리더 같은 이가 되리라.
가끔 위화감을 느끼곤 한다.
리더는 과연 평범한 유배자인가?
아서는 대전사 에길로서도, 유배자 에길로서도 탄복할 만한 전사지만 그런 그마저도 두려워하며 한발 물러선 존재가 있다.
악룡인지 뭔지 하는 그 존재를 리더는 오히려 생각보다 약한 놈이네 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고정 NPC 유배자란 보통 경외나 두려움을 받는 존재다.
에길 본인이 그렇다는 것을 이번 회차에서 느껴서 안다.
그의 과거 회차는 위화감이 들 정도로 몇 가지 요소가 없었다.
일단 다른 고정 NPC의 존재가 전무하다.
“그런 식으로 원거리 클래스의 화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적들이 너무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전선을 제대로 형성하고 지원받으며 치고받을 이들이 필요한 거죠.”
에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하였으나 또다시 새로운 개념이다.
미궁의 전투는 바깥의 전투와 다르다. 바깥에는 마법도 총기도 없다. 적어도 에길이 살았던 시대에는 그랬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완전히 새로운 전법.
리더는 언제나 그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시험도 해보았고 그 효용과 단점에 대해서도 줄줄 늘어놓을 수 있다.
아는 것이 참 많은 사내다.
“그럴 경우 마법사는 결국 조커 카드로밖에 기능할 수 없어요. 전장의 주인공은 전사 클래스가 됩니다.”
“과연. 납득했다. 그럼 마침 이번에 그렇게 연습을 하게 되는가?”
“그렇죠. 아서의 말에 따르면 침공까지 한달 여 정도의 여유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그걸 좀 더 늦출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에 악룡을 치우는 게 낫겠죠.”
“어차피 침공은 막아내야 한다고 했지.”
“경험한 적 있으십니까?”
“한 번.”
그걸 막는다라.
에길은 자신의 기억 속에 새겨진 침공이라는 전쟁을 떠올렸다.
그건 그래. 정말로 전쟁이었다.
강력한 보스급 존재들에 더하여 지평선을 뒤덮는 무수한 적들의 존재.
파도나 해일이라고 불러야 할 끝없는 괴물들의 행렬이었다.
수 앞에는 장사가 없다.
일대일로 보스급 존재를 감당할 수 있는 하이 랭커가 있다고 한들, 영원히 싸움을 지속할 수는 없다.
맞서다보면 언젠가는 그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다.
왕국은 그런 식으로 청소 당한다. 미궁의 뜻대로.
“침공을 막는 동시에 악룡을 치울 방법입니다. 한 달이면 넉넉하죠. 어차피 저쪽은 우리를 여흥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니까요. 귀찮게군 건 다 그 아래에 있는 녀석들이라던데.”
에길과 대화하며 다음 행보가 구체화된 모양이었다. 에길은 자신이 도움이 되었음에 만족했다. 그리고 욕구불만을 해소할 수 있을 거라는 점에서 또다시 기대를 하게 되었다.
리더가 방침을 전달하기 위해 일어선다.
곧 파티원들이 모여들었다.
“아서는 일단 카베에게 돌아갔으니 먼저 이야기 하지.”
리더가 이야기한다.
“[하드스록]에 이미 신좌 부품이 하나 구비되어 있다고 하니까 우리는 하나만 더 찾으면 될 것 같아.”
서브 리더가 손을 든다.
“또 천사 떼를 상대해야 해요?”
“아니, 이동속도가 빠른 적들은 변수가 너무 커서 좋지 않아. 그때는 리온을 달고 있으니 했던 거고. 가능하면 안정적으로. 저기 지하.”
리더가 이미 준비해 놓은 판에다가 지형을 그리기 시작한다.
랜덤으로 결정되지만, 그럼에도 고정적인 부분은 늘 있는 것.
“싸워서 이길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탐험과 탐사다. 보이는 대로 베면서 달릴 거야. 최대한 넓은 지역을 수색해야 하니까. 그리고 신좌 부품 하나만 건지는 대로 바로 이탈해야 해.”
지금까지의 전투와는 조금 다른 방향성이 예고된다.
에길이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차라리 모험에 더 가까웠다.
“아서가 전달하러 가 있어. 마력 회복 시간이 필요하니 모레 정도에 바로 출발할 거야. [하드스록]과 함께 지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