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00화
왕국 - Lv.2116 파티 오르골(1)
“아이고 삭신이야.”
제니는 우는 소리를 냈다.
강대하고 강대한 뱀파이어 로드이자 클랜 마스터인 그녀의 호위대상은 틀림없이 어지간한 충격에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레벨로 갈수록 클래스간 내구도의 차이는 현격해지는 법이다.
순수 마법사, 그것도 마인드맵이 없어 보조적인 생존수단도 가지지 못한 뱀파이어 로드는 약하다면 또 아주 약할 수도 있다.
심장, 그곳만 잘못 꿰뚫린다면 그 자리에서 사망.
그리고 정령왕끼리의 결전 마지막 순간, 실피드가 쏘아낸 속도는 이미 음속을 넘어 있었다.
기천사의 영역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가서 아무렇게나 처박힌다면 생존을 장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제니는 무턱대고 미아를 끌어안았다.
다행스럽게도 10살이라기에도 자그마한 마법사는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제니의 품 안에 쏙 들어온다.
유성처럼 충돌하고 아마 척추가 으스러졌을 것이다.
갑옷은 이미 소모품이나 다름없다. 전투 한 번 치르면 새 것을 구해야 하니까.
“회복했다고는 해도……. 환상통이 남아 있는 기분인데.”
축 처진 귀가 컨디션을 대변한다.
휴식시간이 주어졌다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통증은 얼마나 갈지 알 수 없다.
제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생. 고생. 고생뿐이야. 괜히 파티에 남는다고 했나.”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쉽게 이루어진 랭커의 꿈이었다.
이게 이렇게 쉬웠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무엇이었나 싶다가도.
“절대 절대 절대! 그렇게는 못했을 거야.”
사방이 괴물뿐이니 결국 투덜거리는 것도 혼자다.
그냥 따라만 다니는 데도 죽을 것 같은데 각자 적을 하나씩 맡아서 싸우는 이들은 무엇인가 싶다.
이런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거란 기대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실제로도 서브 리더는 가장 많이 박살 나고 다치지만 항상 해맑지 않은가.
천사가 되면 다들 그럴 수 있는 걸까?
그래도 마침 숙소는 신전이다.
혼돈의 신전은 일단은 병원으로서 기능하던 곳이며, 그 기능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노의사가 껄껄거리며 제니의 허리를 철썩 때렸다.
“으냐앗?!”
“통각은 이상이 없고. 뭐 영혼에 문제가 생기진 않은 모양이니 이거 바르고 푹 쉬면 나을 거요.”
“앗아아. 고맙습니다.”
“꼬리고 잘 부풀고 있는 거 보니 척추도 멀쩡하군.”
빵빵하게 부푼 꼬리가 부끄러워 얼른 가라앉히려고 한다. 당연히 잘 되지는 않는다.
노의사가 옷을 젖히고 연고를 바른다. 시원한 느낌이 번져 나갔다.
얼굴 표정이 풀린다. 욱신거리던 신경통이 한결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전사들은 참 고생이 많지. 이런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은퇴하는 이들도 많으니.”
“흐으, 뭐 저도 은퇴하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해요.”
“그런가?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까요오.”
로건은 잘 지낼까? 이제 다시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정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한발 먼저 은퇴했던 다른 동료도 생각난다.
다들 행복할까?
그런데 그 행복을 지켜야 하는 것이 제니다.
침공 방어라니. 그런 게 있다고는 들었는데…….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제니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삶을 하며 내 집 마련의 꿈을 꿀 뿐이던 가련한 잎사귀 요정이니까.
투덜투덜 속으로 온갖 불평을 중얼거리며 진료실에서 나왔다.
미아가 서 있었다.
손에 뭔가를 들고서.
약간 촉촉해진 눈으로.
“제니……. 은퇴할 거야?”
울 것 같은 뱀파이어 로드의 얼굴을 보며 제니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이고 맙소사.
* * *
에길은 만족스럽게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대강의 방향성은 들었다.
꼭 [메인 던전]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중요한 것은 결국 돌파력.
그리고 돌파력의 핵은 전사다.
그중에서도 거병을 다룰 수 있는 에길이 중추가 될 수밖에 없다.
공성추의 모서리 부분을 맡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서나 리더와 교대로 행동하게 되겠지만, 저지력 면에서는 가장 물리적 크기가 거대한 에길이 나서는 편이 옳다.
생각을 해본다.
공성전의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경우 상대가 단단한 벽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한 요령이 적용되리라.
에길은 인간 충차가 되는 것이다.
길이 없다면 만들어내는 존재.
그 구도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부수고 죽인다.
죽이지 못하더라도 쳐날린다.
파괴! 혼돈!
거기까지 사고가 닿은 후 에길은 피식 웃었다.
그는 바깥에서도 서른이 넘었었다.
미궁에서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기엔 이제 마흔 줄을 넘보는 정도의 기분이었다.
전사로서는 은퇴를 고려할 수도 있는 나이였다.
노인들은 전장에서 물러나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낸다.
그 나이까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삶의 증명은 끝났으니.
그러다가 정말로 큰 전투가 벌어진다면 오랜만에 무기를 들고 나서는 것이다.
발할라로 가기 위하여.
하지만 에길은 전사로서의 삶의 막바자기 다가오는 지금에도 자신 속의 불길을 느낀다.
싸우고자하는 열망.
그리고 무기가 부딪히며 서로가 서로에게 소리 없이 전달하는 대화.
그 짜릿한 감각.
에길은 전혀 늙지 않았다.
미궁에서의 노화란 결국 정신적인 것이 아니겠나.
지금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파티 대열의 선두에서 어떻게 무기를 충전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각도로 어떻게 휘둘러야 효과적인 돌파력이 발휘될 것인가.
즐거운 상상이었다.
그리고 에길의 발걸음이 멈칫한다.
“흠?”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료실 앞에서 파티의 마법사가 울먹이고 있었다.
손에는 어떤 꾸러미를 소중하게 들고 있다.
저 꾸러미는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기억의 서랍을 뒤적인다.
오늘 아침부터 마법사와 신전의 책임자가 함께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무언가 하던 것이 생각난다.
신전 책임자 이름이 레미였던가?
아주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어울려 주는 것에 뭔가 무게 같은 것을 느꼈었다.
듣기로는 리더가 튜토리얼에서부터 건져 올려준 인물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렇다면 저렇게 충성스러울 만도 하지.
그런데 무슨 일일까?
곧 제니가 진료실에서 걸어 나왔다.
“제니……. 은퇴할거야?”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였군.
으레 하는 푸념 같은 것일 텐데.
하지만 제니는 몹시도 당황한다.
에길은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 잎사귀 요정 쌍검사는 묘하게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은 경향이 있다.
이미 단련이 끝난 이들 사이에 있어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같은 일을 겪는다.
선배 전사로서 이끌어주고 돌봐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
에길은 제니를 아주 좋아했다.
입으로는 불만이 가득해도 몸은 정직하다. 언제나 열심이고 노력한다.
노력하는 젊은이를 싫어하는 전사는 없다.
제니는 언제나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진지했다.
마법사가 마법에 대한 일과를 끝마치면 항상 찾아간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의논했다.
호위로서 저보다 충실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은 약간의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 * *
받은 것이 있다면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감사는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표하는 것이 좋다.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비록 나이로만 따지면 자신보다 어리겠으나 미아는 희우를 무시해본 적이 없다.
가끔 농담처럼 엣헴하긴 하지만 진심이었던 적도 없다.
어린 시절 뱀파이어가 되고 그 이후에는 유배자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내온 미아에게 나이는 정말로 숫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에는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어떻게든 제니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하드스록]과의 전투, 적 정령왕과의 싸움 이후 제니의 상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미아는 아주 멀리 날아갔다.
뱀파이어 정도의 신체 내구도로는 그대로 으깨져 죽었으리라.
미아가 살아있는 것은 제니가 몸을 던진 덕분이다.
그리고 의식을 되찾았을 때, 미아를 감싼 제니는 아주 처참한 상태였다.
그런 참상에 익숙한 미아조차도 저도 모르게 물러설 정도였다.
병을 꺼내 재빨리 뿌려서 살아남긴 했지만 얼마나 아플까.
뱀파이어도 재생은 한다. 포션을 쓰지 못할 뿐이지.
회복된다고는 해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해 보면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언제나 공격을 대신 받아내고 감싸주는 제니다.
미아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빠는 바쁘다. 엄마도 아빠를 따라 [하드스록]의 요새로 가서 없다.
이곳에 남은 사람 중에 가장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인물은 레미였다.
왕국 이전부터 함께 여행했던 인연도 있고 같은 마법사로서 친근감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일찍 일어나서 또 업무를 수행 중인 레미에게 찾아갔을 때는 물러설 뻔했다.
일에 파묻혀 있는 얼굴에선 피로가 뚝뚝 묻어난다.
“어……. 레미. 차라리 내가 물어줄까? 뱀파이어가 더 편할 것 같아.”
퀭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든 레미가 대답한다.
“네? 괜찮아요. 어차피 이 피로는 정신적인 게 대부분이라…… 저도 일단 유배자거든요.”
“예전처럼 말해줘.”
“그럴까?”
금새 돌아온 친근한 말투에 미아는 배시시 웃었다. 대외적으로는 하이랭커 파티의 일원이다.
레미는 그렇게 미아를 존중하곤 한다.
그대로 레미는 시간을 내었다. 사실 급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미리 해두고 싶었을 뿐.
그리고 미아의 이야기를 들은 후.
“그런 거라면 선물을 전하는 건 어때? 거창한 것 말고 오히려 소박한 게 더 좋을 수 있어.”
“소박……?”
미아는 약 30초간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우주선?”
“음, 소박의 개념이 좀 미쳐 버렸군.”
이게 다 고블레타리아 연방 때문이다. 말하면 다 만들어서 보내주니까 답이 없다.
“그런 것 말고 말이야. 마음을 담아서. 그래. 쿠키 같은 걸 굽는 건 어때? 과자를 싫어하는 여자는 드물다구.”
“……쿠키?
“젠장. 마법바보라서 쿠키가 뭔지부터 설명해야 하나.”
그런 사소한 해프닝 끝에 미아는 쿠키가 뭔지, 소박한 선물이 뭔지 이해했다.
애초에 머리가 나쁜 문제는 절대 아니다.
그냥 환경이 좀 이상할 뿐.
레미에게도 좋은 일탈이었다.
잠깐 외출하여 재료를 사고, 의료시설은 조리시설로도 활용할 수 있다.
어딘가 이상했지만 레미는 어쨌든 제대로 미아가 쿠키라는 것을 만들도록 이끌었다.
차폐공간을 만든 후에, 그곳의 온도를 수동 제어하여 굽는 것은 어떤가 싶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마법사의 요리란 그럴 수도 있는 법.
결과적으로 마력이 듬뿍 담겨서 맛 이상의 효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는 결과물이 완성되었다.
“술식은 완벽했어. 마법은 이런 식으로도 응용할 수 있구나!”
“효율은 모르겠지만…….”
미아는 아주 기뻐했다.
처음 먹어보는 쿠키의 맛은 정말로 매혹적이었기에.
제니가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떠나는 미아를 보며 레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쉴까. 일하기 싫어…….”
그렇다면 과제를 해야 한다.
노의사는 결코 신전의 책임자라고 레미를 봐주는 일이 없었다.
진료실에 들러 암기해야 할 것들을 받아온다. 나오는 길에 죽어가는 제니와 마주친다. 미아가 우려하던 후유증이 굉장한 모양이다.
미아와 엇갈렸나?
곧 만나겠지 뭐.
레미는 의사의 꿈을 꼭 가져야만 했을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 * *
제니가 미아를 달래는 것은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기에 뒤에서 지켜보던 에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다가왔다.
“마법사 아가씨. 전사들은 삶의 고단함을 그렇게 푸념으로 풀기도 하는 법이네.”
“그런가요? 쿨쩍.”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에길…….”
에길은 흐뭇하게 웃었다.
제니는 젊다.
미아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런 딸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
전사로서 살아감에 가정은 필요 없다고 여겼다.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가 너무 전장에 열광했을 뿐이니까.
“나도 하나 맛보아도 되겠나.”
제니가 미아의 눈치를 본다. 미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앞에서 대신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은 제니만이 아니다.
에길 역시 미아가 감사할 대상 중 하나다.
에길은 그 커다란 손가락에 비하여 너무 앙증맞은 쿠키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씹으니 입안에서 톡톡 튀기 시작한다.
어째서지.
그리고 확 하고 번지는 향기.
민트인가?
초콜릿과 민트라니.
잘 알 수 없는 취향이군.
그렇게 생각하다가 에길은 멈칫했다.
“잠깐, 고양이가 초콜릿을 먹어도 되던가?”
그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기에 미아도 움찔했다.
과거 제니의 야성회귀를 보고 연구했던 것이 생각난다.
잎사귀 요정은 동물의 특성을 강하게 가진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육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제니는 고양이다.
“괜찮거든요! 저 고양이 아니에요! 요정이라고! 요정! 이 사람들아! 너무해! 누굴 마스코트인 줄 알아! 어! 나도 파티원이거든!”
에길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미아도 웃다가 주저앉아 버렸다.
제니는 혼자 화를 내다가 제풀에 지쳐 버렸다.
“아, 하여간. 진짜 은퇴하려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거 엄청 맛있네요. 슈팅스타 민트초코 쿠키인가? 어떻게 이런 맛을 생각한 거예요?”
미아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니 피랑 똑같은 맛이야!”
“에에엑?”
인간 출신 뱀파이어에게 요정의 피는 해로운 것이다.
하지만 보통 해로운 것은 독특한 맛이 되기도 한다.
제니가 다시 솟아오른 털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잘되지 않는다.
혹시 난 고양이가 맞나?
왠지 시무룩해져서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맛있네요. 내 피가 이런 맛이라니.”
미아가 활짝 웃으면서 제니를 끌어안았다.
“항상 너무 고마워!”
“저도 고마워요.”
“왜?”
“제 일자리를 만들어주니까.”
“호위가 필요 없어져도 제니는 내 거인걸. 내가 키울 거야!”
“반려동물 취급은 좀…….”
에길은 흐뭇하게 웃었다.
아직 단련 중인 전사는 어찌 되었건 기묘한 파티 내에서도 훌륭히 적응하고 있다.
처음에는 조금 우려했지만 문제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