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02화 (30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02화

왕국 - Lv.5162 [지옥](2)

3일은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게 만들 수 있는 고레벨 유배자에게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요새 지하에 뚫린 지옥의 입구를 막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비행하는 괴물들이 그 구멍을 통해 지상으로 향하기 시작한다면 침공 이상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침공은 일시적이지만 그 아래에서 기어 올라오는 괴물들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지옥이건 저 상공의 외계건 왕국만큼이나, 혹은 왕국보다 더 큰 공간을 점유하며 존재하고 있으니까.

내버려 두었다가는 요새의 방향이 역전된다.

그 속에서 바깥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 기어 올라오는 괴물들을 바깥에서 상대해야 하는 탓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번외 던전의 괴물들은 그다지 적극적으로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정령왕의 계약자, 아젤리아의 피를 토하는 마력 소모 끝에 지옥의 입구는 1시간여 만에 덮였고 3일간의 휴식이 끝나 마력을 회복한 후에는 요새의 다른 곳을 정비한다.

“그래서 아젤리아는 참가할 수 없다.”

“우리가 부순 거니 뭐 어쩔 수 없죠.”

“지옥은 정령이 활약하기 좋은 곳일 텐데…….”

“괜찮습니다. 조금 장기전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정령사는 히든카드지 지속적인 전력은 아니에요.”

“그렇군.”

아서는 과거의 자신을 모두 내려놓았다.

카멜롯의 왕이자 원탁의 수장이었던 기사로서의 자신.

그리고 이 왕국에서만 40년을 구른 하이랭커 유배자로서의 자신조차 내려놓았다.

게이머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남자의 발상은 남달랐다.

애초에 알고 있는 것부터가 다르다.

필요하니 지금 말하고 있을 뿐, 미궁의 비밀은 더욱 많을 것이고 이 남자는 그 사소한 부분까지 꿰고 있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오랜 통찰이 그 판단을 긍정했다.

여유조차도 아니다.

그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할 뿐이니 누군가 놀라건 말건 관심조차도 없는 태도인 것이다.

저것이 연기라면, 속아 넘어간 아서가 인생을 헛산 셈이겠지.

“그런데 어제부터는 왜 그렇게 말이 없으십니까? 혼자만 떠드는 것 같아 좀 뭣한데.”

“아니, 뭐. 나는 그게 편하네.”

“하긴, 카베 영감님이 리더였죠?”

“그렇지. 사실 [하드스록]은 다른 두 파티에 비하면 신참자들뿐이라 말일세.”

“그렇군요.”

아서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같은 파티 소속이 된 다른 이들을 향해 눈길을 돌린다.

대다수가 아서를 향해 공감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에길 스칼라그림손.

저자는 안다. 카베가 알고 있는 고정 NPC였다.

대강의 배경도 안다. 그 전사가 자신에게 달관한 느낌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지금 자신과 같은 과정을 겪은 것이다.

그 뒤의 여인은 놀랍게도 그 악명 높은 블랑쉐였다.

왕국에 도달한 절대다수의 유배자가 그 이름을 안다.

어디서부터 누가 이름을 알아내어 구전하기 시작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블랑쉐라는 이름은 튜토리얼 공포의 화신으로서 새겨져 있다.

뒤늦게 이 파티의 일원이 된 아서로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물며 한눈에도 경각심이 느껴지는 저 천사는 정체불명의 힘살자라는 클래스를 표방하고 있다.

실제로 가볍게 검을 겨루어보니 그 말이 납득이 되었다.

정면에서 아서의 검을 받아내고 위협을 가할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암습을 경계해야 한다.

방심하고 한순간이라도 인지를 놓친다면, 그 순간 갑옷이 무라도 썰리듯 잘려 나갈 것이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작은 은발의 마법사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아젤리아가 직접 증언하기를.

“정상이 아니에요. 술식의 발동부터 차단하는 다대일 마법전이잖아요? 그건 일정 수준 이상부터는 마인드맵 스펙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아서는 마법에 무지하다. 그러니 휘하의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질문했다.

다른 마법사들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아서님, 사람의 손은 두 개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검을 다섯 개를 쥐고 휘두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네. 그건 검술의 영역은 아니지.”

“그런데 그 느낌이었습니다. 뭐 이상한 스킬이라도 있는 걸까요?”

그래서 아서는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했다.

남의 비장의 카드를 밝히라는 것과도 같으니 그래서는 안 되겠으나.

의문을 참기 힘들었다.

점잖게 질문하는 아서를 향해 그의 새로운 리더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아, 그냥 재능 좀 있는 NPC에요.”

“마인드맵이…… 없다고?”

“마법은 원래 그런 거거든요.”

다행스럽게도 그 말을 아젤리아와 그 휘하의 마법사들에게 다시 전달할 기회가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마법의 신이 강의를 들으러 내려왔단 소문이 있던데…….”

“아케인의 리더가 박살 났다죠.”

“알게 되면 저희에게 좀 알려주시죠.”

아서는 마법사가 아니다. 더 이상의 이해는 포기했다.

전문가들도 고개를 젓는다면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제니라는 고양이 귀 쌍검사였다.

“엇, 으어엇, 엇. [하드스록]이다. 진짜다. 정말이다. 미쳤다. 미쳤어.”

뭔가 팬 미팅이라도 하듯이 조심스레 아서와 악수를 하고 눈을 반짝이며 킁킁거린다.

그나마 정상적인 것이지 진짜로 정상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쪽도 기묘하게 쭈그러들어 있을 뿐, 작정하고 랭킹 등반을 시작한다면 꽤 높은 자리에 이름을 올릴 만한 인재였다.

“대단하군. 언제 이런 인재들을 몰래 모아서 기른 건가?”

“왕국 오고 한 석 달 되었나? 레미야! 몇 달이지?”

“비슷할걸요?”

“……?”

아서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째서 리더가 작전을 수립하고 설명을 늘어놓을 때 잡음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뭘 알아야 잡음을 내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질 역할의 디테일에 대해서 물어보고 답을 듣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랜 경험을 가진 카베에게 물었다.

“고정 NPC 유배자 중에 저런 이가 있냐고?”

“그렇소이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군.”

“하지만 아서 자네도 알지 않나.”

“그렇지……. 나는 지난 회차 총합 30년간 고정 NPC 유배자를 목격한 적이 없소.”

“고정 NPC의 기억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나. 자신을 의심할 수 없도록 말이야.”

“그럼…….”

카베는 그가 먼 옛날 게이머라고 불리는 족속에게 들은 미궁의 게임으로서의 특징을 떠올렸다.

“랜덤…… 인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정말로 게이머들이 말하는 그대로일지도 모르는 것이지.”

“그저 사람. 모두 다른 곳에서 유배당한 사람.”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법 아니겠나.”

그렇다.

그것이 저 남자의 동기이기도 할 것이다.

별나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돌아갈 곳이라면 아서에게도 있지 않은가.

카베가 웃었다.

“행운을 빌지.”

“아직이오. 그 악룡이 쓰러질지는 모를 일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나는 왜인지 그냥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

아서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느낌일 뿐이지만,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

직감은 결국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결정체다.

무의식부터 알고 있는 정보를 취합한 끝에 내려지는 결론이다.

그 과정이 한순간이라 비논리적인 것으로 느껴질 뿐.

그리고 아서는 자신의 삶에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서는 카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베도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칼리버를 아직까지 아껴둔 보람은 있겠군.”

“피차 행운을 빌지요.”

그게 카베와 마지막 대면이었다.

진짜로 마지막이길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늘 그렇듯, 마지막인 것처럼 인사했다.

* * *

딱 사흘, 특별히 비범한 환경에 처한 게 아니라면 마력이 만전이 되는 시간이다.

바닥부터 따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미아는 자주 한계에 내몰리는 편이었고 그때마다 꼬박꼬박 사흘씩 쉰다.

충고할 필요가 있다.

지옥은 지속 가능한 전투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필살기를 쏟아부은 다음 기절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절대로 바닥까지 긁어 쓰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 이상의 잔량을 유지해.”

“알겠습니다!”

미아가 어디서 배운 건지 경례를 척 붙여 올린다. 아무거나 다 따라 하고 싶은 나이지.

하드스록이 저런 경례를 했던 것 같다.

가장 몸 쓰는 클래스인 만큼 대체로 길드 내 규율이 엄한 편이다.

희우도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한다.

그러더니 서로를 쳐다보며 꺄르르 웃는데 뭔가 싶다.

아서는 적응을 괜찮게 한 것 같다.

우선 에길과 블랑쉐와 죽이 잘 맞았다.

제니는 아서를 상당히 동경하는 모양인데 오랫동안 하드스록에 몸담은 입장에서는 전설의 위인 같은 느낌인 모양이었다.

에길이 종종 제니를 데리고 아서와 대화하거나 대련했다.

제니는 매번 형편없이 깨졌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모습이다.

블랑쉐도 같은 민첩 계열에 속하는 클래스로서 제니를 좋게 보는 모양이었다.

저기는 전체적으로 제니가 이쁨받는 그룹이다.

전투적으로 밸런스가 맞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각 인원들끼리도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다.

실제 나이야 어찌 되었건 정신은 육체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 법이다.

이건 실제로 설문도 해본 문제였다.

몸이 젊어지면 정신도 젊어진다.

몸이 노인이라면 정신도 노인이 된다.

그렇기에 아서는 노인이었다.

그리고 에길은 장년이었으며, 블랑쉐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정도의 상태다.

그 세 명의 사이에서 제니가 분주하게 중심을 잡는 느낌.

바깥에서는 카지노 딜러였다고 했던가?

요즘 들어 곧잘 희우나 나를 붙잡고 다시 서비스업을 하는 것 같다며 푸념하곤 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이 저 사이에 끼는 게 어지간히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간의 서먹함이 완전히 녹아내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렇다고 희우나 미아가 아서와 데면데면했다는 것은 아니다.

아서는 생전 처음 보는 스타일의 희우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희우 역시 깐깐하고 꼬장꼬장해서 바깥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면 잘 따랐다.

미아는 말할 것도 없다.

아서 역시 처음에는 뭔가 경계하는 듯한 기색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냥 허허하며 웃어넘기는 분위기였다.

서브 리더인 희우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다들 상성이 잘 맞아서 다행이야.”

“그런가요?”

“다 같이 개성이 강하잖아. 저러면 마찰도 자주 빚어지는데 말이야.”

“음, 그래도 뭔가 저는 초회 차라 그런지 아직 외형대로 대하게 되는 느낌이랄까? 동방예의지국이잖아요.”

“너 나 처음 봤을 때, 뺨 때리려고 하지 않았어?”

“아이, 나이 차이 얼마 안 나 보이더라고요.”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반가워요!”

“음……. 좋아. 날 살려줬다면서?”

“내버려 두면 트롤도 죽을 것 같아서?”

“고마워. 넌 정말 진정한 전사로구나.”

“악수할까요?”

“천사는 손이 작네? 내 손가락이랑 악수할까?”

잠깐이나마 함께하게 될 [하드스록]의 멤버이자 [웨펀마스터] 보유자인 트롤, 카롤리는 그래도 희우와는 금방 친해졌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과는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

“크군…….”

“어……. 고마워.”

블랑쉐와는 저 상태다.

거인인 멜메르와는 더 했다.

“엄청 크군…….”

“…….”

가장 심각한 상태인 것이 블랑쉐라 예시를 들었지만 다른 이들도 대단한 차이는 없다.

뭐, 난생 처음 보는 이들과 끔찍한 곳을 주파해야 하면 어쩔 수 없지.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카베는 참가하지 않았다.

노거인은 분명 강하지만 노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위쪽도 지휘자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다른 그룹도 하나 더 도착해 더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와! 에리나 언니! 오랜만이에요!”

“오랜만……?”

일그림 파티의 무투가가 달라붙는 희우를 보며 피곤해했다.

저쪽도 한번 희우에게 개박살이 난적이 있었지.

일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저기, 우리가 여기 꼭 껴야 하나?”

“어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전사가 많은 게 가장 좋고.”

“이런 젠장. 난 별로 지옥에 가고 싶은 기분이 아닌데.”

일그림이 하루 온종일 투덜거리자 아서가 나섰다.

노기사의 근엄한 시선을 받은 일그림은 입을 딱 다물었다.

시작의 세 파티에 속한 자의 무게감이란 그런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그 정도의 권위는 없으니 이용하기 정말 좋군.

아서 역시 그런 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파티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좋아, 현재 시각 오전 6시. 점심은 지옥에서 먹는다!”

아젤리아가 모여 있는 면면을 보며 떨떠름하게 자신의 정령왕을 불러들였다.

얼굴이 창백한 것이 혹사에 혹사를 거듭하고 있는 모양이다.

카베의 대장간 아래에 막아둔 구멍이 다시 열리고 다들 낙하했다.

한참을 낙하한 끝에 붉게 뒤틀린 마력으로 가득한 곳이 우리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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