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04화
왕국 - Lv.5162 [지옥](4)
점심시간이 되었다.
전과는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
암습판정으로 무난하게 처리한 짐승형 악마 432개체.
적의 척후에게 인지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전투를 벌여 처리한 악마가 22개체.
이건 단 두 번의 전투로 물리친 숫자다.
제대로 된 전투가 일어나자 우리에게도 손실이 누적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나를 제외하면 지옥의 경험이 아무도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경영자고 뭐고 이런 지옥 같은 곳을 굳이 찾아 들어올 이유는 없다.
흥미 본위로 들어오기에는 너무 힘들고, 특별한 목적이 있다면 [메인 던전]으로 향할 테니까.
어느 회차를 가나 [지옥]이나 [외계]는 없는 취급이다.
얻을 것이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곳에 누가 모험을 하겠는가.
“정말 지옥에서 점심이네요.”
희우가 결계 속으로 들어오며 땀을 닦는다. 저항할 수 있는 것과 열기에 더위를 느끼는 것은 별개다.
휴식시간만큼은 시원하게 지내야 한다.
레바테인의 화염이 주변을 불사르며 열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결계 내의 온도는 일시적이지만 상온에 가깝다.
내가 굳이 이 마검의 속성을 차갑게 만져둔 이유다.
미궁에서 비상시에 열을 만들 방법은 많다.
반면 열을 식힐 방법은 생각 이상으로 제한되거나 비효율적인 경우가 흔하다.
아서는 투구를 벗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땀방울이 수염을 타고 흐른다.
에길과 제니 역시 잽싸게 갑옷판을 떼어내고 몸을 식혔다.
트롤의 재생력이 있기에 이번에는 갑옷 없이 활동 중인 카롤리와 본디 천사의 방어력을 믿는 날렵한 무도가 에리나는 그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다.
하지만 그쪽 두 명도 몹시 지쳐 보였다.
실제로 전과는 저쪽에서 다 나오기는 했다. 극심한 레벨 차이도 있어서 카롤리가 우세한 듯했으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천사라는 종족 자체가 이런 괴이한 환경에서 유리한 면이 있다.
마법 재해란 결국 마법 저항력으로 극복 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짧은 리치 대신 극단적으로 높은 공격력을 지닌 격투가이기에, 이런 단단한 외피의 생물들을 상대로 효율적인 부분도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리치가 짧을수록 무기의 암습에 추가 보정이 들어간다.
전문 암살자만큼은 아니더라도 격투가의 암습도 몹시 끔찍한 딜을 뽑아내는 편이다.
관제탑인 나로서는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경쟁이었다.
일단 결과는 무승부에 가깝다.
서로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딘가 불완전 연소된 불편한 기색이 있다.
카롤리야 그렇다 쳐도 에리나는 나름대로 블랑쉐과의……. 전혀 아닌가?
전제부터 틀려먹긴 했지만 어쨌건 겉으로는 블랑쉐과의 쿨뷰티로 보였으나 뜻밖의 열혈 격투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미궁에서 격투가 같은 거 하는 유배자 성격이 뻔하긴 하지. 보통 사람은 그런 거 안 한다.
“짜자잔!”
“뭐야? 도시락이야?”
“도시락입니다! 직접 만들었어요.”
이런 세상에나. 새벽부터 부산스럽더라니. 어디로 외출하나 했더니 엔젤에게 갔던 모양이군.
엔젤이라는 코드네임을 사용하던 히트맨 천사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다.
무한한 재력의 고블레타리아 연방을 등에 업은 레미는 그야말로 문어발 재벌처럼 온갖 분야에 손을 뻗었다.
의식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가뜩이나 하드스록은 가장 낙후된 땅이었으며 위치상으로도 척박한 북부다.
요식업.
레미가 눈독을 들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정말 중학생이 맞는 걸까?
어쨌건 엔젤 쉐프의 프랜차이즈 사업을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모양이다.
신정 공산주의 연방의 자금으로 그 누구보다 자본주의적인 행보를 걷고 있는 혼돈의 교단이여…….
“엔젤이랑 같이 만들었지?”
“앗, 들켰나. 혼자 만든 거라고 하면 먹을 거예요?”
“뭐, 독을 먹어도 죽진 않을 테니 상관은 없는데.”
“독 아니거든요! 그리고 저 원래 요리 잘해요!”
“정말?”
희우가 쓸쓸하게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맨날 학교엔 안 나오지. 한 번씩 뉴스에 피칠갑하고 나오지. 친구는 몇 명 없지. 그런 환경에선 혼자 노는 법을 배워야 한답니다…….”
“음, 좋아 알겠어. 맛있게 먹을게.”
그전에 다른 조리를 좀 하고.
에리나와 카롤리를 좀 더 놀려봐야겠다.
쓰러뜨린 짐승형 악마들 중에서는 먹을 수 있는 녀석들이 있다.
악마라고는 하지만 그게 명확한 하나의 종족은 아니다.
이 녀석들은 말하자면 이곳의 야생짐승인 셈이니까.
“으엑, 그거 먹을 수 있어요?”
“넌 이런 거 못 보지? 눈 가리고 저기 보고 있어.”
그사이 말라붙은 내장을 빼낸다. 그럼에도 흉측하다. 희우가 약한 종류의 끔찍함이다.
생체가 죽으면서 몸을 환경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던 마력도 빠져나갔다. 열기에 온전히 노출되어 이미 반쯤은 조리가 끝나있다.
게임 시절에도 이런 환경에선 고기가 절로 익었다. 열에 약한 재료는 제대로 보관하지 않으면 금방 상하거나 불타서 몸에 화상을 일으켰지.
그리고 식량 관리가 중요한 게임이었던 만큼 어딜 가나 먹을 수 있는 게 존재는 한다.
솔직히 별미라고도 못한다. 평범하게 맛은 없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적당히 익은 것을 가공하고 마력적 처리를 한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한 고깃덩어리가 빠르게 분리되어 간다.
미아가 마법적 처리에 관심을 보였고 전사들은 ‘저딴 걸 먹는다고?’ 하는 기색을 비춰준다.
“식량의 현지조달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다들 튜토리얼에선 이러고 살았잖아.”
짐을 줄일수록 유리해지는 건 맞다. 식량은 가능한 적게 들고 다니며 현지 조달.
던전 탐사의 기본이다.
카롤리가 좋은 생각이 난 것 같은 표정이 되더니 미끼를 물었다.
“흠, 진정한 전사라면 과연. 과연.”
저 녀석은 바보다. 처음부터 알아봤다.
그러자 에리나도 반응했다.
“험하게 살아온 세월은 나도 못지 않지.”
“크흠.”
에길도 헛기침을 하더니 다가왔다.
아서와 제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일그림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때아닌 시식회가 펼쳐진다.
나는 희우와 도시락을 까먹었다.
의외로 취향에 맞는 사람들도 있는 법인데 뜻밖에도 에리나의 표정이 좋았다.
“독특한 누린내로군.”
“큽.”
카롤리가 인상을 쓴다. 에길은 가만히 눈을 감더니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미아는 한 점 맛보더니 구석으로 가서 토하기 시작했다.
“제기라알. 천사의 미각은 다 돌아버린건가.”
“전 멀쩡하거든요!”
“흥.”
카롤리의 푸념.
희우의 항의.
에리나의 피식.
소풍 나온 것 같군그래.
레바테인을 뽑고 출발했다.
희우의 도시락은 솔직히 말해서 반은 엔젤이 만들었구나 싶다. 그래도 반대쪽 절반도 나쁘지는 않았다.
* * *
멜메르는 이 상황이 몹시도 별로였다.
[하드스록]에서도 고위종족인 거인씩이나 되는 그는 탱킹 담당이다.
비록 어깨에 태우고 있는 악마에게 패하긴 했으나, 심지어 사수인데 패하긴 했으나…….
그것은 방패를 함부로 내던진 실책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일단 거기서 더 부끄러운 생각은 멈추었다.
전사답지 못하며 남자답지 못하다. 패배는 인정해야 한다.
어쨌건 그는 지금 다른 이들이 앞에서 3000레벨에 달하는 강적들을 썰어 재끼는 동안 주변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다.
어깨에 사수와 마법사를 태우고 말이다.
치욕까진 아니더라도 아주 뜨뜻미지근한 기분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는 불에 강하기에 이런 환경에서도 더 잘 싸울 수 있는데.
불만을 말하기엔 아서가 너무 고분고분히 저쪽 리더의 말을 따르고 있으니 참을 수밖에.
속으로 투덜거리며 멜메르는 거인답게 거대한 고기 덩어리를 끄집어내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문득 푸성귀를 아작아작 씹고 있는 자그마한 잎사귀 요정이 눈에 들어왔다.
“다 시들었네…….”
하이랭커 된 입장에서 랭킹에도 없는 저런 전사는 까마득한 후배의 느낌이다.
하지만 어쨌건 그들을 이긴 파티의 일원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유난히 약해 보이긴 하다.
저 쌍검 전사의 역할은 대체 무엇일까? 이 파티에 저 요정이 필요한 구석이 있는가?
실제로 돌파 시에도 단지 아서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저쪽 리더의 옆에서 헉헉대며 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왜 이 파티에 있는 거지?
그 시선을 눈치 챈 제니가 고개를 든다.
“뭐요. 할 말 있으면 말로 해요. 대따시만 한 눈으로 쳐다보니까 모를 수가 없네.”
“음……. 그거 맛있나?”
“차원 주머니에 넣어뒀는데도 다 시들었어요. 여기 너무 빡세게 뜨거운 거 아니에요? 어휴.”
“그렇군.”
멜메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서에게 듣기로는 [하드스록]이란 것만으로도 굉장한 팬심 비슷한 걸 보였다고 했는데.
왜 자신에게는……?
그때 혈액팩을 쪽쪽 빨고 있던 마법사가 제니에게 다가왔다.
“제니! 제니! 풀뜯지마! 고양이는 육식 동물이야!”
“저 고양이 아니라니까요…….”
저 마법사가 유난히 제니를 아끼는 듯하다.
멜메르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반려 동물인가?
곧 다시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이 주변은 대충 다 훑어봤는데 뭐가 없는 것 같네요. 조금 더 중심부로 이동합니다. 이젠 진짜 위험해질 테니 더 조심스럽게 이동하죠.”
멜메르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악마와 흡혈귀를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자세를 숙이고 보조를 맞추러 오리걸음을 시작했다.
* * *
두 시간이 더 흐른 후, 다시 짧게 휴식시간을 가졌다.
레바테인을 꽂아두고 땀을 식히며 말했다.
“이건 곤란한데.”
지옥의 구조 역시 왕국마다, 그러니까 회차마다 랜덤으로 달라진다.
어느 정도 정해진 오브젝트들은 있으나 그것들 위치는 중구난방이다.
경향성을 따라서 주변을 탐색하다 보면 대강의 윤곽은 나온다.
로그라이크 랜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완전히 예측할 방도가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일정 범위 내로 설정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때그때 조합되어 나오는 것이니까.
그리고 외곽이라곤 하지만 여긴 놀라울 정도로 허허벌판이었다.
짐승들만 조금 더 있고, 안쪽을 더 들어가도 가끔 보이는 요새 같은 구조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끝없이 용암의 강, 호수, 바다와 함께 언제건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지옥석 덩어리들, 그걸 씹어 먹고 있는 짐승들만이 있다.
그 어떤 랜덤 인카운터적 요소도 나타나지 않는다.
블랑쉐가 묻는다.
“한 번씩 보인 요새는 어떻지? 거긴 아무것도 없나?”
“그건 그냥 필드에 대충 깔려 있는 것들이라 안에 괜히 강한 녀석들만 있고 얻을 건 적어.”
“그런가…….”
희우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지고 있다.
대충 눈치챈 것이다.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행운의 신에게 뒤틀린 애정이라도 받고 있는 것 같은 희우는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지금처럼 있기 힘들 정도로 일이 안 풀린다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문제없다.
“그럼 예정을 좀 바꾸어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아서가 우려를 표했다.
“지금도 계속 소모되고 있는데 괜찮은 것 맞나?”
“안 괜찮을 수도 있지만. 침공 방어가 더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아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추가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의사가 다른 이들에게도 있는지 확인해야겠네.”
“그러시죠.”
일그림과 에리나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들 역시 침공을 방어하고 싶은 입장이었다.
멜메르와 카롤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멀리 정찰을 나갔던 희우가 돌아왔다.
“좀 많이 커다란 게 하나 있던데요. 요새라기보다는 성?”
“빨간 색이었어?”
“네!”
“칠흑의 성이 아니라면 지옥의 왕이 사는 곳은 아니야. 일단 거길 떨어뜨려 보자.”
상황을 알려면 현지의 주민을 붙잡아서 심문하는 것이 최고다.
텅 비어 있는 외곽 벌판이 아니라 저 안쪽 중심부까지 들어가고 싶지는 않지만 우선은 뭔가 파악을 해야 한다.
붉은 성은 지옥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게임상에서는 소탕하면 주변 지역의 지도가 밝혀지는 식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현실에서는 알아서 그 정보를 수집해야 하지만 결국은 비슷하다.
비상시에는 지옥의 왕을 상대를……. 하긴 힘들다. 그게 된다면 여기가 동급의 난이도가 아니었겠지.
가능한 먹고 튀어야겠군.
지옥에 존재하는 일곱 왕좌에는 반드시 신좌 부품이 하나씩 존재하고 있다.
애초에 그건 실패한 신좌니까.
왕국 지하를 다스리는 악마들의 왕이란 건 신이 되지 못한 부산물이며, 권능을 온전히 가진 채 왕국 내에 존재하는 신 그 자체다.
「비상시에는 화신해 주지.」
“그럼 이길 만도 하긴 한데. 굳이 안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슬아슬 할 거라서.”
「하긴, 권능을 그대로 휘두르며 지상에 존재하는 신이면 강림한 것보다 더하겠군. 그래도 네가 막는 동안 다들 도주하면 되지 않겠나.」
“그럴 바에야 아예 저 혼자, 혹은 아서와 둘 정도만 잠입하는 것도 괜찮겠군요.”
일단 진지하게 지옥의 왕이 거주하는 성으로 들어갈 계획은 짜기 시작했다.
희우가 몹시 불안해하고 있기에 가서 볼때기를 조물딱조물딱해 준다.
희우는 곧 헤 하고 바보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