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06화 (30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06화

왕국 - 지옥과 지옥 사이(1)

전투,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격렬한 전투.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지만 그것은 어른들도 다르지 않다.

대개 추악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다.

반 이상의 의리로써 공투를 추구할 경우에는 어린 시절의 그 순수함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진다.

늘 해맑은 트롤 카롤리와는 마찬가지고 멜메르 또한 어느 정도는 전사에 과몰입한 유형이었다.

그는 바깥에서 소위 말하는 너드(Nerd)였다.

좋아하는 것은 공부, 취미는 게임.

몸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사람과 어울리는 게 귀찮은 종류.

뭐, 그렇다고 특출나게 학창 생활이 힘겨웠던 것은 아니다.

좋은 취급은 못 받더라도 이상한 취급 받을 정도로 지내지는 않았으니까.

애초에 바깥에서도 체격이 크고 힘이 좋았던 탓도 있다.

덩칫값 못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나 뭐 어쩌랴.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었을 뿐인 것을.

미궁에 입장한 것은 고교 졸업 파티 때였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게임은 좋다. 그가 해본 적 없는 게임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의 세계에는 이런 게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그라이크라는 개념은 익숙했고 전혀 모르는 게임이어도 적응할 자신은 있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힘겨운 생활을 했다.

당연하다.

미궁이 좋은 곳일 리가 없지 않나.

모험은 책이나 모니터 속 이야기일 때나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멜메르는 가면을 썼다.

그는 마침 타고난 체격이 좋았다. 미식축구를 하지 않겠냐고 권유도 여러 번 받았을 정도다.

코치가 아깝다고 했던 체격의 덕분에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미궁에 적응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도 이제 수십 년 전의 이야기다.

긴 세월이 흐르고 방구석이 좋던 소년은 그린스킨을 비롯한 여러 전사들을 보며 감명을 받았으며, 그 뒤를 이어 완연한 전사가 되었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멜메르는 바닥에 철푸덕 엎어져 있었다.

카베의 대장간은 견디기 힘든 열기로 가득한 곳이지만 저 아래의 지옥보다는 훨씬 낫다.

그다지 그가 바라던 종류의 모험은 아니었다.

하이랭커가 되기 위해서는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그는 이번 회차에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올라온 마당에 다시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치고 힘들다. 오늘은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이랭커가 된 이후 느낀 적 없는 공포였다.

더 올라갈 곳도 없는데 대체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가.

멜메르가 카베와 아서를 믿고 따르며, 동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랬다.

애초에 그는 침공 후의 리셋을 겪어보지 못했다.

[하드스록]은 카베를 제외하면 먼 옛날부터 이어져 온 그 파티가 아니다.

카베의 동료였을 초대 [하드스록]들은 이미 다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사니까 어쩔 수 없다.

제일 쉽게 죽고 많이 죽는 클래스다.

만신창이.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몰골이다.

카베가 새 갑옷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으나 진짜 그것을 바라는가 하면 잘 모르겠다.

멜메르는 계속해서 엎어져 있었다.

파티 동료인 카롤리가 다가온다.

“어이, 덩치! 오늘 신났지?”

“미친놈.”

“안 그랬어?”

트롤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너도 어차피 다음 회차 남아 있잖아. 그럼 이런 날도 있어야지.”

“음. 그래.”

“짜식. 한 번씩 그렇게 의기소침할 때도 있지. 그래도 오늘 너 아니었으면 정말 다 죽었을 거다. 다음에도 잘 부탁해!”

카롤리는 그렇게 제 할 말만 하고 멀어졌다.

저 트롤도 미국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틀림없이 바깥에선 학교에서 치어리더를 애인 삼아 끼고 다니는 부류였겠지.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세상에 산다는 괴리감은 있다.

그리고 멜메르는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쾅!

미궁에서 산 세월이 밖의 삶보다 훨씬 길었다.

그런데도 유배자는 이렇게 과거에 목매여 살게 된다.

미궁의 삶은 한 번이 아닌 탓일까?

쾅!

나이를 더 먹은 게 아닌 것 같다. 오늘은 너무 힘들었다. 덕분에 온갖 잡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쾅!

나는 하드스록.

그리고 [하드스록].

쾅!

그때 누군가 불평했다.

“땅 흔들려요오……. 하지 마.”

고양이 귀가 힘없이 축 늘어진 요정이었다.

멜메르는 고개를 들고 옆을 본다.

몸은 회복되었으나 영혼은 아직 고단하다고 한다면 딱 저런 몰골이리라.

요정답게 외모로 흠잡을 구석은 없고 건강에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눈이 죽어가고 있다.

오늘 멜메르보다 더 크고 많은 부상을 입은 유일한 인원이다.

“너는 괜찮은가?”

“안 괜찮아…….”

반말하는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감히 하이랭커에게! 같은 생각을 가진 놈들도 있지만 일단 멜메르는 아니다.

제니는 축 늘어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주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련하듯이 꿈틀거리고 있다.

하지만 아마 저 요정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저 아래로 내려가겠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무엇을 위해 저렇게 노력하는가?

그것을 물었다.

“이유? 몰라요……. 그냥 하는 거지.”

멜메르는 더더욱 궁금해졌다.

약간의 권위를 빌려보기로 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과 제약 플레이는 다른 것이다.

미궁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이용해야 하는 땅.

“그럼 같은 전사로서 묻지. 나는 [하드스록]의 멜메르다. 너는 어떻게 이런 고난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수할 수 있나?”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걸로 보여요?”

“그건 아니다만.”

멜메르는 엎어진 자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인 전사답게 당당한 태도로 드러누운 요정을 내려다본다.

제니가 조금 고민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처음에는 그냥 랭커나 되어보자 하고, 이런 파티에 낄 수 있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였는데…….”

멜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귀영화까지는 안 가더라도 모든 유배자는 결국 더 나은 삶을 위해 살아간다.

“되어보니 허무하더라고요. 아래에서 볼 때는 그렇게 대단하고 놀라워 보이는 게 랭커였는데. 무슨 의미인가. 어차피 나는 나인데.”

호오. 멜메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그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죽도록 노력하여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것이 이번 회차다.

그리고 그는 느꼈다.

레벨은, 강함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취감은 있었으나 그 끝에 또 다른 커다란 가치가 존재했냐면, 멜메르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 목표가 없었다.

단지 카베와 아서를 따르니 그들의 뜻대로 행할 뿐.

“저 원래 하드스록에서 하루 벌어먹고살던 짐승 사냥꾼이었거든요. 그때 파티는 이제 없어요.”

“죽었나?”

“그건 아닌데. 은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거요.”

“애석하군.”

파티가 오래가면 하나둘 은퇴하기 시작한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가 있다면 저렇게 될 것이다.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도 이제 없어요. 그럼 전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궁에서 혼자라구요. 이 파티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어요.”

“그러다가 죽으면? 똑같지 않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그럼 그때 가서 울겠죠. 그리워하면서. 하지만 그래도 그게 사람 사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가.”

멜메르는 그만 웃고 말았다.

반려동물인가 생각했던 것은 취소한다.

그것은 크나큰 모욕이었다.

삶이라는 전장에서, 제니는 훌륭한 전사였다. 그보다도 더 훌륭한 전사.

“사과하겠다. 너는 전사다.”

“네? 왜요?”

“그런 게 있다.”

멜메르는 제니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깊은 내적 친밀감이었다.

그리고 제니는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깨달았다.

“어? 잠깐만. 아까 그 사람이 뭐라 그랬지? 하드스록이 아니라 [하드스록]이라고 했나?”

대장간은 쉬기 좋은 곳이 아니다.

카베는 그 짧은 사이 방을 추가로 파고 마법사들을 통해 마법적 조치를 취했다.

대장간 옆의 임시 숙소 같은 개념이다.

지옥 탐사가 며칠 더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니는 포근한 침대에서 경악했다.

“그냥 고기 방패가 아니었네?!”

다음에 보면 깍듯하게 존대해야지.

화났으면 어쩌지?

제니는 침대를 깊이 파고들었다.

* * *

블랑쉐가 찾아왔기에 열심히 칭찬해 주었다.

대놓고 그걸 요구한 것은 아니다. 전술적 평가와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추가적인 의논이라는 명목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쿨뷰티는 어디다 내다 팔아먹었는지 어딘가 상기된 얼굴에 콧김을 푹푹 뿜을 것 같은 기세면 뻔하지.

블랑쉐가 만족할 때까지 이야기해 주었다.

‘오르골’과 동일시되고 있는 건가? 어쩌면 그쪽의 좋은 점만을 내게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이용해 먹는 것과는 다른 게 아닐까? 서로 좋은 일이잖아.

어쨌든 미아를 안아 들고 이동했다.

“어디로 가나요?”

“바르바로이한테 너 보여주려고.”

“네에?”

미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한다.

자랑스러움? 쑥스러움? 뭔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꺼려짐?

“괜찮아. 너보고 막 헌 아빠 통제하라고 그러진 않을 거니까.”

“그건 인간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잘 배웠구나.”

“상식 공부는 엄마와 함께 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면 희우 녀석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긴 해도 유교 탈레반 국가인 코리아에서도 유수의 명가에서 나고 자란 양갓집 규수다.

이렇게 말하니 참으로 고리타분해 보이는군.

하지만 은발 적안의 서양인 흡혈귀 어린이가 벌써 이렇게 탈레반화되는 건 어떤 일인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헌 아빠라는 표현도 문제가 있지 않니?”

“어? 그런가요? 엄마는 괜찮다고 했어요.”

좋아 그냥 내버려 두자.

“낄낄대며 웃긴 했는데…….”

“아니야. 그냥 신경 쓰지 마. 몸은 좀 괜찮고?”

“각오를 좀 바꿔야 할 것 같긴 해요. 계속 이런 식이면 누군가 죽을 것 같아요.”

“맞아. 아마 무슨 일이 있다곤 해도 그렇게 정면으로 치는 일은 자제해야지.”

그러기 위해서 찾아가는 바르바로이다.

그간 여러 시간대의 바르바로이를 찾아가고 끊임없이 이런저런 부탁을 해왔다.

지금은 어디 보자. 연방의 자금력이 가장 여유가 있던 시기로 가야겠군.

미아가 클랜 마스터이기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바르바로이와의 접선 시간대가 더 정밀해진다.

몇 번 시행착오 끝에 정확한 시간대로 도달했다.

* * *

국부 바르바로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며 추앙받고 있는 이 늙은 흡혈귀는 자신의 삶이 단단히 꼬여감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혹사당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클랜 마스터로서의 업이 깊기는 하나 어떻게 이주하여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으니까.

어떤 유배자를 만나고서부터 그의 삶은 극적으로 변했다.

고블린과 기묘한 연합은 나쁘지 않았다. 그 또한 삶의 터전이니까.

하지만 국정의 일부를 떠안게 될 줄이야.

수명이 길고 긴 흡혈귀다.

처음에는 마을의 원로로서, 세월이 더 흐르고는 지도자의 고문으로서, 우주선을 타고 공간을 넘나드는 지금은 전설 속의 영웅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지만 바르바로이는 의외로 이것이 자신의 체질임을 새로이 깨달았다.

그래, 의도한 적은 한 번도 없으나, 지금도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꾸준히 찾아오는 그의 골치 아픈 유배자 클랜 마스터의 패턴도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용의주도했고, 어느 시점의 연방에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마침 연방이 가장 부귀한 타이밍이다.

우주에 개척할 곳은 많았고 이제 막 우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여러 국가들은 빈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부는 끊임없이 창출되며 마르지 않는 샘처럼 보였다.

이것도 끝이 오리라는 것은 그의 클랜 마스터가 일러주었다.

국부 바르바로이는 묵묵히 그런 일을 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바로 지금 나타나겠지.”

“그 바로가 정답이다!”

“아, 예. 오랜만은 아니군요.”

어김없이 허공에 유배자가 나타난다.

바르바로이는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준비된 응접실로 향한다.

“이번에는 어쩐 일이신…….”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뭔가 이상하다.

왜 인간이지?

그럼 클랜 마스터는 누구지? 마스터의 존재감은 느껴진다.

바르바로이의 인식에서 미아는 아직 어리고 약한 흡혈귀였다.

이 시점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인식이 늦었다.

“어, 어어어.”

냉엄한 귀족적인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다. 그랬기에 미아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맡을 사람이 없어서 맡은 것뿐이니 헌 아빠는 평소대로 대해주세요.”

“어……. 그, 그래. 고맙구나.”

헌 아빠는 대체 뭐 하는 호칭인가.

바르바로이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 어차피 실질적으로는 저 양반이 클랜 마스터겠지.

하나 살면서 이따위 뱀파이어 클랜은 본 적도 없다.

그 안의 뱀파이어 근본주의자가 미쳐 날뛰고 있으나 참아내었다.

유배자가 얽히면 원래 일이 이따위로 돌아가는 법이다.

지난 시간동안 많이 느꼈으며 아마 앞으로도 많이 느낄 것이다.

“……그래서 어쩐 일이십니까? 금전적인 부분이라면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역시 우리 바르바로이가 최고야!”

“역시 그거군요.”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물어도 숨기는 마스터는 아니었다. 선선히 대답해 준 내용은 탐욕의 마왕에게 바칠 재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또 어디 다른 세계에서 바쁘신 모양이군요.”

“그럼.”

인간이 된 마스터는 떠나기 전에 돌아보았다.

“항상 고마워.”

“뭘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아니, 뭐. 미궁이 클리어 된 후에도…… 언제나 고마울 거야.”

대충은 들어서 안다.

그런 목적이 있어서 수많은 사고를 치고 다니는 남자다.

“무운을 빌지요.”

바르바로이는 그렇게만 말했다.

곧 리치 고블린 자매가 찾아왔다.

제 스승이 나타난 것을 감지한 덕분이다.

만나보지 못하여 아쉬워했으나 자주 있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 바쁜 사람이니까.

바르바로이는 마왕 아르바리온을 떠올렸다.

그나마 그와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먼 옛날이다.

유배자와 그의 시간은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이제는 그의 손을 떠난 미아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건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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