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07화
왕국 - Lv.5162 [지옥] 2일차(1)
첫날이라 각오가 되지 않아서 피해가 더 컸던 점도 있을 것이다.
하이랭커들이 대체 목숨을 내던지며 던전 공략에 임했던 게 언제겠는가?
특히 많이 다친 제니와 멜메르가 힘들어했기에 우리 의사양반을 좀 소개해 줬다.
“거인……? 자네는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의술의 신좌가 있었다면 앉았을 유배자요. 그리고 거인의 몸 구조는 인간과 똑같습니다. 그냥 좀 큰 거죠.”
“끄응…….”
일단 둘을 맡겨두고 신전에 다들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신경 쓴다.
준비는 레미가 꼼꼼하게 해주었다. 연방에서 제공한 재화를 정리하는 일까지 떠넘긴 후, 나도 내가 할 일을 한다.
우선 확인해야 할 사항.
파티원들, 혹은 파티 연합원들이 지옥 공략에 불만이 있는지 없는지를 꼭 확인해 봐야 한다.
카베와 나를 제외하면 지옥의 환경을 체험해 본 이는 없다.
카롤리와 멜메르 역시 하이랭커로서의 경력이 긴 것은 아니다.
그 하이랭커들조차도 리스크 대비 가성비가 시궁창이라 기피하는 곳이 번외 던전들이다.
지옥의 지옥 같은 환경을 하루 종일 뼈저리게 체감하고도 계속 함께할 의지가 있는가?
억지로 데려가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은 균열을 낳고 결국은 파국을 불러온다.
그래도 구슬려 볼 생각은 있다.
초고레벨 환경에서 이렇게 폭렙할 기회는 흔치 않다.
안전하고 느릿하게 레벨링을 하는 수도 있으나, 폭주하는 경험치 바는 분명 구미가 당기는 것이리라.
그래도 제니처럼 쉽게 넘어오진 않겠지?
이미 왕국의 꼭대기에 앉아 있으니 그 자리에 만족해 버릴 수도 있긴 하다.
다만, 파티 리더들을 존중하여 정말로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대화하지는 않기로 했다.
일그림은 죽어가는 눈으로 말했다.
“난 빠질 거야. 어차피 침공은 네놈이 막아준다는데 대체 왜 이 고생을 해야……. 악!”
“미안해. 이 녀석은 입으로는 늘 저러지만 시키면 잘하는 녀석이야.”
에리나가 건틀렛을 낀 주먹으로 일그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일그림은 그 자리에 엎어졌다.
“끄으으…….”
“……살아 있는 거 맞아?”
“그렇게 약하게 키우진 않았어.”
일그림이 일시적으로 퇴장한 상태에서 리더 대리 자리를 쟁취한 에리나가 말한다.
“모든 유배자가 더 강해지길 원하는 것은 아니지. 하이랭커쯤 되면 안 그러는 이들도 있지만 말이야.”
쾅!
아니, 책상 내려치지 마. 내가 레미한테 혼나…….
“나는 더 강해지고 싶다. 나아가 너와 더 친해져서 마인드맵에 대한 조언도 좀 받아보고 싶군.”
“아주 솔직한데? 그거 일그림도 동의한 사항 맞아?”
“우리 파티는 아는 게 제일 많으니 일그림이 리더를 하고 있을 뿐, 수평적이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수평적인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괜찮다. 아마 저놈은 속으로 엄청 갈등하고 있을 거야. 레벨링이 너무 달달할 거거든. 하지만 쓸데없이 신중하고, 또 파티 리더로서의 책임감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아, 그거 뭔지 알 것 같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감투라도 하나 쓰고 있다면 성실한 인간들은 시야가 좁아지는 경우도 있지.
“등을 떠밀어주기를 바라고 있을 거란 거지?”
“그래. 그게 파티에서의 내 역할이기도 하고.”
“오호, 알겠어. 믿도록 하지.”
쾅!
아이고, 부서진다니까. 그거 좀 하지 마.
“그리고 레베카를 불러도 괜찮겠지?”
“오고 싶어서 환장하고 있을 거 같긴 하네.”
“사랑스런 제자를 보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더군.”
학장은 [아케인]인 척을 아주 잘 하고 있다.
종종 레미를 통해 연락이 온다. 연구자에 더 가까웠던 다른 하이랭커들 몇몇도 침공 대비에 합류했다는 모양이다.
애초부터 일그림 파티는 생존을 위해 경영자들에게 대항할 생각으로 그룹을 만들고 있었다.
그 느슨한 레지스탕스 파티연합에는 아무래도 마법사 랭커들이 많았다.
똑똑한 이들은 어떻게든 제 살길을 찾는 법이다.
“마법사가 하나 더 있는 건 좋은 일이지. 마음대로 해.”
“들었지?”
그러자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마법사가 뛰어 들어왔다.
“짜잔! 레베카예요!”
그 품에는 떨떠름한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의 미아가 안겨 있다.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다보니 안겼다기보다는 휘둘린다는 느낌이지만.
“헤헹, 이미 제자는 확보했지만 그래도 학부모한테 보고는 해야지. 얼굴 비췄으니 난 간다! 재수탱이 없는 얼굴!”
레베카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보여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아를 안고 다시 사라졌다.
“미친……. 행동력 좀 이상하지 않아?”
“이게 일그림 파티다. 기억해 둬.”
“알았어…….”
에리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파티의 명칭을 담당하는 일그림을 아무렇게나 짊어졌다.
무슨 쌀포대 옮기듯이 대충 들고 가버린다.
뭐, 하이랭커 파티는 고사하고 랭커파티만 되어도 저런 경우는 많다.
레벨링이나 파밍을 위해 잠깐 모이고 흩어지는 비즈니스 파티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높은 곳으로 갈수록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친구이자 동료이며.
어쩌면 가족들이다.
일그림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뢰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생각나는 것은 물어보자.
“레베카는 불렀는데 맥은 안 불러?”
“연락두절이야.”
“그거 아주 안 좋은 소식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해서.”
“그것도 신뢰인가?”
“맥이 어디서 객사하는 건 상상할 수 없거든.”
그 능글맞은 친구라면 시티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무사할거란 믿음이다.
흠, 맥 하나 어찌하겠다고 맥의 친구인 베키까지 어떻게 하면서 들쑤시진 않겠지.
우리 악룡 선생님은 상당히 여유를 부리고 계기는 모양이니.
물론 그리 말하는 에리나의 얼굴에도 언뜻 수심이 스쳐 간다.
혹시나 하는 생각은 들 수밖에 없으니까.
생각을 조금 정리한 다음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이은 대화는 [하드스록] 멤버들이다. 그걸 위해서는 내가 밖으로 나가야 했다.
방에 들어오기에는 카롤리와 멜메르의 체구가 너무 크다.
병원 구석의 항공기 격납고 같은 곳에 멜메르가 누워서 시술을 받고 있었다.
“으으음.”
“침이라니, 완전 동양의 신비! 멜메르? 시원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군.”
무슨 시술이냐 하면 침술이다.
아니, 대체 그걸 어디서 배웠나 했는데, 농담 삼아 지껄인 의술의 신좌 이야기가 농담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체고 15미터가 넘는 거인의 몸에 꽂는 침이라.
“그것은 침이라기엔 너무나도 컸다…….”
“확실히, 침이라기보다는 기둥이군.”
지켜보던 아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거인용 장침은 레미가 어디서 구해왔다.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좋은 일이다.
내가 모든 것을 총괄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일이 잘 굴러간다.
직전 회차에서는 이게 안 되어서 말아먹었다.
나는 너무 모든 것을 내 손아귀에 틀어쥐고 놓지 않으려고 했고, 결국 그것은 누구도 믿지 못했다는 결과로 이어졌다.
오해조차도 아니었다.
난 실제로 누군가를 믿지 않았으니까.
뭐, 이러다가 레미가 나를 배신해서 모든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다.
하지만 원래 삶이란 것은 한번에 모든 것을 붙잡지는 못하는 법이다.
배제할 줄 아는 것은 게임에서도 인생에서도 중요하다.
누군가 날 배신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먼저 신뢰를 주어야 배신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저번 회차의 나는 배신을 당한 것조차 아니다.
“어이 친구들! 내일 지옥 나들이 또 갈 거지?”
카롤리가 쾌활하게 받는다.
“재밌어서 좋아. 오랜만에 피가 끓는다고. 좋은 워밍업이야.”
“워밍업?”
“시티즌과 한판 붙을 거 아냐. 침공도 있고!”
호전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그야말로 슈퍼 전사 트롤이로군.
반면 대비되게 어두침침한 성격으로 보이는 거인은 그저 신음했다.
“멜메르는 어떻게 생각해?”
“…….”
“의사는 존중하지.”
카롤리가 이렇게 재밌는 일에서 빠질거야? 하는 시선을 보낸다.
아서는 나름대로 설득하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쏘아대고 있다.
만약 이탈한다면 일그림과 멜메르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멜메르는 엎드린 자세에서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본다.
거구의 존재감에 가려 몰랐는데 제니도 엎어져서 비슷한 걸 당하고 있었다.
저게 고양이야? 고슴도치야?
노의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레벨이 적어도 1000은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몸놀림을 딱히 숨기려고 들지도 않는다.
멜메르는 물끄러미 제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대답했다.
“나도 간다.”
약간 불안해져서 되물었다.
“진짜로?”
“진짜로.”
제니가 무언가 심경의 변화를 주었던 모양인데. 나중에 물어보자.
* * *
“화난 건 아니었단 거지?”
“갑자기 손가락 악수 청하더라고요.”
“거인의 악수법인가.”
“왜인지는 몰라도 제가 마음에 든 것 같아요.”
“그래?”
천장을 한 번 보고, 제니를 다시 본다. 약간 불안한 표정.
“좋아, 잘했어. 왜 그렇게 된 건진 모르지만 원래 랭커질하려면 인맥보다 중한 게 없어.”
“휴, 다행이다.”
“그런데 고기방패라고 생각한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 그게 비하발언은 아니고 그냥 저랑 비슷한 처지가 아닌가…….”
제니가 시선을 살짝살짝 피한다.
“진짜 그게 다야?”
“……솔직히 말하면 제 역할이 사라진 것 같아서 별로였어요.”
입술을 삐죽이며 또다시 시선을 피한다. 부끄러운 건가?
“그래도 난전이 되고나서는 미아 옆으로 찾아갔잖아.”
“그렇긴 한데. 음, 저도 어깨에 태울 수 있을까요?”
“거인이 되고 싶어?”
거대 고양이?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닌데요…….”
“걱정하지 마. 언제나 미아를 맡길 테니까.”
“너무 신뢰하셔도 그건 좀…….”
“어쩌라고!”
내가 버럭하자 제니가 빠르게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따님을 언제나 지키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하, 다들 어디서 못된 거만 배워가지고.”
“헤헤.”
뭐 좋은 일이지. 쭈뼛거리지도 않고, 편안하게 나를 대하고 있다. 이거면 된 거다.
제니와 레베카가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넘어가자.
미아의 표정이 끊임없이 기묘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도움은 청하지 않고 둘 사이의 중간쯤 위치를 유지했다.
레베카와 제니는 한참 툴툴거리다가 결국 서로가 미아를 독점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다시 지옥으로 출발할 때쯤, 미아가 나를 보았다.
지친 눈이었다.
아빠, 세상은 원래 이런가요?
나도 눈으로 대답했다.
딸아, 어른이 되었구나.
네가 블랑쉐보다 낫단다.
그 블랑쉐는 에길과 새로운 전술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저 둘이 왜 죽이 잘 맞는지 모르겠다.
겉보기로는 둘 다 점잖게 노인정 장기라도 두듯이 말하고 있으나 내용은 살벌하기 짝이 없다.
“목을 이렇게 찌르는 것만으로는 쉽게 죽지 않았어.”
“과연, 그것보다는 날개를 뜯어버리는 게 더 유효한 공격 수단인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에리나도 합류했다.
“잘 안 으깨지던데.”
“타격은 이럴 때는 불리할 수도 있겠군.”
“그래도 연속 공격이 가능하니 괜찮은 것 같아. 만약 그 발자국들을 만든 괴수형 악마가 있다면…….”
“그건 확실히 타격을 먼저 넣는게 나을 수도 있겠군.”
“외피를 내가 어느 정도 깨뜨릴 수 있을 거야.”
내 옆에서 같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서가 웃었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이런 분위기요?”
“그렇다네.”
하이랭커나 랭커들에게는 더 이상 모험이라는 게 없다.
초심이라는 마음이 지금처럼 와닿을 때도 없을 것이다.
파티는 한 명도 빠짐없이, 오히려 레베카가 추가된 채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갔다.
* * *
미궁의 원본이 되는 게임의 재밌는 점은 로그라이크라는 틀 내에서 한없이 큰 스케일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게임은 전체적으로도 로그라이크지만 부분적으로도 로그라이크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면 몽환의 숲을 떠올리면 된다.
하나의 거점인 왕국, 그리고 그 왕국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던전들.
그 던전들 하나하나가 어느 정도 로그라이크 같은 느낌으로 기능한다.
게임 시절의 [지옥]도 그랬다.
플레이어가 도저히 후퇴하지 않고 이어서 진행할 수 없는 환경을 설계해 둔다.
그렇게 거점인 왕국으로의 복귀를 유도한다.
거점에서 정비한 후, 재진입을 하면 많은 것이 달라져있다.
“마력의 흐름이 이상한데요?”
“이건 아주 나쁜 것 같은데.”
“잠깐, 뭐야 여기? 왜 이래? 들은 거랑 다른데?”
차례대로 미아, 블랑쉐, 레베카의 반응이다.
내게 모이는 시선을 보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만 후딱 쉬고 오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얄짤없군.”
“설명을 해! 설명을 하라고!”
“지옥은 원래 외부 마력이 유입될 때마다 환경이 변해. 악마들에게는 영향이 적으나 다른 종족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형태로.”
그야 지하 깊은 곳에 밀폐되어 있는 독자적 생태계에 외부의 힘이 끼어든 것이다.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마력이 유입되면 환경파괴가 일어나고, 개판으로 이어지지.
여기서도 결국 유배자들은 침략자인 셈이니까.
“이번에는 어디 보자.”
마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술식이 정확하게 구현되지 않는다.
광역 [사일런스]나 다름없는 환경이다. 실제로 게임에서는 그렇게 구현되었다.
다만, 일반적인 원소 마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데스 레이]
어렵지 않게 구현된 보랏빛 죽음의 광선이 번뜩인다. 바닥에 깔끔하고 둥근 구멍이 뚫렸다.
“레베카? 지옥 속성 마법은 얼마나 구사할 수 있지?”
레베카가 입을 다물었다.
“저기요?”
“……순수 지옥 속성은 거의 못 다루고……. 원소 혼합 마법이라면 어떻게 할 수는 있는데.”
그럼 어쩔 수 없지.
“애제자한테 배우면 딱이겠군.”
“어? 으? 아, 악?”
이번에 전사를 가능한 많이 모집한 가장 큰 이유다.
마법의 종족인 악마가 사는 곳은 당연히 전사에게 불리해 보인다. 상대가 죄다 마법 구사자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도리어 전사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기도 한다.
기본적인 룰을 제시해 두고, 그걸 뒤틀어 유저에게 엿을 먹이는 함정이다.
원래 이런 건 미궁 도처에 널려 있다.
블랑쉐가 인상을 쓴다.
“이건 쉽지 않군. 마법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공간을 여는 건 어때?”
블랑쉐가 손가락을 튀긴다. 딱 소리와 함께 곧바로 공간 균열이 입을 벌렸다.
소매틱 한번 블랑쉐답군.
“그건 가능하다.”
“투명화 같은 보조 마법도 대체로 기능할 거야. 공격 마법이 대부분 먹통인 거지.”
이건 좋은 일이기도 하다.
원소 마법이 막히는 것은 악마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같이 좋은 날이 없겠군. 최대한 밀어버린다.”
“흠.”
아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나 혹시 쓸모없나?”
레베카만 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