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10화
왕국 - Lv.5162 [지옥] 2일차(4)
물리력이건 마력이건 그것이 정도 이상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터진다면, 결국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빛난다.
그렇다. 그것은 빛이다.
여러 가지 파괴적인 힘 그 자체가 지네의 머리통에 직격한다.
사방에 빛이 된 에너지가 쏟아져 나갔다.
굳건한 공간의 균형이 무너지며 일그러져 갔다.
어딘가의 공간이 강력한 힘에 의해 강제로 깨진다면 그것은 [심연]으로 통하는 입구가 된다.
미궁의 모든 세상이 무너져 퇴적되는 공간.
[심연]의 아가리가 순간 입을 벌린다.
그 사이로 무수한 괴물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 다음 순간 세상은 정상으로, 아니, 사실 지옥이 정상인가 하면 의문이겠으나.
어찌 되었건 돌아왔다.
터져 나간 빛이 밀도를 지니고 주변을 흐른다.
탐욕의 검은 번개가 그와 어우러져 기이하게 빛났다.
멜메르의 강속구에 맞은 거대한 재앙이 머리가 깨져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저런다고 죽을 괴물은 아니지만 물러서게 하는 데는 차고 넘쳤다.
거체가 바닥을 쓸어 지형을 바꾼다.
빠져나가기 위한 몸부림 한 번 한 번이 협곡을 만들고 산을 일으켜 세운다.
그 움직임으로 구름이 피어올랐다.
대지의 일부였던 것들이 솟구쳐 올라 하늘을 뒤덮어 구름이 된다.
비 따위는 내릴 수도 없고 내릴 리도 없는 땅.
당연히 수증기 따위도 없다.
있기 힘든 기상현상처럼 붉은 흙먼지로 이루어진 거대한 버섯구름이 재앙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다.
탐욕의 마왕도 번개를 거두었다.
저 재앙의 일각은 너무나도 강대하다.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을 내기에는 말이다.
지네가 불길한 검은 혈액을 흩뿌리며 멀어져간다.
그 흔적이 남은 곳은 지형이 깎여나가 대평야가 되어 있다.
공격에 참여한 전사들은 모두 저 높은 상공으로 튕겨 나갔다.
지닌 힘에 비해 유배자의 질량은 너무 가볍다.
희우가 날개를 가누며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고도가 높다.
하지만 우리 마법사들은 유능하다.
추락을 시작하는 우리를 미아와 블랑쉐가 함께 준비한 공간 균열로 회수한다.
땅이 한순간에 가까워졌다. 발을 디디고 비틀거리자니, 아연한 얼굴의 아서가 말한다.
“자네들 항상 이렇게 사나?”
“하하.”
“목숨이 몇 개여도 모자라겠군.”
“그러니 유배자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이 정도면 대부분의 하이 랭커들도 참으로 몸을 사리는 겁쟁이가 되겠군.”
“원래 겁쟁이는 끝까지 못 가는 법이죠.”
아서가 껄껄 웃었다.
“정말 무서운 말이군.”
스탬피드들이 흩어지고 있다.
거대한 힘의 충돌에 휘말리기 싫어 제각기 살길을 찾아 떠나고 있다.
재앙에게 쫓겨 방향조차 틀지 못하고 전력 질주하던 짐승들이다.
그사이에 패잔병처럼 되어 달리거나 날고 있던 악마들도 비틀비틀 착지하거나 칠흑의 성으로 향했다.
성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던 고위 악마들이 보인다.
개중에는 플레이어블이 아닌 것들도 있다.
짐승형이나 괴수형이라고 모두 지성 없는 괴물인 것은 아니다.
데몬, 데빌, 이블은 인간형이기에 플레이어블 종족으로 설정된 것일 뿐, 그들이 악마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는 아니다.
나는 탐욕이 이제 어떻게 나올지를 생각했다.
그럴 확률은 낮아 보이지만 우리마저 적대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가장 빠른 바람의 정령왕의 힘을 빌려 최선을 다해 달아날 것이다.
그 이후 다른 왕좌 주변을 잠입하여 찾아보겠지.
그 영역의 신과 적대관계가 된다면 그러는 편이 좋다.
부하를 보내 알현 같은 형식을 취할까? 아니면 직접 나타날까?
이건 얼마나 급하냐에 달렸다.
신좌는 속박에 그친다.
하지만 왕좌는 앉은 자의 본질마저 얽매어 온다.
그래서 탐욕의 왕좌에 앉은 악마는 탐욕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왕좌는 새로운 왕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탐욕의 마왕은 모든 세상의 부를 긁어모으고 자신의 것으로 해야 한다.
왕좌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저것들은 실패작이다.
제 의지를 가지고 권능을 손에 넣어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좌가 어찌 정상일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가진 왕좌는 자신에게 앉은 이를 속박하고 더 큰 공물을 요구하여 신좌로 거듭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부여되었을 권능을 외력으로 메꾸기 위해.
「잠깐만, 그거 혹시 내가 앉아 있는 이 녀석에게도 해당되는 건가?」
“신좌의 의지를 느껴본 적은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 뭐냐, 좀 더 수동적이고 AI 같은 그런 거 아니었나? 그렇게 적극적인 자아가 있는 녀석이었어? 의자 주제에?」
“아니, 뭐 생각하신 게 맞습니다. 지옥의 왕좌는 따지고 보면 폭주한 AI죠.”
아니, 뭐 그럼 자동으로 척척 알아서 맞춰주는 신좌 같이 편리한 기구에 그 정도 설정도 안 붙어 있겠는가.
레베카에게 가서 손을 내밀었다.
“뭐?!”
“아니, 잠깐 마법의 신님과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해서.”
“손?”
“그래.”
레베카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을 잡는 대신 검지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체 이게 뭐야.
「오, 나의 스승. 나의 행복. 나의 목표. 나의 희망. 제게는 어떤 볼일을?」
‘……우리 그렇게 오랜만에 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사이에 대체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당신의 발상은 정말 완벽하게 멋집니다. 마법을 보는 시선을 좀 달리할 기회였지요. 마법은 과학이 아닙니다. 그래 과학이 아니었지 뭡니까.」
대화를 들을 수 있는 레베카의 표정이 급격하게 침울해지고 있다. 이 마법사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마법 신의 헛소리를 좀 차단하자.
‘아, 일단 진정하시고 말입니다. 조금 있다가 허세를 부릴 일이 있는데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마왕을 상대로 신이 강림한다고 협박하는 겁니까?」
‘강림은 아니고 화신 정도만. 레베카씨는 아끼는 제자이자 대신관 아닙니까. 그 목숨도 살리는 셈 치고.’
「기꺼이요.」
서둘러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에 몸을 빼냈다. 레베카가 내 옆구리를 찌르던 검지를 거두고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놈이 마법의 신께서도 반할 만큼 위대한 마법사라니…….”
“슬슬 궁금해지는데, 대체 내 어디가 그렇게 싫은 거야?”
“잘생긴 놈! 싫어!”
“아니, 왜?”
“내가 꽃잎 요정이니까 알지.”
“아, 그거 알지. 무조건적인 호감도 어드밴티지라는 거 생각보다 기분 나쁘거든.”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싫어.”
이건 또 어렵군.
희우가 미심쩍은 눈으로 레베카를 보고 있다. 경계하는구나. 나는 희우를 보며 윙크를 해줬다.
그러자 희우가 헤실 웃어 보이며 끼어든다.
“어, 그럼 오빠! 신좌 부품이란 거 왕좌 입장에서는 소중한 거겠네요? 그거 가져간다는 거 되게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 그러니까 훔치는 거지.”
신좌 부품은 지옥의 엔딩과도 엮여 있는 핵심 아이템이다.
[메인 던전]과 동격인 번외 던전으로서 미궁의 핵심 줄기에 영향을 적게 주면서도 동격의 파밍을 하기 위한 공간.
게임 시절 유저들이 해석한 번외 던전들의 위치가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메인 던전]과 같은 격의 분기점과 멀티엔딩이 존재한다.
“그거 봐야 해요?”
“아니, 안 볼 거야. 다만 분기를 중간까지는 진행할 수도 있지.”
주기적으로 리셋 되는 진짜 [메인 던전]과 다르게 이런 번외 던전은 리셋 없이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여럿 존재한다. 따라서 번외 던전 쪽이 변수는 훨씬 더 크다.
가뜩이나 적정 스펙이 아닌 상황에서 들어와 있다. 이 이상으로 일을 벌이는 건 지양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왕좌로부터의 해방이야.”
“악마들은 왕좌의 마력에 매료되어 있는 거 아닌가요? 풀어줄 방법도 있나 봐요.”
“탐욕이 어찌 나오는지를 봐서 말이지.”
그리고 번개가 떨어졌다.
검은 번갯불 속에서 뒤틀린 형체를 가진 노년의 악마가 나타났다.
그가 서서히 걸어온다.
모두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 다른 악마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 상황까지 오더라도 여신님이 화신해 주신다면 탈출할 수는 있다.
심연의 성물은 그만큼 유용한 소모품이다.
탐욕의 마왕은 천천히 걸어왔다.
파티원들은 모두 저 마왕이 갑자기 공격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생각중일 것이다.
마왕이 입을 연다.
변조된 듯한 기이한 목소리.
“누가 리더지?”
“나요.”
제멋대로 틀어진 살덩이가 한쪽 눈을 막고 있다. 외눈의 마왕이 내 몸 위아래를 훑었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다.
적대의사는 없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미치광이일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광인의 행동에서 논리를 찾으면 안 된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다.
그럼에도 긴장은 노출되지 않도록, 근육 하나하나의 움직임에도 세심하게 조절한다.
표정 역시 의연하게, 거래를 제안하러 온 그런 모습으로.
자신이 절대적 우위에 있다고 믿고 있을 마왕마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연기한다.
마왕이 넘어갔는지는 모른다.
얼기설기 뿔 같은 각질이 돋아난 팔로, 수염 같지도 않은 어떤 촉수 같은 걸 쓰다듬으며 점잖은 태도로 말한다.
“지상의 유배자겠지? 이미 이 지옥이 어떤 곳인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더군.”
“알만큼은 알지요.”
“목적이 있어서 왔을 거라 생각한다만. 내가 누군지도 알지 않는가.”
“탐욕의 주인 아니십니까.”
“흠.”
떠보는 듯한 대화가 조금 더 이어졌다.
나는 확신했다. 급한 것이 없다면 저렇게 할 이유가 없다.
죽이고 약탈한다.
지옥의 악마에게는 그것이 기본이다.
호전적일 경우를 대비한 시나리오 다섯 가지를 폐기처분한다.
“말이 통하는군. 그렇다면 공물을 바쳐라. 그다음에 이야기를 들어 주지.”
오호라. 마음이 급하시군. 캐내고 더 뭔가 없으면 죽인다. 그런 생각조차 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몸의 상태로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다만, 괴물로 변해가고 있음에도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냉철했다.
틀림없이 오래되고 강인한 악마왕이리라.
상대가 미치광이일 경우를 대비한 세 가지 시나리오도 폐기처분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공물을 쏟아내었다. 고블레타리아 연방이 축적한 재물은 셀 수 없이 많다.
행성을 채굴하고 인공행성 실험이 자행되는 세계다.
쏟아지는 금은보화를 본 탐욕의 표정이 변했다.
“네놈. 수상하군. 지나치게 잘 알아. 이건 우연히 가지고 있을 수준의 재화가 아니다.”
“처음부터 당신께 바치러 왔습니다.”
“원하는 것이 뭐지?”
“신좌의 부품.”
번개가 번쩍인다. 우리 파티원 주변을 가두듯이 둘러선다. 그 거대한 지네를 잠시나마 가두어두고 일방적으로 두들기던 감옥이다.
아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이의 반응이다.
상대가 성격이 급해, 이 시점에서 전투가 개시되는 것을 대비한 두 가지 시나리오.
그것도 폐기처분한다.
“농담인가?”
“아니요. 일단 당신이 원하는 교환조건부터 들어보죠.”
노왕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진다.
위협하려는 의도가 확실히 느껴지는 낫게 깔린 목소리.
“난 이 자리에서 당장 너희들을 모두 죽일 수 있다.”
반쯤은 사실일 것이다.
아마 이대로 전투를 개시한다면 우리 모두가 무사하긴 힘들겠지.
그러나 마왕을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상대가 저렇게 나온 이상 우리도 최소한의 힘은 보여줘야 한다.
모든 거래가 그렇다. 최소한의 힘조차 증명하지 않는다면 약탈의 대상이지 거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아까 보여준 우리 전사들의 힘은 그다지 마왕의 시선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강력하지만, 그것이 전력이라면 이 마왕이 두려워할 힘이 아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우리의 힘만으로 무언가 할 생각은 없다.
“무슨 생각 드는지 압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신의 대전사와 대신관이 있음을 이해하셨으면 좋겠군요.”
혼돈의 신앙은 이제 넘치도록 쌓여 있다.
악신의 신앙을 쌓는 법은 대체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경험치를 쌓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틈틈이 해왔다.
무엇보다 대전사로서의 직위는 원래 교단에서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레베카가 그랬듯이 보랏빛 신성이 내 몸에 깃든다.
뒤편의 레베카도 지친 얼굴을 숨기고, 무력시위를 위하여 푸르스름한 신성을 몸에 두른다.
마법의 신 역시 내 편이기에 부릴 수 있는 강짜다.
「어어, 이 자식 지금 화신하려고 하는데? 말린다?」
‘아니, 이 양반이 왜 이래. 말려요. 말려.’
작은 해프닝이 아무도 모르게 지나간 후, 마왕이 입을 연다.
“협박이군.”
“신 둘의 화신을 상대할 자신 있으십니까?”
“좋은 생각이 아니지. 적어도 확실하게 너희를 놓치겠군.”
“그럼 저는 탐욕의 영역 근처는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겁니다. 공물이 필요하시겠지요?”
탐욕의 마왕은 고민했다. 이제는 숨기려고 들지 않는다. 그는 절박한 상태다. 괴물이 되지 않고 이 왕좌에 더 오래 앉아 있고 싶어 할 것이다.
“신좌 부품을 떼어갈 방법이 있기는 한가? 그건 왕좌 그 자체인데.”
“그리고 왕좌가 그 이후에도 기능할지 알고 싶으신 거군요?”
“유배자란 가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군.”
답부터 말하자면 왕좌는 그 기능을 잃는다. 신좌 부품은 왕좌의 핵심이다.
여기서부터는 탐욕도 알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믿기 어려운 말일 것이며. 동시에 수작이라고 여길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끔찍한 괴물로 전락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상태도 회복됩니다.”
“증거는?”
“없습니다. 결과로 보여드릴 수밖에.”
“흠.”
이 시점에서 파토가 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한 시나리오 세 가지를 다시 폐기처분한다.
탐욕은 도리어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마왕이 아니겠군.”
예상하고 있던 질문.
“다른 마왕이 되면 됩니다. 탐욕의 왕좌는 영영 사라지겠지만, 당신이 새로이 차지할 왕좌가 6개나 더 있으니까요.”
이제 슬슬 누가 들어도 너무 허황된 소리일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불상사를 대비한다. 역정을 내며 전투가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여신님도 살짝 긴장을 끌어올리는 것이 왠지 모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악마왕은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택도 없는 소리를 들었을 것임에도 수염을 쓰다듬으려던 손 그대로 턱을 짚은 채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 그냥 고민만 하고 있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상정하지 못한 반응이다.
여기까지 순순히 따르는 마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해봤다.
저자는 탐욕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 아닌가? 그럼 더 욕심을 부려야 할텐데.
모든 시나리오를 폐기처분한다.
내가 준비한 모든 경우의 수에서 지금 시점에서는 서로 손을 잡는 경우는 없었다.
좌의 마왕이 그런 경우는 없다시피 하다.
그러니 일단 한번 파토 난 후에, 데면데면한 상태에서 다시 구슬릴 생각이었다.
좀 더 호구처럼 굴면서 말이다.
막대한 공물은 그러기 위한 최소한의 호감도작이었는데.
어쨌든 지금부터는 임기응변이다. 물론 내 표정이나 몸짓에서는 손톱만큼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마왕은 미소 지었다. 뒤틀린 얼굴에서 나오는 미소는 웃음에서 자연스레 따라 나올 긍정적인 느낌 대신 불길함을 부추긴다.
“듣겠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제기랄, 적당히 속여 넘기긴 힘들겠군.
몇 가지의 진실을 보여주어 신뢰를 얻은 후, 자연스럽게 속여서 삥땅치는 게 목적이었는데.
마왕이 내 상상의 범주를 벗어날 정도로 멀쩡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왕의 좌에 앉아 있으면 정신이 흐릴 만도 한데.
빠르게 계산을 한다.
여신님을 불러오고, 그 힘을 이용하여 다른 마왕의 왕좌를 찬탈할 수 있을까?
추가적인 몇 가지 가능성, 조력할 것이 분명한 이 마왕의 전력을 계산에 넣고, 여신님까지 고려한다면.
답은 ‘있다.’다.
생각은 길고 복잡했으나 실제로 흐른 시간은 찰나였다.
따라서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었다.
“가능합니다. 내가 당신을 도울 테니.”
탐욕의 얼굴에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격렬한 감정이 떠올랐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 그리고 폭소.
“크핫. 크하하하. 이용해 먹을 놈이 왔다 했더니, 미친놈이었군.”
“악마들은 이런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서로 주고받는 비즈니스.”
“어처구니가 없군. 어떻게 돕는다는 거지? 신좌 부품은 어디에 쓸 생각인가?”
“그것으로 신을 불러내고, 신이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이건 임기응변이다.
여신님이 당황한다.
「내가?」
‘몸풀기라고 생각하시죠.’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지옥에서 무슨 몸을 풀어?」
마왕은 웃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어딘가 아련해졌다.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어딘가 먼 과거를 보는 듯하다.
마왕이 다시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불길하지 않다. 오히려 무언가 그리워하듯이.
“혼돈이시여. 과연…….”
의외의 반응이었다.
마치 신도가 제 신을 부르는 듯한 반응.
“제가 모시는 신을 아십니까?”
“나는 이 지옥에 도달하기 전에 혼돈의 권속이었다…….”
어…….
한순간 뇌가 정지했다.
물론 얼굴은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한다.
손가락이 살짝 떨리는 선에서 몸의 반응을 통제해 냈다.
침을 삼키려는 행위, 입술을 핥는 행위, 모두 막아내었다.
그리고 여신님께 묻는다.
‘진짜요?’
「……그야, 몇 번인가 새로 생성되는 서버에 종족신으로 나를 모시는 작은 악마 팩션이 같이 생성되긴 했다만.」
그 어느 때보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자연의 신과 전쟁의 신은 반드시 요정과 그린스킨의 종족신이다.
그건 서버가 생성되는 순간 결정되는 일이다.
저 두 신좌의 경우엔 100%다. 그래서 안정적이고 범용성 높은 신좌로 여겨진다.
혼돈의 신좌도 그런 경우가 있다. 다만 100%가 아니다.
게임 시절에는 0.175%의 확률이었다.
한 번의 플레이에서 볼 수 있는 서버는 작정해도 저 확률의 기댓값을 만족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미궁은 현실이고, 여신님은 셀 수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신좌에 앉아 있었다.
오히려 일어난 적이 없는 편이 더 이상하다.
그리고 그때 그 서버에서 혼돈의 신도로서 태어난 악마가…….
왕국으로 흘러들어오고…….
지옥으로 흘러가…….
탐욕의 마왕이 되었다.
이건 이미 확률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영역이다.
수만, 수십만 번의 플레이 중, 한 번이 겨우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의 기적이다.
이번에는 참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희우를 보게 된다.
희우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이거 저 때문일까요?”
마왕이 나를 아직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대답했다.
“그런 것 같다.”
이런 상황은 행운의 성물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만들 수 없다.
그건 사실 튜토리얼에서의 그 무수한 불운 역시 그랬다.
불운만큼의 행운.
그래, 그것이 미궁의 기본 법칙인 삼대신격이다.
그중 하나인 행운의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