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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314화 (31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14화

왕국 - Lv.5744 [지옥] 4일 차

사람은 절박할 때, 더욱 강한 힘을 낸다.

평소에도 성실한 사람은 많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면 더 굉장한 것을 보여주는 법이다.

그리고 미궁은 모험을 진행한다면 매일같이 사람의 한계를 짜내는 곳이다.

나는 거기서 더 짜내는 법을 안다.

절박함에 더해 당근을 던져주는 것이다.

뒤편에는 절망이, 앞쪽에는 희망이 기다린다.

그런 상황에 놓인 이는 그야말로 한계를 초월한 힘을 낼 수 있다.

물론, 자주 쓰면 안 될 수단이긴 하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루시, 여기 빠르게 작살 내고 올라가면 엔젤이 요리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뭣이?!”

“트동트 영감님도 지금 아케인에서 돌아오고 있으십니다. 성직자의 나라에 머물고 있던 헨리 대신관도 돌아오고 있고요.”

“오오…….”

“신께서 친히 돌아오셨는데 어찌 한번 뵙지 않으려 할까요?”

“세상이 너무 따뜻하구나.”

루시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나에게 흥미를 가진 후에 죽음이라는 소망을 거두었다.

홀로 신좌의 어둠 속에서 셀 수도 없이 긴 세월을 보냈다.

다른 신들보다도 더 질이 나쁜 어둠이었다.

스스로 신도들을 떨쳐내고 죽기 위해 망각 사이로 몸을 던졌으니까.

그러니 사람의 따뜻함이 무엇보다 그리우리라.

강림하고 싶은 생각도 많았을 게 분명하다.

신앙이 어느 정도 확보된 후에는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참았다.

파티를 위해서다.

아마 그 시점에서 우리 파티는 루시의 목표, 소망, 그리고 꿈이 되어 있었다.

이 파티를 후원하고 이 파티만을 위한 신으로서 존재하자.

그렇게 하여 그 끝을 보자.

아마도 실패하는 것을 본다면 다시 죽음을 향하여 몸을 던지지 않았겠는가.

이미 삶에 미련은 없다. 신좌를 벗어날 방법은 알지 못한다. 도전자는 멈춘 지 오래다.

결국 유일한 희망이라고 해봐야 우리 파티의 성공일 뿐이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을게 분명하다.

하지만 뜻밖에 이루어졌다.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해방되어 미궁의 바깥은 아니지만 신좌의 바깥으로 돌아와 함께할 수 있다.

신이라는 강대한 유배자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은 보통 이런 때다.

자신이 죄수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죽지도 못하여 언제까지고 어두운 방의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

상상치도 못한 순간 그 감옥에서 해방된다.

찾아오는 더없는 기쁨.

그리고 그렇게 기쁨에 절여져 있을 때, 내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이다.

이것은 잠깐의 탈옥일 뿐이라고.

하지만, 이어질 수 있다고.

나에게는 그 수단이 있음을 속삭이고.

남은 시간 동안 즐길 수 있는 행복을 넌지시 제시한다.

그리하여, 최강의 전사로서 이름 높은 혼돈의 여신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 넘치는 파괴신으로서 이 지옥에 현신하는 것이다.

“쿨다운이 얼마라고 했지?”

“한 달여 정도 됩니다. 다시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번 일주일 이내에 그 악룡까지 처죽이면 되나?”

“바로 그겁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남은 시간은 자유니까요.”

“내가 또 혼돈과 자유의 여신 아니겠느냐! 하하하!”

물론 말은 저렇게 하지만 내가 정말로 이 소중한 여신님을 도구로서 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희우 덕에 졸업했다.

“한번 안아봐도 될까요?”

“엉? 아니 왜?”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요. 대전사로서 표하는 공경이라고 해둘까요?”

“아니다! 좋다!”

희우와는 다른 감촉, 미아와도 다른 느낌.

우리의 작은 여신님, 루시는 행복하게 웃었다.

* * *

물론 그건 그거고 일은 일이다.

질투의 마왕을 문자 그대로 으깨 버린 후, 정확히 유니크 액티브의 쿨다운만을 기다렸다.

악마들은 평균적으로 대단한 충성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탐욕의 부하들도 이제 제각기 미쳐 날뛰는 녀석들이 많다.

다른 마왕의 부하들도 권능의 힘으로, 승리하리라는 믿음으로 붙어 있을 뿐이다.

질투의 마왕이 쓰러짐을 루시가 널리 알리는 순간 모든 악마들의 전의는 끊어졌다.

참수 작전도 이따위 참수 작전이 없다.

하지만 유효하다.

신이란 그런 존재다. 규격 외의 무언가.

그리고 루시는 그런 신들 사이에서도 경외받는, 다시 한번 규격을 벗어난 유배자다.

이렇게까지 강력한 신은 내 모든 회차를 통틀어보아도 드물다.

전쟁의 신 에길도 루시만큼이나 강하지는 않았다.

로그라이크는 간혹 기적을 빚어낸다.

행운이 편애하는 것 같은 부조리함 속에서 충분한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다면 탄생하는 괴물.

루시는 그런 존재다.

나는 그래서 혼돈의 여신이라는 신이 얼마나 강한지 그 편린을 느낀 순간부터 이번 회차에 긍정적이었다.

이 신은 틀림없이 시간의 신앙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색욕의 군대는 대체로 여성형 악마인 경향이 많아.”

“어…… 서큐버스요?”

“그건 여성 이블이잖아. 이블들은 지옥에 잘 없어서 그렇진 않아. 하지만 얼마 없는 이블들은 죄다 색욕의 군대에 있지.”

시선이 블랑쉐에게 모인다.

블랑쉐가 자신만만하게 이블의 특징인 분홍빛 피부와 뿔을 드러냈다.

“잠입할 시간인가?”

“바로 그거지.”

최소한도로 루시와 나, 그리고 아서 정도만이 들어간다면 권능을 휘두르는 마왕을 상대할 수 있다.

나머지는 마왕과 독대하는 상황을 만들며 잠깐만 버티면 된다.

레베카는 항상 우리 뒤에서 마법으로 지원한다.

마법의 신은 기꺼한 한두 번의 화신을 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 이번만큼은 받아들인다.

우리 유능한 첩보원이 길을 뚫는다.

유배자조차 찾아오지 않는 이곳에서 여성형 이블은 그 자체로 어떤 소속의 증명이나 다름없다.

블랑쉐는 능숙하게 입을 다물고 표정만으로 상황을 시사했다.

비록 그 태도가 서큐버스다웠다고는 못하겠으나, 입담 대신 무난하게 넘기는 기술만큼은 확실하다고 하자.

사소한 해프닝 몇 번은 무력으로 제압하고, 왕좌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약 15분 가량의 전투 끝에 색욕의 마왕은 패배했다.

“이번에는 소모가 좀 있었군요. 길게 쉬지는 말고 올라가서 포션 채우고 돌아옵니다.”

카베의 대장간을 거쳐 하드스록에 있는 회복의 샘까지 최대한 빠르게 이동한다.

루시는 들어서자마자 감격했다.

“병……. 내 병이 있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몸이 기억하는 법이다. 아주 능숙하게 샘물을 병에 밀봉하여 담은 후, 햇빛에 비춰본다.

반짝반짝하는 반사광을 보며 또 실없이 웃는다.

지상을 보고 온 루시의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도리어 다른 파티원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정확하게 내 의도였기에 그대로 두었다.

비교적 약체라지만 유사 신좌에 앉아 있는 마왕이었다.

그걸 거의 산채로 회치는 압도적인 힘 앞에 전사들은 조용히 루시를 따랐다.

멜메르조차 불평을 말하지 못했다.

전사는 이게 좋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다면 말을 참 잘 듣는다.

그날 우리는 나태까지 조졌다.

* * *

4일 차가 밝았다.

다시 한번 환경이 변했다.

전사에게 유리한 시기에 마법사형 마왕 둘을 제거했다.

다음 환경의 변화는 높은 확률로 전사에게 불리하다.

“하지만 똑같이 불리하다면 더 약한 놈들이 더 크게 불리해지죠.”

“오호, 그건 옳은 말이로다.”

마력이 무거워졌다. 전체적인 행동이 느려지고 움직임에 제약이 걸린다.

게임 시절에는 행동 속도에 디버프가 들어오는 식으로 구현되던 환경이다.

마법사 역시 같은 페널티를 받겠지만 캐스팅 속도와 투사체는 그런 페널티를 받지 않는다.

다른 곳이 어떻게 초토화되었는지는 아직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허를 찌르는 작전은 유효하다.

언제나 적의 상식을 초월하라. 그러면 승리할지니.

“그나저나 모든 특성을 다 꿰고 있군. 그것도 게임 시절부터 알고 있던 건가?”

“지옥은 가끔 공략하긴 해야 했어요. 메인 던전이 엄청 꼬여 있으면 여기가 더 쉽기도 해서요.”

보통은 신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서다.

침공의 방어를 하건 메인 던전 공략을 하건 말이다.

몇 명을 암살하고 모습을 바꾼 블랑쉐가 최소한의 정보를 얻는다.

마왕들은 다양한 템플릿을 가진다. 이 역시 일정한 테이블 내에서 랜덤으로 결정되는 요소다.

그렇게 파악된 사실.

인색의 마왕은 훌륭한 검사였다.

마법의 종족인 악마 중에서도 마법사 그 자체인 데몬으로 태어난 그는 그럼에도 검을 추구했다.

오로지 몸에 익힌 기술만으로 마왕의 좌에 도달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루시도 감탄했다. 데몬은 검을 들기에는 종족 자체의 높은 스탯 외에 전혀 이득이 없다.

“세상에. 데몬으로?”

“데빌인 루시보다 더하군요.”

“그러게 말이다.”

인색의 마왕은 왕좌의 의지에 따라 부하들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인물은 아니었다.

냉철하고 까다로운 인상의 노인은 말 그대로 인색해 보였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제 손으로 해결하는 일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루시가 단독으로 진영을 개박살 내자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보기 드문 무인이로군. 어디서 나타난 악마냐?”

루시가 이 지옥에 흔해 빠진 데빌이라는 점은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대부분이 유배자라기보다는 어디선가 힘을 기르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나타난 악마라 여긴다.

이 또한 맹점이다.

“소문은 많이 들었다! 도전하러 왔다!”

인색의 마왕은 기꺼이 결투를 받아주었다.

약 30분에 걸친 혈투 끝에 그는 패했다.

그러나 저런 타입은 2페이즈가 있다. 순순히 승복한다면 마왕이 아니지.

권능을 사용하기 직전 마법의 신이 화신했다.

레베카의 모습으로 권능 그 자체를 억제하고 루시가 그의 심장에 창을 박아 넣었다.

이미 화신이 등장했다.

이제 남은 것은 분노와 오만인데 그 둘도 상황을 깨달았으리라.

그럼 조금 더 과격하게 하면 된다.

* * *

5일 차.

분노는 훌륭한 마검사였다. 인색처럼 제약 플레이를 하는 변태도 아니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자였다.

시작부터 마법의 신이 화신했다. 레베카의 안색이 조금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와 루시와 희우, 그리고 아서까지 모두가 나서서 합공했다.

마법전은 마법의 신이 전담한다. 미아가 조금 아쉬워했으나 반대쪽 역할도 중요했다.

공략에는 차고도 넘치는 멤버다. 다만, 대면할 상황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

분노와 오만은 부하들의 결속이 강한 편에 속한다.

충성스러운 다른 악마들이 많을 것이다. 독대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숫자의 폭력에 노출된다면 우리 파티가 감당할 수 없다.

그렇기에 처음의 그 협곡으로 돌아간다.

“찾았다. 그때 그 협곡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군요.”

“저기에 웅크린 지 오래 되었다. 목적은 모르겠지만. 그런데 설마…….”

“그 설마입니다.

탐욕의 마왕이었던 악마, 벨제뷔트는 몹시 어이없어했다.

“나는 이제 저걸 막을 수 없는데.”

“위험하면 탈출하십쇼. 그쪽 지휘는 맡기죠.”

심연의 성물은 아직 재고가 있다. 그리고 미아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성물은 아티팩트의 형태이기에 수명이 아직 더 길다.

그리고 실피드를 보여주었다.

“정령왕……. 과연 그랬기에 처음부터 저 재앙을 이끌고 내 영지에 나타났었군.”

“도망칠 자신은 있었거든요.”

우리도 쓸 수 있는 수단은 뭐든지 사용한다.

[더 시티즌]이 메인 던전을 감시하고 있을지언정 [지옥]을 들여다보고 있을 리가 없다.

비상시에는 정령왕까지 타고 다니며 풀링한 끝에, 분노의 영지를 화난 지네가 초토화시키고 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물론이지!”

이번에는 좀 오래 걸렸다. 분노는 권능까지 적극 활용하며 그야말로 반신다운 위용을 보여주었다.

분노의 성이 초토화되고 왕좌만이 달랑 남을 때쯤에서야 전투가 끝났다.

루시도 이번에는 꽤나 지쳤다.

“으으으, 내려온 다음에 하루 종일 전투만 하고 있지 않나! 이거 말고 뭐 없느냐!”

사실이 아닌 모양이다. 슬슬 답답함에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하는군.

“올라가서 좀 쉴까요? 환영 파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 대전사여!”

뭐, 어차피 오만을 마지막에 남겨둔 이유가 있다.

오만의 왕좌에 앉은 자는 오만해야 한다.

그건 긍정적으로 본다면 자신감이기도 하다.

자, 지금 상황에서도 오만의 마왕이 오만할 수 있을까?

이틀 만에 자신을 뺀 모든 왕좌가 사라졌다.

그게 스스로 한 일이라면 마침내 지옥을 정복했노라 하고 자찬하겠으나 전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무언가가 나타나 헤집고 다닌다는 사실은 알겠지.

하지만 말이야, 그게 무엇인지 실체조차 불분명하다면?

악마도 공포에 질릴 줄 안다.

지금 틀림없이 귀신에 홀린 기분일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오만하지 못한다면 왕좌는 그에게 힘을 부여하고 싶지 않아 할 것이다.

[지옥]이 원래 이렇게 쉽게 풀리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대응하기 좋은 상황이 너무 잘 나왔다.

사실 탐욕의 마왕이 이쪽 편을 들었던 것부터가 있기 힘든 일이었으니 말이다.

* * *

오만의 마왕은 당황했다.

더 이상 이곳에 신좌 부품은 남아 있지 않다. 함께 영역을 나누던 다른 어떤 마왕도 남아 있지 않다.

한때의 적이었으나 결국은 왕좌를 노리기 위해 다른 마왕 아래에 숨죽이고 있던 무수한 악마들이 투항해 왔다.

“창을 든 데빌이 있었습니다!”

“탐욕의 번개를 사용하는 데몬이 있었습니다!”

“천사와 인간 전사들이었습니다!”

“정령왕이 오만의 재앙을 도발하며 날아다니는 일도 있었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일치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기묘했다.

“잠깐만. 그럼 정리하면 많아 봐야 스물은 넘지 않는 조그만 유배자 무리인 것 아닌가?”

“기적의 샘물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폐하, 실제로 일어난 일에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만은 애써 호탕하게 웃으려고 했다.

“좋아, 다 죽었으면 나만이 이 지옥의 유일한 왕이자 신이군.”

대답은 없었다.

오만은 좌중을 둘러보며 오만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애써 웃고 있지만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왕좌가 그의 심경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 느껴진다.

왕답지 않은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있다. 이건 아주 나쁜 일이다.

하지만…….

오만의 마왕은 도저히 왕의 덕목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가 앉은 것이 겁쟁이의 왕좌였다면, 그는 지금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할 것이다.

지금 앉아 있는 왕좌가 왕의 자리가 아닌 단두대의 아래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무지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세상 전체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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