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18화
왕국 - 여신님 휴가 복귀 4일 전(2)
“이예이! 천사 허리케인!”
“깃털 회오리!”
희우가 마구 소용돌이치며 곡예비행을 하고 있다. 에리나도 그 옆에서 깃털을 뿌리며 장단을 맞추는 중이다.
어쩐지 엔젤도 나란히 비행 중. 대체 뭘까.
멜메르는 술이 들어가면 말문이 트이는 타입이었나 보다. 카롤리와 쉴 새 없이 참된 전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헛소리를 나누고 있다.
혼란의 도가니에서 멀쩡해 보이는 제니를 발견했다.
“저거 누가 부추겨서 저러는 거야? 스스로 저래?”
“……아서님을 뺀 전사들이 흥을 잘 돋우더라고요. 아서님도 말리진 않으셨고.”
“어휴, 이제 성인이니까 마시지 말라고 할 명분도 없고.”
확실히 전사들은 이런 쪽으로도 중간이 없는 이들이긴 하다.
달리면 갈 데까지 가는 것이지.
“제니는 별로 안 마셨나 봐?”
“아, 저는 술이 엄청 세서.”
“오…….”
“딜러만 했던 건 아니고 바텐더도 했었거든요. 어지간해서는 안 취해요. 지금 레벨이 몇인데.”
너보다 레벨이 높은 양반들이 지금 헤롱거리고 있는데 말이야.
뭐 미궁의 보정은 대부분 원래의 육체 스펙에 맞춰서 퍼센티지로 증폭되는 식이다. 그런 고로 바깥에서 말술이면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취한 거야?”
“죄다 루시님이 자연의 신님한테 삥 뜯어온 술인가 봐요.”
“……그럼 저게 다 요정의 꿀술?”
나도 마셔야겠군. 엄청 맛있는데. 아니, 그보다 어디서 이렇게 트럭으로 싣고 온 것 같은 양의 꿀술들을…….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다.
이 술은 맛도 맛이지만 종족과 레벨에 무관하게 공평한 취기를 돌린다는 점에서 귀하다.
아니, 그럼 이걸 버티는 제니는…….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니. 그냥 굉장해서? 혹시 러시아계 미국인이라거나?”
“와, 어떻게 알았어요? 이게 리더의 품격인가…….”
정말로 놀란 것 같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미아는 스파클링 혈액을 쪽쪽 빨며 천사들의 비행을 보고 있었다.
눈이 반짝반짝하는 것이 놀이공원에 처음 온 어린이 같다.
정서 교육에 나쁠 거 같은 술자리지만 내버려 두자.
거하게 취한 아서와 에길이 체스 비슷한 보드게임을 만들어 두고 있다.
수염 난 전사 둘이서 서로의 로컬 룰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곳을 지나자 레미가 홀로 잔을 홀짝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
“넌 또 왜 울어?”
“흐어엉. 저 그냥 공부하지 말걸 그랬나 봐요. 이게 다 과제에요! 말이 돼요?”
“네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그냥 죽고 싶어…….”
술은 사실 진정제라지.
뭔가 참고 있던 것이 다 터져 나오게 하는 진정제다. 억제 중추를 진정시켜 버리거든.
그리고 좀 더 걷다 보니 왠지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쿨 하고 뷰티한 우리 블랑쉐 양을 주웠다. 멀쩡한 제니에게 그냥 시체인 블랑쉐를 인계하고 술자리를 완전히 지나쳐서 빠져나갔다.
그러다가 생각나서 술을 몇 병 챙겼다.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런 귀한 술은 좋은 위문품이 되리라.
그 고생하는 이들은 이 도시를 굴러가게 만들고 있는 세 명이다.
삼의회의 집무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드스록의 등대.
러셀과 일그림, 그리고 삼의회의 친애하는 마이어 씨가 엄청나게 피로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하. 뉴 삼의회야?”
“농담이 아니니까 입 좀 닥쳐라.”
러셀이 화를 낸다. 용인은 잠적해 버리고 트롤은 요새로 합류한 김에 다시 돌아오지 않고 눌러앉아 버렸다.
따라서 남은 것은 마이어 씨뿐.
러셀과 레미가 그를 돕고 있다가 오늘부터는 일그림도 합류했다. 레미는 일이 너무 많기에 한계가 있는 탓이다.
어쨌든 이 거대한 도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누구건 바빠야 하는 법이지 않겠나.
“이제는 어디건 침공 대응 준비를 해야지.”
“안 그래도 아케인에서 시끌시끌하니 다들 불안이 고조되는 모양이야. 그냥 크게 터뜨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일그림 뭘 잡았다며?”
“시티즌에서 온 끄나풀인 것 같던데. 러셀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기에 가서 잡았지.”
“오호. 러셀이 그쪽 출신이라 꼬리가 붙었나.”
악룡 아래의 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루시가 돌아가기 전에 박살을 내자.
그리고 일단 나는 지금 마이어 씨를 찾아온 길이다.
그렇게 말하자 서류에 찌들어 있던 마이어 씨가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에? 선배님? 저를요?”
“전쟁의 신앙이었지? 내가 그 신이랑 만신전에 가서 얼굴 볼 사이는 아닌 거 같아서 좀 연락해 보려고.”
그 트롤은 나와 얼굴 마주치면 대뜸 무기부터 들어 올릴 것 같아서 무섭다.
하필 여신님이 부재중이니 대신 전달할 수 없다.
자연의 신은 요정의 신인만큼 대부분의 서버에서 그린 스킨의 신인 전쟁의 신과 전쟁 중이다.
마법의 신은……. 그냥 다른 신과의 교류가 전혀 없다.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러니 이렇게 간접적으로 찔러보자. 대뜸 강제로 화신하기야 하겠나.
[하드스록] 멤버들도 전쟁의 신도는 아니었기에 전쟁의 신은 최근 우리 파티의 종적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사실 전쟁의 권능은 그 이름답게 다대다 전투에서나 빛을 발하며. 하이랭커급 모험에는 아쉬움이 크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다.
대체로 상위 랭커로 갈수록 전쟁의 신앙은 버려지는 경향이 있다. 충분한 스펙이 확보된다면 신벌을 각오하고서라도 말이다.
사실 경력직 하이랭커들은 처음부터 선택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내 가장 가까운 전쟁의 신도가 또 마이어 씨다.
어리둥절해하는 성실한 전사의 손을 잡고.
“거기 들립니까? 여보세요?”
3분 정도 기다려 보았는데 반응이 없다.
바쁜 모양이네.
“신께서 이런다고 신언을 내리십니까?”
상황을 잘 모르는 마이어 씨 입장에서는 의아하기 짝이 없는 듯하다.
랭커급이라도 신언을 자주 들을 일은 없긴 하다.
뭐, 보통은 그렇다. 하지만 이 스토커라면 가능한 우리 파티를 주시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러면 좀 께름칙하긴 해도 만신전 가서 불러봐야겠네. 그럼 나도 술자리에 껴볼까.”
상대가 전화를 안 받는데 어떡해.
그리고 내 발언에 일그림이 분노했다.
“야야야! 나도 데려가!”
“너는 일을 해야지!”
“내가 왜 하이랭커나 되어서 여기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어야 해!”
“그러게 왜 일을 잘해!”
처음에는 그냥 ‘일그림 파티’라는 유명 하이랭커 파티의 리더를 내세워 민심을 억제하는 정도에서 그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놈이 일을 잘한다. 뜻밖에도 너무 잘한다.
그렇게 일그림은 뉴 삼의회가 되었습니다.
“너 어차피 오늘 전투에선 루시 창 받침대나 했잖아. 고생은 다른 사람들이 했으니까 잠깐만 수고해 줘.”
“제기라알! 나도 술!”
“쯧쯧, 여기 위문품이다.”
요정의 꿀술을 보여주자 셋 다 눈이 커진다.
“어? 이거 뭐야. 그거 아니야?”
“이건…… 혹시?”
“……?”
“좀 쉬다 하고 그러쇼. 당신네들 덕에 저쪽에서 맘 편하게 쉬고 있는 건 맞으니까.”
일그림이 희희낙락하며 술병을 따고 마이어 씨도 흐뭇하게 병을 바라본다. 나는 손을 흔들며 떠나려고 했다.
“으어억?!”
마이어 씨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보는 와중에 나는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마이어 씨는 누가 귀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은 표정이 되고는 허겁지겁 다가왔다.
손이 닿자마자 내 귀에도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소리가 들린다.
「네에에에에 녀석! 어째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냐! 그리고 혼돈의 신좌가 비어 있는 것 같은 건 왜지?!」
아이고, 귀 아파라.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으세요?”
「저어어어언화아아아? 네놈은 지금 신이 장난으로 보이느냐!」
“장난은 아니고 제안은 있죠.”
「닥쳐라아아아! 그보다 혼돈의 여신은 어디 간 것이지? 네놈이 대전사 아니냐! 똑바로 간수하지 못할까!」
“아니, 언제부터 대전사가 신을 간수합니까?”
「말대꾸하지 마! 당장 혼돈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 녀석에게 화신해서 다 때려 부술 것이다! 아니! 당장 강림해 버리겠다! 전쟁의 분노를 보여주마!」
불쌍한 마이어 씨는 제 머릿속에서 쩌렁쩌렁 울려대는 기차 화통에 기겁을 했다.
이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랭커고 뭐고 두려운 일이다.
어쨌건 신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신적인 전설상의 유배자들이니까.
하이랭커가 미간만 찌푸려도 움찔하는 신세였던 삼의회다. 신의 호통에 겁먹지 말라는 건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내 전화기지.
“진정하시고, 제가 좋은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왜 나중에 다시 무기로 대화하고 싶다고 그러셨죠? 당장 실현할 수 있습니다!”
「또 무슨 꿍꿍이지?」
언젠가 이 트롤이 말하길, 46서버의 과거에 존재하는 대제라고 불릴 정도의 위대한 오크황제의 몸에 화신하여 나와 맞서겠다고 했다.
“그것보다 직접 한판 붙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화신은 아무래도 대리전 같은 느낌이죠. 강림도 찝찝하고.”
「……말해 보아라.」
좋아 좋아. 역시 루시가 관련되면 다루기 쉬워진다.
그대로 마이어 씨를 붙잡고 루시가 술통을 굴려대는 자리로 갔다.
하나하나가 초인들인 유배자들의 술판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명기가 펼쳐지고 있다.
술통으로 저글링은 왜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전쟁의 신이 잠잠해졌다.
경악한 목소리가 마이어 씨를 통해 전해져 온다.
「어떻게……?」
“자, 신좌 부품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러며 까맣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라고 알려진 톱니바퀴 몇 개를 꺼낸다.
전쟁의 신은 한참이 흐르고 나서야 그것을 알아보았다.
「[언더 그라운드] 유적에서 나오는 물건? 용도가 없다고 알려져 있을 텐데……. 지금 신좌 부품이라고 했나?」
역시 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뭔가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직감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미리 알려준 느낌이다.
“어떠십니까? 그때 그 시절처럼 육체를 가진 채 한번 철로 대화하고 싶으시지 않습니까? 그 열쇠는 제가 쥐고 있는데. 보다시피 뺏는다고 뺏을 수도 없을 겁니다. 사용법도 정확히 모르시죠?”
그 직후 터져 나온 것은 일종의 함성이었다.
어째서 일종이라고 말하냐 하면 생명체의 성대에서 울릴 수 없을 것 같은 굉장한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이 형용하기 어려운 괴성은 차라리 감정의 격류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지금 신좌에 앉아 있는 이 트롤의 녹색 뇌세포가 무시무시할 정도의 전류를 흘려대고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불행한 전화기 마이어 씨는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나는 그의 등을 짚고 대화를 이어간다.
다음 순간 들려온 전쟁의 목소리는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신들을 해방할 수단인가? 나를 다시 이 땅으로 풀어줄 수단?」
조심스러우면서도 격앙되어 있다고 표현할 법한 모순된 말투였다.
루시에 대한 집착, 신좌에 앉은 것에 대한 후회, 긴 세월을 버텨온 보람, 신좌를 포기한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걱정, 풀려나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의문.
보내온 세월만큼이나 길고 복잡한 상념이 담긴 목소리다.
나 또한 신언에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담은 건 처음 봤다.
신들은 대개 메마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래된 신일 것임에도 이토록 열정적일 수 있다는 것은 그린스킨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단순하게 보며 단순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잘 고장 나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처음 같은 열정을 품고 눈앞을 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실로 그린 스킨의 화신과도 같은 유배자로서 전쟁의 신이 감격했다.
「혼돈 맙소사! 루시 맙소사!」
“이름을 아시는군요.”
「같은 시대를 살아온 모든 유배자는 그 전설적인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신앙이라 함은 그것이었지. 그리고 내가 동경하던…….」
말은 거기서 뚝 끊겼다.
“못들은 걸로 해두죠.”
「닥쳐라. 내가 명령해서 못 들은 것이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래, 이 간악하고도 기특한 유배자여. 원하는 게 뭐지?」
공짜일 리가 없다는 사실은 전쟁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튜토리얼 내내 진짜 끔찍하게 나를 괴롭혔던 트롤이지만.
“저기 시티즌에 살고 있는 드래곤이 하나 있다고 아는데 말입니다.”
「찢어발겨 내장을 널어주마.」
아군일 때는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다.
이제 자연의 신에게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