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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320화 (320/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20화

왕국 - Lv.4965 [더 시티즌](2)

시티즌의 도심은 마치 저 바깥처럼 마천루가 가득하다. 이것은 이 도시의 지배자가 가진 취향이다.

그는 이 왕국의 지배자이고 싶어 했으며 나아가 돌아갈 수 없는 바깥의 지배자이고 싶어 했다.

심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높다란 빌딩은 일견 화려한 네온으로 빛나, 험난한 삶을 어렴풋이 비춰주곤 한다.

고단한 미궁의 삶을 그런 향수로 위로받고 싶어 하는 이는 어디에나 있었다.

가장 규모가 큰 국가.

시티즌이라는 이름의 도시이자 국가는 그렇게 고향을 잊기 싫은 유배자들을 위해 존재했다.

이곳에는 향락도 사치도, 그리고 편안함도 있다.

마치 바깥처럼 말이다.

거친 야생의 도시이자, 온갖 문화가 뒤섞여 초현실적인 면모를 가진 하드스록과도 다르게.

그야말로 이 미궁의 비현실성을 대변하듯 존재하는 마탑들 사이에 온갖 마법기하학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아케인과도 다르게.

아늑한 현대 문명의 그늘을 드리워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늘 속에 곰팡이처럼 슬어 있는 어둠이 있다는 점에서도 구현도는 높다.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든단 말이지.”

그가 살던 땅과는 많이 다르다.

우주로 뻗어 나간 거미줄 같은 세력도도, 온 사방에 들끓는 죽여야 할 세력가들도 없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이 향기.

갱단이라면 갱단이요, 범죄자라면 범죄자들이다.

도시의 그늘에 숨죽이고 제 사냥감들이 어디선가 발 들이기만을 기다리는 짐승들.

그는 바깥에서도 그런 곳에 속한 인물이었으며 미궁에서도 그러길 원했다.

기나긴 여행이었다.

이토록 그의 마음에 쏙 드는 왕국을 발견하기까지 말이다.

“그러니 유지보수를 잘해야겠지. 알파? 거기 있나?”

“예, 오르골님.”

코드네임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향수다.

바깥에서 곧잘 그의 복제체들에게 부여하던 이름과는 조금 다른 형식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단순한 것도 좋지 않나 생각한다.

“[하드스록]의 배신은 확정되었다. 그에 따른 후속 조치에 대해 보고해라.”

“베타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브리핑은 어디서?”

“레프리 호텔 옥상입니다.”

“좋군.”

이번 회차의 삶은 마치 어딘가에 부임해 온 것과 같았다.

미궁의 더럽고 불결하며 제멋대로인 법칙에 휘말리지 않아도 된다. 단지 그가 모시는 주인이 만든 질서에 따라 모든 것이 정렬된다.

만약 빨아 쓸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진다면 모조리 밀어버리고 다시 세운다.

그런 방침 또한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비록 합류한 지는 몇십 년 되지 않았으나 이곳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었다.

“붙인 꼬리 하나가 붙잡혔다지?”

“살아서 다 실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용서를…….”

“되었다. 그 녀석은 아는 것도 별로 없으니.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쪽의 전력이 [하드스록]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생각 이상인 모양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조사해도 그 파티의 행적은 일 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특별히 숨긴 흔적도 없다.

하지만 믿는다.

비록 그 자신의 복제체는 아니겠으나 그는 요원들을 허투루 키우지 않았다.

그러니 진실일 것이다.

“결국 [용사]를 취득하게 내버려 둔 게 문제일지도 모르겠군.”

“그 부분은 송구합니다. 제가 더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그럴 수 있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어중이떠중이 게이머인 줄 알았으니 그거면 될 줄 알았단 말이야.”

게이머.

그가 가장 혐오해 마지않는 족속들.

공정한 경쟁의 장이어야 할 이 미궁이라는 정글에 아주 불쾌한 이레귤러로서 투입되는 것들.

미궁의 무수한 제멋대로인 점 중에서도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게임?

그런 것에 인생을 낭비하던 것들이 잘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현실은 현실을 살아가는 자들의 것이다.

“뭐, 문제는 없겠지. 가능하면 그분이 나설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알파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사라졌다.

아주 마음에 드는 태도였다.

그리고는 누군가 들을지 모르니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언젠가는 그 드래곤도 치워 버려야지.’

그것 또한, 그가 혐오해 마지않는 게이머다.

지금이 아닐 뿐, 언젠가는 칼을 거꾸로 쥐겠지.

* * *

루시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다.

추풍낙엽처럼 흔들리는 멘탈은 마치 미궁에 처음 발들인 그 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바깥에서 귀족이었지만 아버지는 변방의 자그마한 영지를 가진 기사일 뿐이었다.

작위가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날 정도의 옛날이다.

그랬기에 자유로웠다.

얼굴도 이름도 몸짓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는 정략결혼 따위를 추진하기에는 너무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정절은 요구했었다.

미궁에 들어온 후에도 사고가 곧바로 바뀌지는 않는다.

자결해야 마땅할 수치를 감내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마침 재능도 있었다.

처음에는 줘도 안 가질 일부 변태들이.

그 후에는 힘에 눈이 멀어 다가오는 쓰레기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힘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그런 눈으로 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동료는 익숙하다.

가족도 익숙할지도 모른다.

신도 역시 익숙하다.

친구는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인……?

울림부터 어색하다. 남을 엮어준 적은 있더라도 그 자신이 대상이 되어본 적은 없는 탓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 루시는 벽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부끄러움 때문이다.

“조오타!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지. 대전사 놈이 항상 제대로 보는 건 아닐 테고.”

“아, 전쟁의 신 말씀이시라면 아마 사실일 걸요?”

“흐앗?”

옆을 보니 지나가던 레미가 문틈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존경하는 여신님, 제가 감히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그러지 말고 동료처럼 대해주면 안 되겠느냐?”

“그럼 말투부터 어떻게 하셔야죠?”

“동료 하지 않을래?”

“알았어.”

어, 그렇다고 바로 반말이 나오나? 루시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래서 지금 뭘 고민하는지 알 거 같긴 한데. 거의 확실하니까 그냥 마음의 준비나 하고 계시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어려운데……. 예로부터 인간의 공포란 미지에서 오는 것이라고 경험 없는 일에 뛰어든다면 누구나…….”

레미는 이 상황을 알 것 같다. 비슷한 고민을 했던 바보 하나를 알고 있다.

이젠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 같지만.

그렇기에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신님의 머리에 손날을 내리쳤다.

“악?!”

“자자, 진정하고 좀 꾸며나 볼까. 본래 자신감은 그런 것에서 나오는 법. 여신님도 원판이 워낙 좋으니 잘될 거야.”

주변에 미인이 너무 많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자신을 가꾸는 법도 잘 모른다.

가만히 있어도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양반들이니까.

원통하기 짝이 없다.

내가 저렇게들 생겼으면 의사의 꿈같은 건 집어치우고 아이돌이나 했을 텐데.

남은 일정을 생각해 본다.

잠을 조금 줄이면 여신님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옷 사러 가 볼까?”

“으응?”

하드스록도 사람 사는 곳이다. 민첩 전사들은 대개 잎사귀 요정이며 요정들은 어찌 되었건 외모를 신경 쓰기 좋은 종족이다.

이미 여러 일 관련으로 커넥션은 많다. 벌이는 사업이 한두 가지일까.

재봉사에게 가서 이러쿵저러쿵 지지고 볶은 다음에 함께 디자인하고 뚝딱 옷을 만들어낸다.

흑색을 기조로 하여 악마적인 분위기를 한껏 살린 드레스.

과연 옷이 날개라고 핏자국 제대로 지워지지도 않은 낡은 평상복 대신 이렇게 입혀두니 인형 같다.

“진짜로 인형 같네.”

작은 뿔과 날개, 앙증맞은 꼬리까지 있으니 더하다. 어쩌면 인형보다는 피규어일까?

이전에 조언해 준 천사가 늘씬하게 쭉 뻗은 미인상이라면 이쪽은 어떻게 뜯어봐도 큐트 계열.

다양한 타입의 미인이 주변에 너무 많다.

“아, 자존감 떨어져.”

“고맙……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아니요. 뭐. 여신님. 사랑이란 뭘까요?”

루시는 어느샌가 다시 공대로 돌아온 말투를 깨달았다.

그리고 긴장이 어느새 해소되었다고도 느꼈다.

애초에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일까? 똑똑함이라는 점에서는 자신이 없는 편이다. 참으로 든든한 신도다.

“사랑이라. 글쎄. 네가 더 잘 알지 않겠느냐.”

“그러게요.”

머리를 슥슥 빗겨준다. 머릿결이 곱다.

강력한 전사는 그만큼 신체도 강인해지니 모발의 손상도 적은 것이리라.

루시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전쟁의 신이 나한테 원하는 건 일단 한판 뜨자 아닌가?”

“그렇겠네요.”

“거기에 이렇게 차려입고 나가는 의미가 있는가?”

“여자의 무기는 창만 있는 게 아니죠.”

“끄응.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만.”

아직도 진짜일까 걱정하는 모습. 어쩜 이리 순수할까.

상대는 몇천 년에 걸친 순정남인데.

뭐, 생각해 보면 그래서 오히려 잘 안 될지도 모르겠다.

요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끝! 걱정 말고 나중에 나가보세요.”

“정말 고맙군!”

“고맙기는요. 여기서 이런 자리 앉아 있는 제가 고맙죠.”

그래 정말 고맙긴 하다.

튜토리얼에서 구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좀 힘들긴 해도 대우도 받고 권력도 있다.

미궁에서 이보다 편안한 삶도 드물다.

“저는 이제 다음 일정이 있어서 가 볼게요.”

“고생이 많도다. 이리 오게.”

루시가 활짝 웃으며 다가와서 껴안았다. 레미가 대응하기에는 지나치게 빠른 동작이었다.

“너는 잘하고 있다. 아이야. 다들 감사하고 있지 않으냐. 모두 너에게 의지하고 있는 게지. 그래도 가끔 너도 나에게 의지하거라. 나는 네 신이니.”

훨씬 키가 작은 루시지만 힘을 담아 꽉 끌어안아 주는지라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포근했다. 그리고 그 뜻도 알겠다.

그간의 노고를 위로받는 기분이다.

“헤에, 고마워요.”

“그래! 힘내거라!”

레미는 웃어 보여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를 사랑해 줄 남자는 어디 없나.

외로워라.

한 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남의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엮어주었다.

“슬프네~.”

* * *

블랑쉐는 눈을 뜨자마자 깨달았다.

마력이 충만했다.

당장 오르골을 찾아갔다.

그리고 설명을 들었다.

뭐건 물어보면 대답이 나오는 남자다. 편리하다.

“과연, 그렇게 귀한 술이었군.”

“너 술자리가 기억은 나냐?”

“안 난다.”

“술 원래 약해?”

“약하지 않다.”

그렇다. 요정의 꿀술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독했다.

취기는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그랬기에 바깥에서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르골’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미궁에 들어와서는 다르다. 이래저래 취하고 싶은 날은 많았다.

“술을 마시면 잠든다. 하지만 언제나 자고 일어나면 개운하지! 술이 강하다는 증거다.”

“그건 너무 빨리 뻗어서……. 아니다. 되었으니 주변을 경계 좀 해주겠어? 뭔가 많이 붙었어. 아마 시티즌 쪽.”

“임무인가? 맡겨라.”

“늘 신뢰하고 있어.”

“물론이지.”

블랑쉐에게 주어진 새 임무는 간단했다.

시티즌에서 온 것 같은 귀찮은 녀석들의 위치를 특정.

포획이 가능할 것 같으면 포획하여 심문.

상대의 목적과 대응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모양이다.

신들이 내려오고 있는 이상 패배는 걱정하지 않으나 사상자의 발생을 막겠다는 취지의 준비였다.

블랑쉐는 생각해 보았다.

저쪽은 신이 이쪽에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정보의 차단은 완벽하며, 비밀병기는 너무나도 강하다.

낙승이다.

이렇게 쉬운 전투도 달리 없으리라.

그 악룡인지 뭔지 하는 놈이 뭔가 싶긴 해도 말이다.

그림자 속으로 녹아든다.

블랑쉐는 원래도 최고로 뛰어난 첩보원이자 암살자였으나 미궁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 파티에 합류하고 난 후에는 배울 점이 참 많았다.

천사 소녀의 기묘한 움직임을 배우려고도 노력해 보았다.

가장 처음 튜토리얼에서 만났을 때는 단숨에 제압했지만, 그때는 스펙의 격차가 컸을 뿐이다.

지금은 정면으로 싸운다면 아무래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마인드맵의 방향성의 차이가 서로의 역할을 나누었을 뿐이다.

어느 정도 비슷한 스타일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점은 확실하게 다르다면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와중 저 오르골에게 배운 것도 많았다.

세세한 움직임의 디테일만큼은 그 녀석을 따라갈 사람이 없으리라.

든든한 전우 에길 역시 그렇다. 미궁에 필요한 더 강력한 한방을, 무기의 휘두름 한 번 한 번에 진득한 살의를 담아 치는 방식은 그에게서 많이 참고했다.

블랑쉐는 오늘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과거의 블랑쉐보다 강하다.

내일의 블랑쉐는 오늘보다 더 강할 것이다.

그런 연마의 나날 끝에 불랑쉐의 동작이나 무기술은 이전과 여러모로 달라져 있었다.

잠복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적이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결국 혼돈의 신전이나 길드 하우스다.

지나가는 행인의 동선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고, 이상함을 보이는 이는 따로 메모도 한다.

스킬을 동원한 은신도 생각하여 마력을 미미하게 흘리며 탐색도 했다.

상대가 자신을 먼저 발견하게 될 위험을 생각하여 언제나 몸은 긴장시킨 채로.

긴 탐색 끝에 수상한 이가 몇 명 추려졌다.

기이한 동선을 보이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목적이 있는 척은 하고 있으나 실상 아무 이유 없이 방황 중이다.

슬럼가도 점점 축소되는 하드스록에 삶이 그리 한가한 이는 적다.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한다.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무언가 행동에 나서는지 보고 싶었다.

갑자기 상대의 모습이 사라졌다.

블랑쉐는 단검을 뽑고 레일건을 권총의 형태로 만들었다.

소리 없는 일격이 공간을 격하듯이 튀어나왔다.

단검끼리 부딪친다.

몇 번의 총성.

한 손에는 총, 한 손에는 단검을 들고 무언가 하는 행위는 익숙하다.

바깥에서부터 해오던 일이다.

이걸로 내게 덤비다니. 가소롭군.

초근접 상태다.

총구의 사선에서 몸을 최대한 빼내고, 상대 손목의 각도를 제한한다.

단검은 그 와중에도 공방일체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단검이 마주 부딪친다.

그 후 정확히 같은 동작으로 총구가 움직인다.

팔을 쳐서 조정하자 저쪽도 몸을 틀며 대응한다.

블랑쉐는 어쩐지 기시감을 느꼈다.

그다음에는 자세를 낮추고 다리를 노릴 것이다.

그대로였다. 붙잡고 팔꿈치를 지른다.

상대 역시 뭔가 이상한 표정으로 그걸 가드했다.

직후에 서로 약속한 듯이 물러난다.

“어디 출신이지?

“…….”

대답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렇게 배우니까.

마법이 아닌 장비를 사용한다. 고블레타리아 연방의 기술은 그녀가 바깥에서 사용하던 각종 소모적인 장비들을 훌륭하게 재현해 주었다.

피쉭 하는 소리와 함께 연막이 피어올랐다.

블랑쉐라는 이름의 고정 NPC가 왕국에 도달하는 즉시 사망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남아 있는 바깥의 장비 덕이다.

그리고 순간이동.

마법적이지 않은 순간이동은 허를 찌르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마력의 움직임 자체가 다르다.

팔의 스파크를 발사했다.

이 역시 마법 같으나 물리적인 공격으로 판정된다.

블랑쉐만의 무기다.

그런데.

“으윽?”

저쪽에서도 번개가 튀었다.

익숙한 스파크다.

몸이 무력화되는 감각까지 흡사하다.

그리고 상대 역시 순간적으로 무력화되었다.

서로의 총구가 서로에게 겨눠진다.

탕 하는 총성.

그러나 무기는 블랑쉐가 훨씬 더 좋았다.

권총의 형태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티팩트에 준하는 총기.

저쪽의 팔이 날아간다. 상대가 쏜 총탄도 블랑쉐에게 맞았으나 악마는 물리에 강하다.

이쪽은 부상에 불과하다.

달려들어 마법을 사용했다.

속박의 마법진이 피어오르고 팔이 날아간 채 저항하는 상대의 머리를 노리는 척하다가 뒤돌려차기.

이런 체술은 천사 소녀가 더 잘 쓰는 것이었다.

“끄으윽.”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턱을 가격당하자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이 정도 뇌진탕으로는 기절하지 않는 것이 미궁의 어려운 점이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팔을 하나 더 잘라서 제압했다.

다리도 제압한다.

이것은 미궁의 좋은 점.

어지간해선 죽지 않으니 무엇을 해도 대충 사로잡을 수 있다.

그리고 상대가 익숙한 동작을 취한다.

깨물려는 입안에 손을 집어넣어 막는다. 완력으로 턱을 아예 뽑아버렸다.

“아으, 아. 우아.”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으면 일단 안심이다.

어금니 안쪽을 만져보니 과연 독약 캡슐이 있었다.

지금은 버렸으나 그녀도 튜토리얼까지는 치아 속에 숨겨두었던 물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너, 그걸 다 누구에게 배웠지?”

그녀가 아는 여동생은 아니다.

그렇다고 언니도 아니다.

아니지, 세대가 많이 차이 난다면 그녀가 모를 수도 있다.

조금 전의 싸움은 스펙과 노련함의 차이였을 뿐 서로 거울을 보는 듯한 것이었다.

있을 수 없다.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녀의 과거는 진짜가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최근에는 차라리 가짜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블랑쉐는 최대한 빠르게 오르골에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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