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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321화 (321/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21화

왕국 - Lv.4965 [더 시티즌](3)

전쟁의 신이 내게 협력하는 유일한 이유는 루시다.

그는 루시를 동경하고 있으며 다시 그와 나란히 서고 싶어 한다.

빠돌이라면 이런 극성 빠돌이가 없다. 스케일만 따져도 수천 년은 지속된 것 아닌가.

그렇게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전쟁의 신은 당연히 오래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네놈 말대로 하였다! 이렇게 끼워 넣으면 되는 것 아니냐?」

“아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안 보입니다만.”

「흥, 내가 하는 일에 의문을 가지지 마라. 나는 틀리지 않는다. 그러니 이걸 누르겠다.」

말로는 리더십이 철철 넘쳐 흐르시지만 그러면서도 또 꼬박꼬박 뭘 하는지 알려는 준다.

똑똑한데 단순한 사람이다.

그리고 신좌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전쟁의 신이 제 몸만큼이나 거대한 신좌에 앉아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모습은 딱히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얼굴에 으르렁이라고 써놓은 듯한 모범적인 트롤이다.

그리고 컸다.

트롤의 평균 신장은 5미터에 달하지만 전쟁의 신은 그것보다도 더 컸다. 7미터는 안 되겠으나 6미터는 넘지 않을까?

극히 거만한 자세로 왕좌에 앉아 있던 트롤은 만족스럽게, 그리고 아주 탐욕스럽게 웃었다.

“이런 것이군.”

“얼마만의 외출이십니까?”

“글쎄. 5천년 쯤 부터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지. 공기가 다르군. 공기가 달라.”

“대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건 중요하다. 전쟁의 신이 정말로 해방되길 원할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러리란 법은 없다.

내가 기억대로라면 이 양반은 신좌에서 즐기는 전략 시뮬레이션에도 상당히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전쟁.

영원히 꺼지지 않는 열정과도 같은 남자.

겨우 100여 년 정도로 멘탈이 흔들리는 나 같은 놈과는 많이 다른 뇌 구조를 가졌으리라.

“흠. 그것. 그래. 그런 게 필요하다고 했지.”

방금 말했는데 한참 전에 들은 것처럼 말하며 무게 잡는 걸 보면 틀림없다.

의외로 블랑쉐와 죽이 잘 맞을지도?

전쟁의 신은 벌떡 일어서더니 신좌 옆에 기대어놓은 그의 무기, [라그나로크]를 집어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체격이 있어 위압감이 느껴지는 걸음걸이다. 말이 좋아서 6미터지 꽉 들어찬 근육 덕에 덩치가 주는 위압은 훨씬 크다.

거의 2층 건물이 걸어오는 느낌이야.

“달에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나는 신좌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럼 대타 수배는 포기하겠습니다.”

“네놈이 찾을 수도 있었나?”

“괜찮은 후보가 하나 있었거든요.”

카베 영감님이라거나.

그는 좋은 신이 될 것이다. 물론 지금 전쟁의 신이 나쁜 신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카베는 좀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신이 되겠지.

“불쾌한 생각을 하는 표정이군.”

“티 납니까?”

“되었다. 넌 내 앞에서 무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다.”

“쿨하시군요.”

“전쟁은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계속되는 지옥이겠지. 그 끝을 생각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는 바보들이 너무 많을 뿐이다.”

이럴 때는 전사들이 좋다. 구질구질하게 굴지는 않는다.

아니, 사실 15층에서의 그건 되게 구질구질했던 것 같긴 하지만…….

트롤이 자세를 낮추고 손을 내민다.

나도 내밀었다.

높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는 악수가 성사되었다.

“기뻐하라. 너는 이 아이신기오로 드라간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니.”

순간 뇌가 살짝 작동 멈췄다.

“그거 본명 아니십니까?”

“너는 이름을 숨기나? 애송이답군.”

“아니, 보통은 숨기죠?”

“마법쟁이들의 저주를 두려워하는가. 역시 애송이로군.”

제정신이 아니다. 그 계통 마법사에게 흘러들어간다면 단순 디버프는 물론 주살까지도 가능한 재료가 본명이다.

유배자가 가명을 사용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기도 한데. 유명인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흥, 아무에게나 내 이름을 말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단지 네가 그 자격이 있을 뿐이다.”

“그건 참으로 다행이군요.”

아, 난 또 깜짝이야. 그런 거라면 아는 사람은 별로 없겠네.

그리고 아이신기오로라고? 이거 설마.

“혹시 다이칭 구룬의……?”

“알아보는군. 그렇다. 대초원의 칸은 결코 제 이름을 숨기지 않는다.”

칸이라 말하는 것을 보면 청나라의 제위에 올랐던 적이 있는 모양이다.

미치겠군, 아마 나랑 같은 세계는 아니겠지 싶지만…….

어째 자의식이 미쳐 날뛰더라.

바깥에서조차 정복군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궁의 유배자들은 재밌는 이들이 많다. 바깥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넘어, 역사에 남을 위인도 가끔 등장하곤 한다.

전쟁의 신 역시 그의 세계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겠지.

드라간은 거대한 몸을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대뜸 철로 대화를 나누자고 덤비기 이전에 해후를 즐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놀라운 모습을 목격했다.

어딜 보아도 심박수가 상승하고 있다.

바깥에서는 황제였으며 미궁에서는 신인 존재가 태연한 표정으로 심장 소리를 쿵쿵 울리기 시작한다.

나는 애써 모른 척하였다.

트롤의 신진대사는 지나치게 빠르다.

거대한 체격을 지탱하는 심장은 그 크기도 크지만 엄청나게 빠르게 박동하곤 한다.

고로 엄청나게 긴장하거나 흥분한 상황에서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옆에 들릴 정도까지 커지기도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빠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최초의 신이란 보통 그런 존재가 되기 쉽지만 같은 신이 된 존재, 그것도 이런 자의식 과잉 황제에게도 그 정도 동경을 받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냥 동경은 또 아니겠지.

혹시 왕비가 없었다거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또는 사별하였거나.

더 나아가면 루시가 닮았을지도 모르겠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드라간은 점점 발걸음을 빨리했다.

루시는 신전에 있다. 드라간은 여전히 표정만은 태연했으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제 거대한 망치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초조한 태도였기에 또다시 애써 외면했다.

이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거대한 트롤은 신전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블랑쉐가 나타났다.

누군가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블랑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상황을 알아챘다.

붙잡힌 여성 유배자는 누가보아도 블랑쉐의 초기 장비를 닮은 차림이었다.

드라간을 슬쩍 보았다.

일단은 허락을 받기 위하여 말을 걸었으나 그는 무시하고 걸었다.

그냥 루시가 잘 처리하길 기도하며 빠져나갔다.

* * *

루시에게 꾸밈이란 것 또한 생소한 것이었다.

바깥에서는 대단히 그럴 여건이 되지 못했으며, 미궁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본인이 크게 관심이 없었던 탓도 있다.

그래도 이렇게 하고 보면 또 나쁘지 않았다.

여자의 무기라는 것의 다른 의미를 하나 더 깨달은 것 같다.

이것은 갑주다.

차려 입은 것만으로도 그냥 기분이 좋았다. 자기만족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어디인가.

유배자들만큼 자신의 심리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도 드물 것이다.

이곳은 물리적 상해가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어진 세계니까.

기분이 좋아지면 불안도 사라진다.

곧 전쟁의 신이 온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 트롤에 대한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잊고 있긴 하였으나 뒤늦게 되살아났다.

완전히 망각하기에는 과도하게 개성적인 캐릭터였다.

신좌에 앉기 전, 같은 유배자로서 함께 싸울 때도 그랬다.

신좌에 앉은 후, 신도가 되어서도 그랬다.

그녀의 대전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었던 태도가 기억난다.

트롤치고도 거대한 체구였다.

강인했고 또 강인했다. 이후 신이 되어서 아직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동시에 정신력.

결국 중간에 모든 것을 놓아버린 루시와는 다르게 바로 지금까지도 진행형으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놀랍기 짝이 없다. 그녀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사랑이니 뭐니 하기 전에, 자신이 그런 것을 받니 마니 하기 전에.

한 명의 전사로서 오랜 전우를 다시 마주하는 일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꾸미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예의를 갖추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게 된다.

사교계에 데뷔한 적은 없지만, 그런 미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차기 전에 이곳으로 끌려온 탓이었으니.

온갖 상념이 맴돌고, 결국 기대감으로 귀결되었다.

다시 겨루어볼 것도 즐겁고, 그저 얼굴만 보아도 즐겁다.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그때 그 시절의 개척 왕국.

다시 볼 수 없는 향수가 아닌가.

신이 되어 이만큼이나 살아온 이들에게는 바깥보다도 더 그리운 시절일지도 모른다.

자연의 신은 아직 기억나지 않으나 그도 얼굴을 보면 떠오를지 모르지.

그립고도 또 그리운 시절이여.

하지만 틀림없이 미화된 추억일 것이다.

루시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는 큭큭 대었다.

아무래도 좋다.

신좌에서 벗어나 이런 일이 찾아올 날이 다시 올 것이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

실로 살아 있기를 잘하였도다.

그런 기쁨으로 인하여, 뒤편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루시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루시 스스로도 생각하기에 지난 수천 년 중 가장 밝은 웃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뒤돌아섰다.

거대하고도 낯익은 트롤의 모습이 보인다.

화신하였을 때의 거대한 망치를 다소곳하게 들고 어쩐지 어색한 걸음걸이로, 그러나 표정만큼은 누구보다도 전사답게.

너무나도 낡은 기억 속의 화폭 그대로여서 반가웠다.

“오! 전쟁의 신이여! 아니, 드라간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루시는 고개를 갸웃하고 달려갔다.

망치가 떨어졌다.

루시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무기를 떨어뜨리는 전사라고? 이상한데? 내가 사람을 착각했는가?

아니었다.

드라간이 울부짖었다.

“혼돈 맙소사!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뭣?! 갑자기 무슨 소리냐!”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여봐라! 여신께 이렇게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힌 자 누구느냐! 내 큰 상을 내릴테니 냉큼 나오도록 하라!”

“뭐래는 거야!”

“오오, 루시, 혼돈, 나의 여신이여. 그대와 다시 함께할 날이 올 줄이야.”

“히 히익?!”

커다란 손이 루시의 작은 몸을 확 덮었다.

그러나 그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 무엇보다도 강인한 힘을 만들어내는 트롤의 근육들이 최선을 다하여 부드럽게 움직였다.

제 몸을 감싸는 커다란 손바닥이 너무나도 신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루시는 버둥거림을 멈추었다.

촉각으로 그녀를 느끼듯이,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깊은 탄식이 트롤의 얼굴에서 새어 나온다.

“확실히 당신이 맞군. 화신도 강림도 아니야. 그때 그 모습이야.”

“너도 그대로군. 드라간.”

트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루시는 그게 웃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마주 웃어주었다.

“크윽. 심장이.”

“아니, 또 왜?”

드라간이 쓰러졌다.

* * *

일단 블랑쉐를 희우에게 맡겨두고, 내가 이번 회차에서 아는 모든 고참들과 대화하러 다녔다.

카베는 의문을 표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지금까지는 없었습니까?”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네. 하지만 그건 내가 겪지 못했을 일일 뿐이지.”

“말은 그래도, 시행 횟수가 차원이 다르실 텐데.”

카베가 이 왕국에 얼마나 있었을까?

일반적인 거인의 수명은 인간의 100배에 달한다.

그런데도 세월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카베라면 대략 8천여 년 정도를 잡을 수 있다.

당연하지만 나조차도 하나의 왕국에 그렇게 오래 머물러 본 적은 없다.

그런 카베가 금시초문이라는 것은 있기 힘든 일인 동시에 이 회차의 특별함을 시사한다.

그렇다. 어쩌면 나 역시 그 경험이 맹점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경험은 대다수가 게임 시절에 기반을 둔다.

게임 시절의 경험이란 제한적인 것이다.

NPC들은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며 그들이 흘러들어 온 세계는 데이터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단순하게 믿었다.

게임이 현실화되었다는 가정을 유지하고 생각을 계속한다.

이 미궁은 어디까지 현실화되었는가?

설정 상으로만 존재하던 무언가.

설정조차 존재하지 않던 무언가.

그 모든 것이 실체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미궁의 범주 내거나 혹은 적어도 그 마력이 미치는 상태라면.

그렇다면…….

일그림에게도 물었다. 그는 내 생각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너와 내가 만났다. 그렇다고 친다면 정말로 뭐든지 가능한 것이지. 긍정적으로 생각해.”

“무엇을?”

“모든 것이 현실이다. 너도 나도, 블랑쉐도.”

“그런가.”

일단 어느 정도의 확신은 생긴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희우의 기억은 완전히 날조된 거짓은 아니다.

희우의 가족과 삶은 최소한 미궁이 실재하는 동안은 진짜다.

적어도 완전한 허상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미궁에는 흔한 일 아닌가?”

“우문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현답을 하였고.”

그는 신좌에서 진작 해방되었다.

대타는 스스로 구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다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해방되었다. 그대로 하드스록을 유람하며 바깥 공기를 즐기고 있는 차였다.

신이 해방될 수 있음을 지금 모두에게 널리 알릴 이유는 없으니까.

“자네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야. 그 덕에 내가 이렇게 밖을 거닐고 있으니.”

꽃잎 요정의 시원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미소 짓는다.

“하지만 자네도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지. 이 세상이 게임이라면 어째서 자네가 게임 속으로 들어와 있는가?”

무언가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 강박, 혹은 오랜 착각.

어쩌면 그저 그렇게 지키고 싶었을 뿐인 껍데기.

“좋은 표정이군.”

그 말에 내 얼굴을 만져보았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곧바로 알 수 없었다.

자연의 신이 웃으며 거울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기묘하게 웃고 있었다. 어딘가 후련한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인정한 것처럼.

“아무도 자네의 신념을 부술 수 없었겠지. 다른 이들이야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무너져 포기했겠지만.”

“저에게는 그게 벽이 아니었나요?”

“너무 유능했기에 조금 늦은 것이야.”

아아, 그런가.

그랬던가.

“내 감히 자네에게 할 말은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않았네. 혼돈의 여신께서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몰라.”

나보다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미궁에서 보내온 이가 말한다.

“이제야 현실을 살아가겠군. 그간의 태도가 어땠는지 알 것 같나?”

“결국 저는 언제까지고 이곳을 모니터 너머의 세상으로 보려고만 했군요.”

“그 천사 아가씨만 빼면 말이야.”

“그래도 그건 빼주십니까?”

“그래. 그때부터였으니까.”

무엇이 그때부터였는지는 묻지 않았다.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하는 순간이 온다면 다들 엄청나게 기쁠 것이라고 기대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냥 시원하고 섭섭할 뿐이다.

극적인 감정 변화보다는 조용하게 그 변화를 받아들이며 기뻐할 따름이다.

지금이 그랬다.

“내 생각에는 튜토리얼은 본디 그런 역할을 하게 되어 있어. 왕국에선 결국 받아들이게 되지. 다만, 자네에겐 왕국까지도 튜토리얼에 불과했을 뿐인 것 같군.”

자연의 신이 여전히 미소 짓고 있다.

“우리에게 미궁은 처음부터 불가해하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공간이었지. 그러나 삶은 원래 그렇다네. 미지기에 곧 삶 아니겠나.”

그렇기에 자연의 신은 말한다.

“그러니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있더라도 살아가는 걸세. 자네는 거짓도 무엇도 아니야.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야.”

세상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희우나 미아를 볼 때만 조금 더 선명했던 것이. 이제는 모두 그렇게 보인다.

“완전한 현실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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